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후예
1. 개요
리그 오브 레전드의 2016년 슈리마 스토리 개편 후인 사막의 후예 스토리를 집필해둔 항목이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원본 스토리를 볼 수 있다.
2. 1장
수백 명의 인파가 북적거리는 거리, 행인들이 서로 부딪히고 구시렁거리는 소리, 그들이 풍기는 땀 내음, 외지인이 들으면 싸움이라고 착각할 만큼 왁자지껄한 수다와 입씨름. 탈리야는 이곳 슈리마의 용광로 같은 열기를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깜빡 잊고 있었다. 그간 여러 나라를 가 보았지만 고향 슈리마만큼 생기와 열정이 넘치는 곳은 여태껏 보지 못했다. 아이오니아는 경탄이 흘러 나왔고, 프렐요드의 얼어붙은 풍광도 그만의 놀라운 매력이 있었지만, 그 모든 기억은 벨준의 암석 부두에 발을 딛는 순간 슈리마의 작열하는 태양에 녹아 없어져 버렸다. 마치 바바잔 할머니의 향긋한 차를 마실 때처럼 모국의 땅에서는 깊은 유대감이 느껴졌다. 부둣가의 계단을 오르는 탈리야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올라 만면에 퍼졌다. 녹스토라의 흑빛 돌 아래를 지날 때조차 함박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탈리야는 벨준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항구에 정박된 녹서스의 전함 때문에 초조해지면서 나쁜 기억이 줄줄이 떠오른 탓이었다. 슈리마 사막 한복판까지 다녀온 무역상들이 어떤 이야기를 전해 왔는지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소문을 확인한 뒤 식량거리만 구입하고는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소문이래 봤자 사막의 전사들을 보았다거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고 내내 메말라 있던 곳에 물줄기가 생겼다는 식의 터무니 없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거의 전부였다. 벨준을 떠날 때 탈리야는 익숙한 얼굴들을 잠시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에 남쪽 케네세트로 가는 네리마제스의 비단 판매상들과 동행했다. 짐마차를 끌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장사를 하는 이들은 무기까지 단단히 갖추고 있었다.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한참을 견딘 끝에 사이 사막의 북쪽 경계선에 있는 악명 높은 도시 케네세트의 장터에 도착했고, 탈리야는 다시 혼자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반들반들한 흑옥 같은 눈을 가진 깡마른 우두머리 상인 샤마라는 더 이상 남쪽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만류했지만, 탈리야가 가족을 구해야 한다고 답하자 더는 붙들지 않았다. 케네세트를 빠져 나온 탈리야는 고대 슈리마 제국의 수도에 수원이 있다는 거대하고 구불구불한 강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이 강을 다시 ‘생명의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탈리야는 보는 눈이 없는 틈을 타 바위를 말처럼 타고 달렸다. 물결이 굽이치는 모양으로 바위를 움직여 가며, 사이 사막에서 들어온 모래 속에 반쯤 묻혀 있다고 알려진 도시 베커라를 향해 남쪽으로 곧장 내려갔다. 샤마라는 베커라가 버려진 도시의 폐허 위에 지어진 작은 부족 동네로 지친 여행자와 떠돌이 유목민이 쉬어 가는 곳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틀렸다는 걸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베커라는 다시 태어나 있었다. 죽어가는 여인만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탈리야는 아마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
3. 2장
베커라의 장터는 색채와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천막 천으로 아치 형태의 차양을 친 저잣거리에서는 격한 흥정 소리와, 코를 찌르는 향신료와 고기 구이 냄새가 바람에 일렁이며 실려 왔다. 탈리야는 상인들의 능청스런 호객 행위와 자식들이 굶고 있다는 애원을 무시한 채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걸어갔다. 사막 쥐를 구운 꼬치 요리가 쌓여 있는 가판대 쪽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 끄는 손이 있었지만 뿌리치고 걸음을 재촉했다. 허름한 성벽으로 향하는 드넓은 길에 수백 명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쭈글쭈글하게 늙은 현자처럼 문가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담뱃대에서 안개 같은 연기가 피어 올라 진한 냄새를 풍겼다. 바베 족, 자가야 족, 예셰제 족의 표식이 보였다. 모르는 표식도 수십 가지나 있었다. 탈리야가 슈리마를 떠날 때엔 철천지원수 사이던 부족들이 이젠 서로를 안아 주는 형제지간처럼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참 많이도 변했구나.” 탈리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도시의 동쪽 변방에 있는 건물의 폐허에 머물 곳을 이미 마련해 놓았다.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물고 싶진 않았지만 부상 당한 여인에게 보살펴 주겠다는 약속을 해 놓은 터였다. 어머니는 어떤 약속이든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된다고, 대지모신은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깨에 둘러맨 헐겁게 짜인 가방 안엔 식량이 들어 있었다. 말린 고기, 귀리, 빵과 치즈, 그리고 물 두 주머니. 혼자서는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이었지만, 혼자만의 몫이 아니었다. 옷 안감에 꿰매 놓은 금화는 거의 바닥나 버렸지만 이제 갈 길이 그리 멀지 않았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걸음씩 발을 내딛을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땐 금화가 쓸모 없어질 것이다. 진정 필요한 것들이 천막 안에 모두 있을 테니. 탈리야는 그렇게 행복한 상상에 잠겨 있다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집채만 한 남자에게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리고 미동도 않는 그의 몸으로부터 그대로 튕겨 나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는 바위벽에 부딪친 것 같았다. 시장 사람들은 탈리야만큼 둔하진 않은 듯했다. 바위 옆을 돌아 흐르는 냇물처럼 모두들 남자를 빙 둘러 갔기 때문이다.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 육중한 체격과 신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넝마로 감싼 커다란 손잡이가 있는 긴 지팡이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두 다리가 기이한 각도로 비뚤어져 있는 걸 보니 지팡이가 필요할 것도 같았다. “죄송해요.” 탈리야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거기 계신 걸 미처 못 봤어요.” 남자는 머리에 쓴 기다란 고깔의 그림자를 얼굴에 드리우고 탈리야를 내려다 보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역병에 걸린 환자처럼 손가락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손을 내밀었다. 탈리야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잡았다. 남자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탈리야를 일으켜 세웠다. 남자가 두 손을 다시 소매 안으로 넣기 직전에 탈리야는 그의 누추한 옷자락 사이에서 금이 반짝이는 것을 얼핏 보았다. “고마워요.” 탈리야가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라.” 남자가 강한 억양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고 깊은 슬픔의 우물에서 나온 듯 형언할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슈리마는 이제 위험한 곳이란다.” |
4. 3장
남자는 소녀가 인파를 뚫고 뛰어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베커라의 금간 성벽으로 다시 발을 돌렸다. 성벽에 도착하니 큰 석재는 그의 키만큼만 쌓여 있었고, 그 위로는 햇볕에 구운 벽돌이 석재와 같은 색으로 칠해져 쌓여 있었다. 베커라 사람들에겐 장엄한 성벽이겠지만 그의 눈엔 볼품 없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젖혀 어설프게 쌓인 돌덩이를 올려다보면서 성큼성큼 성문을 통과했다. 모랫물을 녹색 유리병에 담아 넣는 톱니바퀴 모양의 놋쇠 기계 앞에 상인이 서 있다가 남자가 지나가자 고개를 들었다. “물 사세요. ‘생명의 어머니’ 강에서 방금 길어 온…” 남자의 거대한 형상이 눈에 들어오자 상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는 점성술사의 탑에 피로 쓰인 글씨를 보고 이곳을 찾은 것이었고, 제라스 또한 이 쪽으로 이끌려 올 것이 분명했다. 한 때 세계를 평정했던 고대 슈리마 제국의 후예가 베커라에 있음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적이 움직이기 전에 그 후예를 찾아야 했다. 슈리마의 혈족은 찾기 어려울 정도로 드물었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지르를 깨어나게 한 것도 슈리마의 후예였다. 그 후예가 만에 하나 잘못된 손에 들어가면 부활한 슈리마가 다시 무너질 수도 있었다. 때문에 발길을 재촉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과거의 혼령들 사이에서 장사를 하시는군요.” 남자가 말했다. “혼령이요?” 겁에 질린 상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성문 말이오.” 남자가 아치 형태로 만들어진 성문의 천장을 지팡이로 쿡쿡 찌르듯이 가리키며 말했다. 성문 위의 성곽을 행인들이 걸어 지나가자 돌 틈새 사이로 흙먼지가 장막처럼 떨어졌다. “원래 이케시아라는 옛 나라에서 망명한 장인들이 쌓았었소. 그 많은 돌을 어찌나 정확하게 깎아 맞추었는지 회반죽을 단 한 방울도 쓰지 않고 고정시킬 수가 있었소.” “저…전 잘 모르는 일입니다.” “필멸자들은 과거를 쉽게 잊고, 기억해야 할 역사를 전설로 만들곤 하지.” 사막 한가운데서 잃어 버린 수백 년 세월에 대한 회한이 격렬한 분노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남자가 말했다. “그런 기억의 한계에 대비하기 위해 내가 대도서관을 지은 것 아니겠소?” “외람된 말씀이오나, 지금 하신 이야기는 모두 고대 설화이옵니다.” 상인이 성벽 쪽으로 바싹 붙어 서며 말했다. “당신에겐 그렇겠지만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땐 60미터짜리 성벽이 새로 쌓여 있었소. 돌 하나하나가 모두 잘 닦은 새 대리석으로 금빛 결이 살아 있었소. 나와 내 동생은 빛나는 창과 금 갑옷으로 무장한 일만 군대의 선봉에서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이 도시로 들어오곤 했소. 바로 이 성문을 지나 승리의 행진을 했단 말이오.” 남자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1년 후, 모든 것이 사라졌소. 모든 것의 종말이었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었을 수도... 세상을 너무 오래 등지고 살다 보니 이제 어느 쪽이 맞는지조차 모르겠소.” 남자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진 상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늘에 가려진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두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사막의 방랑자’ 아니십니까!” 상인이 말했다. “나… 나서스님!” “그렇소.” 몸을 돌려 도시로 들어가며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많이 방황하는 존재가 있소.” |
5. 4장
나서스는 행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인파를 따라 도심의 사원으로 향했다. 그는 체구만으로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성벽에서 만난 식수 판매상 덕에 곧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날 터였다. 슈리마는 지켜지지 못하는 비밀이 많은 나라였다. 도심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역시 걸음을 멈춘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상인의 모자란 역사 의식이 학자인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성벽과 성문처럼 베커라 시내도 과거 슈리마가 누린 영광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베커라는 아지르 황제의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었고, 젊은 황제는 이곳 사람들에게 후한 대접을 베풀곤 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여온 꽃과 계단식 정원이 선명한 색채를 뽐내고 그윽한 향을 풍기며 도시의 구조물을 장식했었다. 은과 옥이 박힌 탑들이 반짝거렸고, 거대한 신전에서는 시원한 물줄기가 솟아나와 커다란 수로를 따라 영영 마르지 않을 것처럼 태평하게 흘렀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후, 한 때 장엄했던 베커라의 구조물은 모두 폐허가 되고 황폐한 도시엔 앙상한 돌무더기만 남았다. 과거를 숭상함으로써 미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은 수구파의 노력으로 베커라는 지난 몇 세기에 걸쳐 조금씩 재건되었다. 나서스는 점점 늘어나는 인파를 헤치고 걸어가면서 오랫동안 잊혀진 옛 기억을 어쭙잖게 재현한 구조물들을 살펴보았다. 대가들이 설계한 건물들이 이제는 옛 영광을 흉내 낸 우스꽝스러운 모방작이 되어 있었다. 네모지게 깎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던 건물 벽은 삐뚤삐뚤한 돌덩이와 목재로 다시 쌓여 있었다. 기본적인 윤곽은 그대로였지만 나서스는 악몽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익숙한 환경이 낯설고 기괴하게 바뀌어 있었고, 모든 것이 거북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수근거리는 행인들의 대화 속에서 그의 이름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내딛었고, 마침내 길목을 돌아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한 광장에 들어섰다. 베커라 사람들이 재건한 도시의 중심부에 무엇이 세워져 있는지 확인한 나서스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세게 주먹 쥐었다. 그것은 사암과 노암을 깎아 만든 태양의 사원이었다. 인간의 손으로 인간의 기준에 따라 지어진 이 사원은 슈리마 제국의 중심에 있던 거대 건축물을 어린 아이가 흉내 낸 것 같아 보였다. 당시 태양의 사원은 발로란 대륙의 시기를 온몸에 받은 걸작품이었고, 먼 나라 왕실의 건축가들이 수천 킬로미터 여정을 불사하고 보러 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 태양의 사원을 어떻게 이렇게 모욕적으로 만들어 놓을 수가 있는가? 사원의 검은 벽은 현무암처럼 윤이 났지만 나서스는 대충 깎은 돌덩이에 석판이 삐뚤삐뚤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원 위에서 빛나고 있는 태양 원판은 밑에서 보아도 금이 아닌 청동과 구리로 만들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떠 있는 모습도 나서스가 초월 의식을 치를 때와는 전혀 달랐다. 대칭조차 맞지 않는 두 기둥 사이에 묶인 밧줄로 양 옆을 매달아 공중에 겨우 띄워 놓은 상태였다. 나서스는 베커라 사람들에게 분개하고도 싶었다. 자신을 비롯한 무수한 이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위대한 제국을 이렇게 추하게 재현한 자들을 증오하고 싶었다. 존엄한 과거의 흔적 위에 쌓은 그들의 건축물이 무엇을 훼손했는지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고, 그가 본 것을 본 적도 없으니 그의 말을 이해할 리 만무했다. 깃털로 만든 예복을 입은 주교가 원판 앞에 서 있었다. 도심의 소음에 묻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두 팔을 들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찾는 사람이 바로 저 이인가?’ |
6. 5장
나서스는 단호한 걸음걸이로 광장을 가로질러 가며 사원의 네 모퉁이에 깎아 놓은 울퉁불퉁한 계단을 바라보았다. 짐승 머리 모양의 투구를 쓰고 꽉 끼는 청동 갑옷을 입은 두 경비병이 계단 앞에서 보초를 서다가 그를 보고 몸을 돌렸다. 그들의 투구가 누구를 상징하는지 알아 보고 나서스는 잠시 걸음을 주춤했다. 두 짐승 모두 주둥이가 길었지만 하나는 악어의 입을 어설프게 흉내 낸 형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으르렁거리는 자칼의 머리 모양이었다. 창을 겨누던 그들은 나서스가 누더기 옷을 벗고 몸을 곧추세우자 놀란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체구를 숨기기 위해 나서스는 너무 오랫동안 구부정한 몸으로 필멸자의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속죄를 하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암울한 고독 속에서 숨어 지냈다. 하지만 이제 칩거는 끝났다. 더 이상 본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경비병을 내려다보며 우뚝 선 나서스는 힘과 마법의 존재, 그 자체였다. 초월한 영웅들이 필멸자 사이를 걸어 다니던 머나먼 과거에서 온 초월체였다. 그 옛날, 병들고 죽어가던 그의 몸은 태양 원판의 마법으로 공중에 떠올라 자칼의 머리와 짙은 피부를 지닌 반인반수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직도 그의 가슴과 어깨는 단단한 금판으로 감싸져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금의 광택은 사라졌지만 슈리마의 인장이 새겨진 봉헌띠는 그대로였다. 나서스는 손을 들어 지팡이에 매인 천을 찢어 냈고, 그러자 거대한 전투용 도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끼 중앙에 박힌 푸른 보석은 햇빛을 끌어모았고, 도끼날은 기대에 찬 듯 번쩍거렸다. “비켜라.” 나서스가 말했다. 경비병들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지만 고집스레 자리를 지켰다. 나서스는 한숨을 내쉬고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 끝이 올라갈 때엔 첫 번째 경비병이 30미터 밖으로 날아갔고, 내려올 때엔 두 번째 경비병이 흙먼지 속으로 처박혔다. 경비병들이 쓰러져 신음하는 사이 나서스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발로 계단을 딛었다. 허술한 금속 원판을 태양이 비추고 있는 사원의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베커라의 허름한 성벽 바깥쪽을 둘러 보았다. 지평선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척박한 모래 사막이 삼면을 에워싸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지면이 완만하게 솟아올라 울퉁불퉁한 낮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고, 언덕 위에는 억척스런 사막 야자수와 바나바 나무 여러 그루가 물을 찾기 위해 땅 속 수백 미터 아래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허허벌판이 된 슈리마의 모습을 보며 나서스는 생명의 어머니 강이 준 양분으로 활력과 생기가 충만하던 조국의 애틋한 옛 시절을 떠올렸다. 어쩌면 아지르가 슈리마에 생명을 다시 불어 넣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때문에 슈리마의 후예를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다른 경비병들이 고함을 치며 사원 꼭대기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언어는 고대 슈리마어에서 파생되었지만 사라진 슈리마어만큼 아름답거나 정교하지는 못했다. 나서스는 마지막으로 태양의 사원에 올라 왔을 때 느꼈던 고통과 두려움을 기억했다. 그는 초월 의식을 치러야 했지만 병약해진 몸을 가누지 못해 동생의 품에 안겨 사원에 올라왔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태양은 거의 최정점에 떠 있었고, 그의 몸에선 부서진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생명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는 레넥톤에게 애원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 날 두고 가라고.. 하지만 레넥톤은 그저 고개를 젓고 필멸자로서의 마지막 말이 될 약속을 나직이 속삭였다. “끝까지 함께 할 거야.” 그 말은 아직도 나서스의 가슴에 그 어느 칼날보다 더 깊은 생채기를 냈다. 필멸자 시절 레넥톤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짓을 할 때도 많았지만 숭고하고 용감한 일을 해낼 때도 많았다. 초월 의식을 통해 부여 받은 힘으로 레넥톤은 더욱 강해졌고, 슈리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 가며 황제의 능으로 배신자 제라스를 끌고 들어간 것도 결국 레넥톤이었다. ‘슈리마를 구해…?’ 그 날 두 형제가 한 일 중 그 어떤 것도 슈리마를 구하진 못했다. 아지르는 죽마고우에게 목숨을 잃었고, 잘못된 초월 의식의 폭발적인 마법은 도시를 초토화시켜 사막 모래 속으로 묻어 버렸다. 나서스는 레넥톤과 제라스를 뒤로 하고 능의 입구를 봉인하던 순간을 매일같이 되새겼다. 그럴 때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제 제라스와 레넥톤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리고 아지르는 죽음을 정복하고 초월체로 다시 태어나 자신만의 의지로 슈리마를 부활시켰다.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슈리마의 고대 도시는 모래 무덤에서 빠져 나와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깨어났다. 하지만 사막에서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나서스가 알고 사랑했던 레넥톤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의 레넥톤은 복수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는 미친 살인마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나서스가 중얼거렸다. 사원의 정상에 오르며 나서스는 변한 동생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려 안간힘을 썼다. 동생은 불타는 사막 모래 위에서 나서스의 이름을 울부짖는 괴물로 변했다. 그리고 나서스는 그 괴물을 언젠가 대적해야 했다. |
7. 6장
나서스는 팔과 허리춤에 달린 봉헌띠를 펄럭이며 사원의 정상에 올라섰다. 그리고 자루가 아래로 가도록 도끼를 세워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를 짚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칠고 투박한 태양 원판에 햇빛이 반사되어 이리저리 흩어졌다. 밧줄은 볼썽사나울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고, 베커라 사람들의 솜씨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천장엔 아무런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고, 연단에는 그 신성한 표면 위에서 초월 의식을 치른 영웅들의 모습은커녕 천체도나 방위도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청동 갑옷을 입고 흙먼지 묻은 망토를 두른 근위병 열 명이 나서스와 주교 사이에 섰다. 검은 부리가 달린 투구를 쓴 주교는 날개처럼 소매가 넓고 빛에 따라 색이 변하는 기다란 예복을 입은 키 크고 늘씬한 남자였다. 투구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귀족적이고, 엄격하며, 냉철해 보였다. 마치 아지르처럼. "나서스님이십니까?” 주교가 물었다. 제왕의 목소리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깊고 중후한 주교의 목소리에서 나서스는 두려움을 감지했다. 신의 후예임을 자칭하는 것과 진짜 신을 만나는 것은 확실히 다른 일이었다. “물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걸 보니 내가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나 보오. 맞소. 내가 나서스요. 근데 난 그 쪽이 누군지가 더 궁금하오.” 주교는 짝짓기 전에 치장을 하는 새처럼 가슴을 부풀리며 몸을 곧추세웠다. “저는 아즈라히르 텔라무입니다. 매 황제의 후예이자 베커라의 첫 번째 목소리이며 빛을 받은 자이자 빛 속을 걷는 자이고 신성한 불의 수호자입니다. 새벽을 부르는 자이기도 하며…” “매 황제의 후예?” 나서스가 말을 잘랐다. “지금 아지르 황제의 후예라고 말하는 거요?” “후예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 후예입니다.” 자신감을 어느 정도 되찾은 주교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원하시는 게 뭔지 이제 말씀하시지요.” 나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끼를 지면과 평행하도록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 “피를 좀 보여 주시오.” 나서스가 말했다. |
8. 7장
나서스가 석조물을 도끼로 내리치자 사원 천장에서 모래 먼지가 피어 올랐다. 모래 먼지는 반짝이는 장막처럼 원을 그리면서 주교와 근위병들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주교가 물었다. “얘기하지 않았소? 피를 좀 보여 달라고.” 빙글빙글 돌던 모래 먼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매서운 태풍이 되었다. 근위병들은 두 팔을 올려 얼굴을 가렸고, 주교는 먼지 속에서 시야를 잃고 콜록거리며 쭈그려 앉았다. 모래 폭풍은 에카설 떼의 털을 단 몇 분만에 모조리 뽑아 버리는 사막 한복판의 바람처럼 거세게 휘몰아쳤다. 갑옷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작은 틈새에까지 모래가 들어와 살갗을 휘갈겼다. 태양 원판도 앞뒤로 흔들려 석조물에 박은 쇠고리와 원판 사이의 밧줄이 팽팽해졌다. 나서스는 모래 폭풍의 분노가 온몸을 가득 채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짙은 피부 속으로 사막의 진노가 흡수되자 사지에 힘이 돌고 몸집이 커졌다. 비대해진 나서스는 고대 전설 속의 초월체들처럼 무시무시하고 위압적인 형상이 되었다. 나서스는 기습적으로 근위병들에게 돌진하여 도끼 자루나 날의 납작한 면으로 가격해 한 명씩 해치웠다. 슈리마의 아들인 그들을 죽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훼방꾼을 그냥 놔둘 수도 없었다. 쓰러져 신음하고 몸부림치는 근위병들을 지나 나서스는 주교 앞에 섰다. 주교는 상처 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잔뜩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강아지를 들어 올리는 사냥개처럼 나서스는 주교의 목덜미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나서스가 얼굴 높이로 들어올린 주교의 발이 지면 한참 위에서 대롱거렸다. 주교는 모래 폭풍을 맞아 살갗이 거칠게 그을렸고 뺨 위로는 눈물이 흘렀다. 나서스는 태양 원판 가까이에 섰다. 진짜 태양 원판도 아니고 심지어 금도 아니었지만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아지르의 후예라 했소?” 나서스가 말했다. “정말인지 어디 한 번 봅시다.” 나서스는 주교의 얼굴을 태양 원판 위에 갖다 댔다. 금새 원판 위로 주교의 혈흔이 번졌고, 나서스는 곧장 그 흔적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갈색으로 굳어 있었다. “자네의 피는 황제의 혈통이 아니야.” 나서스가 애석해 하며 말했다. “자네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닐세.” 그 때 마침, 멀리 지평선으로부터 푸른 섬광이 비쳐 와 원판의 표면에 반사되었다. 나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돌려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행진하는 군인들의 발에 채인 모래가 먼지구름을 만들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창과 갑옷이 먼지 구름 사이로 번쩍였고, 전투용 북과 피리 소리도 들려 왔다. 밧줄로 멍에를 만들어 씌운 전투용 짐승들이 먼지 구름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가시 돋친 작대기를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짐승들을 몰고 있었다. 단단하게 석회화된 가죽과 길게 구부러진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한 이 짐승들은 베커라의 허술한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는 살아있는 불도저였다. 짐승들 뒤에는 다양한 부족 표식을 새긴 군사들이 베커라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발놀림이 가벼운 정찰병부터 말을 타고 함성을 지르는 사수, 비늘 방패와 육중한 도끼를 든 전투원까지 최소 오백 명은 됨직했다. 평소 같았으면 서로를 보자 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었을 부족들이었기에 나서스는 이들이 다른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직감했다. 강력한 마법의 존재가 느껴졌고 비릿한 금속성의 맛이 입 안을 메웠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사원 아래로부터 수백 명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 왔고, 청동 원판의 결점이 빠짐 없이 보였으며, 날카로운 발톱 사이가 널찍하게 벌어진 커다란 발은 밟고 있는 모래알의 촉감을 한 톨도 남김 없이 느꼈다. 무언가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영영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옛 시절의 희미한 흔적과 먼 메아리가 그 냄새에 실려 왔다. 도시의 폐허와 동쪽의 언덕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피의 내음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나서스를 깨운 마법의 주인이 군사들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차가운 쇠사슬과 고대 석관의 파편에 둘러 싸여 작열하는 어둠의 마법 에너지. 슈리마를 멸망시킨 제국의 반역자. “제라스.” 나서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
9. 8장
베커라의 동쪽 변방에 쓰러져가는 폐가가 있었다. 지붕도 거의 다 떨어져 나갔고 발목 높이까지 모래가 들어와 있었지만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이고 머리 위엔 나뭇잎이 우거져 있어 뜨거운 햇볕을 막아주었다. 늘 그렇듯 탈리야는 언제든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가방을 싸서 한 쪽 구석에 세워 놓았다. 가방 옆면에는 물 주머니와 염소 우유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고, 안에는 2주 동안 충분히 먹을 양의 말린 고기와 옷가지, 발로란 전역을 다니며 모은 돌멩이와 자갈을 담은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탈리야는 그늘 아래 누인 여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여인의 옆구리에 감은 붕대를 살짝 들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치료한 상처 주변에 마른 핏자국을 보고 흠칫 놀랐다. 검에 베인 상처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갑옷을 벗기고 조심스럽게 씻기는 동안에 본 여인의 몸엔 옆구리의 치명상 외에도 수많은 흉터가 있었다. 하나만 제외하곤 모두 전사로서, 그것도 전면에서 싸워 얻은 흉터였다. 이 여인이 누구든지 간에 그녀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은 적은 단 한명 뿐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탈리야가 붕대를 갈자 여인은 고통스러워 하며 신음했다. 여인이 사막 한복판에서 혼자 얼마나 아파했을지는 오직 대지모신만이 알고 있었고, 잠든 그녀의 몸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싸움 잘하시죠?” 탈리야가 말했다. “잘하시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이깟 상처 얼른 이기고 일어나세요.” 여인이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을 걸어 주면 영혼이 다시 몸으로 돌아오는 데에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어쨌거나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좋았다. 열에 들떠 황제와 죽음에 관해 중얼거린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아이오니아에서 야스오를 떠난 후 탈리야는 한 곳에서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무르지 않으며 혼자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다녔다. 베커라에서는 이미 계획보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잠깐 들러 식량만 사 갈 생각이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여인을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가족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대지모신은 모든 인간이 삶의 씨실과 날실로 서로 엮여 있다고 가르쳤다. 실 한 올이 헤어지도록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모든 실이 헤어진다. 그래서 여인의 곁에 남아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가족을 찾지 않고 흘러가는 매 순간이 가슴 아리긴 했지만… 탈리야는 여인의 짙은 머리칼을 뜨거운 이마에서 쓸어 넘겨주고, 여인이 사이 사막 변방에서 부상을 입고 모래 속에 반쯤 묻히게 된 연유가 무엇일지 상상하며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생김새는 고왔지만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강인한 인상이 있었다. 피부는 토종 슈리마인처럼 햇빛에 그을려 어두운 빛을 띠었고, 가끔 눈꺼풀이 떨릴 때마다 보이는 눈동자는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탈리야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제…깨어나실 때까지 제가 별다르게 해드릴 일이 없는 것 같네요.” 그 때 서쪽 방면에서 굉음이 우르릉 울렸다. 바위가 바위에 갈리는 소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탈리야는 창가로 갔다. 처음엔 지진인 것 같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산사태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아니면 베커라 시내에서 건물이 붕괴된 걸지도. 그곳 건물들의 상태를 알면 무너졌다 해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탈리야는 다친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무슨…일이지? 여기가 어디야?” 여인의 목소리에 탈리야는 몸을 돌렸다. 여인은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면서 무언가를 찾아 손을 더듬었다. “여긴 베커라에요.” 탈리야가 답했다. “밖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계신 걸 제가 발견했어요.” “내 검은 어딨지?” 여인이 물었다. 탈리야는 뒤쪽 벽을 가리켰다. 단단한 가죽 재질의 칼집에 싸인 여인의 기이한 무기는 귀여운 새 무늬가 그려진 담요 아래 숨겨져 있었다. “저기 있어요.” 탈리야가 대답했다. “칼날이 어찌나 날카롭던지 잘못 밟았다가는 발이 잘려 나갈 것 같아서 치워 뒀어요.” “넌 누구지?” 여인이 의심하는 투로 물었다. “제 이름은 탈리야에요.” “너 나를 아니? 너네 부족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 탈리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것 같진 않은데요. 저희 부족은 유목민이에요. 천을 짜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죠. 그런데 사람을 죽이진 않아요.” “그럼 다행이네. 나를 노리는 부족이 더 많은데.” 여인은 이렇게 말하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옆구리가 얼마나 아플지 탈리야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여인은 허리를 세우다가 실밥이 당겨지자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을 왜 죽이려고 하죠?” 탈리야가 물었다. “내가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까.” 똑바로 앉으려고 애를 쓰며 여인이 말했다. “의뢰를 받아 죽인 적도 있고, 방해가 돼서 죽인 적도 있고. 하지만 요즘은 내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해서 죽이려는 사람이 더 많아.” “돌아가지 않다뇨? 어디로요?” 여인은 형형한 푸른 눈을 탈리야에게로 돌렸고, 소녀의 안에서 깊은 고통과 혼란의 우물을 보았다. “도시.” 여인이 답했다. “사막 밑에서 올라온 도시.” “그럼 그게 사실이에요?” 탈리야가 물었다. “고대 슈리마가 진짜로 부활했단 말이에요? 직접 보셨어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여인이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고 있어. 대부분 동쪽과 남쪽 부족들인데 다른 부족들도 곧 가게 될 거야. 어리석은 짓이지.” “사람들이 지금 가고 있다고요?” “그래. 점점 더 많이.” “그런데 왜 돌아가지 않으려 하시는 거에요?” “질문이 너무 많아 피곤하네.” 탈리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질문은 서로를 알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잖아요.” 여인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그래도 사람을 가려가며 물어봐. 말이 아닌 검으로 답하는 사람도 있거든.” “당신도 그런가요?” “그럴 때도 있지. 하지만 넌 생명의 은인이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할게.” “그럼 하나만 더 얘기해 주세요.” “뭘?” “당신 이름이요.” “시비르.” 여인이 고통을 참으며 답했다. 아는 이름이었다. 슈리마에서 시비르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탈리야는 십자 모양의 검을 보고 여인의 정체를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탈리야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낙석 소리 위로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고향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아이오니아의 해변, 녹서스의 땅굴, 프렐요드의 얼어붙은 황무지에선 수도 없이 들어본 소리였다. 탈리야는 베커라를 빠져나가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머리 속으로 계산하며 가방 쪽을 흘깃 보았다. 시비르도 소리를 듣고는 다리를 옆으로 돌려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움직이시면 안돼요.” 탈리야가 말했다. “저 소리 들려?” 시비르가 물었다. “그럼요.” 탈리야가 답했다. “꼭 비명소리 같아요.” 시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비명소리야.” |
10. 9장
하늘에서 불덩이가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쭉 뻗은 제라스의 두 팔에서 발사된 청백색의 불꽃 혜성이 포탄처럼 공중을 갈랐다. 첫 번째 불덩이는 시장에 떨어져 운석처럼 폭발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뜨거운 화염이 치솟았다. 여기저기서 불붙은 파편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제라스의 악랄한 웃음소리가 뜨거운 바람에 실려왔다. 다른 이의 고통을 즐기는 광기는 늙지도 않고 그대로였다. ‘저 악마를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시내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베커라 사람들에게 느꼈던 나서스의 분노는 오아시스 위의 아침 안개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채찍질에 화가 난 전투용 짐승들은 뒤로 물러났다가 땅을 흔드는 위력으로 달려나가길 반복하며 도시의 성벽을 부쉈다. 경무장한 군사들이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넘어 시내로 진입했다. 그리고 학살을 시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열 가지도 넘는 구호를 큰 소리로 외쳤다. 나서스는 도끼를 휘둘러 매고 사원의 계단을 한 번에 네 단씩 밟아 아래로 내려왔다. 공포에 질린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도시의 서쪽에서부터 중앙 광장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는 고함 소리와 무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황에 빠진 시민들은 광장 주변 건물에 들어가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그고 몸을 숨겼다. 나서스는 함락된 도시의 피비린내 나는 거리를 걸어 본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전투 후에 군사들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라스는 베커라 시민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처단해버릴 것이 분명했다. 불덩이가 벼락처럼 계속 내리쳤고, 비명소리와 타는 냄새가 공중을 가득 메웠다. 마법 공격이 일으킨 화염 속에서 암석들이 녹아 갈라지며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장은 불타고 있었고 새까만 연기 기둥이 하늘로 번져 올라갔다. 나서스는 강력한 힘을 지닌 피의 냄새를 맡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 틈을 지나 곧장 동쪽으로 향했다. 주교는 수천 년 동안 희석된 약한 피를 가진 가짜였지만 지금 감지한 이 피는…이 피는 강력했다. 필멸자의 가슴 속에서 뛰는 심장 소리가 나서스의 귓속에서 뇌성처럼 울려 퍼졌다. 황제와 전사여왕의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이었다. 원대한 야심과 힘을 지닌 자들의 후손이었다. 영웅의 피가 분명했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외치며 간절하게 도움을 청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는 슈리마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적으로부터 슈리마를 보호하며 평생을 헌신하기 위해 태양의 힘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금 그는 그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커라 시민들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남겨두고 가자니 익숙한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더 이렇게 방관해야 하는가?’ 그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모래가 날려와 높이 쌓인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걸었다. 주변 건물은 대부분 부서진 골조와 잘려진 사각 기둥의 형태로 모래에 묻혀 있었다. 사막 쥐들이 그를 보고 줄행랑을 쳤다. 쿵쿵거리는 심장소리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황량해졌다. 도시의 폐허는 모래 속에 점점 더 잠겨 갔다. 마침내 어느 허름한 구조물에 도착했다. 주변 건물보다 벽이 두껍고 튼튼한 것으로 보아 과거에 목욕탕으로 쓰였을 듯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다 나서스는 안에 있는 두 영혼의 땀과 피 냄새에 순간 고개를 움츠렸다. 한 명은 어린 영혼이었고, 다른 한 명은 너무 오래된 영혼이라 그와 같은 태양 아래를 걸었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동쪽 바다 건너 지역에서나 입을 법한 하늘하늘한 긴 옷을 걸친 어린 소녀가 문가에 나타났다. 시장에서 만난 그 소녀였다. 소녀는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마치 자연의 마법을 일으키려는 듯 곡선과 원을 그리며 결연하게 두 손을 움직였다. 땅이 진동을 했고, 소녀의 발치에서 돌들이 모래를 털어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녀의 뒤로는 칠이 벗겨진 벽을 붙잡고 일어서려 애쓰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의 옷은 붉게 젖어 있었다. 중상이지만 목숨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난 사막의 관리자 나서스다.” 나서스가 말했다. 눈빛으로 보아 소녀는 이미 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던 듯했다. 소녀는 놀라 입이 벌어졌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비켜다오.” 나서스가 말했다. “안돼요. 저 분은 건드리면 안돼요. 지켜드린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나서스는 도끼를 돌려 등 뒤에 걸치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집 안으로 물러서는 소녀의 발 밑에서 지면이 복잡한 모양으로 굽이쳤다. 땅 속에서 암반이 솟아오르자 벽에서 석고칠이 벗겨져 가루처럼 떨어졌다. 돌바닥에 금이 가더니 다 떨어진 지붕까지 타고 올라갔다. 필멸자 시절에 나서스는 소녀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대적했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부상 당한 여인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소녀의 능력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슈리마의 바위를 깨뜨리는 힘을 지녔구나.” 나서스가 말했다. 소녀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러니까 물러서세요. 안 그러면 아저씨까지 깨뜨리는 수가 있어요.” 소녀의 대담함에 나서스는 미소를 지었다. “영웅의 심장을 가진 아이로구나. 비록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지만…네 마법은 훌륭해. 내가 너라면 제라스에게 마력을 빼앗기기 전에 이 도시를 떠날 게야.”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 아무데도 안 갈 거에요. 시비르님을 지켜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리고 대지모신은 약속을 어기는 걸 싫어해요.” “그럼 보호자로서 알아 두렴. 나는 시비르를 해치러 온 게 아니란다.” “그럼 왜 오신 거에요?” “구해 주러 왔단다.” 붕대를 감은 여인이 절뚝거리며 다가와 소녀의 옆에 섰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의연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하지만 고대 슈리마의 혈통을 바로 이어받은 사람이라면 지당히 그래야 했다. “제라스가 누굽니까?” 여인이 물었다. “당신의 존재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어둠의 마법사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탈리야에게로 몸을 돌려 굳은 살 박힌 손을 소녀의 어깨에 올렸다. “구해줘서 고맙지만 신세는 그만 지도록 할게.” 여인이 말했다. “약속은 지킨 걸로 해 둬. 이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소녀는 안도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면서도 주저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치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잖아요.” 탈리야가 말했다. “베커라를 빠져나갈 때까지만이라도 도와드릴게요.” “그래, 좋아.” 시비르는 고마운 얼굴로 응했다. 그러고 나서 나서스에게로 몸을 돌려 중앙에 에메랄드가 박힌 십자 모양의 반짝이는 금빛 검을 등 뒤에서 꺼내 필멸자답지 않은 능숙한 솜씨로 겨누었다. “구해주겠다는 사람이 요즘 너무 많아 지긋지긋하네요.” 시비르가 말했다. “다들 바라는 대가가 있던데, 거인 아저씨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뭐예요?” “당신을 살리는 거요.” 나서스가 말했다.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챙길 수 있어요.”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면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당신은…” “이거요?” 시비르가 말을 잘랐다. “거절 당하기 싫어하는 겁쟁이들이랑 의견 차이가 좀 있었어요. 이것보다 더한 일도 있었지만 난 항상 살아남았어요. 그리고 보호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요즘엔 뭘 하든 운명이 절 지켜주는 것 같거든요.” 나서스는 고개를 저었다. 필멸자가 운명에 대해 제대로 알 리 없었다. “미래는 돌에 새겨진 글씨가 아니오.” 나서스가 말했다. “오히려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강물에 가깝소. 천체에 운명이 쓰여 있는 사람도 조심하지 않으면 삶의 물줄기가 황무지로 흐를 수 있소.” 그는 시비르의 무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 검이 원래 누구의 것이었는지 알고 있소?” “그걸 왜 알아야 하죠?” 시비르가 반문했다. “지금 내 것이면 그만이지.” “그 검은 초월체라는 존재가 설화가 되기 전, 초월체 최고의 여전사 세타카가 썼던 샬리카요. 나는 세타카의 곁에서 300년을 함께 싸우는 영광을 누렸고, 그녀의 업적은 가히 전설적이었소. 당신은 세타카의 이름도 모르는 것 같지만.” “죽으면 잊혀지는 법이죠.” 시비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오래 전 죽은 전쟁 동료에 대한 시비르의 냉정한 반응을 무시하고 나서스는 말을 이었다. “한 번은 사막의 고행자가 세타카에게 말했소. 슈리마의 황제가 전세계를 지배하는 날을 살아 보게 될 거라고. 슈리마는 아직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기에 세타카는 자신을 이길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소. 하지만 이케시아가 멸망하기 전 날, 세타카는 괴물의 공격을 받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소. 나는 숨이 꺼져 가는 그녀를 품에 붙들고 있다가 영면에 임했을 때 사막 아래 깊은 곳에 눕히고 가슴 위에 그 무기를 올려주었소.” “검을 뺏으러 오신 건가요? 그럼 그리 호락호락하게 되진 않을 거에요.” 나서스는 한 쪽 무릎을 꿇고 가슴 위에 양손을 엇갈려 올렸다. “당신은 고대 슈리마 제국의 후예요. 그 무기는 황제의 피가 흐르는 당신이 지니고 있어야 하오. 당신의 피는 아지르와 슈리마를 되살렸고, 거기엔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요.” “아뇨. 아무 의미 없어요.” 시비르가 쏘아붙였다. “난 아지르한테 살려 달라고 한 적 없어요. 신세 진 거 없다구요. 난 당신과도, 그리고 제라스인지 뭔지 하는 사람과도 연관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뜻은 중요하지 않소.” 나서스가 말했다. “당신이 운명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제라스는 당신을 죽이려 할 거요. 제라스는 아지르의 혈통을 완전히 끊어 버리기 위해 베커라에 왔소.” “아지르가 시비르님에게 원하는 건 뭘까요?” 탈리야가 물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아지르가 우릴 노예로 부릴까요?” “질문이 많은 아이에요.” 시비르가 말했다. 나서스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지르가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단다. 하지만 아지르와 제라스는 분명히 서로 대치하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시비르 당신은 순순히 목을 내놓든지, 살아남아 또 싸우든지 해야 할 것이오.” 시비르는 상의를 들추고 피에 젖은 붕대를 보여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 평생 남의 뜻을 순순히 따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당분간 제가 싸울 수 있는 건 졸음 밖에 없을 것 같네요.”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오.” 나서스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리고 준비를 하시오.” “무슨 준비요?” 얼마 안 되는 짐을 탈리야와 함께 챙기며 시비르가 물었다. “슈리마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있을 것이오.” 나서스가 말했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몸을 피해야 하오. 제라스의 군대가 베커라 시민들을 몰살하고 있소.” “왜 베커라를 공격하는 거죠?”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며 탈리야가 물었다. “시비르를 찾고 있는 거지.” 나서스가 답했다. 시비르는 굳어진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나서스님이라고 했죠? 어릴 적부터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쟁과 영광스런 전투에 대한 이야기들이요. 동생과 함께 슈리마를 지켰다는 전설… 모두 사실이에요?” “사실이오.” 나서스가 말했다. “레넥톤과 나는 슈리마를 위해 수 세기 동안 싸웠소.” 시비르는 나서스를 향해 절뚝거리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은 수백 년 전통을 무시하고 자기 자신의 초월을 위해 태양 원판을 준비할 것을 사제단에게 명령하던 아지르처럼 단호하고 거만했다. “그럼 지금 슈리마를 위해 싸우세요.” 마치 황제처럼 시비르가 고압적으로 말했다. “사막의 아들과 딸들이 지금도 죽어가고 있어요. 내가 평생 동안 들어온 그 영웅이 맞다면 지금 밖으로 나가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세요. 그게 당신의 의무잖아요.”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지만, ‘의무’라는 말을 듣고 나서스의 가슴에서는 오랫동안 꺼져 있던 심지에 작은 불씨가 붙었다. 불씨는 곧 온몸으로 퍼져 나갔고, 그제서야 나서스는 슈리마의 멸망 이후 고독 속에서 오랫동안 잃고 있었던 길을 찾았다. “맞소. 그게 내 의무요.” 나서스는 손을 올려 목에 건 가죽 끈에 달린 펜던트를 풀면서 말했다. “내 목숨을 걸고 슈리마의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리다. 그러니 이제 어서 몸을 피하시오.” 펜던트에는 옥이 박혀 있었다. 초록빛 바다색을 띈 표면 위로 옅은 금결이 혈관처럼 뻗어 있었다. 천천히 뛰는 심장처럼 희미한 빛이 고동치며 뿜어져 나왔다. 나서스는 시비르에게 펜던트를 건네 주며 말했다. “이걸 품고 있으면 제라스의 눈에 띄지 않을 거요. 효력이 영원하진 않겠지만 충분히 오래갈 거요.” “얼마나 오래요?” 시비르가 물었다. “내가 당신을 다시 찾을 때까지.” 나서스가 몸을 돌리며 답했다. |
11. 10장
제라스의 군대를 자신 쪽으로 유인하는 것이 시비르와 탈리야를 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안 나서스는 혹여 마음이 바뀔까 서둘러 길을 나섰다. 떠나는 모습을 두 사람이 지켜봐 주었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심은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나서스는 시민들의 비명소리를 따라갔다. 미쳐 날뛰는 군사들의 칼에 베인 사람들의 주검을 보고 나서스는 가슴에 울분이 끓어올랐다. 오래 전 대적 때도 셀 수 없이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렇게 또 죽어 나가다니… 나서스는 근육을 풀기 위해 어깨를 돌렸다. 지난 번 대적 때는 동생이 곁에 있었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둘이서도 이기지 못했는데, 혼자서 대체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나서스는 광장의 출구를 봉쇄하고 있는 군사 다섯 명을 발견했다. 등을 돌리고 있던 그들은 나서스가 도끼를 꺼내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보았다. 초월한 전사를 전장에서 만나면 사색이 되어야 정상이지만 제라스의 마법에 지배된 군사들은 놀란 기색도 없이 푸른 불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들은 칼과 창을 겨누며 나서스에게 달려들었다. 나서스는 정면으로 맞섰다. 도끼를 낮게 휘둘러 한 번에 세 명을 날려버렸다. 네 번째 병사는 주먹으로 가슴을 격파했고, 다섯 번째 군사는 맨손으로 가볍게 처리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병사들을 뒤로한 채 나서스는 걸음을 옮겼다. 광장에 들어서니 살아남은 시민들이 태양의 사원 앞에 신자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머리에 검이 겨눠진 그들은 공포에 벌벌 떨고 있었다. 피 묻은 군사들이 그들의 이글거리는 끔찍한 신을 바라보며 하늘 높이 창을 던졌다. 배반자 제라스는 사원 위 공중에 떠올라 있었고, 그의 초월한 몸에서 나오는 용광로 같은 열기 아래 태양 원판의 변두리가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주교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필멸자들은 참 어리석어.” 제라스가 말했다. “아지르 같이 형편없는 황제의 후예를 자칭하는 이유가 대체 뭐지?” “제라스!” 광장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나서스가 외쳤다. 필멸자 군사들은 고개를 돌려 보면서도 공격할 태세는 취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나서스는 제라스의 증오가 파도처럼 몰아쳐오는 것을 느꼈다. 해골에 가까워진 주교의 몸이 일순간에 재가 되어 제라스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뜨거운 바람에 흩어져 날아갔다. 나서스는 한 손에 도끼를 단단히 쥐고 뚜벅뚜벅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너일 줄 알았어.” 필멸자의 몸으로 걸어 다니던 때처럼 사탕발림하듯 제라스가 말했다. “수천 년 동안 땅 밑에 나를 가둬 놓은 겁쟁이가 아니면 또 누구겠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해 주지.” 나서스가 말했다. 제라스의 형상이 더욱 밝게 타올랐다. “그 땐 사랑하는 동생이 도와줬잖아. 어디, 감옥에서 나온 레넥톤은 만나봤나?” “그 이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 나서스가 으르렁거렸다. “어떻게 변했는지 보기는 했나?” 나서스는 입을 다물었고, 제라스는 불의 영혼들이 서로 부딪는 듯한 소리로 웃어 젖혔다. “당연히 못 봤겠지.” 제라스가 말을 이었다.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르는 듯한 투였다. 쇠사슬과 파편에 갇힌 그의 몸이 빛났다. “봤으면 그 놈 손에 바로 죽었을 테니까.” 부스러져 가는 사원의 벽 아래로 제라스가 내려왔다. 그의 몸을 이루는 불꽃들이 그의 사지를 훑는 듯이 일렁이며 반딧불이 같은 불씨를 흩날렸다. 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군사들은 석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필멸자는 끼지 못하는, 초월체 간의 대결이었다. “네 놈이 가진 힘은 원래 아지르를 위한 것이었어.” 제라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나서스가 말했다. “넌 태양의 선택을 받지 않았어.” “그건 레넥톤도 마찬가지였잖아.” “그 이름 말하지 말랬지.” 나서스가 이빨을 꽉 깨물고 말했다. “네 동생은 약했는데, 이미 알고 있었지?” 제라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무너지더군. 네가 어둠 속에 버리고 갔다고, 적과 함께 가두고 죽도록 내버려 뒀다고, 그렇게 말해주기만 했는데 미치광이가 됐어.” 제라스가 일부러 자극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증오에 찬 나서스의 머릿속엔 제라스의 몸을 감싸고 있는 사슬을 떼어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대전사와 살아있는 마력 덩어리. 시대를 벗어난 두 초월체가 도시의 심장부에서 서로에게 맞섰다. |
12. 11장
잠자코 서 있던 나서스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선제공격을 했다. 두 다리로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머리 위에서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도끼를 내리쳤다. 도끼는 제라스의 가슴을 가격했고, 그 충격으로 쇠사슬이 폭발했다. 제라스는 뒤로 밀려나 사원 벽에 충돌했다. 석조 바닥이 갈라지면서 구불구불한 틈새 사이로 지하 고분의 모래 먼지가 뭉게뭉게 올라왔다. 사원의 거대한 석판들이 떨어져 추락했다. 제라스는 이글거리는 몸에서 활활 타는 에너지 기둥을 내뿜으며 돌진했다. 제라스의 불기둥이 몸에 닿자 나서스는 울부짖었고, 그들은 맹렬한 기세로 서로 맞부딪쳤다. 마법 에너지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 사람들이 태풍 속의 나뭇잎처럼 휘말려 날아갔다. 벽을 흔드는 어마어마한 힘에 주변 건물이 하나둘씩 붕괴되었다. 시민들은 고대에서 온 두 신의 싸움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마법이 풀린 제라스의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시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제라스가 심장에서 마법의 불을 불러내어 무차별적으로 발산시키자 여기저기서 화염이 일었다. 나서스는 몸을 굴려 연이어 떨어지는 불꽃 혜성을 피했다. 불꽃은 차가운 촉감이면서도 뜨겁게 화상을 입혔다. 나서스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도끼날을 휘둘러,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백색 불의 구체를 연달아 막아냈다. 제라스는 나서스의 머리 위에서 갈퀴 같은 벼락을 내리치며 표독스럽게 웃어댔다. 나서스는 온 힘을 쥐어짜내 제라스 쪽으로 도끼를 던졌다. 도끼가 명중되자 제라스는 고통과 분노로 포효했다. 심장의 불꽃이 잠시 꺼지는가 싶더니 이내 되살아났다. 나서스는 제라스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들은 공중에서 격투를 벌이다가 태양의 사원에 다시 한 번 부닥쳤다. 그 충격으로 외벽이 무너지고 지붕의 거대한 석재들이 추락했다. 석재들은 먼 옛날 고분을 지키던 고대 경비병의 주먹과 같은 위력으로 지면과 충돌했고, 그 여파로 바닥이 갈라지면서 사원의 그늘진 지하실이 드러났다. 녹아 들어간 태양 원판은 거인이 던진 동전처럼 맥없이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닿자마자 원판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반짝이는 금속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때 파편 하나가 나서스의 허벅지를 찔렀다. 나서스가 파편을 빼내자 붉은 피가 햇빛을 받으며 다리를 타고 흘렀다. 부서진 석재 사이에서 제라스가 올라 오자 흐린 불꽃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나서스의 가슴에 꽂혔다. 나서스는 신음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나며 비틀거렸다. 제라스는 번뜩이는 마법 에너지를 다시 한 번 발사했고, 이번엔 나서스의 심장에 명중시켰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통증에 나서스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거센 불길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필멸자 군대는 한 손으로도 해치울 수 있었지만 제라스는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그는 태양의 힘을 훔쳐 휘두르면서 어둠의 마력까지 겸비한 초월체였다. 나서스는 고개를 들었다. 온 도시가 불타고 있었다. “네 놈이 찾는 자는 여기에 없어. 네가 볼 수 없는 곳으로 피신했으니까.” “아지르의 마지막 후손… 영원히 숨어 있진 못할 거야.” 제라스가 말했다. “내 손으로 반드시 찾아서 그 보잘것없는 혈통을 끝내 버릴 테니.” 나서스는 도끼를 꺼내 날에 박힌 보석으로 제라스의 이글거리는 광선을 막아냈다. “내가 살아있는 한은 안 될 거야.” “그럼 지금 죽여주지.” 제라스는 이렇게 말하고 두 팔을 연신 끌어당겨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불꽃을 발사했다. 나서스는 최대한 방어했지만 모두 막아내지는 못했다. 제라스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말했다. “네가 숨겨온 질투와 네 배반에 대해서 네 동생에게 연거푸 얘기해줬어. 그랬더니 네 사지를 절단내겠다고 저주를 하면서 울부짖더군.” 나서스는 두 발을 딛고 일어서며 크게 포효했다. 제라스의 몸을 향해 불기둥이 용암처럼 치솟았고 ‘무수한 태양’의 불꽃이 일렁이며 온몸을 집어삼키자 제라스는 고성을 질렀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절대 충분할 수 없었다. 지난 번 대적은 나서스와 레넥톤이 힘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나서스의 위력은 이제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반면 제라스는 수 세기에 걸쳐 힘을 키워 왔다. 제라스는 나서스의 절실한 마지막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떨쳐냈고, 나서스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제라스는 마법으로 나서스의 몸을 들어올려 허공에서 빙빙 돌리다가 부서져 가는 사원을 향해 집어 던졌다. 나서스의 몸은 석조물을 산산조각 내고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태양이 빚은 그의 뼈는 불쏘시개처럼 부러졌다. 나서스는 두 다리가 부러진 채 사원의 잔해 위에 쓰러졌다. 왼쪽 팔은 어깨부터 손목까지 온통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다치지 않은 팔로 짚고 일어나려 해 봤지만 부러진 허리 쪽으로부터 날카로운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을 상처였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천하의 나서스가 이렇게까지 추락할 줄이야.” 제라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손 끝에서는 타고 남은 재처럼 작은 불씨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미움 살 짓만 하지 않았다면 내가 널 불쌍히 여겼을 텐데. 고통 속에서 혼자 방황하는 긴 세월 동안 넌 영혼이 꺾여 버렸어.” “꺾이고 고통 받는 게 배반자가 되는 것보단 낫지” 나서스가 입 안에 든 모래를 뱉으며 말했다. “새로운 힘을 얻었어도 결국 네 놈은 노예에 배신자일 뿐이야.” 나서스는 제라스의 분노를 느끼고 즐겼다. 그것 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난 노예가 아니야.” 제라스가 말했다. “죽기 바로 전에 아지르는 날 해방시켰어.” 나서스는 어안이 벙벙했다. 제라스가 해방되었다고? 그럴 리가… “그럼 왜 이 짓을 하는 거지? 왜 아지르를 배반한 거냐?” “아지르가 멍청했고, 너무 늦게 초월을 했으니까.” 제라스가 답했다. 극심한 통증 속에서 나서스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부서진 어깨 뼈의 조각들이 서로 마찰하며 다시 붙기 시작했다. 팔에 힘이 돌아오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며 축 늘어뜨려 놓았다. “내가 죽은 다음엔 어떻게 할 건가?” 제라스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떠올리며 나서스가 물었다. “네 놈이 황제가 되면 슈리마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서스의 초월한 몸은 제라스가 입힌 상처를 기적적으로 치유하고 있었고, 나서스는 그로 인해 통증을 느끼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했다. 제라스는 고개를 젓고 공중으로 솟아 올라갔다. “몸이 되돌아오고 있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나?” 제라스가 말했다. “그럼 내려와서 제대로 싸워!” 나서스가 외쳤다. “난 네 죽음을 천 번도 넘게 상상해 봤어.” 푹 꺼진 사원 위로 올라가며 제라스가 말했다. “그렇지만 내 손으로 죽이진 않을 거야.” 나서스는 사원 위로 올라가는 제라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지할 곳이 없어진 사원의 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기울어지고 있었다. “사막의 도살자에게도 할 몫을 남겨둬야지.” 태양 원판보다 더 밝은 빛을 내며 제라스가 말했다. 머리 위에서 바위와 흙먼지가 떨어졌다. “난 지켜보기만 할 거야. 그 애가 네 목숨을 거두는 모습을.” 부스러져 가는 사원의 벽으로 백색 불 사슬을 던지며 제라스가 말했다. “그 전까진 널 묻어 두려고. 네가 날 사막 밑에 가뒀던 것처럼.” 제라스는 초신성처럼 눈부신 빛을 내며 불 사슬을 끌고 왔다. 부서진 석재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살인적인 화염이 하늘 위에서부터 베커라 시내를 뒤덮었다. 위에선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암석 덩어리가 우박처럼 쏟아지고, 밑에선 땅이 빙글빙글 돌다 갈라지며 솟아났다. 사원의 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나서스는 수백 톤의 잔해 아래에 묻혀 버렸다. |
13. 12장
어둠이 지나고, 빛. 뜨거운 한 줄기 빛. ‘태양빛인가?’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죽기 전에 보는 환영인지, 처음엔 알 수 없었다. ‘초월체의 죽음은 이런 건가?’ 아니다. 죽음은 아니었다.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햇빛이 보였고, 피부에 닿는 느낌이 따스했다. 다리를 뻗고 어깨를 돌리며 몸을 움직여 보았다. 팔 다리가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이 흐른 모양이었다. 그의 몸은 회복 속도가 빨랐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됐는지 몰라도, 너무 오래되었다. 제라스는 풀려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머리 위의 암석이 완벽한 돔 형태인 것을 보고 나서스는 손을 올려 만져 보았다. 구불구불한 표면이 유리처럼 매끄럽고 따뜻했다. 화가의 팔레트에 반쯤 섞인 물감처럼 굽이치는 물결 무늬가 어두컴컴한 와중에도 확실하게 보였다. 나서스는 빛이 들어오는 쪽을 주먹으로 연달아 강타했다. 뜨거운 열기에 유리화된 암석이 쪼개지고 부서졌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원은 완전히 무너져 한낱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는 형상이 되어 있었다. 나서스는 허리를 굽혀 자신을 보호해 준 돔의 조각을 주웠다. 이리 저리 돌려 살펴 보니 여러 재질이 한데 섞인 걸로 보아 본래 하나의 암석은 아니었던 듯했다. 단검 같은 돔 조각을 옷 속에 집어 넣고 나서스는 무너진 태양의 사원을 떠나 걷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구슬픈 바람의 한숨을 들으며 나서스는 잔해를 살펴 보았다. 도시는 사라지고 없었다. 적어도 슈리마의 잔해 위에 다시 지어 놓은 것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지면을 보니 암반이 대부분 솟아 나와 있었고 나서스의 생명을 구해준 돔처럼 표면이 모두 구불구불했다. 마치 파도가 치다가 반들반들하게 얼어 붙은 것처럼. 제라스의 살인적인 불길을 막아 준 그 파도 아래에서 베커라의 시민들이 나왔다. 처음엔 한두 명이었지만 나중엔 그 수가 꽤 되었다. 그들은 햇빛에 눈을 깜빡이며 밖으로 나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놀라워했다. 나서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말했다. “탈리야, 네가 슈리마를 구했구나.” 그리고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나서스가 마지막으로 이 곳에 왔을 때처럼 베커라는 황량한 껍질이 되어 있었다. 무너진 벽, 산산조각 난 골조, 잘려진 기둥이 석화된 숲 속의 죽은 나무처럼 서있었다. 슈리마가 멸망하던 날 제라스와 처음으로 대적한 후에도 이런 폐허를 보았다. 그 땐 죄책감에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렸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제라스는 레넥톤이 피에 굶주린 야수가 되었다고 했지만 레넥톤에 대해서는 나서스가 더 잘 알았다. 제라스는 야수로서의 레넥톤만 보았다. 그 안에 숨겨진 숭고한 전사의 모습은 잊고 있었다. 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동생. 배반자로부터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전사. 제라스는 이런 레넥톤의 진면모를 잊고 있었지만 나서스는 절대 잊을 수 없었다. 레넥톤이 살아 있다면 영웅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기억이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을 끄집어 낼 수만 있다면 그를 광기의 구렁텅이에서 꺼낼 수 있을 것이다. 나서스는 언젠가 레넥톤을 만날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왔지만 만나는 그 날, 둘 중 한 명은 죽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목적이 생겼다. 아지르의 혈통이 남아 있으니 아직 희망이 있었다. “네가 필요해, 레넥톤.” 나서스가 말했다. “너 없인 제라스를 막을 수 없어.” 눈 앞에 펼쳐진 사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등 뒤에 솟아오른 모래가 베커라를 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