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니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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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amnite Wars'''
기원전 343년부터 290년까지 있었던 로마 공화국과 삼니움 사이의 전쟁이다.
좀 더 정확히 로마와 삼니움 사이에는 총 세 번의 전쟁이 있었는데, 기원전 343년부터 341년까지를 1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26년부터 304년까지를 2차 삼니움 전쟁, 그리고 기원전 298년부터 290년까지 있었던 싸움을 3차 삼니움 전쟁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 전쟁은 로마가 캄파니아인의 도시인 카푸아를 삼니움의 공격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개입한 것이 원인이었고, 두 번째 전쟁은 로마가 네아폴리스의 정치에 개입하여 네아폴리스를 종속시키려다가 그게 남부 이탈리아의 세력 싸움으로 번지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마지막 전쟁 또한 이탈리아 남부의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한 세력 싸움이 원인이었다.
전쟁은 반세기 넘게 지속되었고, 크게 삼니움과 로마, 그리고 세노네스[1] 가 크게 관여되었다. 덧붙여서 삼니움은 초기 고대 로마의 강력한 라이벌 중 하나였다.
2. 배경
삼니움족은 초기에는 로마와 우호한 관계를 유지했고 갈리아인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서로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삼니움족은 자원이 풍부한 캄파니아를 탐내는데 이곳에는 수많은 그리스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의 도시국가가 있었다. 삼니움족이 계속 쳐들어오자 캄파니아의 도시국가들은 동맹을 맺었다.
3. 제1차 삼니움 전쟁 (343 BC ~ 341 BC)
BC 343년, 캄파니아 도시국가 동맹의 맹주인 카푸아는 로마에게 삼니움족의 침략을 대비해 동맹을 맺자고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미 삼니움족과 동맹을 맺은 로마는 동맹을 깨뜨리고 카푸아에 지원군을 보내면서 제1차 삼니움 전쟁이 일어난다.[2] 전쟁이 점점 장기전으로 진행되면서 전쟁에 지친 로마인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원로원의 친(親)삼니움 세력은 삼니움과 화해를 하고 반란을 진압하여 1차 삼니움 전쟁을 종결시킨다. 이 제1차 삼니움 전쟁과 라틴 전쟁으로 로마는 캄파니아에 진출하여 라티움 지역의 패권을 쥐게되었다.
4. 제2차 삼니움 전쟁 (326 BC ~ 304 BC)
BC 327년, 네아폴리스[3] 의 그리스인이 로마의 캄파니아 통치에 대해 반발을 제기하며 난을 일으켰다. 원로원은 사절을 보내 대응했지만 그리스인들은 더 거세게 반발했다. 그런데 이때 삼니움이 네아폴리스에 지원군을 보낸 사실이 드러났다. 로마는 바로 삼니움에게 동맹 규칙 위반이라며 항의했지만, 삼니움은 로마가 식민지를 세운 것이 동맹 규칙을 이미 위반한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면서 제2차 삼니움 전쟁이 시작되었다.
4.1. 카우디움 협곡 사건
BC 321년, 로마의 2만 병력은 카푸아에서 출병해 카우디움 협곡[4] 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게릴라 전술을 이용한 삼니움족은 미리 매복 중이었다가 로마 군단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유리한 고지를 이용하여 매복당한 로마 군단에게 무차별 화살을 쏘아댔다. 로마 군단은 속수무책으로 화살을 맞을 수밖에 없었고 군량마저 부족해지자 로마 집정관은 결국 항복을 선언한다.
삼니움족의 장수 가이우스 폰티우스는 로마에게 로마 기병 600명을 볼모로 삼아 삼니움 침략을 포기하고 삼니움 땅에 로마인들의 식민 지배를 금지한다는 협약을 강요한다. 결국 집정관 2명과 재무관 2명, 군사령관 4명과 백부장 12명이 협약을 맺는다. 그리고 삼니움족은 바리케이드를 열어 양쪽에 긴 창 2개를 세우고 창 하나를 가로로 놓아 포로인 로마 군단병에게 모든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그곳을 기어서 지나게 하는 굴욕을 선사하고 풀어준다.[5]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격노하여 삼니움족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기원전 312년, 감찰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가 로마에서 타라키나, 타라키나에서 해안을 따라 카푸아까지 곧게 뻗은 아피아 가도를 건설했다. 이 도로가 로마군의 행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후에 삼니움족은 캄파니아와 에트루리아들의 도시들을 선동하여 로마에게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로마는 그렇게 빼앗긴 캄파니아를 다시 손에 넣고 아펜니누스 산맥의 여러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삼면으로 삼니움족을 포위한다. 이로써 BC 304년에 삼니움족은 로마에게 강화를 요청하고 오랜 전쟁에 지친 로마가 수락하면서 제2차 삼니움 전쟁은 막을 내린다.
5. 제3차 삼니움 전쟁 (298 BC ~ 290 BC)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끝나고 로마와 삼니움의 동맹이 6년째 되던 해에 로마는 다른 지역에 세력을 넓히느라 삼니움족을 신경쓸 시간이 없었다. 그 사이 삼니움족은 로마와 치룬 전쟁에서 잃은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루카니아인들에게 동맹을 제의했다. 루카니아인들이 계속 거절하자 삼니움족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 계속되고 더 버틸 힘이 없던 루카니아는 로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가 이 도움을 받아들여 로마와 삼니움족과의 전쟁이 또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집정관이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6] 가 삼니움의 명장인 에그니투스를 쫓다가 에그니투스가 연합시킨 이탈리아 중북부 세력 연합[7] 의 공격을 받아 전군이 몰살당한다. 이 소식을 들은 원로원은 긴급 동원령을 발표해 16~45세까지의 시민병과 퇴역한 군인, 해방노예 등 전부 4만 명의 병력을 소집했다. 그리고 이듬해의 새로운 집정관으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결전을 앞두고 연합세력 중 하나인 에트루리아군 세 명이 몰래 빠져나와 로마군에게 항복했다. 이 때문에 에트루리아군의 모든 전략과 전술이 로마에게 새어나가고 에트루리아군은 결국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전선을 이탈한다.
그리고 BC 295년, 다시 집정관에 선출된 파비우스와 데키우스의 로마군은 아펜니누스 산맥 동쪽과 북 움브리아에서 연합군과 대치했다. 연합군은 갈리아#s-2군이 왼쪽에서 삼니움군이 오른쪽에서 공격해 로마군을 포위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이때의 결전은 이탈리아 역사상 전례없는 대규모 혈전이었다고 한다. 전황은 로마에게 불리했고 병사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자 집정관 데키우스가 "로마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면 목숨을 바치겠다"고 기도하며 적진으로 뛰어들었고, 이에 병사들의 사기가 다시 올라 전세가 역전되었다. 데키우스는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지만 파비우스는 삼니움 군대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고 나머지 군대는 모두 후퇴해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
6. 결과
이 세 번의 전쟁으로 인해 반(反)로마 동맹은 깨졌고 삼니움족은 로마에게 영토를 내놓고 항복을 했다. 로마는 이들의 감시를 위해 산 한 가운데 식민지를 건설했다. 삼니움족을 굴복시킨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를 손에 넣었지만 로마의 급격한 팽창을 경계한 남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과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사소한 분쟁은 곧 피로스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1] 원래는 갈리아 북부에 살던 족속으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반도 북부 지역을 장악하였다.[2] 리비가 적은 바에 따르면 카푸아가 로마에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으나 로마가 삼니움과의 동맹을 이유로 거부했다. 그러자 카푸아는 동맹 대신에 복속을 청했고, 로마는 이를 받아들였다. 로마는 동맹인 삼니움에게 카푸아는 이미 로마의 영토이니 쳐들어오지 말 것을 통보하지만, 이미 그 전부터 카푸아를 노리던 삼니움은 카푸아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로마는 다시금 전령을 보내 재고할 것을 요구했으나 삼니움은 다시금 전쟁을 선포했고, 로마도 이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리비의 이 기록은 신빙성에 있어서 다소 의심을 받고 있기는 하다.[3] 오늘날의 나폴리[4] 베네벤토와 카푸아 사이에 위치한 협곡이다.[5] 이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로마군 포로의 처우를 놓고 삼니움 부족장이 고민을 거듭하던 와중에 한 부족원이 "포로를 모두 처형해서 로마의 힘을 약하게 만들던지, 깔끔하게 모두 풀어줘서 로마로부터 호의를 얻고 (로마와 삼니움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는) 제 3세력들에게 강대함과 여유를 과시하던지." 확실하게 정할 것을 조언했으나, 족장은 조언을 따르지 않고 모욕은 모욕대로 주고 포로를 모두 풀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덕분에 로마는 전력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셈이 되었고, 풀려난 로마 군단병들은 한층 더 복수심에 타올라 죽자사자 싸우게 되었다.[6]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조상.[7] 에트루리아 인, 움브리아 인, 키살피나 지방의 갈리아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