사가의 난

 

佐賀の乱
메이지 7년 1874년 2월 1일~3월 1일
1. 배경
2. 관련 항목


1. 배경


사가 번(지금의 사가현나가사키 지역 포함. 고쿠다카 37만 석 이상의 유력 번이었다.)은 지리적인 위치에서 서양기술을 먼저 받아들여 에도막부 말기(막말)에는 가장 근대화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도 막부 명군 10대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통치하에, 서양의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제철소를 가지고 있어서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식 화포를 만들었고, 당시 최신식 무기 암스트롱포도 제작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막부에 새어나가면 탄압받을 우려가 있어서, 사쓰마 번과 비슷하게 다른 번의 사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번의 무사들이 다른 번들과 교류하는 것도 불가. 탈번하면 사형. 쇄국주의, 불간섭주의 방침이라 막부 타도 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권유와 시대의 흐름으로 무진전쟁의 우에노 전쟁에서부터 도막파로 참가했다. 그 근대적 무기는 위력을 발휘해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메이지 유신에 뒤늦게 참여한 걸로 되어[1], 신정부에서는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사가) 순으로 4번째 위치에 놓여서, 고관의 지위를 얻은 사람이 적었다. 이로인해 번내에서는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 가운데 평민 출신에서 참의(參議) 사법경[2]직에 오른 에토 신페이(江藤新平)는 이른바 메이지 6년 정변에서 오쿠보 토시미치와 대립하고 결과 정치투쟁에서 지고 고향으로 낙향한다.
메이지 신정부에 불만을 가진 사족(士族)들이 정한당의 에토 신페이, 시마 요시타케, 우국당의 아사쿠라 나오타케를 지도자로 모시고 '제2의 유신'을 꿈꾸고 일으킨 내전이 사가의 난이다.

2. 관련 항목


서남전쟁

[1] 사쓰마, 조슈는 일찌감치 막부 타도 운동의 선봉장이었고 도사는 전쟁 발발 직전에 합류했다.[2] 에도막부에서는 노중(老中), 우리나라로 치면 법무부 장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