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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鹽鐵論
1. 개요
2. 집필 배경
3. 회의 내용
4. 결과
5. 의의
6. 편향, 윤색 의혹
7. 기타


1. 개요


염철론은 중국 전한 소제 시원(始元) 6(기원전 81)년에 조정에서 개최된 회의의 토론 내용을, 이후 선제의 치세인 기원전 50년 무렵에 재현하여 구성한 책이다. 모두 10권 60책이며, 저자는 환관(桓寬)[1]이다. 제목도 글자 그대로 '소금과 철에 대한 논의'라는 뜻이다.

2. 집필 배경


한무제, 소금, 등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전매(專賣) 정책 및 균수와 평준 등 일련의 재정 정책을 펼쳤다. 이를 통틀어 '염철주(鹽鐵酒: 소금, 철, 술) 전매제도'라고도 부른다. 무제 시기의 염철 전매정책은 상인 출신의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염철주 전매제도는 상홍양이 제안한 제도로써 대상인을 압박해 빈부격차를 줄이고,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다.
기원전 119년에 한은 흉노 원정 등으로 고갈된 국가 재정을 확충할 방안의 하나로 이 정책을 도입했다. 동곽함양과 공근등이 대사농(大農丞)이 되어 염철(鹽鐵)의 일을 주관하고 상홍양이 총애를 받아 고관에 올랐다. 이에 동곽함양(東郭咸陽)과 공근(孔僅)은 대농승(大農丞)으로 임명하고, 소금과 쇠를 주관하라고 하였다. 상홍양(桑弘羊)은 계산에 밝아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상홍양은 낙양상인의 아들이었는데, 암산에 능하여 열세 살에 시중(侍中)이 되었다. 때문에 이 세 사람은 이윤에 관한 일은 가을철에 털갈이를 하여 새로 돋아나는 짐승의 가는 털까지도 분석할 정도였다.(사기 평준서) 무제 시기에 실시된 또 다른 국가통제 경제정책인 균수(均輸)와 평준책(平準策)도 이들 상인 출신의 경제관료들에 의해 입안, 관리되었다.
상홍양은 백성들을 모집하여, 비용은 각자가 부담하되 기물은 관(官)의 것을 사용하여 소금을 달이게 하고, 관에서는 소금을 달이는 기구를 주도록 하고, 지금까지는 덕에 비해 식록이 많은 사람이나 불량한 백성들이 산과 바다의 재화를 제멋대로 점거하여 치부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부려 이익을 꾀하고 있으니, 이 일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철관은 철의 산지에 설치하여 국가가 생산과 판매 과정을 전부 장악하였으며, 철이 생산되지 않는 지역에는 소철관(小鐵官)을 두어 폐철의 회수와 재주조를 담당케 하였다. 이에 비해 염관은 소금의 산지에 설치하되, 생산은 국가가 위탁한 민간업자가 맡고 그 생산물의 판매는 이들 염관이 담당하였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염관은 27개, 군국에 36관, 철관은 40개, 군국에 48관이 있었다.
사기 평준서에 따르면 상홍양은 각지의 관원들이 스스로 매매하면서 서로 경쟁을 해서 물가가 올랐고, 천하 각지에서 조세를 운송하는데, 어떤 것은 조운의 운임 비용만도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대농부승(大農部丞) 수십 명을 배치하여 부서를 나누어 각 군국을 주관하게 하고, 각자 주요한 현에는 균수관과 염철관 등을 배치할 것을 청했다.그리고 '먼 곳에서 바친 물품이 가장 비쌀 때에 상인들이 외지에서 파는 가격에 맞추어 세금을 내게 하고, 각지의 화물이 상호 교류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도에 평준관(平準官)을 설치하여 전국에서 운반되어 오는 화물을 모두 받아들이고, 공관(工官)을 불러 수레와 여러 기물을 제조하게 하면, 그 비용은 모두 대농이 공급하여야 한다고 했다. 대농에 소속한 관청에는 천하의 화물을 모두 장악해서 비쌀 때는 내다 팔고 쌀 때는 사들이도록 했다. 이와 같으면 돈 많은 장사꾼들은 큰 이익을 취할 도리가 없어져서 곧 본업인 농업에 힘쓰게 될 것이고, 만물의 가격은 오를 수가 없게 되며, 천하의 물가를 억제할 수 있으니, 이름 하여 ‘평준(平準, 물가를 공평하게 조절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천자는 도리가 있다고 여겨 그의 주청을 허가했다.
균수법은 국가가 각 지방의 산물을 조세로 징수하여 다른 지방에 운송하여 판매함으로써 이익을 거두는 것이었다. 평준법은 풍년 등으로 물건이 쌀 때 국가가 사들여 저장해 두었다가 가격이 오르면 내다팔아 그 차액을 국가의 수입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 대체로 각지의 조세 수입을 중앙정부에 그대로 수송할 경우 생기는 수송비의 문제, 중앙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자와 징수품목의 차이 등에서 오는 국가 재정상의 비효율성을 개선하려고 했던 제도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균수법과 평준법은 각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어 값이 싼 산물을 국가가 매입하여 가격의 폭락을 막고, 나아가 그 물자를 다른 지방에 운송하여 판매함으로써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고 물가를 안정시켜 서민의 생활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상인의 역할을 대신하여 중간 이득을 얻어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다. 때문에 균수법과 평준법의 실시는 상인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부족한 재정의 회복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국가가 직접 상업에 관여한다는 것에 대해 유학자들의 반발을 낳았다.
염철회의 당시의 법가는 관료조직 전체의 지지와 옹호를 받고 있었다. 한나라 초에는 관료조직의 상층부가 공신 집단과 그 2세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지만, 그 중추부는 이른바 문리(文吏) 혹은 문법리(文法吏)라 불린 법가적 관료집단에 의해 점거되어 있었으며, 무제 시기에는 그 나마 공신 2세조차 자연 소멸되면서 관료조직의 상층부까지 법가적 관료들에 의해 침투되었다. 한나라 초 고황후 여씨문경제 시기에 크게 유행하였던 황로술(黃老術)은 공신 집단의 이념체계여서, 무제 시기에 이르러서는 공신 집단의 잔여 세력과 함께 황로술적 이념체계도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5경(經) 박사(博士)와 태학(太學)의 설치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유가적 현량문학지사들이 관료조직의 상층부로 거의 진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무제 시기에는 법가적 통치술이 법가적 관료집단과 더불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무제 시기의 관료조직을 이끈 또 하나의 세력은 직업적 상인 출신의 관료군이었다. 오랜기간 대외 정벌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갖가지 경제적 부작용이 발생했다. 이때 기용된 사람들이 이들이었다. 염철 논쟁을 주도한 상홍양(桑弘羊)은 비록 상인 출신의 경제관료였지만, 법가 사상에 통달한 법가적 관료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원전 80년에 모반에 연루되어 처형될 때까지, "태공환공, 관중의 화식술(貨殖術)을 이수하여 치부성업(致富成業)"(염철론)하였고, 장기간 경제전문 고급관료로 일하였다.
그러나 국가재정 역시 무제의 무리하고 방만한 흉노원정으로 바닥을 보였으며, 결과적으로는 백성들의 삶이 특별히 더 나아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무제가 죽은 뒤에도 이 정책들을 존속시킬 것인지의 여부 등이 논쟁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 크게 보면 '민간의 고통'을 주제로 하여 개최된 이 회의에서, 당시 소제의 보정대신이었던 곽광은 전국에서 추천을 받은 유학자들과 담당 관리들을 수도 장안으로 불러 모아 토론을 하게 했고, 그들과 함께 논의한 내용을 수록했다.

3. 회의 내용


현량과 문학을 비롯한 유가에서는 도덕과 인의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원칙론을 내세우고, 이러한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즉, 이러한 정책을 나라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행위(= 여민쟁리)로 보아서 옳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반대파들이 유가의 논리로 상홍양의 경제정책은 "이욕(利慾)의 문을 활짝 여는 것으로 이는 범죄자들을 끌어들이는 계단"이라고 공격했다. 반대파들은 특히 철과 소금의 국가전매는 본말이 뒤바뀐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여 비판했다. 유가에서는 본업인 농업을 중시하고 백성들이 자유롭게 생산활동을 하게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길은 쓰임새를 줄이고 농업을 숭상하고 토지를 분배하여 정전제를 시행하는 데 있을 뿐이라고 했다.
유학의 주장은 실물도 아닌 상공업의 가치 뻥튀기 해봤자 실물인 농산물에 비하면 의미 없고 진정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는 실물인 농산물 생산을 통해 정부가 아닌 백성들이 스스로의 삶을 꾸릴 수 있어야 한단 게 당시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상공업은 백성들이 자기들 '필요'에 따라 만들고 거래하도록 두면 된다고 주장했고 이는 국가가 이익 극대화를 위해 시장을 통제함으로서 나타나는 부정부패와 실제 필요한 물건 간의 괴리를 비판하는 것 이다. 이는 백성을 권리가 있는 곳에 자유롭게 풀어놓고 염철 전매제를 철폐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폭강한 세력에 유리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대 중국의 민간사회를 지배하던 호족(豪族)과 연관되기도 한다.
반면 이러한 정책을 입안했던 당시 어사대부 상홍양을 비롯한 법가는, 이런 제도가 국가 재정의 안정에 기여하고, 안정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백성의 생활이 오히려 안정될 수 있다고 하여 존속을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애초 당시 중상주의라는 게 동이든 서든 장사질은 토지세보다 훨씬 더 돈이 빨리 걷어지니까 상공업 진흥시켜서 거기서 쪽쪽 빨아먹어 정부를 부강하게 하자는 거였기 때문이다.그래서 당시 한 무제 정권에서 소금 전매니 장인들 동원이니 하면서 나라 힘이 비대해지고, 전쟁도 벌였던 것이고 상공업 키워서 정부가 돈이 많아지면 다른이한테도 배푸니 좋은 거 아니냐는 게 이쪽 주장이다.
장인이 나오지 않으면 농기구가 부족하게 되고, 상인이 나오지 않으면 진귀한 재화들도 유통되지 못하게 되며. 농기구가 부족하게 되면 곡식 생산을 늘릴 수 없고, 진귀한 재화가 유통되지 않으면 재정이 궁핍하게 된다. 그러므로 염철주 전매제와 균수법은 적체된 재화를 소통시켜서 공급과 수요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니, 이를 폐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상홍양은 관자를 인용했는데 '나라에 비옥한 토지가 많이 있음에도 백성들의 식량이 부족한 것은 농기구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며, 산해의 자원이 풍부한데도 백성들의 재화가 부족한 것은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때문이다.'라고 하여 균수법의 운영으로 생기는 물자와 창고에 비축해 두는 재물은 백성을 상대로 장사해서 오로지 군사 비용으로만 쓰기 위한 것은 아니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고 수재나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데 어찌 반드시 농업에만 의존할 것이며, 백성을 풍족하게 하는 데 어찌 반드시 정전제만을 고집하겠느냐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4. 결과


현량과 문학들은 민간의 어려움에 대해 묻는 황제의 물음에 답하여 "소금과 철, 술 등의 전매를 관리하는 관청과 균수를 담당하는 관청을 철폐하여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다투지 말 것을 청하고, 절약 근검의 모범을 보인 뒤에야 교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사대부 상홍양은 이를 반대하면서, 염철주의 전매와 균수 등은 국가의 대업으로서 사이를 제압하여 변방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재정의 바탕이기 때문에 철폐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서 권24 식화지)
염철회의를 마친 다음에, 어사대부 상홍양과 승상 전천추 등이(한서 권24 식화지) 상주하여, "현량과 문학은 정부의 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외람되이 전매제도가 불편하다고 하니, 군국의 각고(榷沽)와 관내의 철관를 철폐하자"고 청하니, 황제가 이를 받아 들였다(염철론 39). '각고(榷酤)'(官)의 철폐란 곧 "백성들이 법률에 따라 관에 신고한 다음에 술을 한 되에 4전(錢)씩 받고 팔 수 있게 한 것"(한서 권7 소제기)을 의미하며, 관내의 철관 철폐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였다. 결국 염철회의 결과, 염철주의 독점적 생산과 판매 가운데서 술 전매의 전면적 해제와 철 판매의 일부 해제만이 이루어졌을 뿐이어서, 염철회의의 직접적 의미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후에 상홍양 일파가 주살당한후 염철제도는 폐지된다. 하지만 전매제도가 폐지된다고 하여 꼭 나라에 이로운 것은 아니었다. 후일 원제때는 백성을 위한답시고 도리어 전매 제도를 폐지했다가 재정만 더 망가졌다.

5. 의의


염철회의는 흔히 정치적 음모로서 이해되는데 곽광과 상관걸, 상홍양 일파의 싸움이 그것이다. 그것은 이 회의의 소집이 곽광의 막료였던 두연년(杜延年)이라는 인물에 의해 발안되었기 때문이다. 김일제가 죽고 보정대신간의 싸움으로 염철회의 직전의 정국은 내조(內朝)의 영수인 곽광과 외조(外朝)의 실권자인 상관걸, 상홍양 등이 은연중에 패를 나누어 정권을 다투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는 한편으로는 내조와 외조의 권력 투쟁이라는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염철회의가 곽광의 대장군막부 막료에 의해 입안되었고 전개 양상이 곽광이 추천한 현량과 문학에 의해 외조의 실권자 어사대부 상홍양이 혹독하게 공격을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염철회의가 곽광이 내외조의 정적을 일거에 제거하고 외조를 무력화하여 곽광 정권을 확립하려는 정치적 책략에서 소집되었던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도 염철회의가 있었던 그 다음 해, 즉 원봉(元鳳) 원년(기원전 80년)에 모반을 이유로 "곽광이 상관걸과 상홍양 및 그 외인 종족을 모두 죽이니 곽광의 위세가 해내를 진동하고 소제가 관례를 치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곽광에게 정권을 위임하였다"(한서 권68 곽광전)는 결과가 염철회의의 정치적 책략설에 설득력을 더해 준다.
흥미로운 것은 염철회의의 내용은 유가와 법가의 싸움이었지만 실제론 공격받는 상홍양뿐 아니라 공격측인 유가를 후원한 곽광이나 두연년도 혹리[2]이자 법가지 유가는 아니라는 것. 그나마 두연년은 그 기본은 혹리 두주의 아들로 법에 밝으면서도 온화한 인물이었지만 곽광은 그냥 법가적인 엄혹한 정치를 했다.[3] 염철회의에서 현량과 문학의 주장은 전매제도의 전면 폐지로 이는 전매제도를 옹호하는 상홍양에게 정치적인 타격을 주려고 회의를 연 곽광도 받아들일 수 없는 급진적인 주장이었는데, 사상적으로 곽광이나 두연년 역시 법가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4]
다만 염철회의는 소제(昭帝) 시기의 중국인들이 염철회의를 통해 얻은 결론은 무제 시기의 연장인가, 문제 시기로의 회귀인가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두 시기의 특성을 함께 아울러 새로운 성격의 시기를 여는 것이었다. 한대(漢代), 아니 고대 중국의 사회와 국가의 전형적 모델은 진시황 시기나 한문제, 무제 시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염철회의가 진행된 전한 후기의 소선제(昭宣帝) 시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6. 편향, 윤색 의혹


환관은 결론을 비롯해 토론의 쌍방 중 본문 도처에서도 현량 문학에 경향된 찬자의 입장을 암시하는 글귀를 많이 남기고 있다. 그리하여 한서 예문지(藝文志), 수서 경적지(經籍志)에서도 염철론을 '유가(儒家)'의 부류에 포함시켰다. 이로 인해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도 이 책을 유가의 부류에 넣었다.
염철론은 당시의 격렬한 토론 장면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지만, 실제 대화의 내용으로 믿기에는 너무나 논리가 정연하고 말씨가 정돈된 곳이 자주 발견되어, 윤색의 흔적이 강하게 감지된다. 그러나 염철론이 환관 개인이 만들어 낸 허구라든가, 염철회의의 진행과 토론 내용을 허위로 전하는 기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찬자 자신이 회의록을 직접 입수, 관람하여 정리한 것이어서, 그 사료적 신빙성을 과소 평가할 필요는 없다.

7. 기타


사료의 부족으로 연구하기 힘든 고조선과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에 한국사에도 중요한 사료이다.[5]

[1] 중국 한나라 선제 때 사람. 자는 차공이다. 승이라는 지방관을 지냈으나 당시에는 이름 있는 정치가도, 문장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박학하고 글을 잘 지어, 앞 시대인 소제 때 있었던 염철 회의를 전부 재현하여 저술을 남겼다. 이로써 후세에 뛰어난 문장가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염철 논쟁으로 대표되는 한대 지성인들의 토론 방식과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소중한 틀을 부여하였다.[2] 법가에 따라서 엄혹한 정치를 한다고 해서 혹리라고 하고, 유가를 따르는 관리를 순리라고 한다.[3] 한서 권89 순리전 중 황패 :무제 말기부터, 법가를 이용함이 심했다. 소제가 서자, 어려, 대장군 곽광이 정사를 쥐고, 대신들은 권력을 다투니, 상관걸 등이 연왕과 함께 모의해 반란을 일으키자, 곽광은 곧 그들을 주멸하고, 마침내 무제의 법도를 따르니, 형벌로써 무리들을 고통스럽게 얽매어, 시속에서는 관리들이 엄혹함을 숭상하고 이를 유능하다 여겼으나, 오로지 황패만은 너그럽고 화합함으로 유명해졌다.[4] 다만 곽광은 워낙 불학무술했기 때문에(...) 법가라고 학맥을 규정할 순 없고 두연년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보인다는 게 맞을 것이다.[5] 중간에 고조선(부왕~준왕 시기)이 기원전 3세기 경에 진개로부터 빼앗긴 영역을 중원에서의 진의 몰락/초한쟁패/흉노침공과 같은 혼란한 시기를 틈타 일부 회복하여 압록강을 맞대고 중국과 경계를 가르는 형세를 이루게 되는 내용을 암시하는 기록(‘조선은 샛길을 넘어 연나라 동쪽 땅을 겁략했고...’)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