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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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루이 스타니슬라스 자비에 드 프랑스
(Louis Stanislas Xavier de France)
'''출생'''
1755년 11월 17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824년 9월 16일 (68세)
프랑스 왕국 파리 루브르 궁전
'''장례식'''
1824년 9월 24일
프랑스 왕국 생 드니 대성당
'''재위'''
프랑스 왕국의 왕
1차
1814년 4월 6일 ~ 1815년 3월 20일
2차
1815년 7월 8일 ~ 1824년 9월 16일[1]
'''배우자'''
사보이마리 조세핀
(1771년 결혼 / 1810년 사망)
'''아버지'''
프랑스루이 왕세자[2]
'''어머니'''
작센마리아 요제파
'''형제자매'''
마리 제피리느
루이 16세
샤를 10세
마리 클로틸드
엘리자베트
1. 개요
2. 험난한 즉위 여정
2.1. 조카의 죽음
2.2.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
3. 재위기간
4. 평가
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프랑스 왕정복고기의 부르봉 왕조 왕.

2. 험난한 즉위 여정



2.1. 조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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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전의 루이 18세(당시 프로방스 백작)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프로방스 백작의 칭호로 불렸다.[3] 루이 16세가 한동안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한때 추정 상속인 자격으로 왕위계승자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자를 출산하자 형 부부와 매우 사이가 나빠졌고,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과 함께 국왕 부부의 흑색 선전에 열을 올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바렌 사건이 터진 가운데 형과 형수는 탈출에 실패했지만 그는 혁명이 시작되자마자 위험을 감지하고 빠르게 독일로 망명할 수 있었다. 루이 16세가 사망했을 때 왕세자의 섭정을 자처했었고, 나중에 조카인 루이 왕세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자 스스로 루이 18세를 자칭했다. 뭐 루이 16세의 유일한 아들인 왕세자가 죽었다면 살리카법이 적용되는 프랑스 왕실에서는 루이 16세의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 아닌 그가 왕위계승 1순위가 된 건 맞긴 하니까...

2.2.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


어쨌든 독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한때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브뤼메르 쿠데타로 권세를 잡자 그가 왕당파라는 것을 확신하고 1800년 2월 20일 그에게 몹시도 거만한 편지를 보내 왕정복고를 촉구했다[4].

"'''내게 왕위를 돌려주는 데 꽤나 뜸을 들이는군요.''' 그러다가는 기회를 놓칠 위험이 있소. 내가 없다면 당신은 프랑스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반면 그대 없이 나는 프랑스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소. 그러니 서두르시오. 그리고 어떤 지위와 명예가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알려주시오."

실제로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왕당파이거나 심지어 자신이 왕이 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대의 편지를 받았소. 친절한 말씀에 감사드리오. '''그러나 프랑스로 돌아오려는 희망을 품고 있다면 버리시오.''' 그러려면 시신 10만구를 밟고 넘어야 할 것이오. 프랑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사사로운 이익을 희생하시오. 역사가 잊지 않을 것이오. 그대 가족의 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오. 은퇴한 뒤 편안하고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겠소."

이후 나폴레옹은 1803년에도 그에게 편지를 보내 "왕정복고? 꿈 깨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그를 실망시켰다. 루이 18세의 동생이며 훗날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은 이때부터 나폴레옹에게 치를 떨었고 부르봉 왕당파는 나폴레옹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기회를 엿보던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무리한 전쟁으로 민심을 잃는 것을 확인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1813년 2월 1일 "대혁명과 보나파르트 시대의 토지 처분을 수용하고 국유재산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법령을 발표함으로 프랑스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빈 회의에서 지지하고 프랑스 상원이 결의하여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어 루이 18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왕위에 즉위했다. 그러나 예전에 섭정을 자처했던 것과 왕세자의 죽음이 확실히 확인된 상태는 아니었던 거 때문에 루이 18세의 공식적인 지위는 일단 국왕이 아니라 섭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르나도트가 프랑스 황위를 노렸지만 빈 회의에서 의견이 갈렸고 외무장관 탈레랑과 프랑스 상원의 지지로 몇 달 후, 정식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후 자신과 손잡길 거부한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는데 나폴레옹을 아소르스 제도로 추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나폴레옹에게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약속된 200만 프랑에 달하는 연금 지급을 거부했고 나폴레옹의 개인 재산인 160만 프랑은 꿀꺽했다.(...) 거기에 수시로 암살자를 보내어 나폴레옹을 도발함에 따라 나폴레옹을 사실상 엘바 섬에서 끌어낸 장본인으로 보기도 한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남프랑스로 진군해오자 즉각 6만명의 토벌군을 파병했지만 되려 보낸 토벌군마다 항복하거나 소극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입법원과 국민방위대가 국왕을 지지했고 니콜라 우디노니콜라 장드듀 술트, 앙드레 마세나 등 나폴레옹의 원수들 상당수가 국왕에 대한 지지를 천명함으로 처음에는 걱정이 없어 보였으나 3월 16일 나폴레옹을 철창에 잡아 넣겠다고 호언장담한 미셸 네 원수가 오히려 나폴레옹에게 붙어버린 것을 계기로 전군이 무너져 나폴레옹에게 합류해버리자 결국 공포로 이성을 잃고 3월 19일 심야에 파리를 빠져나갔다. 나폴레옹은 다음날인 3월 20일 아침에 파리에 입성했다. 이후 국외로 다시 망명했으나 백일천하가 끝난 후, 다시 돌아와 프랑스 국왕으로 복귀했다.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에게 '''"당신이 프랑스로 돌아오려면 10만 명의 시체를 밟아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10만 명 이상의 시체를 밟고 돌아온 셈이 되었다(...).

3. 재위기간


루이 18세의 이후 치세는 민심의 수습에 중점을 두었다. 즉위와 함께 "나는 혁명 당시의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혁명 전의 아무것도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혁명 이전으로의 복귀를 예고하는 듯 했고 실제 망명한 귀족들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했지만 한편으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혁명 당시에 성립된 제도들의 존속을 약속하였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온건한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공화파에게 부모와 형제를 잃고 학대당하여 원한이 컸던 조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 공화파 및 보나파르트파들을 제거한답시고 저지르는 테러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만년이던 1820년, 조카인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5]이 자유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온건정책을 중단하고 절대왕정으로 회귀했다. 이는 루이 18세의 애인과 남동생 샤를 아르투아 백작의 정치 간섭을 불러 소위 적과 흑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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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9월 16일 자녀 없이 사망했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 지하묘실에 안장되었는데 프랑스를 통치한 국왕의 자격으로 매장된 사람은 루이 18세가 마지막이었다. 그의 뒤는 남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이 계승해 샤를 10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퇴위되면서 영국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그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해 생 드니 대성당에 묻히지 못하고 슬로베니아 노바 크리치아[6]에 묻혔다. 루이필리프나폴레옹 3세는 모두 영국 땅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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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사보이마리 조제핀(1753~1810)
사르데냐 왕국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세의 차녀로 개인 도서관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다. 아이를 가지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루이의 초고도비만 때문에 성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힘겨운 노력 끝에 마리 조세핀은 두 차례 임신했지만 모두 유산했고 이후로는 자식을 보기를 포기했다. 설상가상으로 1779년에 루이가 시녀와 바람이 나면서 부부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 결국은 루이가 외도를 끝내고 용서를 구했지만 정이 다 떨어졌는지 공식 석상에서 말도 걸지도 않을 정도로 남편을 싫어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에는 서로 다른 나라에서 별거했고, 말년에 들어서야 부부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루이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810년에 사망해서 정식으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

4. 평가


루이 18세가 반포한 헌장은 국민대표가 제정한 헌법이 아니라 왕이 국민에게 내리는 흠정헌법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왕정의 복구가 혁명 전의 앙시앵 레짐의 복구를 의미하지 않음을 보장하였다. 사반세기의 혁명이 이뤄놓은 것을 깡그리 없애버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헌장은,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 재능에 따르는 취업의 자유, 재산에 비례하는 납세, 관권의 자의적인 억압과 체포로부터의 자유, 종교와 출판 및 언론의 자유, 소유권의 불가침성 등을 보장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혁명정부가 교회와 망명 귀족에게서 몰수한 국유재산과 국민이 정부로부터 구입한 재산도 다른 재산과 마찬가지로 그 소유권이 보장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헌장은 나폴레옹 치하에서 국가가 국민에게 진 빚의 반제를 약속하고, 강제 징병제를 폐지하며, 나폴레옹이 멸시했던 정치적 자유의 문제도 해결할 길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헌장은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 이외의 어느 나라의 것보다도 가장 ‘리버럴’한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노명식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지만 잘 아는 사람들의 사이에서는 음험한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로 통했다. 혁명 전에는 형 루이 16세를 깎아내리기 위해 온갖 공작을 동원하였고 루이 16세가 처형당했을 때 가장 기뻐한 인물 중 하나였다.[7] 그래도 왕위에 오른 후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를 1815년 1월 18일 수습해 동년 1월 21일 역대 프랑스 국왕들이 잠든 생 드니 대성당으로 이장했다. 혁명기에 군중들이 생 드니 대성당에 매장된 왕족들의 묘소를 훼손했기 때문에 이를 복구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형과 형수를 포함해 왕족들의 묘소를 복구하는 것 이상으로 엄밀히 보면 왕권 강화와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점이 컸다. 거기다 프랑스 혁명 원인이된 삼부회 귀족 및 성직자 과세문제에서도 귀족들 기득권을 옹호하며 과세를 반대한 전력이 있다.
루이 18세의 복귀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친 탈레랑의 평가도 좋지 못했다. 탈레랑은 '''루이 18세는 내가 세상에서 본 사람중 최고의 거짓말쟁이다. 1814년에 내가 왕과 처음 대면했을때 느낀 실망감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가 루이 18세에게 본 것은 언제나 에고이즘, 둔감, 사치향락, 배은망덕 등 뿐이었다...'''라고 아주 대차게 까고 있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나폴레옹 몰락 이후 국왕에 즉위한 루이 18세가 넘어진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세워주기 전까진 일어서지 않겠다고 그대로 주저 앉아있었다고 한다. 탈레랑이 이 모습을 보고 위의 발언을 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다만 흔히 "시대 착오적 반동 꼰대" 정도로 폄하당하는 복고 부르봉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행적에서는 오히려 상당히 중도적이었고 앙시앵 레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를들어 18세 시대의 하원은 소선구제였기에 당연히(!) 왕당파로 도배되었으나, 상원은 왕이 임명하는 세습직임에도 불구하고 옛 귀족보다는 나폴레옹의 옛 관료 출신들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내각에서는 왕당파가 배제되고 중도적인 탈레랑이 수상에 임명되었다. 즉 루이 18세는 민중의 의지에 반대해서까지 의도적으로 중도를 걸었던 것이다. 심지어 열받은 왕당파 쪽에서 왕은 의회 다수파에게 내각구성을 위임해야 한다며 의회주권론을 주장하고, 이에 당황한 입헌파는 왕은 헌장에 위배되지 않는 한 마음대로 내각을 구성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아무튼 이러한 정파들을 배경으로 하여 1815년 8월 선거 결과 세상에 둘도 없는 극우 왕당파 의회가 출현했는데, 루이 18세는 극우파에서 대신들을 고르지 않고 중도적인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의회와 내각의 관계에 대한 기이한 논쟁이 일어났다. 왕당파가 의회 주권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왕이 의회의 다수파에게 내각 구성을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입헌파는 국왕은 헌장에 위배되지 않는 한 그의 마음대로 내각을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쪽이 왕당파이고 어느 쪽이 입헌파인지 분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왕당파의 주장이 오히려 더 ‘리버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장의 당리를 위한 논리에 불과하였다. 왕당파는 결코 의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의회의 다수를 발판으로 내각마저 점령하려는 당략에서 나온 가짜 의회 주권론이었다. 그런데 왕당파의 가짜 리버럴리즘은 의회 주권론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권자의 수적 확대와 지방분권을 지향하는 선거법 개정을 서두르기까지 했다. 그들은 유권자의 수효를 늘리면 지방의 이름 없는 귀족들과 그 지지자들의 의회 진출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리고 지방분권이 실현되면 나폴레옹의 관료 출신들이 아직도 많이 차지하고 있는 도지사들을 눌러서 지방 귀족들의 정치 세력을 키울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하였다.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노명식

이러한 면모로 인해서 동생 샤를 10세와는 달리 혁명의 급진성과 구체제의 수구성 사이에서 적절하게 중도를 추구하던 더 현명한 인물로 평가된다[8].

5. 매체에서의 등장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선 빌포르가 루이 18세를 만나서 보나파르트 당을 개발살낼 것을 건의하면서 에드몽 당테스도 겸사겸사 처리해버린다.
레 미제라블에선 이후에 루이 필리프 왕에 대하여 한장 가까이 할애하여 상세히 설명한 것과는 달리 특별한 언급은 없고 줄곧 프랑스의 왕으로 자처해온 그의 면모를 조금 엿볼 수 있다.
[1] 루이 18세 본인은 자신이 1795년 6월 8일 루이 17세가 죽은 이래로 줄곧 프랑스의 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재위 기간은 합쳐서 10년 정도이지만 이 양반 기준으로는 29년간 6개월 하고도 8일 재위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을 보면 1818년에 루이 18세가 자신이 재위 23년을 맞이했다고 으스댔다는 묘사가 있다.[2] 루이 15세의 장남[3] 공식으로는 앙주 공작이었고, 그 외에도 프로방스 백작, 멘 백작, 페르슈 백작, 세노슈 백작 등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최초로 받았던 작위인 프로방스 백작으로 주로 불리었다.[4] 다만, 나폴레옹이 왕당파로써 당연히 자신(부르봉 왕조)에게 왕위를 바칠 것이라는 확신(착각)에 빠져있다는 점에서는 몹시 오만한 편지이긴 하나, 내용 자체를 보면 최소한의 정세 파악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점에서 프랑스를 장악한 것이 나폴레옹이며, 그 자신은 나폴레옹의 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 따라서 왕위를 얻기 위해서는 나폴레옹과 그 동료들이 원하는 지위든 명예든 달라는대로 줄 수 밖에 없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기에 왕위를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그러다가는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고 결심을 요구하는 저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굳이 평가하자면 '거만한 태도로 하는 애원' 정도에 해당한다.[5] 샤를 10세의 차남이다. 루이 19세로 알려진 루이 앙투안은 샤를 10세의 장남이다.[6]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7] 심지어 일설에 의하면 형의 사형이 부결될까 걱정된 나머지 '''의원을 매수했다는 소문도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루이 16세의 처형 가결은 아슬아슬했기 때문에,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8] 이는 당시 프랑스 왕정이 처해있던 정치적 상황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첫 발자취인 프랑스 혁명' 에 대한 환상과는 정 반대로, 당시 프랑스에서 공화주의자들은 그다지 다수가 아니었고, 특히 유권자 계층 내에서는 오히려 왕당파(부르봉 왕조에 대한 호감을 가진 이들)의 비율이 더 높았기에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1위 정파의 과다대표현상이 일어나 왕당파가 하원을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프랑스 국내에서 왕당파의 정치적 세력 자체가 하원 의석 장악 비율만큼 압도적이었던 것은 아니고, 특히 비교적 수동적인 왕당파에 비해 공화파나 입헌파쪽은 집단적인 정치적 행동에 더 적극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이에 더해 고위 관직에서는 나폴레옹 시대에 임명된 입헌파 관료들의 비중이 높았던 것. 즉, 단순히 선거 결과(왕당파의 하원 장악)에만 고무되어 정말 왕당파를 중심으로 일방적인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다면, 도리어 공화파+입헌파의 강한 반발로 정치적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 당장 루이 18세의 동생인 샤를 10세가 결국 일방적이고 강경한 절대왕권 회귀를 시도하다가 공화파+입헌파의 반발을 못 견디고 자진퇴위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즉 루이 18세에게는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현실을 파악할 정도의 균형감각이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