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

 

1. 사쓰마 국
2. 사쓰마 번
2.1. 개요
2.2. 역사
2.3. 여담
2.4. 출신 인물
3. 현재의 지명
3.1. 사쓰마군(薩摩郡)
3.2. 사쓰마초(さつま町)
4. 사쓰마 반도
5. 전함


1. 사쓰마 국



薩摩[1]国(살마국). 오늘날 가고시마현 서부 일대로 삿슈(薩州)라고도 불렸으며, 5기 7도 구분에 따르면 사이카이도(西海道, 서해도)[2]에 속한다.

2. 사쓰마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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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 번(薩摩藩)

2.1. 개요


에도 시대 규슈 남부의 사쓰마 국, 오스미 국, 휴가 일부분(모로카타코오리[3]), 아마미 제도를 다스리던 중세 일본의 (藩).
사쓰마(혹은 사츠마)란 이름은 판적봉환 이후 가고시마 번이 되었고 폐번치현에 의해 가고시마현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사쓰마라고 통칭 불린다. 약 600 년간 시마즈 가문의 다스림을 받았다.

2.2. 역사


가마쿠라 막부 때 코레무네 씨(惟宗氏)를 뿌리로 하는 시마즈 가문이 사쓰마(薩摩), 오스미(大隅), 휴가(日向) 3국의 슈고(守護)로 임명돼 교토에서 옮겨왔다. 무로마치 막부 때는 물론 전국 시대에도 세력을 유지하면서 일본 유수의 센코쿠 다이묘(戦国大名)로 성장해 한 때 규슈 통일을 노렸다. 그들은 1580년대 중반 규슈 통일의 꿈을 이루는 듯 했으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로 물거품이 된다. 다만 히데요시는 시마즈 가문을 남겨 사쓰마, 오스미 두 개 국의 영지는 인정해 줬다.
히데요시의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시마즈 가문은 서군에 동참해 다시 패하지만, 승리한 도쿠가와 가문은 시마즈 이에히사#s-3에게 도자마 다이묘로서 가문을 잇게하고[4] 영지를 그대로 인정했다. 이 시점이 본격적으로 사츠마, 즉 오늘날의 가고시마현의 성립이라고 본다.
1609년 시마즈 가문은 류큐 왕국을 복속하고 원래 산출량에다가 류큐 12만 석을 더했다. 한편 오키나와에 이웃한 아마미 군도를 류큐에서 분리해 사쓰마가 직할했다. 오늘날에도 아마미 제도는 가고시마현으로 오키나와현이 아니다. 사쓰마 번은 류큐를 대중 무역 창구로 이용하는 한편 아마미 군도 산 설탕을 일본 전국으로 유통시켜 번의 재정을 늘렸다.
사쓰마는 토양 자체가 시라스(화산재) 대지[5]로 물이 잘빠지고 토질이 벼농사에 적합치 않다. 에도 막부가 파악한 초기 사쓰마 번의 총 수확 규모는 90만 석인데, 그 중 곡물 소출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다른 작물이나 어획량, 대외 무역 등을 환산한 것이라고 한다. 대대로 농업은 소규모의 논 및 밭농사가 대부분이던 그들은 고구마, 담배 등 상품 작물을 들여와 재배에 성공한다. 오늘날에도 고구마의 일본 이름엔 사쓰마가 들어간다. 통신사 조엄이 일본에서 들여온 고구마도 사쓰마 산이었다.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 속에서도 밀무역으로 번의 재정을 튼튼하게 했으며 그런 기반이 메이지 유신의 토대가 되었다.
밀무역과 반도쿠가와 등 이런저런 이유로, 에도 막부로부터 역사적으로 찍혔던 지역이었다. 당시 중세 일본 영주들 모두 겪던 참근 교대는 물론 각종 공사에 과중하게 동원되기 일쑤여서, 그 피로감과 불만은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은 8대 당주 시마즈 시게히데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세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약간 해소되었고 막부 정치에 제 목소리를 내게 되고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다.
1827년, 가로(家老)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를 중심으로 번정 개혁을 단행해 채무 정리, 설탕특허 제도강화, 류큐 무역의 확대[6] 등로 재정이 크게 나아졌다. 오유라 소동을 극복하고 1851년 제11대 번주가 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서양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서양식 공장 시설을 설립하고 증기선 군함을 구입하는 등 군비를 확충했다. 양녀(篤姬, 아츠히메)를 쇼군에게 시집보내 외척이 되는 한편, 공무합체 운동(친막부 운동)을 벌여 중앙의 신임을 얻었고, 타지방 도자마 다이묘들도 중앙 정치에 진출하게 했다. 막부의 중신들은 시마즈 가문을 우대했다. 이 때를 그린 NHK 대하드라마아츠히메.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병사한 후, 이복동생인 시마즈 히사미쓰가 실권을 잡아 공무합체파로 번을 다스린다. 공무합체파란 막부의 편을 말하는 것으로 시마즈는 막부의 외척 집안이었다. 그러나 당시 막부가 권위를 잃으면서 전국적인 선풍을 끌었던 존왕양이파들이 사쓰마 번내에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존왕양이란 오랑캐 서양인들을 축출하고 나라를 막부에게서 빼앗아 천황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아무리 영주가 공무합체를 주창한들, 번내 하급 사무라이들이나 우국지사들의 존왕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아들 나리아키라한테 에도로 쫓겨난 시마즈 나리오키가 돌아와 존왕양이 지사들을 숙청했지만... 고작 1년도 되지 않아서 병사하면서 다시 존양지사들로 사쓰마의 상층부가 구성되었다.
1862년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이 벌어진다. 요코하마 항구 근처 나마무기 마을을 지나가던 시마즈 히사미쓰와 700명의 병력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다. 때마침 말에 탄 영국상인 윌리엄 마샬이 실수로 시마즈 군 앞에 난입하면서 벌어진다. 당황한 수행원들이 영국인을 칼로 베자 영국과 외교 문제가 일어나 이듬해 8월 영국과 전쟁이 벌어진다. 영국은 7척의 전함을 앞세워 자그마치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해왔다. 사쓰마는 막부의 외척이었음에도 공무합체파가 힘을 잃고 번내 여론이 존왕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그들은 집안의 체면도 있어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요코하마 개항 철회를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받아 막부와 사이에 금이 갔다.
가로(家老) 코마츠 타테와키 밑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도막파 하급 무사들이 실권을 쥐고 에도 막부의 제2차 조슈정벌 명령에 따르면 번의 재정이 거덜날 것이 뻔하니 방관하자는 쪽으로 돌아서, 이때까지 견원지간이었던 조슈 번과 삿초 동맹을 맺는다. 덕분에 조슈 번은 막부군을 물리치고, 대정봉환을 거쳐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가고시마현의 현재(2016년 12월) 현지사 이토 유이치로 씨의 조상들은 옛 시마즈 가문의 사무라이라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근대식 해군을 육성할 때 사쓰마 지역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고[7], 위의 조슈 번(육군)과의 라이벌 의식과 맞물려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생겨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사쓰마 번(해군)은 조슈 번(육군)과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도 다툼을 벌였는데, 화족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를 지지하는 조슈 번에 맞서, 방계 황족이자 사쓰마 번 제12대 영주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義)의 외손녀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s-4을 지지했다. 일명 '궁중모중대사건'이라고도 불린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나가코 여왕히로히토 황태자의 비(妃)가 되었다.
이후의 역사 및 사회 등은 가고시마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2.3. 여담


  • 예로부터 일본 중앙 지역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고 밀무역으로 먹고 사는 지역이라, 반골 기질과 상무 정신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심심치 않게 중앙정부에게 대든 적이 많다.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 타도를 성공시키는 한편, 근대에 들어서는 서남전쟁을 일으켜 정부에 반기를 든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곳 출신이다. 심지어 16세기 말 임진왜란 직전까지 잇따른 농민난을 수습하다보니 히데요시의 징집 기한을 어겼다. 그 벌로 모리(森) 밑으로 배속돼 험한 강원도 산길 루트로 조선을 침공해야 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면서 현재는 보수색이 강하고 자민당이 강세를 보인다.
  • 고대에는 이민족 거주지대로 구마소, 하야토 등이 있었다고 하고, 야마토와는 별개의 읍락국가들이 형성되어있었다. 8세기 무렵에 이들 읍락국가가 야마토 조정에 복속되면서 동화되었지만 아직도 사쓰마 사투리는 여타 규슈 사투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심지어 이웃 구마모토현이나 미야자키현과도 큰 차이를 보일 정도로 발음과 억양이 매우 독특하다. 사쓰마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사쓰마하야토(薩摩隼人)라 부르며 지방색을 보인다. 15세기부터 일본인들이 스페인, 포르투갈 등 라틴 유럽을 지칭하던 남만(南蠻)이란 단어는 원래 규슈 원주민들을 부르는 멸칭이었다고.
  • 한반도와는 악연이 많은데 조선을 침공해 도자기를 훔쳐가고 도공들까지 납치한 시마즈 가문이 대표적이다. 일본 제국 외교관 도고 시게노리(조선명: 박종덕)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였다. 뿐만 아니라 이미 임란 이전부터 활개친 왜구 역시 사쓰마가 주요 근거지였다.
  • 이처럼 상무적이고 이질적인 지역답게, 지방색을 반영한 듯한 특유의 검술 유파인 지겐류가 있다. 부드럽고 세밀한 검풍의 본토 유파들과 달리 박력넘치고 야생적인 검풍을 자랑한다.
  • 사극에서 사쓰마 관련 인물들이 나오면 100% 사쓰마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사쓰마 사투리는 난이도가 너무 높고 억양도 특이해서 알아듣기 힘들다.NHK 대하드라마 등을 보면 함경도 사투리와도 억양이 유사하다. 2차대전 당시 미군도 일본군의 암호보다 이 사투리를 더 알아먹지 못해 가고시마 출신 일본계 미국인을 따로 데려와 사투리를 해독할 정도.
  •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 시절 히데요시에게 패하긴 했지만 이 당시 사쓰마의 군대는 일본 최강이라 불릴 정도로 강했다 전해진다. 상술한 혼슈 본토를 장악한 집권 세력과의 충돌의 역사나, 메이지 유신 당시 보신 전쟁당시 역할이나, 이후 세이난 전쟁을 봐도 그렇고, 독자적으로 진행한 류큐 정복이나 수많은 왜구를 배출한 대외 충돌의 역사만 봐도 사무라이가 지배한 전근대 일본의 기준으로도 상무적이고 전투적인 동네로 유명했다. 조선통신사로 파견되어 전성기 에도 막부의 정치적 상황, 문화, 발전상을 기록한 신유한해유록을 보면 저자인 신유한이 수백년째 엄격한 문치 사회를 형성한 조선에 비해 영 여전히 폭력적으로 보이는 일본의 사회상, 정치 문화를 지적하며 통역겸 가이드였던 일본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듣기론 당신네 나라도 이제 성리학을 받아 들이면서 나름 (전근대적 모화사상적 관점에서) 문명화가 되었다라고 하던데 이걸 보면 영 아닌것 같다라고지적하자 아메노모리 호슈가 황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런건 다 사쓰마 촌놈들이나 하는 짓인데 그 동네가 당신네 나라에 가깝다 보니 당신들이 나쁜것만 주워 들은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 사쓰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성씨가 있는데, 바로 이주인(伊集院)씨와 (동서남북)+고(郷)씨이다. 그 중에서 (동서남북)+고(郷)씨는 도고(東郷), 사이고(西郷)[8], 南郷(난고), 혼고(北郷)[9] 등이 있다. 대표 인물로는 사이고 다카모리, 도고 헤이하치로가 있다.

2.4. 출신 인물


에도 막부 성립 이전, 메이지 유신 이후 출생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자.

3. 현재의 지명




3.1. 사쓰마군(薩摩郡)


사쓰마군 (가고시마현)

가고시마현에 있는 군으로, 동명의 정을 관할한다.

3.2. 사쓰마초(さつま町)


사쓰마초 (가고시마현)

가고시마현에 있는 정으로, 동명의 군에 속해 있다.

4. 사쓰마 반도


규슈 남서부에 위치한 반도.

5. 전함


위의 일본의 옛 지명을 이름으로 한 일본의 세미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사쓰마급 전함이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1] 속일본기에는 살마(薩麻)라고도 기록되어 있다.[2] 오늘날 규슈 지방.[3] 현재 모로카타 군은 미야자키현 소속이다.[4] 이 과정이 제대로 골때리는데 원래 다이묘였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자마자 은근슬쩍 다이묘를 시마즈 이에히사로 갈아끼워버리고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자마자 대놓고 도쿠가와 가문에게 '''"시마즈 요시히로 저 사람이 치매가 심해서 저희 가문차원에서 온갖 진귀한 약을 구해다가 치료중입니다"'''라고 둘러댔고 이를 믿은 도쿠가와 가문 측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서군에 가담한 것이 자기네 가문을 적대하려는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가서 그랬다고 간주해서 시마즈 가문의 영지를 삭감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5] 규슈 남쪽 반도 지역에 널리 분포하는 화산재와 속돌의 층[6] 덤으로 밀무역, 위조화폐 제조[7] 중국, 류큐와 해상 무역을 했던 지역이라 해상업이 발달했다.[8] 미카와 사이고, 아이즈 사이고, 히젠 사이고, 사쓰마 사이고, 이나바 사이고, 부젠 사이고 등 여러 분가가 있다.[9] 시마즈씨의 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