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피아 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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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Appia'''
아피아 가도는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도로로, 로마와 이탈리아 남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는 브린디시를 연결하였다.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 Caecus)가 기원전 312년경, 삼니움 전쟁 중에 군사 목적으로 도로를 만든 것이 그 기원으로,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참고로 위의 가도 중에서 먼저 건설된 구간은 로마~카푸아 구간이고, 카푸아~브린디시 구간은 나중에 연장된 것이다.
사실 가도 건설의 필요성은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었으나, 엄청난 비용과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당장에 특별히는 가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로마는 가도 건설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343년,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캄파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이 연합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삼니움이 일으킨 제1차 삼니움 전쟁에서 보급로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결국 패배한 로마는 마침내 가도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한다.[2]
특히, 로마와 캄파니아 사이에 위치한 폰티노 습지[3] 는 특성상 대규모 군대의 이동이나 보급품의 수송이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근처에 말라리아가 들끓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들어가기에는 제약이 많았는데, 이는 앞으로 로마의 이탈리아 남부 정복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계획을 수립한 로마는 우선 이탈리아 남부 쪽으로 이주민들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는 이탈리아 남부 쪽에 거점을 마련하여, 현지에서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쉽게 말해서 식민지 건설이었다. 그러나 이 식민지 건설로 인하여 삼니움과의 사이는 다시 틀어지게 되고, 거기에다 제1차 삼니움 전쟁 이후, 로마를 물리친 기세를 몰아 삼니움이 네아폴리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둘의 사이는 더욱 악화된다.[4]
그러다가 기원전 327년경에 네아폴리스가 로마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로마는 이에 응하여 다시 군대를 전개하여 제2차 삼니움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로마는 이번에도 삼니움을 상대로 고전을 하게 되는데, 이 이유가 앞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바로 보급의 문제 때문이었다.[5]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나중에 바뀌게 되는데, 바로 기원전 312년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의 새로운 감찰관이 된 것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우선 로마가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를 잇는 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도 로마는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보급의 어려움으로 있는 전력의 100%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감찰관에 임명되자마자 원로원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가도 건설에 들어갔다.
그렇게 클라우디우스가 밀여붙여 건설한 구간은 로마와 캄파니아인의 중심지였던 카푸아를 잇는 구간이었다. 특히, 로마와 캄파니아 사이에 위치한 폰티노 습지를 건널 수 있게 되어, 보급품의 수송이나 대규모 군대의 이동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로마가 이전과 달리,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서 본토의 풍부한 전력을 모두 쏟아부을 수 있게 되면서, 기원전 304년까지 대부분의 전투에서 삼니움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는 로마로 하여금 추후에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6] 이후 로마는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옛 삼니움 지역에 여러 식민도시들을 건설하였으며, 베네벤토와 베누시아까지 아피아 가도를 연장하였다. 로마 세력권이 이탈리아 남부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중심지인 타란토에까지 이르자 타란토와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를 고용하여 로마에 맞서지만, 아피아 가도를 통한 보급의 도움을 받은 로마가 결국 승리하여 타란토 및 아풀리아 지방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아피아 가도는 타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아드리아 해 연안의 항구도시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었고, 브린디시는 로마의 그리스 및 동방 진출의 전진기지, 핵심 군항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사실 로마-카푸아 사이에는 라티나 가도(Via Latina)라는 길이 아피아 가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피아 가도가 해안선을 따라가는 반면 라티나 가도는 로마에서 남동쪽을 향해 내륙 지방을 통과한다. 다만 선형이 아피아 가도보다는 구불구불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푸아-브린디시 구간이 완공된 한참 이후인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베네벤토에서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내려가 브린디시에 이르는 트라야나 (혹은 아피아-트라야나) 가도가 건설되었다. 위 지도의 분홍색 부분으로, 옛 아피아 가도와 길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아풀리아 지방의 평지를 지나기에 소요 시간 단축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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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만들어진 아피아 가도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로마에 가면 한 번 즈음은 걸어볼 만한 거리로,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찾아가는 방법은 버스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는 방법 2가지가 있다. 걸어서는 1시간가량 걸리는데 인도가 없고 차도도 1차선에 좌우가 수풀로 꽉 차있어서 꽤나 위험하다. 특히 이탈리아의 운전매너를 생각했을 때 정말 위험할 수도... 걸어 가다보면 카타콤과 무덤 등 여러 유적이 있기에 역덕들이라면 한 번 해볼 만도 하다.
다만 시간은 넉넉히 잡고 안전에 유의해서 가도록 하자. 가면서 주의를 집중하고 섰다 걸었다를 반복해야되기 때문에 꽤나 힘들다.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도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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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a Appia'''
All roads lead to Rome.[1]
1. 개요
아피아 가도는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도로로, 로마와 이탈리아 남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는 브린디시를 연결하였다.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 Caecus)가 기원전 312년경, 삼니움 전쟁 중에 군사 목적으로 도로를 만든 것이 그 기원으로,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참고로 위의 가도 중에서 먼저 건설된 구간은 로마~카푸아 구간이고, 카푸아~브린디시 구간은 나중에 연장된 것이다.
2. 역사
사실 가도 건설의 필요성은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었으나, 엄청난 비용과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당장에 특별히는 가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로마는 가도 건설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343년,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캄파니아 지방의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이 연합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삼니움이 일으킨 제1차 삼니움 전쟁에서 보급로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결국 패배한 로마는 마침내 가도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한다.[2]
특히, 로마와 캄파니아 사이에 위치한 폰티노 습지[3] 는 특성상 대규모 군대의 이동이나 보급품의 수송이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근처에 말라리아가 들끓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들어가기에는 제약이 많았는데, 이는 앞으로 로마의 이탈리아 남부 정복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계획을 수립한 로마는 우선 이탈리아 남부 쪽으로 이주민들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는 이탈리아 남부 쪽에 거점을 마련하여, 현지에서 보급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쉽게 말해서 식민지 건설이었다. 그러나 이 식민지 건설로 인하여 삼니움과의 사이는 다시 틀어지게 되고, 거기에다 제1차 삼니움 전쟁 이후, 로마를 물리친 기세를 몰아 삼니움이 네아폴리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둘의 사이는 더욱 악화된다.[4]
그러다가 기원전 327년경에 네아폴리스가 로마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로마는 이에 응하여 다시 군대를 전개하여 제2차 삼니움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로마는 이번에도 삼니움을 상대로 고전을 하게 되는데, 이 이유가 앞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바로 보급의 문제 때문이었다.[5]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나중에 바뀌게 되는데, 바로 기원전 312년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의 새로운 감찰관이 된 것이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우선 로마가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로마와 이탈리아 남부를 잇는 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도 로마는 삼니움과의 전쟁에서 보급의 어려움으로 있는 전력의 100%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감찰관에 임명되자마자 원로원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가도 건설에 들어갔다.
그렇게 클라우디우스가 밀여붙여 건설한 구간은 로마와 캄파니아인의 중심지였던 카푸아를 잇는 구간이었다. 특히, 로마와 캄파니아 사이에 위치한 폰티노 습지를 건널 수 있게 되어, 보급품의 수송이나 대규모 군대의 이동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로마가 이전과 달리,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서 본토의 풍부한 전력을 모두 쏟아부을 수 있게 되면서, 기원전 304년까지 대부분의 전투에서 삼니움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는 로마로 하여금 추후에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6] 이후 로마는 삼니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옛 삼니움 지역에 여러 식민도시들을 건설하였으며, 베네벤토와 베누시아까지 아피아 가도를 연장하였다. 로마 세력권이 이탈리아 남부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중심지인 타란토에까지 이르자 타란토와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를 고용하여 로마에 맞서지만, 아피아 가도를 통한 보급의 도움을 받은 로마가 결국 승리하여 타란토 및 아풀리아 지방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아피아 가도는 타란토를 거쳐 최종적으로 아드리아 해 연안의 항구도시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었고, 브린디시는 로마의 그리스 및 동방 진출의 전진기지, 핵심 군항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사실 로마-카푸아 사이에는 라티나 가도(Via Latina)라는 길이 아피아 가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피아 가도가 해안선을 따라가는 반면 라티나 가도는 로마에서 남동쪽을 향해 내륙 지방을 통과한다. 다만 선형이 아피아 가도보다는 구불구불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푸아-브린디시 구간이 완공된 한참 이후인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베네벤토에서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내려가 브린디시에 이르는 트라야나 (혹은 아피아-트라야나) 가도가 건설되었다. 위 지도의 분홍색 부분으로, 옛 아피아 가도와 길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아풀리아 지방의 평지를 지나기에 소요 시간 단축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3.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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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만들어진 아피아 가도는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로마에 가면 한 번 즈음은 걸어볼 만한 거리로,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찾아가는 방법은 버스를 타고 가거나 걸어가는 방법 2가지가 있다. 걸어서는 1시간가량 걸리는데 인도가 없고 차도도 1차선에 좌우가 수풀로 꽉 차있어서 꽤나 위험하다. 특히 이탈리아의 운전매너를 생각했을 때 정말 위험할 수도... 걸어 가다보면 카타콤과 무덤 등 여러 유적이 있기에 역덕들이라면 한 번 해볼 만도 하다.
다만 시간은 넉넉히 잡고 안전에 유의해서 가도록 하자. 가면서 주의를 집중하고 섰다 걸었다를 반복해야되기 때문에 꽤나 힘들다. 체력에 자신이 있다면 도전해보자.
[1] 직역하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로, 같은 목표에는 많은 다른 길이 있다는 영어 속담. 이 아피아 가도에서 유래하였다.[2] 물론 보급로 문제 때문만에 진 것은 아니다. 보급이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의외로 삼니움군이 로마군을 상대로 선전하였고, 무엇보다도 삼니움이 선전하는 모습을 보고 라티움 동맹이 로마를 배신하고 삼니움 쪽으로 돌아선 것이 타격이 컸다. 자세한 건 삼니움 전쟁 항목 참조.[3] 지금은 간척되어서 없어졌다.[4] 네아폴리스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로, 오늘 날의 나폴리이다. 당시에는 그리스계가 많이 살고 있었으며, 로마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1차 삼니움 전쟁에서 로마가 삼니움에게 털리면서, 삼니움이 로마의 비호를 받을 수 없게 된 네아폴리스를 삼켜버린다.[5] 로마는 이 보급 문제 때문에 삼니움을 상대로 본거지에 풍부한 자원을 쌓아두고 있으면서도 이걸 전쟁터로 제대로 옮기지를 못하여, 본거지에서 싸우는 삼니움에 비해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6] 클라우디우스는 이 공적으로 인하여 나중에 로마 집정관까지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