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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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정신을 - 나는 보았다.
프랑스 제1공화국의 종신 통령,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나폴레옹의 생애는 1천 년 내 가장 비범한 생애였다. 나폴레옹은 분명 위대하고 특출한 인물로서 생애만큼이나 자질도 비범했다. 나폴레옹은 확실히 내가 본 인간 중에서 가장 대단했고, 우리 세대에 살았던, 아니 여러 세대 동안 살았던 인간 중 가장 놀라운 인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프랑스 공화국을 쿠데타로 집어삼키고 황제에 올라 혁명을 퇴보시켰다는 점에서 당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고 유럽 전부가 휘말리게 된 전쟁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 평가가 많지만, 코르시카 출신의 귀족으로 시작해 프랑스 혁명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통해 나폴레옹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며 당대 세계적 강대국들이 몰려 있던 유럽을 석권하고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된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다.
2. 상세
그는 카를 3세 이후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된 인물'''이며 그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했기에 그의 몰락 이후 유럽의 외교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인물이 다시 유럽을 집어삼키는 걸 막는가'''를 기준으로 진행될 정도였다.
사상적인 측면에선, 나폴레옹이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그 스스로가 갖춘 사상과 철학인 '''법치주의, 능력주의, 시민평등사상'''을 온 유럽에 퍼트렸고, 나폴레옹 법전 등 여러 업적을 남겨 세계사에 한 획을 그었다. 기본적으로 근대 세계는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해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끝난 정치 혁명 그리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야기한 경제구조의 대변혁이 어우러져 완성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당대 최고의 군사 전략가로서 프랑스 육군의 모든 부분을 전반적으로 선진화시켜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주역이었다. 이후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나폴레옹을 따라 군제를 개편한 만큼 사실상 전쟁사의 근대를 완성시킨 인물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개인으로서 세계사의 변혁을 이끌어낸 인물이며 유럽이 18세기 시민혁명시대에서 19세기 제국주의적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풍미한 인물이었다. 한국에서도 그의 유명세 덕에, 설령 프랑스 출신 인물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잔 다르크와 나폴레옹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정도다.
3. 이름과 언어
프랑스어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나파르트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고, 나폴레옹이 이름이다. 이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전체 이름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으로 표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다만 서적 등에서는 보나파르트로 적는다. 아마도 이름 + 성 구조의 서양식 작명을 몰라서 그랬거나 황제가 되면서 이름인 나폴레옹으로 불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유럽 군주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이름이 왕명이 되고 성은 왕조의 명칭이 되기 때문이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당대에 보나파르트라고 불렸다.
이탈리아어 이름은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Napoleone di Buonaparte).[5] '나폴레오네'로 쓰든 프랑스어인 나폴레옹으로 쓰든 이름의 뜻은 '황야의 사자'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이름을 코르시카 사투리로 발음하면 ‘라파이유 오네’(코가 없는 사람)로 들려 많은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이름은 나름 멋지지만, 성 부오나파르테(보나파르트)는 게르만족 롬바르드족의 성씨 보니파르트가 어원으로써 영어로 하면 Good Part(좋은 부분)라는 뜻이다.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나파륜(拿破崙)[6] 이라고 표기한다.
프랑스 황제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옹 1세. 프랑스 제국의 황제위 요구자들 또한 '나폴레옹 ~세' 라는 명목상의 칭호를 대대로 쓰고 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의 칭호는 나폴레오네 왕인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여러 이탈리아계 국가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나폴레오네였기 때문에, '나폴레오네 2세' 라는 이름의 군주가 배출되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탈리아에서의 칭호가 '나폴레오네 1세' 가 되는 일은 이탈리아의 군주제가 부활하지 않는 한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출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이탈리아계로, 그의 모어는 코르시카어였고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는 학교에서 배웠다. 촌구석이긴 해도 어쨌든 프랑스의 귀족이었으니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는 외국어였고 코르시카어 억양이 묻어나는 탓에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4. 생애
5. 평가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앨리스터 혼 (영국의 역사학자)
아돌프 히틀러와 동급의 악한으로 보는 학설에서부터 전쟁 빼고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로 뽑히는 학설이 나올 정도로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시각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며 이는 그만큼 그가 인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문제적 인물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복잡한 평가는 그가 '근대의 인물'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쾌하게 군대 끌고 적군을 신나게 쳐부수면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고대, 중세, 근세와 달리 근대서부턴 훨씬 복합적으로 역사적 인물들을 평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19세기의 아돌프 히틀러에 불과하다...대중의 일반의지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한 개인이 대표할 수 있다는 믿음의 최상 위에 올려놓은 것이 황제(L'Empereur)냐, 영도자(Der Fuehrer)냐의 차이 정도일 뿐이다...그에 비한다면 최후까지 프랑스 공화국의 집정관으로 공화주의의 테두리 하에서 행동했고, 황궁은커녕 일개 하숙집에서 숙식했던 로베스피에르가 황제 폐하만큼이나 야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That Sweet Enemy: Britain and France: The History of a Love-Hate Relationship, Robert Tombs, Isabelle Tombs 공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를 다룬 TED 강의.
5.1. 영웅 또는 전쟁광
현대 프랑스에서는 국가의 영웅이라는 찬사[7] 와 나라를 전쟁으로 이끈 전쟁광이라는 비난, 두 시각이 공존하고 있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래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봉건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종식시킴과 동시에 프랑스 혁명 이후 극도로 불안정했던 프랑스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근대 유럽의 시작'''을 알리며 시대의 흐름을 넘어 미래를 내다본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만든 '''나폴레옹 법전'''으로 현재도 대륙법 체계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 법률 체계는 고대로부터 잔존한 로마법의 잔재를 기초로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는 교회법이나 지방의 관습법이 통용되고, 거기에다가 왕이 공표하는 칙령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단지 복잡하기만 한 게 아니라 너무나 방대하고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걸 전부 다 나폴레옹 법전 한방으로 '''완전히 갈아엎어 버렸다.'''[8] 또한 이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으로 절대왕정의 요람이던 유럽에 시민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나폴레옹 법전'은 현재 '함무라비 법전',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편찬된 '로마법대전'과 더불어 '세계 3대 법전'으로 불리고 있으며, 나폴레옹 본인도 '''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에 걸친 전쟁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민법전을 말살할 수 없는 데 있다.' '''라며 한때 전 유럽을 군사적으로 제패한 것보다 '나폴레옹 법전' 편찬을 더욱 자랑스러워 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특히 민법)의 구성과 기본 논리는 모두 나폴레옹 법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관료제를 확립하고[9] ,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근대적 엘리트 육성 교육제도인 그랑제콜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국내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 지적법(Napoleon's Cadastre)을 제정하여 토지 측량 및 관리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근현대적인 지적 측량 및 부동산 등기 체제의 효시를 세웠다. 또한 현대 정치 체제의 근간인 '''정교분리''' 역시 나폴레옹 시대에 비로소 완전히 확립된 것이다.
군사 면에서도 기동력을 중시하고 국민군의 전투력을 애국심의 고취로 끌어올리는 등 19세기 전쟁의 개념과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도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즉 단순히 잘 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개념과 방식 자체를 바꿔 버린 인물이라는 것.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대륙봉쇄로 물가를 최고점[10] 으로 끌어올리는 등의 결과로 당시 최강국으로 성장했던 영국을 얼어붙게 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영국의 경제력은 동원 가능한 재원 기준 나폴레옹 프랑스의 거의 10배에 가까웠다. 쇼미더머니를 치고 끝까지 나폴레옹을 잡으려고 든 영국의 경제력이 사기였던 것...
그의 몰락을 기회삼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등 유럽의 구세력들은 유럽을 프랑스를 혁명 이전의 구체제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폴레옹 몰락으로부터 한 세기 만에 나폴레옹의 비전은 대부분 실현되고 유럽 대부분 국가의 왕정, 제정 체제는 붕괴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도입한 법률과 제도 역시 워낙 각 국가들의 사정에 잘 맞게 짜여져 있던 까닭에 나폴레옹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안달이던 그의 정적들조차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폴레옹이 근대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폴레옹의 역사적 위치는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어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간다는 영웅사관을 창시할 정도였다. 즉 한 사람의 어마어마한 존재감 때문에 역사를 보는 관점마저 영향을 받은 것.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동안 불리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자유 제국"을 약속했었다. 짧은 지배기간 때문에 사실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몰락 이후 '''"내가 그런 헌법 만든다고 시간이나 낭비했다니! 어차피 다시 유럽의 지배자가 되면 전부 없애버릴 의회였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약속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황제"라는 하나의 환상을 추가하게 된다. 특히 부르봉 왕조 복고 왕정의 무력함과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퇴행성은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고 결국 군국주의와 민족주의, 자유주의, 혁명과 일인 독재가 결합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프랑스 특유의 기묘한 정치사상을 만들게 된다.[11] 그 과실을 나폴레옹이 죽은 이후에 조카 나폴레옹 3세가 획득하게 되지만 나폴레옹 3세의 실패로 보나파르티즘도 결국 종말을 고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내 계급과 출신 배경에 따른 봉건적 사회적 차별 관계를 '''시민 개병제를 통해 평등하게 만들고'''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회적 비전을 '''강력한 일인 군사 독재자의 권위를 통해 이룩하자'''는 얼핏 보면 진보적이면서도 그 방법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인 정치적 풍조는 19세기, 20세기 들어 유럽, 나아가 세계사 전반에서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왔다. 당장 유럽 내에서는 20세기 전간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를 비롯한 중동부 유럽의 군사 정권과 한국의 박정희나 장제스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소위 스트롱맨 군사 독재자들의 예로부터 근대 세계사 속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풍조로서 굳어졌음을 볼 수 있다.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초기의 공화정이나 무기력하고 퇴행적인 부르봉 왕조의 복고 왕정과 비교해보면, 나폴레옹 시대는 문제도 많았지만 분명 영광과 번영이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번영은 무수한 전쟁을 통해 주위 나라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며 일구어낸 것인 만큼 무작정 칭송하기는 곤란하다. 나폴레옹이 법전의 완성을 위시하여 여러 선구자적 정책들을 도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난맥상은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것들이었다. 결국 정부 재정의 문제나 당대 사회의 혼란들을 해결한 것은 그런 선구자적 정책이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승리였다. 그 승리가 계속되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보였지만, 지속적인 전쟁은 착실히 국력의 소모를 불러왔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너무나 쉽게 몰락했다.
5.2. 군사적 능력
그의 전술적 능력은 동시대 인들의 수준을 몇 수나 앞서 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그의 용병술을 분석하고 모방하기 바빴다. 군재(軍才)만 놓고 보면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인물이며[14] , 그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의 강국(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스웨덴, 러시아 등)들은 7차례에 걸친 동맹(대프랑스 동맹)을 해야만 했다. 애초에 유럽은 지리적 역사적 배경 및 인종 구성 등 다양한 요인들 때문에 하나의 절대 강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가 매우 매우 어려운 대륙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오늘날까지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패권을, 그것도 사실상 혼자 힘으로 구축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군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말년의 아서 웰즐리에게 한 기자가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공작님은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이겼는데, 공작님의 군사적 재능이 나폴레옹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웰즐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언제라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일 뿐이오."("In this age, in past ages, in any age, Napoleon.")'''[13]
포병장교는 수학적 계산능력과 탄도학 등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똑똑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인재들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포병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그 엘리트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그랑제콜 중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부터가 원래는 프랑스군 포병장교 양성기관이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포병 장교들이 혁명이 발생하자 외국으로 망명했지만 나폴레옹은 드물게도 프랑스 대혁명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군사 유년학교와 사관학교를 거치며 제대로 훈련받은 엘리트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함이 없었기에 병사들 사이에서의 인망은 대단했다. 실제로도 나폴레옹은 평생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휘하 병사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거의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는 엘바 섬을 탈출했을 때 그를 잡으러 간 군대가 오히려 힘차게 랑펠로를 외치며 그의 휘하로 흡수된 사건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포병장교 출신이지만 나폴레옹의 전술은 포병/기병/보병의 환상적인 조화와 협동을 이용한 것이 그 진수였다. 포병이 먼저 공격하고 기병이 치고 빠지며 유린하고 최종 타격으로 보병이 결정타를 날리는 전술을 선호했고, 이를 위해 병과 간의 칼로 잰 것 같은 타이밍 맞추기를 매우 중요시했다.
나폴레옹이 익힌 이러한 군사 기술과 제병 합동 전법의 재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거기다 사기 또한 높았던 혁명기 프랑스의 병참 제도 하에서 카리스마를 갖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대육군은 당시 유럽에서 당해낼 장군이 어디에도 없었고 이는 나폴레옹의 적들도 인정했다.
전술도 전술이지만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진정으로 돋보이게 하는 건 전략 및 작전술에서의 능력이다. 애초에 현대적 의미의 작전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립한 것은 나폴레옹인데. 작전술이란 <전략지침에서 제시된 군사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일련의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하며, 전술적 수단들을 결합 또는 연계시키는 활동>으로 쉽게 설명해서 전략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술들을 결합하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 손자병법의 이상적인 조건인 '이겨놓고 싸운다'를 누구보다도 잘 실천한 사람이다. 즉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 부대를 빠른 속도로 이동시켜 유리한, 원하는 장소에서 적보다 많은 병력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에 무서울 만큼 집착했고 또 잘해낸 것이 나폴레옹이 거둔 수많은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사실 그 전에도 당연히 병법에서 굳이 아군이 적군보다 적은 수인데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적을 분리시켜서 아군보다 적은 단위로 만들고 각개격파하는 걸 이상적인 상황으로 상정하긴 했다. 이를테면 명나라의 10만 원정군이 4길로 나뉘어서 진격해오는걸 보고 4만에 불과한 후금 군대가 바로 각개격파한 것처럼, 기회를 날카롭게 포착하고 과감하게 움직일 줄 아는 지휘관들은 이런 전술을 애용했다. 다만 나폴레옹은 단순히 적군이 알아서 분리되었을 때 바로 기회를 잡는 수준을 넘어서서 연락책, 기만책, 병참술 등 온갖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적군을 순식간에 자기 의도대로 분리시키고 틈을 만들어내고, 아군은 유인을 위해 흩어졌다가도 또 결전이 필요한 순간에는 바로 결집해서 각개격파를 하는 기술을 매우 잘 선사했다.
특히 나폴레옹의 병참술은 단순히 뛰어난 수준을 넘어서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에 가까울 정도였다. 과거로부터 이어지던 현지 징발의 방식으로 시작해서 보급소와 분배소를 설치하고 수송수단을 도입하면서 상설보급이 가능하도록 했다.
나폴레옹이 한 말로 알려진 "폐하께서는 항상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병력을 이기셨습니다."라고 부하가 감탄하자 "아니다. 나는 (내가 싸우는 곳에서는) 늘 다수의 병력으로 소수를 이겼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사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대프 연합군에 비해 처음부터 수적 우위를 차지한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그의 능력으로 인해 직접적인 교전 상황에서만큼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수적 우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대군(大軍)에는 병법이 필요없다'라고 할 정도로 수적 우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유럽 역사상 손꼽히는 난세였던 만큼 명장도 많았으며 당대에 전술적인 면에서 나폴레옹과 붙어볼 인물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웰링턴 공작, 카를 대공 등). 하지만 전략과 작전술에서는 그를 따라갈만한 인물은 사실상 없었다. 심지어 그가 완전히 몰락하고 건강마저 잃었던 백일천하 때조차, 전략 및 작전술 단계에서는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웰링턴마저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낚여 허겁지겁 병력을 집결했을 정도.[15]
하지만 결국 패배한 워털루 전투의 패배 요인은,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병과간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인기 있는 분석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지병인 치질이 악화되어 하루 종일 엎드려 있어서 잠도 자지 못하여[16] 정상적인 지휘가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란, 뮈라, 마세나, 베시에르, 베르티에, 모르티에, 다부 등 나폴레옹을 보좌했던 오랜 측근들이 전부 빠졌다. 워털루 전투 시점에서 란, 베시에르, 베르티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뮈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몰락에 기여한 전력 때문에 합류를 거절당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에 합류하길 거부했고 모르티에는 신경통으로 쓰러졌으며 다부는 마르몽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뼈아프게 남은 탓인지 전쟁장관직을 맡겨 파리에 남겨두었다. 이런 여러 악재로 인해 기병과 포병이 따로 놀게 되어, 기병은 사지로 돌격하고 포병은 같은 편의 기병에게 포격을 가하는 촌극이 연출되었다. 기병대를 맡은 미셸 네는 포병과의 협력 없이 혼자 돌격해서 기병을 격파하고 에마뉘엘 그루시도 나폴레옹이 원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싸우는 등 난장판이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참모장이었던 술트는 참모로서의 재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프로이센군을 추격, 섬멸하는 임무를 맡은 그루시는 처음부터 원수감이 아니었다. 사실 그루시만 정상적으로 움직였어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압승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전장은 여러 해프닝은 있었지만 나폴레옹이 짜놓은 판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웰즐리조차도 이거 우리가 당했다라며 멘탈을 잃기 직전이었다.
기병을 지휘한 네는 용맹하고 성실한 장군이었지만 기병의 천재였던 뮈라와 달리 기병 운용능력이 평범했다. 뮈라는 지성은 보잘것 없었지만 언제, 어디로 기병대를 돌격시켜야 할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어 기병 지휘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면 네는 일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전략적인 판단능력은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워털루 당시의 네는 이중 배신을 한 입장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아무리 나폴레옹이 제대로 활약을 못했다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뮈라가 나폴레옹의 기병을 다뤘다면 오히려 프랑스가 이겼을 거라는 의견이 큰 힘을 얻고 있다. 사실 워털루 전투에서도 끝내 주요 요충지를 함락시켜 아서 웰즐리가 후퇴를 고려하고, 나폴레옹은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상황까지 갔으나 그루시는 오지 않았고, 반대로 블뤼허 장군의 증원이 있었던 영국군에게 패했다.
나폴레옹은 이런 군사적 업적을 쌓기 위해 건강을 희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토막잠 전설에서도 알 수 있지만, 군무로건 공부로건 소싯적부터 워낙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며 과로하는 스타일이었으며 성장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과민 증세도 있었다. 또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절대적 신임을 받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당시 병영 생활이라는 것이 원체 개판이었던지라 열병, 위궤양과 탈장, 치질 등의 여러 가지 병을 앓아 사관학교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소년 장교 시절부터 내내 아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체질적으로 위가 안 좋았던 모양이다.[17]
한편, 해군 및 해전 쪽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해군 장교들에게 육군식 명령 체계를 강요하는등, 해군 쪽 인사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18]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린 시절의 나폴레옹은 사실 해군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통해 만든 '신무기'에는 큰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소리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등장한 그 '신무기'들 중에는 몽상가들의 장난감 수준이 아니라 이후 전쟁의 개념을 크게 뒤바꾼 장비들도 있었음에도 말이다. 한 예로 미국인 발명가인 로버트 풀턴이 기초적인 수준의 증기선, 잠수함을 소개하며 이것으로 영국 해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나폴레옹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19] 1782년 개발되어 정찰용 등으로 군에서 시험용으로 사용하던 비행 기구에 대해서도 단순한 유흥거리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다만 보존이 용이하고 휴대가 간편한 전투식량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최초로 병조림을 도입하기도 하였고, 훗날 통조림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보면 보급 부문은 모르겠으되 자신의 특기인 전투분야와 그에 사용되는 장비에 대해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이는 결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신무기가 제대로 된 야전운용 적합성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과 개선이 필요하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받아들이지 않은 무기들은 정석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후 50년(일부는 100년)에 이르는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유지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언제 상용화될지도 모르는 신무기보다는, 다른 데다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할 법 했다. 한정된 예산으로 최적의 편성을 하기 위해서는 무기의 성능 뿐만이 아니라 신뢰성과 병참이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무기는 실전이나 충분한 시험 운용으로 검증되기 전에는 신뢰하기 어렵고 대량 생산이 확정되어 단가가 낮아지기 전까지는 병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군다나 신무기에 대한 훈련도까지 합치면 비용이 장난이 아니게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전술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쓸모가 없었다. 중국의 양무 운동이 좋은 예인데 아무리 신병기를 만들고 가져왔다고 한들 무기는 아무리 개발을 해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병기 생산에 훈련까지 합치면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기에 차라리 어느 정도 위력이 있고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는 구식취급 받는 무기가 오히려 더 쓸모가 있을 수 있다. 증기선은 외륜이 피격되기 쉬운데다 일단 외륜이 피격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으므로 스크류 추진장치가 발명될 때까지 주력으로 쓰이지 못했다. 로버트 풀턴은 나폴레옹에게 차이고 이번엔 영국으로 갔는데, 거기서도 제대로 된 실용성이 없단 이유로 물 먹고 신기술에 목말라 헤매던 미국에 가서야 어느정도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프랑스가 1850년 마침내 증기 전열함을 도입하여(재밌게도 이 증기선의 이름은 "나폴레옹 호"였다) 일시적으로 영국에 쇼크를 주긴 했지만, 영국인들은 금세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증기선을 양산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해군 전력비는 더 벌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잠수함은 전략적으로 유의미한 병기가 되려면 증기선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열기구 역시 여러가지 약점 때문에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실전에서 정찰용으로 쓰기도 어려웠다. (어딘가의 얼리 어답터랑은 확실히 다르지) 링크
게다가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다른 장교들도 전부 그런 신무기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 발명된 신무기가 몇 년만에 바로 전장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는건 산업혁명 이후인 19세기 후반부터나 현실화되기 시작한 일이고,[20] 그 이전엔 기술의 발전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당장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막 임관하던 신참 장교 시절에서부터 그가 퇴역하는 워털루 전투까지 20여년 전장에서 구르는 동안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은 신병기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고, 기존 병기들에 아주 약간의 성능 개량만이 있었다. 하물며 신무기의 개발 속도가 상당히 빨라진 이후로도 신무기의 가치에 대해 일선의 장교들이 무시하는 경향은 굉장히 빈번했다. 이를테면 1차대전 시기 장군들은 항공기를 그다지 고평가하지 않았다. 당시엔 항공기를 이용한 직접적인 타격 효과는 미비했으며 보조적인 역할에 그쳤기 때문. 항공 폭격이 전술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건 제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최소 20~30여년 후의 일이며, 당장 전투를 해야 하는 장교들은 해당 시점에서 눈에 보이는 효과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근미래에 굉장히 강력해질 거란 가능성을 파악한 장교들도 몇 명 없었고, 그런 가능성을 파악했다한들 당장 내일의 전투와 이번 전쟁의 결과엔 아무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신무기가 언제든지 전장을 뒤집을 수 있으니 항상 긴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개념이 장교들에게 안착된 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5.3. 꼬마 부사관(Le Petit Caporal)
나폴레옹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웰링턴 군대에서도 '나보(나폴레옹의 별명)가 프랑스 놈들과 함께 있으면 4만 명의 군대와 맞먹는다.'고 논평했을 정도였다니 당대에는 인정받았던 이야기이다. 심지어 나폴레옹 이후 빈 체제를 정립한 메테르니히조차 "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매혹당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로르 쥐노의 증언에 따르면 목소리가 상당히 근사해서 연설할 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한다.[21] 확실히 다른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만큼은 정말 엄청났던 것 같다. 또한 황제가 되기 전에 보여준 정치적 행동들을 보면 자기 PR에도 역시 천재였다.
나폴레옹이 사람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있다.
참고로 이 일화는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작성하며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수행원으로 데려온 소령의 계급장을 떼서 손수 달아줬다는 말도 있으며, 장교의 계급이 소위로, 복무 기간이 5년으로 바뀌고, 나폴레옹은 그에게 "나도 7년 동안 소위였는데 이 자리까지 올랐다. 너무 불평하지 마라."하며 타이르는 식으로 와전된 내용도 있다.[22]
공훈을 세우거나 성과를 낸 부하에게는 아낌없이 칭찬을 하였으나, 잘못을 한 자에게는 무자비하게 갈굼을 시전하였다. 이는 사람이 많은 장소나 손님이 와 있는 자리에서 더욱 심했는데, 나폴레옹은 다른 이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장소를 택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그 질책했던 부하를 다시 불러서, 전날 자신이 그런 의도를 설명하며 친근하게 달랬다.
초병의 중요성은 총사령관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이다. 더불어 지친 병사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미지로 장병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조지 워싱턴도 비슷한 일화를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배치된 군을 시찰하면서 병사 및 하급 장교들을 일일이 만나며 신상명세를 확인해 주고 고충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나다니 오랜만이네. 자네는 지난 이집트 원정 때 피라미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용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훈장을 받지 못하다니 내 잘못이네. 당장 훈장을 수여해 주겠네!" 하는 식. 이 덕분에 장병들의 사기 및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도는 크게 올랐다.
물론 나폴레옹이 처음부터 이런 내용들을 기억했을 리는 없고 사전에 장병들을 뒷조사했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 장병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인망이 높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의 이런 행사가 진정성을 얻긴 힘들었을 것이다. 원래부터도 군대의 신임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벤트도 효과가 있을 수 있었던 것
장 란 원수와는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는데, 직설적인 편이었던 란 원수는 황제에게 화가 날 때마다 "내가 저런 매춘부에게 애처로운 열정을 품었으니 죽어도 싸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슬쩍 자리를 피한 뒤, 그 다음 날이면 언제 싸웠냐는 듯 사근거렸다고 한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엉덩이에 입이라도 맞추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23]
조아킴 뮈라 원수와도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다. 조아킴 뮈라는 185cm에 달할 정도로 키가 컸으며 '''힘은 엄청 장사'''라 나폴레옹이 맨 처음 출세하게 된 계기가 된 왕당파, 즉 부르봉파의 반란을 진압할 때 '''혼자 대포를 짊어지고 뛰었을 정도'''로 괴력을 갖고 있었다. 뮈라는 나폴레옹 측근 중에서도 눈에 띄게 용맹하여, 각종 전투에서 작전을 성공시킨 공로는 물론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한 적도 많았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여동생 카롤린을 뮈라의 아내로 내주었다. 무엇보다 뮈라가 왕 하고 싶다니까 나폴레옹은 바로 나폴리에서 왕 노릇 잘 하고 있던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돌연히 스페인으로 옮겨버리고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봉해줬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측근 서열에서 뮈라를 자신의 형보다도 우위에 뒀다. 이 정도면 말 다했다.
정작 나폴레옹이 뮈라를 좋아해서 뮈라에게 시집보낸 그 여동생 카롤린은 뮈라에게 자신의 오빠를 배신하고 오스트리아로 붙으라고 꼬드겼다. 나폴레옹 자신은 뛰어난 군인이자 군주였으나, 그 집안은 이토록 콩가루였던 것이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끝난 직후 승장인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을 찾아왔다. 승리를 치하하는 나폴레옹에게 다부는, 자신의 피는 나폴레옹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인정해주시고 따뜻함을 베풀어주시는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후에 다부는 이날의 공로로 아우어슈테트 공작이 되었다.[24]
베두아예르 남작이 아들 이야기를 하면서 나폴레옹을 즐겁게 한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이자 자신의 휘하 원수 중 하나였던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대할 때 프랑스군 원수가 아닌 폴란드의 왕으로 대우해 줬다.''' 비록 포니아토프스키가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 운동을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 폴란드를 되찾아주겠다고 했으며, 포니아토프스키를 항상 폴란드 왕이라고 불렀으며, 프랑스 군 내부에서 자신과 똑같은 의전절차로 예우해 줬다. 이에 감동받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서라면 죽을 힘을 다했고, 결국 나폴레옹을 위해서 죽었다.
라스 카즈의 회고록에는, 세인트헬레나 유배 시절 나폴레옹을 수행한 시종들이 나폴레옹의 총애를 다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대놓고 "내가 자네들 아내도 아니고, 자네들과 내가 잠을 잘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투덜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백일천하 항목 참조. 영화 워털루와 프랑스 드라마에서 재현한 장면[25]그르노블로 진군하던 나폴레옹의 병력이 길가에 제5보병연대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지역 주민들은 "신경쓰지 마세요. 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으나 측근들은 좀 걱정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우리가 속았는지도 모르겠군. 뭐 상관없지, 전진!"이라는 말과 함께 맨 앞으로 나아가 제5보병연대를 정면으로 바라본 뒤 이렇게 말했다.
"제 5 보병연대여! 짐을 알아보겠는가?"
"예, 폐하."
"짐이 자네들의 꼬마 부사관(별명)이다. 자네들 중 짐을 쏘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여기 짐의 가슴이 있다!"
이에 병사들이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백색 휘장을 떼어내고 황제의 손을 만지기 위해 달려나갔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이제 혼자 남겨진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나아갔다.
"무슈 레자르, 짐은 자네를 잘 아네. 자네를 대령으로 만든 것이 누구인가?"
"바로 폐하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 자네를 중령으로 만든 것은 또 누구인가?"
"그 역시 폐하입니다."
"그러함에도 자네는 짐과 싸우기를 원했는가?"
"저는 그저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레자르의 칼을 돌려주고 항복한 제 5연대를 규합해 그르노블로 전진을 재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폴란드 원정 중 폴란드에서 보급에 징발까지 제대로 안 돼서 프랑스 병사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런데 병사 중 하나가 용감하게도, 대열 옆을 지나가던 나폴레옹을 향해 폴란드어로 "Papa, kleba!(아빠, 빵 주세요!)"하고 외치자 나폴레옹도 폴란드어로 "Nie ma!(없어!)"하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병사들은 빵 터져서 불만이 좀 수그러들었다.
이 일화는 나폴레옹의 시종인 콩스탕의 회고록에서 나온다.
나폴레옹이 병사들이 끓인 수프로 함께 식사를 하려는데 머리카락이 나오자 슬쩍 치우고 다 먹은 후 한접시 더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접시에서도 머리카락이 나왔다고... 이 역시 콩스탕의 기록이다. 이 밖에도 나폴레옹은 종종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한 일이 있었다. 당시 장교들이 병사들과 겸상을 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뭔가를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금기시되어 있었다.[26] 즉 나폴레옹이 스스럼 없이 병사들의 식사 자리에 어울리며 그들의 음식을 함께 먹은 건 굉장히 파격적인 행위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려다 영국 해군에게 걸려서 전열함 벨레로폰에 탑승하여 잠시 이곳저곳을 떠돌게 되었다. 배의 선원들은 '코르시카의 괴물'로 불리던 그를 보고 처음에는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이윽고 황제의 아우라에 감화되어 그가 갑판에 나올 때마다 진심으로 존경를 표하며 인사를 했다. 나폴레옹은 해병대원들을 직접 사열해보기도 하고, 영국식 집총자세와 프랑스식 집총자세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머스켓을 들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황제가 병사들과 격식 없이 어울리는 것을 본 영국인들은 "저 분은 항상 저러시냐?"며 매우 놀라워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가기 직전 플리머스 항구에 잠시 머물게 됐다. 그런데 황제가 플리머스에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를 보려고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측근들은 영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라도 할까봐 걱정했지만, 대중들은 갑판에 등장한 황제를 향해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하고, 환호를 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바로 전날 밤, 나폴레옹은 밤에 자는 병사들이 깰까봐 횃불 하나 없이 시찰을 돌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자신들의 텐트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본 일부 병사들이 짚으로 횃불을 만들어 나폴레옹을 보러 나왔다. 이렇게 병영이 어수선해지자 다른 부대원들도 횃불을 들고 황제의 모습을 보러 나오는 통에 나폴레옹의 주변은 수많은 병사에게 둘러싸였다. 그때 누군가가 '오늘이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지 1주년 되는 날이다!' 라고 소리쳤고[27] 이윽고 병사들은 '황제 폐하 만세!' 를 외쳐댔다. 이 광경은 건너편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진영에서도 보였다고 기록되었다. 나폴레옹도 훗날 이 일화를 '내 일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감격스러워 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우린 뙤약볕 아래 골프주앙에 상륙했소. 굉장해. 황제 폐하가 가는 어디든 사람들이 달려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오.
황제 폐하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들도 그를 보자 감동에 못 이겨 우리와 합류했네. 황제 폐하를 따라 전투에 임할 것이오. 황제 폐하 만세! 프랑스여, 영원하리라.
-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까지 갔던 44세의 근위대원 피에르 랑텔름이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했다.
친근감의 표시로 상대방의 귀를 비틀어 꼬집는 행동을 했다. 사적으로 친한 사람이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만 해주던 거라서, 이걸 당한(?) 사람들은 그 자체를 영광으로 인식했다.#
여러 일화에서 나폴레옹은 부사관으로 불린다. 장교인데 왜 부사관이냐 하면, 당시 유럽의 육군 유년 사관학교나 사관학교의 생도들은 생도 계급이 따로 있던 게 아니어서 상병이나 병장 등의 병 계급으로 훈련을 받았는데, 나폴레옹은 그게 별명으로 굳었기 때문이다.
5.4. 외교력
나폴레옹의 몰락은 결국 전 유럽을 적대하게 만든 것이 원인이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외교 능력에 대해 혹평하기도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따지자면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적대한 것은 나폴레옹 개인의 성향에서 불거진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프랑스 자체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이래로 절대주의 왕정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전 유럽의 구체제와 사생결단을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은 어디까지나 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을 계승한 국가였고, 전쟁을 통해서라도 절대왕정을 분쇄하고자 했던 프랑스 제1공화국의 이념과 외교 구도를 계승했으며 주변 국가도 그렇게 인식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1)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공화국과 그 공화국을 승계한 자신의 프랑스 제국이 기존 유럽 질서와 화해하는 것. 2)유럽 질서를 프랑스의 주도하에 재편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도 통령 취임 직후 계속 화해를 시도했고, 실제로 아미앵 조약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내었다.[28] 그런데 화해조약이 아직 유효하던 중에서도 영국은 구 부르봉 왕족들을 계속 후원하고 나폴레옹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으며, 나폴레옹에게 접근하는 러시아 제국의 궁정혁명을 지원 또는 방조하여 러시아의 반(反)프랑스 정책을 고착화시킨다. 이후의 일이지만, 프로이센과의 관계에서도 나폴레옹은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 했고,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히는 러시아 원정조차도 러시아 제국과의 화평을 계속 시도한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차적인 문제는 영국의 대륙 정책에 있었다. 해상대국으로서 당대 최강을 자부하던 영국으로서는 덩치는 크지만 후진적이고 아직 경제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러시아, 약소국으로 추락한 스페인, 자기들이 보기에는 지역 강국들의 군집체에 불과한 오스트리아,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지만 아직은 체급이 안되는 프로이센이나 다 망해가는 오스만 제국은 경계할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3천만에 육박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당대 유럽 문명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던, 게다가 기존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까지 확보한 프랑스라는 강적이 유럽 대륙의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허용할 수 없었다. 프랑스가 유럽 대륙 전체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가공할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영국과 맞서게 된다면, 영국으로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던 것. 실제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행해진 대륙 봉쇄령에 의해서도 영국이 겪은 고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29] 이러했으니, 안 그래도 강력한 적수인 프랑스에 나폴레옹 같은 무서운 녀석까지 나타난 상황을 영국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은 자신들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 대륙을 고만고만한 강국들이 병립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구도로 유지해야 했는데 그 균형을 깨뜨릴 유일한 잠재력을 지닌 프랑스, 그리고 그 프랑스를 이끌어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지도자라면, 나폴레옹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즉 나폴레옹이 아닌 누가 지도자가 됐더라도 (그리고 어떤 외교적 노력을 기했더라도) 영국은 프랑스를 몰락시키려 들었을 것이다.
또한 유럽의 다른 제국들에게도 프랑스 제국에 의한 유럽 질서 재편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할 사태였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세력에 의한 구(舊)질서의 붕괴라는 당대 기준에서는 묵시록적인 사태의 실현이었고, 그런 프랑스 제국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국 내에 있던 시민 세력들에게도 왕조 타도의 명분을 쥐어주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나폴리, 네덜란드, 베스트팔렌, 스웨덴, 나아가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트 일족이나 그 인척들을 왕으로 앉히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방식도 반감을 샀다. 물론 그건 원래 타오를 불에 기름 끼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나폴레옹 개인의 실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이러한 복잡한 국제 사정을 잘 인지했고 이를 충분히 고려한 결정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화려한 승리의 결과 자신과 프랑스 제국의 역량을 과신하게 된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정립된 프랑스군 특유의 현지 보급 및 프랑스 제국의 경기 회복을 위한 가혹한 배상금과 무자비한 약탈 정책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가 바로 훗날 프랑스의 원수가 되는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기본적인 약탈로 1000억원대의 손해를 입었는데 2조 가량을 합법적, 공식적으로 뜯겼고 결국 프랑스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을 구체제를 타파하고 자유를 전파하는 영웅으로 환영하던 주변 나라의 시민 세력들이나 학생들이 결국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에 군주로서 그렇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자신의 형, 동생과 친척들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앉히는 무리수를 감수했던 것도 한몫 했다. 이런 짓을 시도하다가 당초 프랑스 제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도 결국 적으로 만들어버렸고,[30] 러시아 원정은 그런 나폴레옹 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낙하산으로 왕 자리에 앉힌 친인척들이 능력이 뛰어나고 선정을 펼쳤으면 유럽 대륙이 하나의 프랑스 체제로 단결해 기능하면서 나폴레옹의 시대도 연장되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래도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럽의 각국은 문화와 민족구성 상 워낙 개성이 강한 나라들이다), 애초부터 나폴레옹이 제대로 지원도 안 하고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조제프 보나파르트나[31] 네덜란드 시민들에게도 호평받았던 루이 보나파르트 정도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능력 없고 부패한 인물들 투성이어서 해당 국가의 사람들이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한다. 스웨덴 국왕으로 임명한 베르나도트 원수가 칼 14세 요한이 되어 오히려 등에 비수를 꽂은 것은 덤이다.
통령 취임 이전부터 이집트 원정 등으로 나폴레옹 개인의 군사적 야망이 지나친 수준이었다고 주위에 인식되었던 것도 문제. 원래 이집트 원정의 목적은 인도에 압력을 가해 인도를 비롯한 중근동 토후들의 반영 정서를 자극해서 영국을 뒤흔드는 것 정도였는데, 프로파간다로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한 고대 정복자들의 이름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5.5. 해외
이웃나라인 스페인에서의 평가는 거의 악마 수준이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자국에 지옥을 초래했기 때문. 현대 와서야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군사 피규어도 팔리고 프랑스군 리인액트먼트도 하는 등 표면적으로야 유럽 전반의 자유주의적 풍토에 희석되었다 하지만, 마드리드 시내의 프라도 박물관 옆에 있는 역대 스페인 군주가 대관식을 치루는 교회인 성 예로니모 성당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 탄약창으로 쓰이다 박살난 걸 재건축했을 만큼 이베리아 반도 전쟁 당시 스페인이 입은 피해는 스페인 역사에 진하게 녹아있다. 상술한 프라도 박물관에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보며 성장하고, 나폴레옹 전쟁때 한번 털리거나 박살난 사적만큼은 진짜 갈리시아에서 카탈루냐까지 그 지역색 강하고 서로 단합 못하는 걸로 유명한 스페인인들을 묶어주는 집단적 기억인데 스페인 사람들인데 악감정이 없을 리가 없다. 나폴레옹의 침략 당시 대불항전은 당시 스페인의 자유주의자, 보수파, 세속주의자, 가톨릭 교회, 카스티야인, 카탈루냐인 모두 합세하여 싸웠던 유산이고, 베니토 갈도스 같은 스페인의 문호뿐만 아니라 프랑스인 빅토르 위고마저도 경의를 표할만큼 치열했던 사라고사 공방전 같은 사건은 스페인 근대사의 집단적 기억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스페인 본토에서는 아예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스페인 독립 전쟁 (Guerra de independencia)라고 부를 만큼 중요한 사건이고, 현대까지도 은연중에 모습을 드러내는 뿌리 깊은 반불 감정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아프리카라고 깐 적이 있다. 정확히는 "피레네 산맥 아래에 있는 나라들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다."[32] 이 말에 스페인은 폭발했다. 참고로 그 당시 말하는 아프리카는 우리가 아는 '''그 아프리카가 아닌 북아프리카, 아랍을 말한다. 즉 이 두 나라는 유럽이 아니라 아랍이라고 깐 것.''' 레콩키스타로 아랍인을 쫓아낸 게 스페인 민족주의의 시작인데 그 감정을 건드렸던 것이다.
더불어 이집트 및 유럽 각지에서 문화재 약탈자라는 악명도 얻고 있으며, 때문에 모나리자를 약탈했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대표적인 다빈치 빠돌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스스로 선물한 것이다. 애초에 다빈치는 후기 활동을 프랑스에서 했고.
아이티에서의 평가는 좋지 않다. 나폴레옹의 매제 르클레르가 죽은 후 지휘권을 이어받은 로샹보 장군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폴레옹이 아이티의 흑인들을 다 죽이려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원하는 것은 아이티의 노예제를 복구하는 것이었지 인종청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스선을 이용해서 흑인노예들을 대량학살했다는 설 또한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물론 프랑스군에게 많은 이들이 학살당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풍토병으로 많은 군인들이 죽어나갔고 아이티인들은 악마같이 재앙을 내리던 전염병이 이번에는 침략자를 죽여주네~라고 기뻐했다.
1798년 이집트 알 이즈하르 마스지드에서 무장반란 진압 도중 4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살되었기에, 이집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학살자 및 침략자다. 이런 사태가 난 이유는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무리한 징발을 요구하고, 심지어 마스지드에 세금까지 매겼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아랍인들의 저항과 적군에 대한 협력으로 이집트 주둔 프랑스군은 보급에서도 곤란을 겪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대신하여 역적 맘루크를 토벌하러 왔다고 선전했고, 여차하면 자신과 부하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할 수도 있다며 립서비스를 하며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현지 지도층을 포섭하려 했지만[33] ,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영국의 해상 봉쇄로 고생을 했고 팔레스타인 원정에서 영국 해군의 방해와 중포의 부재로 결국 오스만의 견고한 요새를 뚫지 못하고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돌려주고 이집트로 돌아온 다음에,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는 수만 명의 오스만군을 바다로 처넣어 지위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한술 더 떠 페스트까지 발생한데다가 프랑스 내부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자신의 부재로 약화되는 것을 감지한 나폴레옹은 부사령관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겨우 2척이라는 적은 수의 함선을 타고 몰래 프랑스로 돌아갔다. 남은 프랑스군은 1년 반이 넘게 견뎠으나 계속되는 오스만군과 이집트 저항군, 영국군의 공격과 질병, 보급 문제로 결국 1801년 전면 항복한다. 덕분에 로제타석을 비롯한 문화재가 영국 손에 들어갔으므로 어딜 봐도 이집트 입장에서 좋게 볼 구석이 없다.
1989년 4월 21일,28일, 5월 4일까지 3부작으로 KBS-1에서 밤 10시에 더빙 방영한 <나폴레옹과 조세핀>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선 심지어 오스만 포로들이나 민간인들에게 프랑스군이 총을 겨누며 스스로 바다로 들어가게 하여 빠져 죽게 하는 장면도 나온다. 여기서 한 이집트인 떡대 사내가 프랑스군 두엇을 잡고 같이 물귀신이 되자고 투신해 같이 동귀어진하기도 한다.
러시아나 영국에서는 '그런 엄청난 적을 이긴 우리는 더욱 위대하다'는 논리의 설파를 위해 치켜 세워주면서도 악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영국에서 아기들 자장가에서 "망태 할아버지" 급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영국의 당대의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을 높이 평가했다. 나폴레옹이 사망한 직후, 아이반호를 지은 영국의 대문호 월터 스콧이 지은 "나폴레옹전"에서는 나폴레옹이 국가를 안정화하고 자국에 진보적 개혁 조치들을 취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후 나온 토마스 칼라일 같은 경우는 아예 나폴레옹을 들어 영웅사관을 정립했을 정도. 또 '제인 에어'로 너무나 유명한 영국의 전설적인 여성 작가인 '샬럿 브론테'도 '웰링턴 공작'을 매우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폴레옹'도 매우 존경해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에서 비극적으로 죽은 것을 애도하는 에세이를 쓰기도 할 정도로 열렬한 나폴레옹의 팬으로 그녀가 벨기에의 '브뤼셀'의 여학교에서 자신의 동생이자 '폭풍의 언덕'의 작가로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는 '에밀리 브론테'와 같이 유학했을 시절, 학교의 교장이였던 '콘스탄틴 에제'는 그녀가 나폴레옹을 매우 존경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폴레옹의 유품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한다. 뭐 그와 맞서 싸운 영국 장군들이 알아서 띄워주는 지경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나폴레옹이 침략한 러시아에서도 나폴레옹 애호가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12년 서곡이나 나폴레옹 케이크 처럼 나폴레옹을 쫒아낸것을 기념하기 위한 음악이나 요리도 있지만 나폴레옹의 이름을 딴 보드카가 고급 보드카로 소문나 불티나게 팔리는 등(나폴레온 양주와 다르다) 인기가 아직까지도 식지 않았다.
프랑스의 동맹국이였던 덴마크에선 애증의 대상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덴마크도 의도하지 않은 전쟁에 휘말렸고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패전국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다만 덴마크 일반인들 중에는 나폴레옹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아버지가 그 일례이다.
폴란드에서는 구세주 수준의 평가를 받고 있다. 나폴레옹이 자신들의 조국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 러시아를 줘패고 바르샤바 공국까지 세워줬기 때문이다. 비록 바르샤바 공국은 10년[34] 도 지속되지 못한 괴뢰국에 불과했지만, 폴란드인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가지게 해줬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프랑스 제국에 적극 협력했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줬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말 잘 듣고 부려먹기 좋은 빵셔틀 수준으로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토사구팽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나폴레옹이 먼저 몰락해서 알려지지 않았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폴란드 장군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과 같은 동등한 위치의 폴란드 군주로 대해주었기 때문에 정말인지도 알 수 없다. 어쨌든 폴란드는 다른 나라들이 전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다. 이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인식은 매우 좋다. 심지어 폴란드 국가인 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의 가사에도 '''보나파르트가 우리에게 승리의 방법을 보여주었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따라서 현재도 폴란드인 앞에서 나폴레옹이 폴란드를 토사구팽 어쩌구 하면서 비하하는것은 큰 실례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주로 '''자유주의와 민주정신을 전파한 지도자''' 혹은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독재자'''로 인식된다. 하지만 대체로 미국에서의 평가는 호의적인 편이다. 미국 본토에 전쟁 등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 않았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3대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재임 기간동안 프랑스가 전쟁이나 이렇다할 추가 요건도 없이 그 당시 단돈 1500만 달러(7300만 프랑)으로 현 미국의 4분의 1국토를 차지하는 루이지애나 포함 중부지역을 미국이 매입하면서 광활한 영토를 얻었다는 것에 있다.
아시아 쪽에선 나폴레옹이 뭔가 해를 끼친 것이 거의 없다보니 인기가 좋은 편이다. 중국의 경우 나폴레옹이 '''"중국은 잠자는 사자이며 깨어나기만 하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 평했던 것 때문에 좋게 보는 측면이 있다. 사실 이 발언은 중국이 지금 당장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깨우면 중국인들이 언젠가 유럽을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잡을 것이고 제국주의의 보복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시진핑이 프랑스-중국 수교 50주년 기념대회 강연에서 이 발언을 언급하는 등 중국에는 인상깊게 남는 발언이었던 듯 하다. 연합뉴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는 오히려 중국이 밀리는 형국이었지만, 개혁개방을 이루고 일대일로 정책을 펴(면서 미국, 영국, 인도등의 방해를 받)는 지금 상황에선 나폴레옹의 예언이 적중한 셈.
나폴레옹은 조선에 대해선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주간조선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기사로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에서 영국 탐험선이 짧게 섬을 방문했을 때, 영국 탐험대 대장이 나폴레옹에게 조선 여행담과 삽화를 보여줬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삽화에 담긴 조선인의 갓과 담뱃대에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평이다.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이 나폴레옹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업을 배우라는 아버지나 형의 권고에도 굳이 일본육사를 지원하게 된 것도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실제로 김경천 장군의 별명 중 하나가 '조선의 나폴레옹'이였다고 한다.[35]
그리고 한국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매헌 윤봉길 의사도 나폴레옹을 존경해 자신의 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36] 사상가 맹자, 혁명가 나폴레옹, 발명왕 에디슨을 배우라고 했다고 한다.[37]
5.6. 후세 독재자들의 동경, 추종
많은 독재자들의 추종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압제와 전쟁으로 나라를 망쳤고, 스스로의 말로와 평가 역시 나폴레옹보다 더욱 비참해졌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베델 보카사는 그를 흉내내어 황제가 되었다. 그의 황제 선포식도 사실은 나폴레옹의 것을 흉내낸 것이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도 나폴레옹을 동경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를 점령하고 나폴레옹 2세의 관을 나폴레옹의 곁으로 이장시켜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영국 정복이 힘들자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여 전선을 2개로 만들었고 이후 패망했다.[38]
중화민국의 장제스도 젊은 시절에 나폴레옹을 동경했으며, 나폴레옹의 혁명 정신을 잡지까지 내놓으며 칭찬했었다. 대륙이 아니라 중화민국 한정으로 본다면 강토는 축소되고 외교는 침체되었지만, 경제발전과 번영을 이뤄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역시 나폴레옹을 추종했는데, 통치 체제 등에서 나폴레옹의 통치 수단과 비슷한 시스템을 운용했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도 나폴레옹을 영웅으로 높이 샀다.
박정희 역시 학창 시절에 나폴레옹을 매우 동경했다고 한다. 단 박정희가 유별나게 영웅주의적이고 출세 지향적이었다기보다는 나폴레옹 숭배 자체가 당대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보편적인 입장이었다고 보는 게 무난할 듯하다. #
6. 신체적 특징
6.1. 용모
나폴레옹과 함께 그야말로 전설이 된 그림이다. 타 버전이 몇 가지 더 존재하며 구도는 같지만 머리가 흰 백마와 망토가 붉은 색인 버전도 매우 유명하다. 왼쪽 아래의 바위들에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와 한니발과 카롤루스 대제가 새겨진 것은 덤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성인 보나파르트가 한니발과 카롤루스 대제보다 더 위에 있어 나폴레옹이 이들보다 더 위대하다고 선전하는 것도 덤이다. 흔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고 부른다. 그림에는 멋있어 보이라고 백마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에는 지구력이 뛰어난 노새를 사용했다고 한다. 말메종과 부아프레오 성에 있는 원본 그림은 그야말로 신고전주의의 극한이라 칭할 만하며, 그야말로 크기와 포스 모든 면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들은 선전을 위해 미남 대역을 고용해 그려진 것들이 대다수라고도 하는데,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의 외모는 그린 화가에 관계없이 매우 일관된 편[40] 이기 때문에 대역들은 얼굴보다는 포즈를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다비드가 그린 얼굴이 본인과 닮은 편이라고 한다.
사실 나폴레옹은 수려한 미남이었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어느 정도 보정이 들어갔다 치더라도, 정권을 잡기 이전의 초상화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사망 후에 남긴 데스 마스크를 봐도 얼굴은 확실히 보통 이상으로 잘생긴 편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6개의 나폴레옹 석고상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참고로 우측의 초상화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하고 막 프랑스로 돌아온 러시아 원정 후 결국 파리가 함락당하고 극한의 상황에 몰린 퇴위 직전의 나폴레옹을 상상해 그린 '''상상화'''다. 당장 러시아에서 손실할 병력을 복구하고 민심을 달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야 할 판국에 태평하게 초상화를 그리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돌게 된 이유는 영국의 풍자만화 때문인데, 프랑스 제국과 적대적이던 영국이 적대국가의 최종보스 나폴레옹을 당연히 잘생기게 그릴 리가 없었으니,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대개 키 작고 못생긴 난쟁이로 널리 퍼진 것이다. 사실은 나폴레옹에 대해 결코 좋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키는 좀 작았어도 얼굴은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그의 미소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의 초상화를 봐도 그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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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국 근위대 기병대 대령 복장을 하고 있는 나폴레옹. 역시 다비드의 작품이다. 가슴팍에 저렇게 손을 넣는 포즈는 '숨겨진 손'이라 하여 서양에서 유행하던 상류층, 근엄한 리더십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41]
6.2. 비만 등 각종 질병
30대 중반까지의 초상화를 보면 '나폴레옹은 유황을 끼얹은 것 같다'라고까지 얘기될 만큼 창백한 안색에 대단히 여윈 모습으로 묘사된다. 비서 브리엔에게 '나는 나이가 들어도 살이 붙을 것 같지 않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황제 즉위 이후부터는 급격히 살집이 붙게 되고, 나중 가서는 심각한 비만이 되었는데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말년을 묘사한 초상화를 보면 그야말로 펭귄의 모습이다. 사후 부검할 때 복부에서 엄청난 지방을 걷어냈다고 한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위장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는 평생 나폴레옹을 괴롭혔다. 위장이 좋지 않은데다 식사량이 많았으며, 식사를 지나칠정도로 빨리하며[42] 승마 등 운동을 너무 격렬하게 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고 함에도, 갑자기 비만체가 된 걸 보면 잘못된 식습관과 유전적인 요인이 같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
한편, 그에겐 피부가 가려운 피부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시간이 있으면 장시간의 목욕을 즐기고 목욕탕 안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 목욕시에 시종 루스탐에게 피부를 세게 벅벅 밀게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원정 때 부인인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기침과 편두통, 발열이나 배뇨 곤란, 치질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중에 치질은 거머리 치료법으로 호전된 듯했다가 다시금 재발해서 결국 아편을 처방받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아편을 처방받은 날이 하필이면 워털루 전투 때였는데 당연히 전투지휘에 큰 지장을 주었다.
6.3. 결코 작지 않았던 키
작지만 사나운 인물을 뜻하는 나폴레옹 콤플렉스의 유래가 된 동시에 흔히 키가 155㎝ 정도로 작았다고 유명한데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168㎝였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164㎝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오히려 큰 편인 것이다.
나폴레옹이 단신으로 여겨지게 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일단 실제로 그가 속한 집단 중에서는 좀 작은 편이 맞긴 하다. 저 평균키 164㎝라는 수치는 당시 프랑스 남부에서 징집된 병사들의 평균키인데, 일주일에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프랑스 하층민들의 키가 포함됨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유럽 귀족들의 평균키는 170㎝ 중반~180㎝ 까지도 달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이 속한 계층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와 함께하는 고참 근위대는 원래 178㎝ 이상으로 키가 큰 인원들을 차출해서 만든 부대인 데다가, 특유의 셰코 모자 때문에 그들과 같이 있으면 나폴레옹의 키가 더욱 작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성장기 때에도 빈곤하게 지낸 탓에 잘 먹고 발육상태가 좋던 귀족들과 같이 있다 보면 키가 좀 작다는 인식도 있었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다른 장교들과 달리 삼각모를 넓게 쓰는 버릇도 있었고, 몸매가 약간 펑퍼짐한 면도 있는 데다 숏다리였던 것도 이러한 '작아 보이는' 인상에 한몫했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본인 스스로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라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그 외에 키가 150㎝ 로 하향 당한 원인에 대한 다른 설도 있는데, 그 당시 프랑스에서 썼던 피에(pied)라는 단위를 잘못 환산해서라고 보기도 한다. 원래 피에(pied)는 '발'이라는 뜻으로 정확히 영국의 피트(feet)에 해당되며, 보조 단위인 푸스(pouce)도 인치(inch)처럼 1/12 또는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도량형이 다 그러했듯이 18세기 말까지는 나라(또는 지방)마다 시기마다 그 크기가 조금씩 다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대략 17세기 말~18세기 말 기준으로 1피에가 약 32.5㎝, 1푸스(=1/12피에)가 약 2.71㎝였다.[43] 당시 나폴레옹의 키는 통상 '5피에 2푸스'라고 이야기되었으니, 이것을 18세기 말 단위를 적용해 환산하면 약 168㎝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야드파운드법을 쓰던 영국에서는 1피트가 약 30.5㎝, 1인치가 약 2.54㎝로 약간 더 작았음에도 그대로 '5피트 2인치'라고 옮겨버렸다. 도량형의 차이를 감안하면 5피트 6인치 정도라고 해야 맞는데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영국인들의 뇌리 속에는 나폴레옹이 실제보다 10㎝나 작은 158㎝의 단신이라는 인식이 박혀버리게 된다.
단순한 도량형 환산 과정의 착각이었던 것으로 볼수도 있으나 적국의 지도자를 폄하하기 위해 당시 언론들이 일부러 그렇게 퍼뜨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수법은 지금도 쓰인다. 북한에서는 김정은 공포와 동시에 위대한 존재이나, 한국에서는 그냥 뚱땡이일 뿐이다. 두 국가의 언론이 그렇게 만든다. 만만한 존재로 만들어야 싸울 때 군 사기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낭설엔 그의 조카[44] 인 나폴레옹 3세가 진짜로 키가 작았던 게 한몫을 보탰다. 키가 불과 160cm 였다고 한다.
이런 비교는 큰 성과가 없지만 1986년 당시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키가 167.7㎝로 나폴레옹은 20세기 후반,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남성 평균 키와도 겨우 0.1㎝ 차이 밖에 안 난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은 2세기에 가까운 후대의 남성들의 평균 키에 속할 정도로 당대에는 꽤 키 큰 사람이었다.
매체에서 쓰이는 우락부락한 거구들 사이에 있는 체구 왜소하고 제일 약해 보이는 인물이 알고보니 최고 지도자라는 클리셰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단신인 사람이 거구의 부하들을 부리고 다니는 모습은 반대의 경우와 다른, "저 사람은 얼마나 높으신 분이기에 저런 덩치들이 찍소리도 못 하고 복종하는가?" 하는 위엄과 권위를 드러낼 수 있다.
7. 사생활
여러 가지 비범한 모습과 신화적인 전설들이 내려오지만 사실 나폴레옹은 인간적으로서는 단점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면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기 싫어했으며 독단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경향이 많았다. 게다가 자신의 잘못과 실패는 무조건 덮으며 감추는 데 급급했으면서, 정작 부하들이 실패할 경우엔 자신과는 관계없는 100% 부하의 잘못으로 매도해서 질책하고 몰락케 하는 모습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보잘것없는 시골 귀족 가문에 대한 콤플렉스랑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와 전쟁에 너무 많이 참여한 관계로 주변에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사람이 적었다. 여성 문제에서는 조제핀과의 사랑으로 유명하지만, 서로 성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결국 이혼해버리고 오스트리아 황녀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사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조제핀을 거의 일방적으로 사랑했고 조제핀은 상황상 마지못해 넘어간 것에 가깝지만, 조제핀이 나폴레옹의 마음에 넘어가 열중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폴레옹 쪽에서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도 죽는 순간 마지막에 말한 단어가 조제핀의 이름이었으니 진정한 사랑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주변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아도 세속의 권력과 영화에 찌들기 이전에는 상당히 순수한 면이 있고, 인간성도 털털하고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어린 시절부터 일진적인 면모가 있고 유럽 귀족들이 말했던 것처럼 야만적인 해적 귀족스러운 모습들도 있어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실제로도 나폴레옹 본인이 미화하도록 요청한 것들을 제외하면 주변인들의 기록에서 생각보다 평이 좋지 않다. 베르티에의 머리를 잡아다가 벽에 찍어버리거나 말단 병사에게 주먹질을 해서 코피를 터뜨리기도 했으며 하인들에게도 폭력을 쓰기도 했고 말메종 궁전에서 번식기에 접어든 동물을 그냥 죽이고 싶어서 때려 죽이고 말리는 조세핀에게 모욕을 주기도 했다. 여성들에게는 폭력은 덜 휘둘렀으나 역시나 무례하게 대하며 물건처럼 여기는 성향이 있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최후의 충신이었던 베르트랑의 회고록에서도 자신의 재미를 위해 그의 부인을 요구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는 베르트랑 본인 앞에서도 그의 부인을 매춘부라고 비웃었다. 앙또마르키 같은 주변인들에게도 비슷한 조롱을 하고 다녔다. 영국인들에게는 '차갑고 악마같은 인간'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그의 카리스마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달리보기도 했다.
조제핀과 헤어진 직후 한 배우가 나폴레옹의 이 역린(?)을 건드릴 뻔한 일화가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프랑수아 조제프 탈마라는 연극배우가 있었다. 나폴레옹 본인도 그를 튈르리 궁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좋아했다. 탈마는 로마 제국을 무대로 한 연극 '브리타니쿠스'에서 네로 역을 맡았다. 물론 이 공연에는 나폴레옹도 직접 관람하러 참석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극의 내용 중 '''네로의 아내인 옥타비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이전부터 브리타니쿠스의 내용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극을 계속 진행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폴레옹과 궁정 관계자들이 한 행동은 '쿨쿨 잠이 든 척 하기'였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탈마의 행동이 비의도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괜히 사건 만들어서 유명한 배우를 족친다며 여론을 흔들기는 곤란하므로 잠이 들어서 문제의 장면을 못 본 척 하며 넘어간 것이다.
재밌는 점은 나폴레옹의 친지들은 나폴레옹에게 도움은 안되고 그저 배신 혹은 이용만 해먹었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아들인 외젠과 딸인 오르탕스는 나폴레옹을 끝까지 따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친지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외젠과 오르탕스를 친자식처럼 아꼈다. 하지만 혈연주의가 강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은 이 둘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제4차 대불(對佛)동맹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는 나름대로 훈훈한 일화도 남겼다. 베를린 총독 하츠펠트 대공이 간첩 혐의에 연루되었다는 증거인 편지를 입수한 나폴레옹이 하츠펠트 대공을 체포하자, 대공의 부인이 남편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못 된다며 총살당할 처지가 된 남편의 구명을 호소하러 왔다. 나폴레옹이 그녀의 눈앞에 편지를 들이대자 부인은 울음을 터뜨렸고, 임신 중이었던 부인의 부른 배를 보자 마음이 약해진 나폴레옹은 지금 이 편지를 곁에 있는 난로에 던지면 아무 증거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고 그녀에게 넌지시 귀띔했다. 결국 하츠펠트 대공은 목숨을 건졌다.
8. 가족들과의 관계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특유의 혈통에 대한 집착과 가족주의 때문에 낭패를 본 바가 많았다. 물론 권력자가 혈연에 의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고, 신분에 따라 재능을 단련할 기회가 차등적으로 주어지던 전근대 시대에는 권력자 주위의 혈연 집단이 의외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의 지방귀족이었고,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자신의 재능에 의지해 출세한 경우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의지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의 형제들은 사실 당대 기준으로 보아도 능력 면에서는 정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심지어 권력자가 자신의 혈족에게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충성심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무능한 주제에 야망과 욕심은 엄청 많고, 나폴레옹 덕분에 배부르게 호의호식했던 주제에 고마워하기는커녕 문제나 일으키면서 나폴레옹의 몰락에 일조하기까지 하고 자기들까지 망해서 여기저기 망명 신세를 지면서도 "이게 다 나폴레옹 때문이다!" 라고 원망이나 할 정도로 가족들은 정말 답이 없는 집안이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 스스로'''"내 형제들 말만 들으면, 처음부터 우리 아버지는 프랑스의 유서깊은 정통 황제이시고, 내가 그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우리 아버지로부터 계승서열을 무시하고 쿠데타 반란을 일으켜서 왕관을 혼자 꿀꺽하고는 형제들을 모두 내쫓고 나 혼자 호의호식한 줄 알겠다. 아주 기가 막혀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라고 푸념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의붓자식인 외젠과 오르탕스와 훨씬 더 친했을 정도다.
8.1. 나폴레옹의 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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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티치아 부오나파르테(Letizia Buonaparte, 1750~1836) : 나폴레옹의 어머니. 뛰어난 미인이고 기질이 거세, 평범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남편 샤를 보나파르트에 비해 보나파르트 형제들의 독특한 개성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듣는다. 여담인데 14살에 결혼하여 15살에 아들을 낳았으나 1살도 못돼 죽었다. 모두 자식들을 7남 6녀를 낳았는데 그중 2남 3녀는 2살도 안돼 일찍 죽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8명만 어른으로 자랐다.
- 카를로 마리아 부오나파르테(Carlo Maria Buonaparte, 1746~1785)[45] : 나폴레옹의 아버지. 39살 나이로 요절했으며 죽을 당시 나폴레옹은 사관생도였으니 아들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죽었다.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는 제법 명문 집안 출신이고 코르시카 독립전쟁에 열심히 나선 인물이었다. 코르시카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파올리의 부관이었을 정도. 비록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친 프랑스파가 되었지만 그 덕에 코르시카 총독 빽으로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기에 나폴레옹 인생에 그도 큰 다리를 놓아줬다.
- 조제프 보나파르트 (1768~1844) : 나폴레옹의 형. 나폴레옹의 형제들 중에서 그나마 좀 사람된 지식인에 정치적 재능이 뛰어나긴 했는데.. 동생인 나폴레옹이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한 행동들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의 민심이 싹 쓸려나간 후라서 나폴레옹이 앉혀놓은 형제한테 당연히 존경이나 민심을 바랄 수 없었다. 스페인 국왕인 호세 1세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 뤼시앵 보나파르트(1775~1840) : 나폴레옹의 형제들 중 형인 조제프와 함께 정치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진 인물. 재능보다는 열정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면서 일시적으로 패닉에 빠진 나폴레옹을 대신해 사태를 주도하여 나폴레옹 집권에 기여했지만, 문제는 내무장관과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며 금전적인 비리를 숱하게 저지른 데다 나폴레옹이 반대한 결혼을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과 사이가 나빠져 나폴레옹 집권기 동안에는 사실상 나폴레옹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영국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도움이 안되었으며 나폴레옹 제정 기간 동안의 존재감은 전무에 가깝다. 형이 몰락한 뒤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긴 했으나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 루이 보나파르트(1778~1846) : 나폴레옹이 가장 끔찍하게 아낀 동생. 네덜란드 왕국의 왕을 지냈고, 나폴레옹의 양녀 오르탕스와 결혼하여 샤를루이나폴레옹을 비롯한 여러 아들을 보았다. 나폴레옹 2세 탄생 전에는 나폴레옹이 루이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을 만큼 총애했지만, 루이는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데다 부인 오르탕스와의 사이도 좋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불행한 삶을 살았다. 게다가 군사적 재능도 훌륭하지 못했고 군주로서도 별 존재감이 없었다. 형이 몰락한 뒤로 이름을 숨기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살아갔다. 그래도 1840년에 프랑스로 귀국하여 형의 장례식을 보고 늘그막은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막내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다.[46]
- 제롬 보나파르트(1784~1860) :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을 지냈고, 워털루 전투에서도 사단장으로 참전했다. 보나파르트 형제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는 것까지 보았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나폴레옹의 뜻에 충실히 따른 편이었지만, 베스트팔렌 왕으로 재위하던 중에는 지나치게 사치를 즐겨 주위의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에게 "폐하는 선대 나폴레옹 폐하와 하나도 닮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과 마찬가지로 나도 친척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지 않습니까"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고. 제2제정 당시 상원 의장을 지내는 등 평안한 늘그막을 지냈다. 손자인 찰스 조셉 보나파르트(1851~1921)는 미국에서 살면서 정치인이 되어 미국 법무장관까지 오른 바 있다. 1860년까지 살았기에 나폴레옹의 형제자매들 중 유일하게 사진이 남아있다.
- 카롤린 뮈라 보나파르트 (1782~1839) :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조아킴 뮈라에게 시집갔다. 정치적 야심이 대단해서 남편 뮈라를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만들려 획책했고,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과 마리 루이즈, 양녀 오르탕스에게 가장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폴레옹과 뮈라가 폴란드로 출정한 동안, 나폴레옹이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 당시 파리 방위사령관이었던 앙도슈 쥐노를 정부로 삼아 남편 뮈라를 제위에 올릴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이후 남편 뮈라가 나폴리 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지만, 문제는 카롤린이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나머지 해방전쟁 당시 오빠를 배신하고 만 것이다. 이후 오빠와 뮈라 모두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으나 남편과 오빠를 망친 인간으로 낙인찍힌 터라 무수한 문전박대를 당하며 고생하게 된다. 그래도 늘그막에 재혼하여 어느 정도 넉넉하게 살다가 갔지만 죽을 때까지 아이들에게 자신은 왕비로서 유럽을 호령했다는 말을 남기며 지나간 영광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 엘리자 바초키 보나파르트(1777~1820) : 카롤린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질이 거세고 야심이 많아 나폴레옹이 토스카나 일대에 영지를 주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남편 펠릭스 바초키(1762~1841)[47] 가 자신의 눈에 차는 인물이 아니라고 하여, 당대의 유명한 문인 퐁탄과 연애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했고 오빠가 몰락한 뒤 오스트리아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풀려나서 지방에서 작은 별장에서 연금을 받으며 남편과 같이 살며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죽을때 그녀 곁을 지킨 건 남편뿐이라서 그녀는 죽어갈 때, '나는 배신했지만 당신은 바보같이 나를 따르니 참 우습네요... 하지만 정말 고마워요... 마지막까지 남은 게 오로지 당신 뿐이니...'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 폴린 보나파르트(1780~1825) : 보나파르트 자매들 중 가장 미모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여인. 르클레르 장군과 1797년에 결혼하여 아이티에 파견되었지만, 부부가 나란히 사복을 채우는 바람에 평이 좋지 못했다. 1802년 황열병으로 르클레르가 30세 나이로 요절하자 다음해인 1803년에 보르게세 왕자(1775~1832)와 재혼하여 나폴레옹의 정략에 충실히 따랐다. 낭비가 심했고 연애행각이 잦아 언니들만큼이나 말썽이 많았지만, 사적으로 봤을때는 나폴레옹에게 가장 우호적인 여동생이었다. 나폴레옹도 폴린을 가장 총애했는데, 이를 두고 대불 동맹군은 둘이 서로 근친상간을 한다는 악의적인 흑색선전을 일삼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에 유배 되자 어머니와 함께 섬으로 와서 그를 위로하였고, 결국 오빠가 사망 했을 땐 형제 가운데 가장 슬퍼했었다. 여담으로 아이티 바닷가에서 훌러덩 벗고 헤엄치길 즐기다 보니 현지인들에게 하얀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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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 가문은 현재 코르시카 지방 정부에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샤를 나폴레옹 (Charles Napoléon. 위 사진 오른쪽의 백발 신사)과 그의 장남,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 (Jean-Christophe Napoléon. 샤를 왼쪽의 인물)이다. 샤를 나폴레옹은 1950년생으로 위에서 소개한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후손이며, 코르시카의 시장을 역임했으며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은 1986년생으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뉴욕, 런던에서 금융 분야에 종사했으며, 가문의 차기 수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200주년 기념 행사에서도 가문을 대표해서 참석했을 정도. 2019년에는 마리 루이즈 조카의 직계 후손인 올림피아 폰 운트 추 아르코지네베르크라는 오스트리아 여성과 오는 10월 결혼식을 올렸다.# 여담으로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 아들과 아버지가 공동 당주인 이유는 선대 당주이자 샤를의 아버지, 장크리스토프의 할아버지인 루이 나폴레옹이 샤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이혼한 뒤[48] 평민과 재혼 (귀천상혼)하자 샤를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십대에 불과하던 손주, 장크리스토프에게 당주 직위를 물려주었기 때문. 따라서 현재 적통 당주는 루이 나폴레옹의 아들인 샤를 나폴레옹이 아니라 손자인 장크리스토프 나폴레옹이지만 샤를은 이를 무시하고 자신이 당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샤를과 장크리스토프의 관계는 원만한 편인데 이는 샤를이 자신이 사망할 경우 당주의 지위는 장남인 장크리스토프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결국 최종적으로 장-크리스토프가 단독 당주가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장크리스토프 또한 아버지가 당주를 자칭하는 것을 묵인하고 있어 사실상 부자가 모두 공동 당주라고 할 수 있다.
8.2. 나폴레옹의 연인 및 그 후손들
위에 언급한 현대의 보나파르트 가문의 인물들은 나폴레옹의 직계 자손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자손이다. 제롬이 꽤나 자유분방했고 그 덕분에 워낙 자손을 많이 두어서, 제롬의 후손들이 지금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
개방적인 성생활을 즐겨서 자식복은 많았지만 죄다 사생아로써 마리 루이즈의 아들만 적자로 인정했다.
나폴레옹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두 명이 있다. 다시 말해 나폴레옹의 애인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인데 사생아들이라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고 정식으로 호적에 오르지도 못해서, 정식 황태자이자 적자인 나폴레옹 2세와 달리 역사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폴레옹도 동생 제롬 못지 않은 바람둥이였는데, 그의 수많은 애인 중 잘 알려져 있는 두 명의 애인이 있는데, 첫째 애인이 엘레오노르 드누엘(Eleonore Denuelle)이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한 재력 있는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집안에서 이름난 가정교사를 들여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현숙하고 명망 있는 숙녀로 자라났다. 외모도 뛰어났기에 여러 고위층 남성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18세에 장프랑수아 르벨오노르(Jean-Francois Revel-Honore)라는 장교와 결혼했지만 그가 공금 유용 및 사기죄로 2년형을 선고받자 그와 이혼하고 독신이 되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나폴레옹의 눈에 들었는데, 사실 그녀가 나폴레옹과 만날 수 있었던 계기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카롤린의 공이 컸다. 엘레오노르가 카롤린과 사적으로 친했던 터라 그녀가 엘레오노르를 오라버니에게 소개시켜 주었고, 나폴레옹은 그녀의 박식함과 외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조제핀과 결혼중인 상태였으므로 애인으로 삼았다. 엘레오노르는 나폴레옹의 애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을 한 명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샤를 레옹(Charles Leon)으로 당시 애인의 자식은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인 드누엘을 따라 이름이 샤를 레옹 드누엘이 되었다. 샤를 레옹은 어머니를 닮아 유식하고 아버지를 닮아 잘 생겼으며, 아버지의 작위를 잇지 못하는 대신 군인이 되어 장교를 역임하고, 백작 작위를 받아 부유하게 살다가 죽었다. 샤를 레옹에게도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들은 군인이 되었고 나폴레옹 3세 시절 일어난 여러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 와중에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대신 딸들은 살아서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두어 지금도 샤를 레옹의 딸들의 자손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둘째 애인은 마리아 발레프스카(Maria Walewska)이다. 마리아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폴란드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엘레오노르처럼 유복한 삶을 살며 자라났다. 특히 그녀의 가정교사들 중 한 명이 바로 폴란드와 프랑스의 유명한 음악가인 프레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Nicolas Chopin)이다. 쇼팽이 폴란드의 음악가로 통하는 이유는 그의 아버지 니콜라가 젊은 시절에 폴란드로 떠나서 폴란드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생활하다 폴란드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쇼팽이기 때문이다. 바로 폴란드에서 니콜라가 한창 음악가로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가르쳤던 소녀가 바로 마리아였다. 그러나 폴란드는 당시 식민지나 다름이 없어 국가의 주권이 거의 박탈된 상태로,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갈망하고 있던 시대였다. 마리아도 그중의 한 명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정복 전쟁을 할 때 폴란드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왔는데, 마리아가 사는 성이 있는 지역을 통과하다 우연히 나폴레옹이 마리아와 눈이 마주쳤고, 나폴레옹은 마리아가 마음에 들어 측근에게 일러 마리아를 데려오라 했다.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하던 폴란드인들은 폴란드의 명운을 걸고 어떻게든 마리아를 찾아서 나폴레옹에게 바치려 했지만 큰 문제가 있었으니 마리아가 이미 아들 안토니 루돌프 바질리(Antoni Rudolf Bazyli)까지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이었다. 발레프스카는 마리아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이 아니라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 아테나시우스의 성이었던 것이다.[49]
마리아는 조국 폴란드에 해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물인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하러 갔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지만 설마 자신이 모국의 공인 공녀로써 나폴레옹에 바쳐지는 신세가 될지는 몰랐고 당연히 이 성상납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 거부했다. 당시에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라고 해도 도덕적인 일은 절대 아니었고 전 유럽인들이 뒤에서 소곤거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일이니 마리아로서는 당연한 거부였다. 어떻게든 나폴레옹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당시 폴란드인들은 물론 거물 중의 거물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가 직접 마리아에게 찾아가 애원하고, 심지어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까지 자신의 아내 앞에서 무릎 꿇고 제발 나폴레옹과 만나 줄 것을 애원했다.[50] 결국 남편까지 나서서 나폴레옹과 만나 줄 것을 요구하는 주위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리아는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다. 마리아를 만난 나폴레옹은 우격다짐과 협박 및 강압적으로 그녀를 취하였지만 그녀의 식견과 외모에 감탄했으며 그녀가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자신이 유럽을 평정하면 폴란드를 독립국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맹세하고 자신의 부하들과 폴란드 대중 앞에서도 그랬다.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서약을 신뢰하여 그의 애인이 되었고, 나폴레옹은 바르샤바 공국을 설립해주고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여 줌으로서 그 약속의 일부를 지켜주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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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궁정화가 프랑수아 제라르(François Gérard)가 그린 마리아 발레프스카의 초상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다지 미인이 아닌 것 같지만 대단히 아름답게 그려진 다른 초상화들도 있기 때문에 이는 제라르 화풍의 문제일 수도 있다. 사진도 각도에 따라 외모가 다르게 나오는데 화풍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초상화야 말해 뭐하겠는가. 또 외모가 별로였다고 해도 마리아가 프랑스어가 유창했고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지적이었다는 주위의 평가를 보면 이런 지성과 발랄함에 나폴레옹이 반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마리아는 나폴레옹의 아들인 알렉상드르 플로리앙 조제프(Alexandre Florian Joseph)를 낳았다. 그러나 이 아들 또한 애인 간의 사생아였으므로 아버지의 성과 작위를 잇지 못하고 성은 어머니의 남편인 발레프스키 백작의 성[52] 을 따른 발레프스키(Walewski)를 따르고, 자신의 작위 이름인 콜로나 백작(Comte de Colonna)를 붙여 콜로나발레프스키(Colonna-Walewski)로 했다. 알렉상드르는 프랑스와 폴란드를 오고 가며 외교관을 역임했으며, 프랑스 의회의 장도 역임했다. 그는 위의 샤를 레옹과 달리 아들이 죽지 않아 대를 이어 지금까지 그 후손이 존재한다.
알렉상드르의 탄생은[53] 나폴레옹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바로 나폴레옹이 자신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결혼 뒤 둘 사이에서는 아이가 전혀 없었는데 조제핀이 이미 두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아이가 없는 이유를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54] 때문에 엘레오노르 드누엘이 아들 샤를 레옹을 낳았을 때도 샤를 레옹이 진짜 자신의 아들이 맞는지 약간 의심하고 있었다.[55] 하지만 잘 노는 스타일이라 바람 피웠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던 엘레오노르와 달리 마리아 발레프스카가 나폴레옹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지극히 헌신적이라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자신까지 모두 공인하는 사실이라 마리아가 임신한 아이가 나폴레옹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의 소생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조제핀의 딸인 오르탕스와 자신의 동생 루이를 결혼시켜 두 사람 사이의 소생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자신의 후계자를 낳을 결심에[56] 조제핀과 이혼하고 유럽 왕실 가운데서 자신의 후계자에게 혈통의 권위를 안겨줄 적절한 상대를 찾게 되고 결국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게 된다.
마리아의 남편 발레프스키 백작은 자신의 아내가 나폴레옹과 외도해서 낳은 알렉상드르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했을 뿐 아니라 주위에도 자신의 아들로 소개했으며 죽을 때는 상당한 유산도 물려주었다. 알렉상드르 본인도 자신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아들임을 치욕적으로 여겨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끝까지 자신은 발레프스키 백작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를 어필했다고 한다.[57] 마리아는 1816년에 나폴레옹의 6촌인 필립 앙투안 도르나노(Philippe Antoine d'Ornano)와 재혼하였다. 기병 장교 출신인 도르나노는 나폴레옹이 그녀를 데리고 다니던 울름 전역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그는 예전부터 마리아를 사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군이자 사촌의 연인에게 마음을 드러낼수는 없었던지라 그저 먼 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만 보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발레프스키 백작이 늙어서 사망하여 그녀가 공식적인 미망인이 되자 마리아에게 수차례 청혼을 하였고, 그녀도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둘은 벨기에 리에주의 저택에서 회고록등을 작성하며 살았으며, 마리아는 아들 루돌프오귀스트(Rodolphe-Auguste)를 낳고 이듬해, 신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상드르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영국의 6대 샌드위치 백작(Count of Sandwich)인 조지 몬터규(George Montagu)[58] 딸 캐서린과 결혼해 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으나, 요절했다. 두 번째로는 교황청의 서기의 딸과 결혼해 한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으나 아들은 결혼하지 않고 죽었고 딸 한 명은 요절하고 나머지 두 명의 딸만이 결혼하여 자식을 두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상드르는 앞서 결혼한 두 명의 여자와는 출신이 완전히 다른, 라셸 펠릭스(Rachel Felix)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이 여자는 다름 아닌 연극 배우였다. 라셸은 한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이름이 알렉상드르 앙투안이었으며, 알렉상드르 앙투안은 결혼하여 앙드레 알렉상드르 마우리스(Andre Alexandre Maurice)라는 아들을 낳고, 앙드레 알렉상드르 마우리스는 결혼하여 앙투안 레옹 샤를(Antoine Leon Charles)이라는 아들을 낳고 앙투안 레옹 샤를은 두 명의 아내를 두어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중의 가장 큰아들이 알렉상드르 콜로나 발레브스키라는 사람으로, 지금 프랑스에서 생존 중이다. 사진을 보아하니 80대는 되어 보이시는 듯. 링크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조상 알렉상드르의 마지막 부인이 당시 하찮은 직업 중의 하나였던 연극 배우인 라셸이었는데, 정말 현재 생존 중인 알렉상드르 옹(翁)이 그의 친 자손이자 곧 나폴레옹의 친 자손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의 후손인 샤를(위 장크리스토프의 아버지)의 DNA와 알렉상드르 옹의 DNA를 비교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일치했고, 알렉상드르 옹은 실제로 나폴레옹의 생물학적 후손임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제롬의 후손이 딱 잡고 있기 때문에 알렉상드르 옹은 가문 승계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끔 나폴레옹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도 있는 것 같다. 워털루 전투 2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에 참가한, 현재 로마노프 왕가의 수장인 드미트리 왕자(좌)와 알렉상드르 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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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그의 애인 마리아 발레브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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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콜로나발레브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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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첫 번째 부인 캐서린 캐롤린 몬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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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 디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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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의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라셸 펠릭스
9. 나폴레옹의 26인 원수
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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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프랑 금화에 새겨진 나폴레옹.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 제 1통령 시절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 밑에는 혁명력 12년 (AN12,1803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탈리아어어로는 Napoleone di Buonaparte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 프랑스어로는 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코르시카어로는 Nabulionu Bonaparte (나불리오누 보나파르테)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을 신으로 숭상한 니콜라 쇼뱅(Nicolas Chauvin)의 일화에서 맹목적인 애국심을 뜻하는 쇼비니즘(chauvinism)이란 용어가 나왔다. 다만 쇼뱅은 가공인물로 여겨진다.
번외격인 이야기로,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정찰을 하던 도중 잎이 네 개인 클로버를 발견하고 신기하여 고개를 숙였더니, 총알이 나폴레옹의 모자를 뚫고 지나갔다는 에피소드 덕분에 네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되었고, 나폴레옹이 전장에 나설 때마다 늘 도서관 마차를 만들어 끌고 다니면서 책을 읽는 애독가였다는 사실은 뭇 책벌레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59] 다만 한 번 읽은 책은 보관하지 않고 길가에 내던져 버리는 요상한 버릇이 있었다. 이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지나가던 사람이 주워보고 똑같은 감동을 느끼라는 의미의 행동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번외 격으로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집트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피라미드에 들어가 잤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된 일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무서운 듯이 피라미드에서 뛰쳐나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앞으로 피라미드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마라!"였다고 한다. 이후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당한 뒤 친한 친구들이 나폴레옹에게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봤냐고 물어보자 뭔가를 말하려던 나폴레옹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손을 저으며 '됐어. 어차피 말해봤자 안 믿을게 뻔한데 뭐하러 말하겠냐'라고 했다고 한다.[60] 여러 주장들 중 하나를 말하자면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안에서 본 것은 바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폴레옹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죽고 없으니까 사실인지 확인할 길도 없기에 학자들도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여하간 그냥 그런 떡밥이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수행비서였던 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의 글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수학과 과학에 상당한 조예와 관심이 있었던 듯, 이집트 원정 때도 아예 현지 학술원을 만들기 위해 명망있는 학자들을 끌어모아 동행시켰으며 현지에서 이 학자들과 여러 차례 학술적 토론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단순한 토론 정도가 아니라 '이집트지'라는 이집트학 학술지까지 현지에서 만들게 하고 거기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이집트지'는 근대적 이집트 고고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개중엔 "내가 군인 말고 학자를 했으면 아이작 뉴턴[62] 정도로 대성하지 않았을까?"라고 던졌더니 학자들이 "님이 아무리 뛰어나도 뉴턴만큼은 아님"이라 대답해 빡쳤다는 일화도 있다. 단,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게 별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1800년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수학과 과학에 정통했던 집단이 공병과 포병 장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한가락 했다 하는 프랑스 수학자나 물리학자들 명단을 보면 죄다 에콜 폴리테크닉[63] 에서 공부하고 군에서 공병이나 포병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군대에서 응용되는 공학기술(축성술, 탄도학, 대포 제조법 등)의 기초로 수학이나 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기관이 공병/포병 장교 사관학교뿐이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됐듯이 나폴레옹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정통 포병 장교 출신이다. 당연히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수준의 수학, 과학, 공학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유명한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저서들에 직접 주석을 달기도 했다고 한다.[64] 이렇게 전문 학자 수준으로 수학, 과학 지식을 갖추고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탓에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해 프랑스 황제 자리에 복위했을때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나폴레옹의 황제 복위를 가장 지지했다는 말이 있다.7월 14일, 나폴레옹은 피라미드를 둘러보기 위해 카이로를 떠났다. 원래는 멤피스의 네크로폴리스 고대 유적을 삼사일간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갑자기 계획을 바꾸었다. 이때의 피라미드로의 여정은 전쟁과 맞물려 한 가지 로맨틱한 일화를 낳게 내게 되는데, 일부 원주민들이 나폴레옹이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접견한 것과 연관 지었는지 이야기하고 다니길, 그가 피라미드 안에 들어서자 '알라께 영광을! 신은 오직 알라뿐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다!'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렇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에 들어간 적도 없다. 심지어는 들어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막에서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났던 적이 없으므로 만약 그가 피라미드에 들어가 보았다면 나 역시 따라 들어갔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밖에 있는 동안 몇 사람을 시켜 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보게 한 뒤 그들이 돌아오자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물었다. 그들이 보고하길 '아무 것도 볼 게 없었습니다!'라고 했다."[61]
위의 '이집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과 재능은 수학-과학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인 관심과 교양 또한 뛰어났으며, 젊은시절 루소의 계몽주의적 작품에 심취하여 문학 공모전에도 출품을 시도하는 등 인문학적인 소양도 상당할 정도로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다방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인물이었다.
체스를 좋아했지만 실력은 별로였다고 한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폴레옹을 탈출시키려는 추종자들이 체스판에 탈출 계획을 숨겨서 보냈는데 그걸 얘기해줘야 되는 장교가 가는 도중 죽어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탈출 계획이 숨겨진 체스판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사망했다라는 말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세인트헬레나 시절 측근들의 기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탈출계획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인 중 하나가 총독 허드슨 로를 죽이려고 계획한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대노하여 그 하인을 혼냈을 정도로 나폴레옹은 물리력을 사용하거나 탈출을 하는 등의 행위를 거부했다.
백년전쟁 당시 위기에 몰린 프랑스를 구한 업적에 비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무명인 취급 받으며 잊혔고, 공화파로부터는 더욱 천시 당하던 잔 다르크를 다시 부각시켜 영웅시한 것도 나폴레옹의 집권 시대 때이다. 자신과 잔 다르크가 벽지 출신이고 대포를 주무기로 다뤘으며 영국과 맞섰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내세웠다. 잔 다르크가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조작되고 부풀려진 영웅이라는 일부 수정주의적 인식도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자세한 건 잔 다르크 항목 참조.
종교에 대해서 거의 이신론에 가까운 견해를 가졌다. 특히 가톨릭을 싫어했으며 비오 7세와의 불화도 그렇고, 종교를 일종의 필요악으로 취급하였다. 일단 스스로도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는 '인간의 필요성이 종교를 탄생시켰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65]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본 것과 달리, 이슬람교에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군인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자리잡는데만 수백년이 걸린 기독교와 다르게, 단 몇십년만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이야 말로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아무것도 못 이룬 예수보다는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시작해서 왕에 준하는 자리에 오른 무함마드야 말로 훨씬 유능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66] 이집트 원정때도 개종을 고려하기도 했으며, '동방의 영토와 부를 손에 넣을수만 있다면 개종 따윈 몇번이고 할수 있다'고 발언하였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는 거의 숙적 관계로 취급받지만 사실 꽤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다.
유배지에서의 공책이 경매에 올랐는데 영어 공부[67] 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잘하지는 못했다. run의 과거형은 ran인데 '''runned'''라고 우직하게 한 페이지를 채워놨다고 한다. 영국 정복에 성공했으면 불규칙 변화를 모조리 없애 버리고 ran을 runned로 바꿔버리는 세계적 대업적을 이룩하지 않았을까.[68] [69]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프랑스 프랑 지폐에 등장한 인물 중 하나다.
파리를 여행하다 보면 다리나 궁전 같은 건축물에 월계수 안에 N자가 있는 부조를 대단히 많이 볼 수 있는데 나폴레옹과 조카 나폴레옹 3세가 열심히 새겨준 덕분이다.
2014년 11월 16일에 모나코 왕실에서 보유중이던 나폴레옹의 이각모를 경매에 내놓았는데 하림 그룹의 김홍국 회장이 낙찰 받았다.# 세계에서 나폴레옹 모자를 소유한 민간인은 단 2명 뿐인데 그중 한명이 됐다. 일본인과 경매 배틀이 붙어 무려 26억원을 주고 샀는데 문제는 하림 그룹의 주가가 하락하던 중에 이런 것. 게다가, 나폴레옹이 사용하던 검에서부터 은잔, 훈장, 나폴레옹 초상화까지 경매로 11억원을 주고 사서 비판받기도 했다. 다만 김홍국 회장은 젊은이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 정신을 전파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고 한다. 실제 사업목적에도 미술관 및 박물관 운영을 추가했다.
국제학술대회 등지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던 이 모자는 현재 판교테크로밸리 하림 계열사인 NS홈쇼핑 별관 1층 나폴레옹 갤러리에 나폴레옹의 검 등, 몇몇 전시품과 함께 '''무료로''' 상설 전시되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넥슨코리아, 네오위즈, NHN본사가 근방에 있으니 이곳에 들릴 방문객이 있다면 둘러봄직 하다.
러시아 요리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케이크가 있다. 하필 러시아 케이크 이름이 나폴레옹인 이유는 1912년, 바로 그 나폴레옹을 박살낸 조국전쟁의 승전 100주년을 기념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모자 모양을 따서 만든것이 시초라고 한다. 즉 승자의 여유.
유명한 야구선수 중에도 이름이 나폴레옹인 선수가 있다. 바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2루수 중 하나인 냅 라조이로, 본명이 나폴레옹 라조이다. 선수명은 나폴레옹의 Nap 부분만 따서 냅이라 붙인 것. 조상이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캐나다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부모와 가족들이 실제 이 항목의 나폴레옹을 좋아해서 지었다고 하며, 이름에서 프랑스계인게 티가 나서, 선수시절 선수들 사이에서의 별명도 "프랑스인(The Frenchman)"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절대 정신(absoluter Geist)이란 개념을 만들었으며, 나폴레옹이 독일을 집어삼켰음에도 그를 절대 정신의 화신으로 보며 찬양했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절대 정신이 나폴레옹이 이룰 혁신들을 통해 구현되리라고 보았던 것이다.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 정신을 - 나는 보았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초상화에 셉터와 같이 등장하는 흰색 손가락 모양은 '정의의 손'이라는 것이다. 왕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 나폴레옹 외의 초상에서도 가끔 보인다. 본래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내려온 상징으로서 보석으로 만들었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분실되어 상아로 만들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덴마크 왕국에서는 그를 흠모하여 참전한 한 구두 수선공 출신 병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통에 신경 쇠약에 걸렸고, 고향에 돌아간 뒤 얼마 못 가 사망하고 만다. 이때 아버지의 죽음을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그의 아내는 어린 아들에게 눈의 요정이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말했는데, 그 병사의 아들이 바로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한 이 말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눈의 여왕의 창작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10.1.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
[70]
나폴레옹은 잠을 효율적으로 자는 자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한다. 3~4시간만 자고 부족하다 싶으면 말위에서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는데, 사실 당시 장교들이 전쟁 중에 맘 놓고 자기 힘든 상황이었으니만큼, 좀 과장된 면도 없잖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항상 '''자기가 잔 것보다 적게 잤다고 생각했다'''는 식의 말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당대 기준에서 봐도 수면 부족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 젊은 시절부터 마치 발작하듯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바로 잠들어버린 적도 있다고 하니...
그러나 나폴레옹은 '''잠을 결코 적게 자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사관학생 시절, 다들 코르시카 촌놈이라고 무시했지만 브리엔이란 동기만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부관이 되었던 브리엔이 남긴 기록을 봐도 불면증 때문에 못 잔다고 투덜거린 게 많았다고 한다. 브리엔은 나폴레옹빠였지만 늘그막까지 나폴레옹이 잠을 적게 잤다고 하면 왜곡하지 말라며 반론했다. 그 밖에도 프랑스 사학자 Roger Chartier의 연구에 의하면, 야간의 수면 시간이 2~3시간이었을 뿐, 1일 동안 토막잠을 잔 시간까지 합치면 최소한 '''6시간 이상'''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불규칙한 생활 덕분에 불면증까지 겹쳤기에 적게 잤을 뿐이지, 노력과 근성으로 졸음을 참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저렇게 수면이 불규칙적이다 보니, 한번 잠이 들면 주변에서 깨우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한다. 한 번은 연회 도중에 잠든 나폴레옹을 깨우려고 측근들이 그가 좋아하는 치즈를 가져다 줬는데, 그 냄새를 맡던 나폴레옹이 돌연 '오늘은 피곤하니 안 되겠소 조세핀'이라 잠꼬대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체취와 치즈 냄새도 구분 못할 만큼 넉다운 되었다는 이야기.[71]
그리고 저 광고가 아주 엄청나게 중대한 실수를 하나 하고 있는데, 보나파르트 가문은 코르시카의 '''귀족'''이다. 나폴레옹의 직계 조상인 자코보 부오나파르테는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메디치 가문의 친구이자 측근이었고, 15~16세기에는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당히 힘 있는 명문가였다. 16세기 후반에 정권 다툼에 휘말려 코르시카로 망명을 갔으나, 코르시카에서도 지방 귀족 가문으로, 비록 섬 밖에서 크게 떵떵거릴 위세는 아니지만, 현지에서는 상류층에 속했으며, 경제적 사정도 아버지의 사치만 빼면 그럭저럭 잘 살았다.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코르시카 독립 혁명가 파스콸레 파올리의 동지였으며, 루이 16세의 궁정 내 코르시카 대변인이기도 했다. 가문이 살던 현지의 부오나파르테 저택은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며, 인근에는 나폴레옹의 조상들이 매년 사용하던 가문의 여름 별장도 따로 있다. 이런 배경이 있었던 덕분에, 나폴레옹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으며 일찍부터 큰 세상에 발을 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유년 시절은 결코 빈곤하지도, 처량하지도 않았다. 그가 활동한 프랑스 본토에서야 어찌 되었건 프랑스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외딴 섬 촌놈이라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였던 거지, 나폴레옹의 배경을 현대로 치면, 한국에서는 차관급이나 중견기업 집안 출신인 사람이 미국에 좋은 사립대학에 유학갔는데 주변인들은 미국의 장관급이나 포춘 500대 기업의 집안 출신이라 상대적 빈곤감을 느꼈던 셈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나폴레옹 잠(혹은 수면)'으로 검색하면 '''나폴레옹 수면법'''이라는 출처불명의 유사과학 같은 헛소리까지 나와서 마치 나폴레옹이 잠을 컨트롤해서 성공한 것처럼 포장하기도 하며, 이 수면법을 자신에게 정착시키는 동안엔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규정해놓고는 하는데, 정작 이 중에선 나폴레옹이 즐겨 했던 목욕 역시 금지되어 있다고 하니 신빙성이 떨어지는 요법이다. 일부 책에서는 나폴레옹이 '''바보는 6시간, 여자는 5시간, 남자는 4시간을 잔다'''는 말을 했다고 쓰기도 했다. 남녀노소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려면 늦어도 10~12시에는 잠자리에 들어 6~10 시간 이상 자야 한다.[72]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런 불규칙적이고 부족한 수면으로 건강을 망쳐서 '''워털루 전투 같은 큰 전투에서 패인(敗因)이 되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숨긴다. 그리고 비교적 1년 정도 짧은 시간에 공부에 전력매진해야 되는 입시생이라면 모를까, 일반 성인이 이따위 짓을 하다가는 건강을 해칠 뿐더러 카오너에게는 졸음운전까지 유발하는 그야말로 자살, 민폐행위나 다름 없다.
10.2. 나폴레옹의 평상시 일상
나폴레옹은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두 시간 동안 욕조에 푹 잠겨 있으면서 비서가 읽어 주는 영국과 독일 신문의 번역본을 듣거나, 비서에게 자기가 불러 주는 편지를 받아쓰게 했다.
그 후에는 아침을 먹을 때까지 탄원서를 처리하거나 종종 탄원자 본인과 면담을 했다. 하루는 기술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을 거부당한 한 유망한 젊은이가 겁도 없이 무작정 황궁으로 찾아와 나폴레옹을 알현하게 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나폴레옹은 즉석 면접을 본 뒤 교장은 이걸 읽는 즉시 이 청년을 입학시키라는 친서를 써 주었다.
아침 10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오후 5시에 저녁을 먹었다.
여가 시간에는 사냥의 명수였던 베르티에 원수와 함께 코르시카식 토끼 사냥을 즐겼다. 한 번은 담당관이 실수로 길들여진 토끼들을 사오는 바람에 토끼들이 나폴레옹에게 몰려드는 해프닝도 있었다.
부하들과 카드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황제가 되고 나서는 종종 밑장을 빼곤 했다. 이젠 자기가 황제니 눈치채도 판을 엎기는커녕 티도 못 내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연극 매니아라서 생클루와 말메종의 양쪽 황궁에 모두 황제 전용 극장을 지을 정도였으나 오페라 매니아였던 조제핀과는 영 취미가 맞지 않았다.
연회자리에서 흥겨우면 종종 친히 노래를 하곤 했는데 앙도슈 쥐노장군의 부인이었던 '로르 쥐노'가 회고하기를 나폴레옹이 노래를 불렀다 하면 연설을 할 때의 그 근사한 위엄있고 매혹적인 목소리는 대체 어디로 간건지 도축장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꽥거려서 연회의 분위기가 백이면 백 싸해졌다고 한다.[73]
10.3. 나폴레옹의 식사 습관
식사 습관도 지금 기준에서 보면 문제가 엄청 많은 편인데, 황제가 된 뒤에도 10분 이상 식사하는 법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무척 빨리 먹는 편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현대 프랑스인의 평균 식사시간의 1/4 정도다.
게다가 귀족 출신이 맞기는 한지, 식사예절은 거의 무시하고 식탁에 앉아서도 꾸벅꾸벅 졸면서 대충대충 먹어치우고 곧바로 소파나 침대로 곯아떨어질 때도 자주 있었다고 하는데, 선천적으로 위장이 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나쁜 식생활로 인해 건강이 당연히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76]
세인트헬레나로 쫓겨났을 때 불과 46세였는데, 그로부터 6년밖에 못 살고 죽은 것도 이전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데다, 제대로 관리도 하지 못한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포로로서 유형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끌려가는 영국 군함 노섬버랜드호에서도 이 습관을 그대로 고집했다고 한다. 상대가 프랑스의 황제이니만큼 당연히 그 영국 군함 함장은 그를 식탁에 초대했고, 영국 해군의 전통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는 함장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허나 나폴레옹은 아무 말 없이 후다닥 음식을 집어먹고는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하면서 벌떡 일어나 나가는 바람에, 동석했던 함장과 영국 해군 장교들이 모두 아연실색했고, 워털루 전투의 패배가 아직도 사무쳐서 우리하고 말도 섞기 싫은 게 아니냐고 오해를 산 적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수면 부족과 급히 먹는 식습관이 훗날 건강에 크게 악영향을 주고 몇몇 중요한 전투에서 패인으로 작용했다.
10.4. 나폴레옹의 미식
나폴레옹이 평상시에 무엇을 먹었는지는 몇몇 기록들로 대략 알 수 있고, 그것이 부르봉 왕조 때와 어떻게 달랐는지도 알 수 있다. 음식 취향은 매우 소박해서 빵, 염장버터, 감자튀김, 물에 탄 와인을 곁들여 빠르고 간편하게, 식사하기를 좋아했다.
때로는 그냥 따뜻한 수프와 푹 익혀 삶은, 얇은 쇠고기 한조각을 더 선호했다고, 그의 전속 주방장이 말했다. 삶은 달걀이나 감자, 토끼or닭고기 커틀릿, 삶은 토끼고기나 닭고기와 함께 렌틸콩을 넣은 샐러드 등을 아침으로 간단히 먹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먹는 수프를 빼면 아침에 먹는 요리가 2가지를 넘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식사를 담당했던 부서에 전달된 지침서를 보면 포타주, 세 가지 앙트레, 두 가지 앙트르메, 두 가지 빵들을 준비해서 튈르리궁에 있던 조세핀 황후의 거처로 내와서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여기에 나폴레옹이 생전까지 좋아했던 샹베르탱 와인 한 병을 내가면 끝이었다.
그런 나폴레옹조차도 저녁은 부하들이나 다른 궁정 식구들과 함께 먹었으므로 그들을 위해서라도 좀더 풍성한 저녁 식탁을 차리도록 했다. 그러나 그런 저녁 식탁에서도, 나폴레옹 본인은 굽든지 삶든지 해서 아주 간소하게 요리된 고기와 채소 한 접시씩만을 먹었다.
채소라고 해봐야 콩이나 감자 같은 것이었는데, 나폴레옹은 특히 감자를 매우 좋아해서 굽든 삶든 튀기든 감자라면 다 잘 먹었다. 식사의 마무리는 치즈 한조각을 먹었는데, 주로 까망베르, 리코타, 로크포르(Roquefort) 또는 파마산(Parmesan) 치즈가루를 택했다.
나폴레옹은 또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그는 끼니 때 갑자기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하기를 즐겼다. 이때는 그저 있는 재료로 준비해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한 종류의 포타주, 두 가지 를르베, 콜드 컷, 네 가지 앙트레, 두 가지 로스트 요리와 네 가지 앙트르메, 네 종류의 오르되브르, 두 종류의 샐러드, 6가지 빵, 황제가 좋아한 샹베르탱 와인 6병이 항상 준비돼 있어야 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의 공식 연회 만찬에 관해 깊이 생각하거나 그것을 복원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연회가 열리기는 했지만 오로지 몇몇 지방의 시청관료나 초대된 손님만이 참석하는 정도의 아주 작은 규모였다. 황제인 나폴레옹은 은폐된 생활을 했고, 후일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될 때 이점을 몹시 후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살아있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미식도 즐겼다. 그가 매우 아꼈던 막내 여동생 '폴린 보나파르트'는 오빠는 어렸을 적부터 감자와 토끼고기, 닭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로스트 치킨, 치킨소테, 닭고기 살 크넬, 볼로방 페이스트리 치킨파이, 프로방스식 치킨, 백포도주 or 샴페인으로 디글레이즈한 닭or토끼고기볶음, 달걀물을 풀어서 빵가루를 입혀서 버터에 녹인 후라이팬에 요리한 토끼or치킨 커틀릿 등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나폴레옹도 좋아하는 디저트가 있긴 했는데, 바로 아몬드였다. 보통 한 접시를 거의 다 혼자서 비웠다고 한다. 그래서 조제핀 황후가 아몬드로 너무 과식하지 말라고 자제시키기도 했다.
꿀이나 잼, 설탕이 든 달콤한 단맛 자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아주 가끔은 과일도 먹었는데, 새콤달콤한 과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사과나 배 1/4 조각 정도만 먹거나 포도 약간을 먹고 말았다.
또 둥글게 말아 리코타 치즈를 넣은 이탈리아식 카놀리(Cannoli)를 매우 좋아했는데, 전통 방식은 여러가지 다양한 종류의 매우 달콤한 잼들을 리코타 치즈와 같이 넣어서 먹는데 나폴레옹은 잼을 넣지 않고, 오직 리코타 치즈만 넣은 카놀리를 더 선호했다.
또 당시 프랑스 신사들이 흔히 하듯 코냑 같은 독한 증류주를 마지막 입가심으로 마시지 않고, 그냥 물이나, 샹베르탱 와인으로 입가심으로 마셨다.
10.5. 나폴레옹의 정리
기하학 공식 중의 하나.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10.6. 벳시 발콤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과 벳시 발콤이라는 소녀와의 이야기를 다룬 "벳시와 황제"라는 소설이 유명한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소설이다. 다만, 나폴레옹이 거주한 롱우드 지역에 발콤이라는 가족이 살았고, 그 집의 자녀인 딸 두명이 나폴레옹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이다.[77]
11. 대중매체
11.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선악과를 가졌던 인물로 밝혀지며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장교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1.2. 그 외
일단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벌어진 전 유럽의 운명을 놓고 일어난 최후의 대규모 전쟁이므로 수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등에 소재로 쓰이고 있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사실상 진주인공 포지션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도 나폴레옹이 언급된다. 나폴레옹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에드몽 당테스가 누명을 쓰고 인생이 망가지게 되는 배경이 나폴레옹의 심복 베르트랑 장군과 공화주의자 누아르티에가 사주한 나폴레옹의 편지를 외부로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짐 커비즐이 주연한 2002년 영화에는 초반 섬에 들른 에드몽에게 직접 자신의 명령이 담긴 편지를 부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코난 도일의 전설적인 추리 소설 시리즈인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인 셜록 홈즈가 존 왓슨에게 자신의 라이벌이자 영국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인 제임스 모리아티를 '범죄 세계의 나폴레옹'이라고 묘사했다.
현재까지 나온 나폴레옹이 주연인 영상매체로 가장 유명한 것은 1927년작 영화 '나폴레옹'과 70년작 워털루 및 2002년 제작된 프랑스의 TV 미니시리즈 Napoléon이 있다. 아벨 강스의 27년작 나폴레옹은 무성영화 시절 막바지 들어 영화에 대한 감독들의 권한이 극에 달해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1부부터 6부까지 연이어 만들어질 계획이었으나 1부만 해도 그 내용이 330분(!!)에 달했고, 거기에다가 후반부의 전투 장면은 1.33:1 화면 세 개를 붙여서 만들어진 4:1 화면으로 상영해야만 했다. 이런 엄청난 길이와 전례 없는 기술적인 난제 때문에 영화는 일부 공간에서만 제한적으로 상영되었고, 영국과 미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 할 때 즈음에는 유성 영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묻혀버렸으며, 그나마도 4:1 시퀀스가 전부 1.33:1로 잘려나가고 러닝타임이 훨씬 더 짧아지는 등 수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간 뒤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당연히 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나폴레옹 2~6부는 촬영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이 영화는 1980년에 가서야 완전하게 복원되었지만[78] , 이나마도 VHS와 레이저디스크로 발매된 이후 한동안 홈미디어로 발매되지 않았으며[79] , 오늘날에도 1~2년에 한 번씩 대형 오페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반주와 함께 상영되어야만 운 좋게 볼 수 있다. 영화 자체는 후기 무성 대작들 중에서 최고 수준은 아닐지라도 그 사치로운 세트 구성과 기술적인 대담함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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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는 크리스티앙 클라비에(나폴레옹 역) , 제라르 드파르디유(푸셰 경시총감 역), 이사벨라 로셀리니(조세핀 역) 등등 당대 프랑스 최고의 배우와 존 말코비치(탈레랑 외무장관 역)가 출연한 걸로 화제를 모았다. 유투브에서도 나폴레옹 관련 검색어에서 빠지지 않은 작품. 특히 아스테릭스나 비지터 시리즈 등 코미디 연기로 그동안 알려젔던 크리스티앙 클라비에가 열연한 나폴레옹은 그간 나폴레옹을 맡은 배우 중 실제 인물과 가장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코비치 역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자 책략가로 유명했던 탈레랑의 모습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라 마르세예즈와 합성한 동영상도 유투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라 마르세예즈 그 외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와 합성한 동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이 곡은 샤를 10세의 몰락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지만 가사 내용이 나폴레옹의 삶과도 매치되는 부분도 있어서 종종 합성되는 듯. Viva la vida와 합성한 동영상
Commands and Colors Napoleonics, 줄여서 C&C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보드 게임이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다. 이외에도 나폴레오닉 워(The Napoleonic Wars), 나폴레옹의 승리(Napoleon's Triumph), Manoeuvre, 야전사령관-나폴레옹(Field Commander: Napoleon) 등등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보드게임은 정말 많다. 나폴레옹 전쟁 관련 보드게임만 모아놓은 자료
토탈워 시리즈 중 나폴레옹: 토탈 워는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이유인지 플레이 도중 나폴레옹만은 부대가 전멸해도 죽지 않고 부상당해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메세지만 뜨고 나중에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부상당해서 본국 귀환하면 레벨이 떨어지니 조심해야 한다.[80] 캠페인하면서 경험치가 쌓여서 자동전투를 시키면 '''두 배 정도의 적은 간단히 이긴다'''.
코에이에도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게임으로 1990년에 발매한 랑펠로(정확한 독음은 랑페뢰)가 있다. 다만 모든 코에이 게임들 중 가장 어려운 데다[81] 후속작이 안 나온 관계로 삼국지 시리즈나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 비하면 인지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확장팩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루트에 맞춰진 세계 정복 캠페인을 플레이할 수 있다.
문명 5에서는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온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프랑스 대혁명 도중에 이벤트로 등장한다. 군주로서의 능력치는 6/3/6으로 본 게임내 최고 수준. 원래 유럽 깡패인 게임 내의 프랑스와 혁명 효과, 나폴레옹의 능력치가 합쳐져 실제 역사대로 전 유럽 영토에 삼색기를 휘날릴 수 있다.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의 갤주로 인정받고있다.
근육맨2세에 따르면 실은 시간초인이었다고 한다.
진정남 나폴레옹이라는 만화도 있다.(원제는 '사자의 시대 - 나폴레옹'.)
#링크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자. 이게 나폴레옹인지, 켄시로인지 싶어질 거다.
참고로 이 만화의 작가는 문명 5 출시 기념으로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문명 홍보 만화를 그혔다.
한국만 해도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 시리즈에 그가 나오지 않은 시리즈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1세대 판타지 소설 불멸의 기사 2부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당연히 등장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정체를 다름 아닌 루이 16세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충격과 공포다.
국내 웹툰 플린트 락 머스킷은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수인물이다. 주인공 로제타 듀베르는 용기병[82] 여성이지만 나폴레옹 본인도 수인화되어 출연한다.
역시 용을 다룬 대체역사소설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도 당연히 등장했다. 간지폭풍 절대군주로 나온다.
포켓몬스터의 엠페르트는 나폴레옹이 모티브. 이름의 조합이 황제를 뜻하는 영단어 '''Empe'''ror+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의 명성 때문에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유럽 대체역사소설계에서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든지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대체역사적 가정이 단골 떡밥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역사학자들이 다룬 대체역사인 What if에서는 나폴레옹이 중간에 전쟁을 그만두고 정치와 외교로 해결을 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만일 나폴레옹이 틸지트에서 승리하고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좀 더 너그러운 방향으로 조약을 맺었다면, 유럽은 나폴레옹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고, 결국 영국도 굴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챕터의 제목이 '''우주의 왕 나폴레옹'''이다.
해리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두 명의 조지"에서는[83] 프랑스 왕가가 1980년대까지 존속하게 된 영웅으로 묘사된다. 루이 16세의 목숨을 노리는 파리 민중들에게 '''대포 사격'''을 하는 바람에 소요를 진압한 장교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겁스 무한세계의 '보나파르트' 세계들은 나폴레옹이 승리한 평행세계들이다. 그 중에 하나인 보나파르트-6은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나 통일 이탈리아를 건국했다!'''[84] 또한 레비아탄이라는 세계에서는 바다에서 아틀란티스인들이 갑툭튀해서 프랑스가 시망하자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지대에서 모래제국을 건국했다.
한국에서 나폴레옹 관련 영화를 하면 주로 양지운이 더빙을 맡는다.
코드 기어스 시리즈에서는 현실 역사와 달리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관광보내고 영국에 상륙[85] ,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신대륙으로 피난케 함으로써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원래 설정으로는 전 유럽의 황제가 되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으나, 코드 기어스 망국의 아키토에선 황제가 되지 않고 공화정의 장군으로서 살았던 걸로 설정이 변경된 것 같다.
베르사유의 장미 6권(완전판 기준)에서 지나가는 포병장교로 잠시 등장한다. 스무 살의 라 페르 포병연대 소위로 나온다. 죄드폼의 맹세 사건이 터져서 심란해 하던 오스칼이 스쳐 지나가다 눈빛에 매우 놀라 식은 땀을 다 흘리며 나폴레옹을 불러세운 후 관등성명을 묻고 그 이름을 기억해둔다. 이후 다시 식은 땀을 흘리며 '사람의 몸을 얼어붙게 할 것 같은 그런 눈빛이야..! 보통 사람의 눈이 아냐'('앙드레, 저 눈빛 봤니? 저건 독수리의 눈빛이야. 제왕의 눈이야!'라고 말했다는 말도 있다.')이후 에필로그에서 황제에 즉위한 모습으로 한 컷 등장한다.
그리고 이케다 리요코는 베르사유의 장미 연재를 마친 후 '황제 나폴레옹'이라는 만화책을 냈다.
라이트노벨 악성소녀에서는 나폴레옹이 초능력을 지닌 마왕으로 나온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는 하이든이 근육 떡대인 격투가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찍은 이후 나폴레옹에 관한 대작을 찍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지만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1970년 작인 워털루가 쫄딱 망하면서 투자를 못 받아 계속 연기했고 결국 죽을 때까지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나폴레옹 역으론 잭 니콜슨이 낙점된 상태였는데 잭 니콜슨은 큐브릭에게 나폴레옹 역을 제안받고 매우 기뻐했으며 큐브릭이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그 전에 큐브릭이 세상을 떠나면서 무산되었지만 니콜슨은 이 인연으로 샤이닝의 잭 토렌스 역으로 출연하게 된다.[86]
키아누 리브스가 이름없던 시절 나온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에서는 우연히 타임머신에 타게 되어 현대 미국으로 오는데 현대 세계에서 바로 수영장[87] 의 미끄럼틀에 반해 종일 그것만 타고 논다. 두 주인공이 친척 아이에게 부탁하여 맡기는데 나중에 그 아이가 "형, 저 바보 남잔 대체 누구야?"라고 질문한다. 주인공 둘이 나폴레옹이라고 답변하자 "웃기지마! 미끄럼틀만 종일 타고 아이스크림만 신나게 먹는 저런 띨띨이가 나폴레옹이라고?"라며 전혀 믿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위인들이 죄다 맛탱이가 가서 현대 미국에서 활약하긴 한다. 칭기즈 칸은 백화점에서 마네킹을 신나게 부수고 잔 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를 칭하며 신나게 에어로빅을 춤추듯 하다가 진짜 에어로빅 강사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며 빌리 더 키드는 백화점에서 미치도록 총을 천장에 쏘다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고 베토벤은 전자 키보드를 신나게 연주하며 프로이트는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정신분석학을 연설하는데 사람들은 어안이벙벙하게 바라보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백화점 안에서 연설하는데 사람들이 무슨 미친 놈 바라보듯이 한다.
나폴레옹 전쟁이 배경인 혼블로워에서는 주인공이 영국 해군이다보니 절대악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 혼블로워의 활약은 나폴레옹에게 치명타를 준다.
199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뮤지컬 나폴레옹이 초연이 올라왔고 큰 인기를 끌었다. 2017년 7월, 라이센스 공연이 샤롯데시어터에서 올라왔다. 나폴레옹 역에는 한지상, 임태경, 마이클 리가 캐스팅됐다. 조세핀 역에는 정선아(뮤지컬 배우), 박혜나, 홍서영이 캐스팅 됐다. 여기서 특히 한지상의 광기 넘치는 나폴레옹 연기가 압권이다. 다만 여기에서의 나폴레옹은 전쟁광의 이미지만 보이고, 정치면에서는 시종 일관 탈레랑에게 이용당하는 것으로 나와, 실제 나폴레옹보다 못한 모습으로 묘사돼 나폴레옹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고 파리로 진격할 때, 권력의 변화에 따라 태도가 달라졌던 대표적인 당시 신문이였던,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 시민들과 혁명 정부를 지지해 시민들의 지지를 얻은 신문이였지만 나폴레옹 집권 후 변절해 철저한 친나폴레옹 신문을 표방하다가 나폴레옹의 엘바섬 유배와 루이 18세의 등극 이후 철저한 반나폴레옹 신문으로 돌아섰다가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후 다시 극적으로 입장을 바꾼 '모니퇴르'지를 비꼬는 유머가 있다. 버전은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호칭이 멸칭에서 점점 경칭으로 바뀐다는 것이 포인트다.
Fate 시리즈에서 아처 클래스로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나폴레옹(Fate 시리즈) 참조.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대한민국의 광고에서도 몇 번 활용되었는데 몇몇 광고들은 그냥 선전에만 관심을 두고 고증(따위는 쿨하게 씹어 버려서 역덕후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다.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 단락에 제시된 광고는 영상 밑 주석에도 적혀 있듯이 보나파르트 집안이 아무리 깡촌 코르시카 출신이라 해도 엄연히 귀족 가문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어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과 다른 가정을 하고 있다.
365mc병원 지면광고(지하철) 중 지방이가 나폴레옹 코스프레를 한 것이 있다. '''빼볼래용'''이라는 광고문구가 압권이다.
중국 SRPG인 성녀전기에서는 주인공 폴린 보나파르트의 오빠로 등장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어 사형을 면하고 혁명파와 거래를 한 세계관이라 폴린은 실제 역사와는 달리 성녀의 힘을 지닌 군인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나폴레옹은 작중 주인공을 돕는 오빠의 포지션으로 나오지만 초반에는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다. 아예 뮈라나 란 같은 캐릭터들은 폴린의 부하로 활동한다. 중간에 나오는 퀘스트에서는 조세핀과 데이트 계획을 짠다는게 군사 회의를 여는 것처럼 변하는 개그를 보여준다.[88] 그러나 여전히 유능한 군인인데다가 자코뱅 파에 속해 있어 동생을 돕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도미네이션즈에서 영웅 및 이각모가 전설 유물로 등장한다.
Deadliest Warrior란 프로그램에서 조지 워싱턴과 5:5로 싸웠으나 패배했다.해당 영상
이효석의 단편소설 중 나폴레옹의 최후를 묘사한 <황제>라는 작품이 있다.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임종을 맞이한 나폴레옹이 목사와 3명의 의사, 시녀, 시종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형식의 1인칭 소설. 화자인 나폴레옹이 죽음을 앞둔 상황에 처했다는 점을 반영해서인지 특이하게 작품의 모든 문장에 쉼표와 마침표 등의 문장 부호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89]
리들리 스콧이 연출, 호아킨 피닉스 주연을 맡은 나폴레옹 이야기를 그릴 '''킷백'''을 제작한다.# 애플 TV+가 제작 맡고, 2022년 촬영 가진다.#
12. 어록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Impossible>> n'est pas français."'''[90]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91]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92]
[93] '''
'''신은 가장 강한 포병대가 있는 군의 편이다.'''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내 손 안에 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나는 내가 가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가 뿌려지길 원한다.'''[94]
'''당대 사상의 선두에서 나아가면, 사상이 당신을 따르고 지지할 것이다. 당대 사상을 뒤따라 가면, 사상이 당신을 끌고 갈 것이다. 당대 사상을 거슬러 가면, 사상이 당신을 전복시킬 것이다.'''[95]
'''오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96]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La mort n'est rien, mais vivre vaincu et sans gloire, c'est mourir tous les jours.'''
'''''뛰어난 두 명의 지휘를 받는 군대보다는, 어리석을지언정 한 명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낫다."'''[97]
"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
"La victoire appartient au plus persévérant."
''승리를 원한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적을 이길 수 없다면 적과 합류하라."[98]
"내가 쓰러진들 혁명가들에게 프랑스를 넘겨주진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서 내가 프랑스를 구해내지 않았던가?"
'''대혁명은 끝났다. 내가 대혁명이다.'''
"내 가족은 매춘부 가족이란 말인가!"[99]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오."[100]
"나의 치세는 내가 더는 강력하지 못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를 멈추는 날 끝날 것이다.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한 뼘의 땅도 넘겨주지 않겠다. 왕좌에 앉을 운명을 타고난 그대의 군주들은 큰 마음 먹고 스무번 패해도 되고 언제나 수도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출세한 군인이기 때문이다."[101]
"그대는 군인의 정신이 어떤지 전혀 모르오. 나는 전장에서 성장했소. 나 같은 사람은 백만명의 목숨도 개의치 않소."[102]
"정복자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잔인해야 한다. 내가 좀더 잔인했더라면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다."[103]
'''소설 같은 나의 생애여!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한 연민이 물결칠 것이다.'''[104]
"내가 권력을 찬탈했다고? 나는 그 누구에게서도 왕권을 뺏지 않았어. 나는 그저 시궁창에 버려진 왕관을 주워서,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 것 뿐이야. 그리고 나는 그 왕관을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머리에 썼어. 나는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한 거야."[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