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시몽
1. 개요
생 시몽은 7월 왕정과 프랑스 제2공화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백과사전 작가이다. 샤를르 푸리에의 푸리에리즘과 함께 공상적 사회주의의 두 분파 중 하나 생 시모니즘의 창시자이다.
2. 인생
1760년 파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다. 계몽주의에 깊이 심취해, 17살 때부터 라파예트 곁에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다. 1783년 프랑스에 돌아와서 네덜란드, 스페인을 포함한 유럽 각지를 여행했고, 여기서 습득한 경험과 지식으로,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다. 생 시몽은 자유주의의 지지자였고 나폴레옹의 제국 때와 루이 18세 때도 자유주의 사상가로써 활동했으나, 소수의 부르주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자유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노동자 위주의 사회를 꿈꾸게 된다. 그에게 프랑스 혁명은 단순한 정치적인 혁명이 아닌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한 혁명이었다. 1805년부터 생 시몽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는 그의 노동자 친화적인 사상의 발달에 일조하게 된다. 이는 그는 정치를 그만두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고, "새로운 기독교 -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대화"(Nouveau christianisme - Dialogues entre un conservateur et un novateur) 1825년 죽기 직전에 출판한다.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 삶은 단 하나의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3. 사상: 생 시모니즘
그의 유언에서 볼 수 있 듯이 생 시모니즘은 실력본위주의를 설교했다. 그에게 지도자는 단순히 올바른 정치적 결정과 국민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고, 이런 역할에 가장 적합한 직업군은 과학자, 지식인, 엔지니어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는 리슐리외추기경이 1635년에 설립한 아카데미 프랑세즈로 대표되는 앙시앵 레짐이 지식을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게 아니라 오직 시스템을 존속시키기 위한 제도로 보았다. 생 시몽은 아이작 뉴턴을 존경했고, 그와 같은 엘리트가 인류의 대표로,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 덕분에 오귀스트 콩트를 포함한 에꼴 폴리테크니크 출신 엔지니어들의 지지를 받는다. 생 시몽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의 경제적인 모델을 제안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들은 엘리트가 감독하나 노동자/농민들의 삶의 수준을 개선하는 계획 경제를 옹호한다.
천주교의 교리를 일부 계승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대가로 돈을 버는" 금융가들에 대한 혐오를 표출한다. [1] 생 시몽은 금융가들에 대한 비판을 부르주와 계층으로 확장시켰고, 이들을 루이 16세 이전의 전제왕정제체인 앙시앙 레짐의 소산물로 보았다. 또 프랑스가 대부분 농업 국가였던만큼 농민들을 위한 사회주의를 설명하는데 큰 부분을 할당한다.
생 시모니즘은 19세기 프랑스를 휩쓸었으며, 프랑스 제2공화국의 낙관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생 시몽과 생 시몽주의자들은 1824년 파리 정치 신문인 "글로브"(Globe)를 창설했고, 이상적인 사회를 갈급했던 프랑스 사회에 생 시모니즘을 빠르게 보편화시켰다. 글로브는 큰 파급력 가져 아돌프 티에르, 프랑수와 기조, 로아예르 꼴라르 등 당대 정치 거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3.1. 종교적인 색채
생 시몽의 사후 그를 계승한 제자들은 각자 분파를 설립했고, 그 중 바르텔레미 앙팡탕은 이를 기독교에 접목시킨다. 또 생 시몽의 죽음 이후 일종의 "사도"로, 사상의 전도자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생 시모니즘은 철학적 사상이나 경제/정치적 운동보다는 종교적인 색채를 띈다. 생 시몽의 저작물 중 하나 "제네바의 한 거주자가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들"(Lettres d'un habitant de Genève à ses contemporains)에서 "신이 내가 말했다", 또 "나는 올바른 기독교적 정신을 민중과 왕들에게 포교하라는 신의 임무를 이행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생 시몽의 제자였던 오귀스트 콩트를 제외하고도, 에밀 뒤르켐, 프루동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4. 생 시모니즘 사상가들
[1] 천주교 교리에 따르면 시간은 오직 신이 소유할 수 있었고, 원죄에 대한 징벌로 인간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자들에게 금융업자들은 노동의 땀을 흘리지 않고도 돈을 버는 범법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