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홍양
1. 소개
桑弘羊
전한 한무제 시기 정치인이자 경제 관료.
2. 일생
2.1. 한무제의 경제관료
한경제 5년(기원전 152년)에 낙양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상홍양이 계산에 관계된 일을 잘 처리하여 나이 열셋(기원전 140년)에 시중(侍中)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수 3년(기원전 120년), 한무제는 흉노원정을 지속하기 위해 거대 소금 상인인 동곽함양(東郭咸陽)과 거대 철 상인 공근(孔僅) 그리고 상인 집안 출신인 상홍양을 재정관으로 기용하여 국가의 경제정책을 처리하도록 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는 염철주의 전매를 실시하여 막대한 효과를 거두었고 이때의 공으로 대농승(大農丞)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균수법을 추진하였다. 지방에 염철관(鹽鐵官), 균수관(均輸官)을 설치하여 그 정책을 구체화하는 한편 각지의 물류를 조정하여 재정 수입을 늘렸다.
기원전 87년 한무제는 죽기전 흉노족 왕자 출신으로 곽거병에게 잡혀온 김일제와 상관걸(上官桀), 상홍양, 승상 전천추(田千秋), 그리고 곽광을 불러 후계자 유불릉을 부탁했다. 이로서 곽광을 비롯해 김일제, 상관걸, 상홍양 등은 8살에 황제에 오른 불릉의 섭정인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된다.
재무장관격인 대사농(大司農)에 있던 상홍양은 역시 삼공의 하나인 어사대부(御使大夫)에 오른다. 어사대부는 감찰 역할을 하는 재상이지만 상홍양은 역시 하던 대로 경제 부총리 역할을 했다.
2.2. 염철회의(鹽鐵會議)
기원전 81년, 상홍양과 무제의 경제정책은 비판을 받았다. 바로 염철회의를 수도 장안 미앙궁에서 가진 것이다. 곽광은 40년 가까이 실시됐던 염철주 전매제도를 다시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상홍양과 현량, 문학은 장안의 궁정에 모여 갑론을박을 했다.
염철주(鹽鐵酒)의 전매는 상홍양이 입안한 제도로 상홍양은 국가에 의한 경제정책의 주도를 역설했다 상홍양은 염철주가 민간에 독점되다보니 결국 엄청난 폭리가 몇몇 부자들에게만 몰리고 있다고 봤다. 염철주는 반드시 필요한 재화인데 일부 대형 상인들이 이를 독점해 이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게 상홍양의 시각이었다. 한무제 시기에 국가 통제의 경제 정책을 채택한 까닭은 그때까지 소금과 철, 술 등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면서 황제의 직접, 개별적 인민 지배를 방해하고 있던 호족이나 상인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 정부의 재정 수입을 확충하는 데 직접적인 목적이 있었다.
상홍양이 염철주의 전매를 시도한 것은 무제 통치의 전성기였던 BC 120년이다. 당시 시중이었던 상홍양은 염철주 전매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국가주도의 경제정책을 폈는데 대표적인 것이 균수법과 평준법이다. 전국 각처에 균수관(均輸官)과 평준관(平準官)[1] 을 설치했으며 염철주 전매로 거둬들인 수익은 한무제가 BC 130년경부터 40년간 추진해온 대흉노전쟁의 기반이 됐다. 말이 잘나지 않는 중원에서 14만필의 말[2] 을 투입했던 막북전투를 생각해보시라.
철의 경우, 철광을 생산하는 각 지방에 50여 개의 철관(鐵官)을 설치하고, 이 철관을 대농(大農)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채광에서 철기의 주조에 이르는 모든 생산과정은 철관의 직영 아래 행하였다. 소금의 경우, 생산수단의 주요 부분이었던 염장과 제염에 필요한 일체의 설비와 기구는 국가가 공급하고 마련하였으나,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포함한 일체의 경영과 필요한 자본은 국가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 국가가 선발한 종래의 민간 제염업자가 담당하였다.
문제는 무제 치세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흉노와의 전쟁 등으로 재정이 지나치게 방만하게 운영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특히 흉노와의 전쟁은 명백한 낭비[3] 와 비효율, 소모전으로 점철되어 국가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적 배경 하에서 기획되고 실행된 소금과 철, 술의 전매 정책이 무제 사후에 '염철 논쟁'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그것의 생산과 유통을 국가가 독점하면서까지 강행한 흉노와의 전쟁이 지독한 소모전으로 흘러가면서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준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하에 반대파들은 국가가 이런 산업을 국유화하긴 했어도 좋았던 처음의 의도와 초기 성과와는 달리 점차 방만한 운용을 하고 재정낭비를 보충하기 위해 염철주의 생산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는 못하면서 국가가 민간에게 돌아가야 할 부를 독점하여 백성들로부터 나오는 이익을 제멋대로 조정하여 챙긴다고 봤다.
염철주의 옹호 입장에선 당시 승상 전천추와 상홍양이 나왔다. 하지만 늙은 전천추보다 전매제도를 입안한 상홍양이 염철주 전매 옹호의 선두에 나섰다. 상홍양을 빼면 현량과 문학[4] 60여명이었다. 여기서 현량이란 재상들이 천거한 사람이고 문학은 지방 관리들이 천거한 사람이다. 이들 현량과 문학은 높은 집안 자제들로서 젊긴 하지만 상홍양과 같은 입장은 아니었다. 회의 구성원부터 상홍양을 누르려는것이 곽광의(정확히는 두연년) 의도였다. 현량과 문학들은 소금과 철, 술 등의 전매를 관리하는 관청과 균수(均輸)를 담당하는 관청을 철폐하여 국가가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다투지 말 것을 청하고, 절약 근검의 모범을 보인 뒤에야 교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홍양은 이를 반대하면서, 소금과 철, 술 등의 전매와 균수 등은 국가의 큰 사업으로서 사이(四夷)를 제압하여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재정의 바탕이기 때문에 철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무제의 염철전매는 한나라의 재정부족을 해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그간 염철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던 지방 호족 및 대상인들에게는 불리한 정책이었다. 무제 사후, 이 정책을 실시한 상홍양을 비롯한 외조(外朝) 관리와 호족과 대상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던 곽광, 현량(賢良), 문학(文學) 간에 이 문제를 둘러싼 염철논쟁은 현량(賢良)·문학(文學)들이 "국가가 염(鹽), 철(鐵), 주(酒)의 이익을 민(民)과 다투고, 독점하려 한다"는 점을 비판하고 지적하면서 개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현량, 문학이 말하는 '민'이란 실제로는 그때까지 소금과 철, 술의 생산과 판매를 주도해 온 호족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결국 염철 회의라는 역사적 무대에서 현량, 문학이 맡은 역할은 호족의 옹호자일 수밖에 없었다.
상홍양과 현량, 문학은 장안의 궁정에 모여 갑론을박을 했고. 이 자리에서 상홍양은 목소리를 높여 염철주 전매제도를 옹호했다. 엄청난 논쟁이 벌어진 끝에 염철회의는 술의 전매만 중단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흥미로운 것은 염철회의의 내용은 유가와 법가의 싸움이었지만 실제론 공격받는 상홍양뿐 아니라 공격측인 유가를 후원한 곽광이나 두연년도 혹리[5] 이자 법가지 유가는 아니라는 것. 그나마 두연년은 그 기본은 혹리 두주의 아들로 법에 밝으면서도 온화한 인물이었지만 곽광은 그냥 법가적인 엄혹한 정치를 했다.[6] 염철회의에서 현량과 문학의 주장은 전매제도의 전면 폐지로 이는 전매제도를 옹호하는 상홍양에게 정치적인 타격을 주려고 회의를 연 곽광도 받아들일 수 없는 급진적인 주장이었는데, 사상적으로 곽광이나 두연년 역시 법가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2.3. 반역과 죽음
그러나 40년 가까이 유지됐던 굳건한 염철주 전매제도가 훼손됐다는 것은 곽광과 상홍양-상관걸과의 권력차가 커지고 있다는 반증이었으며 소금과 철의 전매도 중단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되자 상홍양-상관걸 진영은 불안에 떨게 된다. 이들은 염철회의가 끝난지 불과 1년도 안돼 곽광을 치는 정변을 일으켜야할 정도로 위치가 불안해진 것이다. 그리고 염철 회의에서 현량, 문학 혹은 그 배후라 할 수 있는 곽광 측이 승리한 것이 호족의 위상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상관걸 일당은 소제가 있는 한 곽광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짜낸 계략은 곽광을 죽인 후 소제를 폐위시키고 자기들과 짝궁이 맞는 연날왕을 황제로 올린다는 것이다. BC 80년 상관걸 등은 개장공주 집에서 연회를 연 뒤 곽광을 초대하고 미리 배치한 자객들로 하여금 곽광을 죽인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야심찬 작전은 내부 고발자로 인해 두연년에게 딱 걸린다. 대로한 소제는 승상 전천추에게 명해 곽광 암살을 기도한 무리를 모두 잡아들이고 삼족을 멸하도록 했다. 이로써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삼상은 모두 처형당해 기시됐고 상홍양이 그토록 애썼던 염철주 전매는 모두 폐지된다.
3. 경제사상
상홍양은 철저한 경제관료였다. 그는 치밀하고 정확한 계산에 능숙하여 "이익이 되는 일을 내세우고, 계산은 추호도 틀림없었다." 또 거시경제의 입장에서 경제관리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각 항목의 경제정책을 개혁하고 만들고 추진하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각 방면의 상호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완전한 시스템(생산-경영-운수-저장-물가 등)을 만들어 운영에 편의를 기하고 경제적 효율을 극대화했다. 상홍양은 시장교역의 필요성을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국가 인민의 생계에 중요한 구성 요소로 농업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므로 상호 연계하여 하나라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상홍양은 시장의 교환작용을 대단히 중시했을 뿐 아니라 농업,공업,상업의 상호관계 및 생산 영역과 유통 영역의 불가분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상품의 유통과 시장교역이 있어야만 각 분야들이 적극적으로 생산에 뛰어들게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통제경제와 계획경제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했다. 그의 정책은 소금과 철, 술을 국가가 독점하여 전매함으로써 재정을 튼튼하게 하자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법가의 입장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물가를 조종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려 했고, 농업생산을 경제의 기초로 인정하면서도 상공업과 교통운수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자치통감과 사기 평준서등에 따르면 상홍양은 무제에게 평준(平准), 균수(均輸) 등과 같은 경제정책을 실행하는 기구를 설립하여 상품을 통제할 것을 건의했다. 비쌀 때 팔고 쌀 때 사들여 물가를 조절하고 전국의 상품시장을 통제함으로써 부유한 상인이나 대규모 중간상인한테서 소금과 철 그리고 무역 통제권을 빼앗아 정부의 재정수입을 증가시킬 것을 적극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지방 유지와 부유한 상인들의 세력에 타격을 주어 궁극적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치권을 강화할 것을 제의한 것이다. 그는 장안에 식량과 화물을 저장하는 국가 창고인 '위부(委府)'와 물가를 통일 관리하는 '평준'을 설치했다. 전국에 설치된 여러 대농관(大農官)은 시장을 설치하여 전국의 화물들을 매매할 수 있었는데, 비싸면 내다 팔고 싸면 사들여 각지의 대상인들이 시장을 독점하지 못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큰 이익을 얻고 물가가 갑자기 뛰는 것을 억제했다.
이렇게 해서 중앙의 재정수입이 크게 증가하고 국고도 충실해졌다. 자치통감 20권에 따르면 한무제는 전국을 시찰할 때마다 약 백만 필의 옷감과 엄청난 금전을 상으로 내렸는데, 모두 재정을 관리하는 대농에서 가져갔다. 상홍양은 또 황제의 허락을 받아 전국 각지에 속보관(粟補官)을 활용하여 곡식을 내면 죄를 감해주거나 사면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이렇게 해서 국고는 더욱 충실해져 산동에서 실어보내는 곡식은 1년에 6백만섬이 더 많아졌고,일 년 사이에 태창, 감천창이 가득 찼다. 변방에도 곡식이 남아 돌았으며, 여러 물자가 골고루 유통이 되어 비단이 5백만 필이나 되니 백성들이 세금을 더 내지 않아도 천하가 풍요로웠다. 상홍양은 개혁과 경제정책의 성공으로 무제에게 좌서장이란 작위를 상으로 받았다.
기원전 109년, 남양 한중 이후의 군들은, 각기 그 땅의 비례에 의해서, 전거와 마피구를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만든 군에서는 때때로 작은 반란들이 일어나 관리를 죽이니 한나라는 남방 사졸을 출동시켜 그들을 주벌하였는데 1년사이에 1만여명이나 되었고, 모두 대농에서 공급하게 하였다. 대농에서는 균수와 염철을 조절하여 부세를 보조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하여 군대가 지나간 곳에는 현에서는 재물을 공급하여도 부족이 없었을 뿐이고, 감히 전쟁비용을 부담하는 천부법을 말하지도 않았다.(자치통감 21권)
또 그는 대외무역을 강조했다. 당시 서한에게 외교상 가장 버거운 상대는 흉노였다. 상홍양은 군사와 외교상 늘 한나라를 위협하던 흉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대외무역을 제안했다. 즉 서로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교역함으로써 흉노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상홍양은 경제가 정치와 군사의 방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경제문제를 정치, 군사와 긴밀하게 결합시켜 고려했다. 경제가 발전하여 국고가 충실해야만 비로소 부국강병이 가능하다고 인식했다. 무제는 염철주 전매로 벌어들인 수익을 기반으로 군대를 키웠고 이 것은 한나라 시대 흉노를 토벌하고 고조선을 섬멸할 수 있었던 군사력의 뒷받침이 됐다. 상홍양은 염철회의에서 선제인 무제가 백만의 군인을 변방에 보내어 국가를 방어하고 있는데 염철주를 폐지하면 변경의 군인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이 되지 않으므로 염철주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결국 엄청난 재정적자를 부르는 흉노 원정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 백성들을 괴롭히는 정책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백성들은 방만한 재정낭비와 흉노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전비소모, 군사적 피해로 인해 이를 보충할 필요가 있던 조정에 의해 높은 세금과 부역, 혹정에 시달려야 했고 흉노와의 전쟁을 뒷받침하던 염철주 전매는 이로 인해 국가가 백성을 곤란하게 만드는 제도로 받아들여졌다. 상홍양은 염철주 전매를 통해 얻은 부를 기반으로 국가 방위를 강화했고 이는 곽광이 통치하던 시기를 비롯해 약 100년 이상 한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게 되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무제가 통치하던 50년 동안엔 매해 빠지지 않고 엄청난 규모로 전쟁을 벌였고 군사물자의 소모가 매우 심각했으며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 전쟁을 치루어 결국엔 각종 세금과 증세가 이어졌다. 무제가 말년에서야 흉노전을 중단한다는 윤대의 조를 발표했을 때 백성들은 기뻐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제시기 정책인 염철주 전매는 흉노전 전쟁을 속개한다는 의지로 보였기 때문에 당장 재산상 손실을 입는 중앙귀족이나 지방 호족이 아닌 일반 백성들도 반대했던 것이다.
상홍양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은 염철론에서 문학들의 비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애초 당시 중상주의라는 게 동이든 서든 장사질은 토지세보다 훨씬 더 돈이 빨리 걷어지니까 상공업 진흥시켜서 거기서 쪽쪽 빨아먹어 정부를 부강하게 하자는 거였기 때문이다.그래서 당시 한 무제 정권에서 소금 전매니 장인들 동원이니 하면서 나라 힘이 비대해지고, 전쟁도 벌였던 것이고 상공업 키워서 정부가 돈이 많아지면 다른이한테도 배푸니 좋은 거 아니냐는 게 이쪽 주장이다.
반면에 유학자들의 경우 실물도 아닌 상공업의 가치 뻥튀기 해봤자 실물인 농산물에 비하면 의미 없고 진정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는 실물인 농산물 생산을 통해 정부가 아닌 백성들이 스스로의 삶을 꾸릴 수 있어야 한단 게 당시 주장이었다.그리고 이에 따라 상공업은 백성들이 자기들 '필요'에 따라 만들고 거래하도록 두면 된다고 주장했고 이는 국가가 이익 극대화를 위해 시장을 통제함으로서 나타나는 부정부패와 실제 필요한 물건 간의 괴리를 비판하는 것 이다.
또 고조 유방부터 무제의 부친인 경제까지 이르는 동안 한나라 통치 방침으로 자리잡은 군국제 대신 황제가 독재하는 군현제를 하려는게 무제의 생각이었는데 이로 인해 한무제 시대는 유교에서 기피하는 혹리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이에 반대파들은 무제시대의 정책을 전면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시대의 정책인 철과 소금의 국가전매는 본말이 뒤바뀐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일수 밖에 없었고 그 중심엔 곽광의 심복 두연년이 있었다. 두연년의 영향을 받은 곽광은 상홍양을 숙청한 후 상홍양의 여민쟁리(與民爭利)대신 여민휴식(與民休息), 즉 백성에게 조세와 노역을 가볍게 하는 무위지치로 회귀했으며 무제시기의 활발한 대외정책을 포기한다.
[1] 지방의 조세 수입으로 중앙정부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여 중앙으로 운송했던 기관이 균수관, 평준관은 물가가 쌀 때 사 두었다가 비쌀 때 방출해 재정 수입을 증대하고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2] 당시 투입된 병력은 10만, 말이 사람보다 많았다.[3] 당장 곽광의 형 곽거병의 흉노 원정 당시 엄청난 양의 물자를 보급받아 놓고선 정작 병사들은 제대로 보급을 못 받은 상태에서 물자를 얼마 쓰지도 않고 그대로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4] 현량과 문학은 원래 벼슬을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천거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5] 酷吏:혹독한 관리, 법가에 따라서 엄혹한 정치를 한다고 해서 혹리라고 하고, 유가를 따르는 관리를 순리라고 한다.[6] 한서 권89 순리전 중 황패 :무제 말기부터, 법가를 이용함이 심했다. 소제가 서자, 어려, 대장군 곽광이 정사를 쥐고, 대신들은 권력을 다투니, 상관걸 등이 연왕과 함께 모의해 반란을 일으키자, 곽광은 곧 그들을 주멸하고, 마침내 무제의 법도를 따르니, 형벌로써 무리들을 고통스럽게 얽매어, 시속에서는 관리들이 엄혹함을 숭상하고 이를 유능하다 여겼으나, 오로지 황패만은 너그럽고 화합함으로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