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1798년 1월 19일
프랑스 제1공화국 알자스-로렌 몽펠리에
'''사망'''
1857년 9월 5일 (향년 59세)
프랑스 제2제국 파리
'''국적'''
프랑스 제2제국
'''신장'''
159cm
'''학력'''
몽펠리에 대학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1. 최초의 사회학자
2. 생애 및 경력
2.1. 사상적 특징
2.2. 여담
2.3. 영향을 미친 사람
3.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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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사회학자


과학으로부터 예측이, 예측으로부터 행동이 나온다(Savoir pour prevoir et prevoir pour pouvoir.)

〈실증철학〉 중

실증주의의 신성한 공식은 다음과 같다. 원리는 사랑이며, 기본은 질서이고, 목표는 진보이다.(La formule sacrée du positivisme : l'amour pour principe, l'ordre pour base, et le progrès pour but.)[1]

사회학의 시조. 실증주의자. 주저에 "실증철학"이 있다. (1798~1857)
사회학자로 분류되지만, 철학자이기도 하다.

2. 생애 및 경력


어려서부터 학문적으로 총명함을 보였고, 프랑스의 이공계 최고 명문인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였으나, 교수와 마찰을 빚고 중퇴하였다. 그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데, 처음에 공상적 사회주의 시조인 앙리 생시몽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 여러 가지로 생시몽과는 사상의 방향이 달라 결별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해 나간다. 학벌주의가 지배하던 프랑스 학계에서 졸업장을 못 얻고 중퇴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연구직은 갖기 힘들었고, 자신의 아파트에 수강생을 모아서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는 식으로 학술활동을 해나갔다.
훗날의 엄청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가난에 찌든 불우한 인생을 살았고,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업적이 인정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국인 프랑스보다는 영국으로서, 서신으로 교류하던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영국학계에 큰 자극을 줌으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도 실증주의는 프랑스 철학보다는 영미사상의 주류가 되고 있다.

2.1. 사상적 특징


프랑스 출신으로 최초로 사회학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다. 프랑스 혁명의 폭풍 속에서 성장한 콩트는 혁명의 정당성이나 불가피성을 논하기 앞서, 그로 인한 사회와 정치의 혼란에 맞서야 했다. 그는 사회를 '''현대적 의미의 개인이 출현할 수 있는 토양'''으로 규정했는데, 즉 사회의 성격이 어떠한지에 따라 개인의 속성이 결정된다는 논리이다. 사회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테제를 처음으로 정식화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후의 사회학이 스스로를 근대와 함께 태동한, 근대(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콩트의 주장이 영향을 주었다.
콩트 사회학의 가장 큰 특징은 실증주의적 태도이다. 콩트는 사회의 무질서를 두고 사회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지(知)적 무능력의 결과로 인식하여,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최초로 주장했다. 콩트에 의하면 과학적인 인식을 위해 사회학 연구는 자연과학에서 그 성공이 확인된 '''관찰, 실험, 비교'''의 세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비교로서, 이는 비교를 통해 인간이 절대주의적인 관점을 벗어나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의 물리 법칙과 마찬가지로 사회에도 모종의 '''법칙'''이 존재하고, 그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인류의 발전 과정을 설명함과 동시에 미래의 진행 과정을 예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사회에 대한 학문은 자연 법칙에 대한 학문인 물리학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그는 자신이 주창하고자 하는 학문을 사회물리학이라 명명하였다. 여기서 후에 물리학이라는 단어가 빠짐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널리 쓰는 '''사회학'''이 탄생한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콩트가 말하는 '실증주의'의 개념은 현재의 실증주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콩트가 스스로 정의하기에 자신의 실증주의적 태도란 '공상주의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실제적인 것', '맞닥뜨린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건전한 성찰에 필요한 진정한 목적'을 의미한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이 실증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적 사실을 다루는 데 있어 자신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경험과학적으로 엄격하게 사실과 관찰을 중시'한다는 의미이다. 이 당시 콩트가 실증주의라고 부른 것은 사회학을 '''과학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 쓰이는 의미에서의 실증주의는 콩트의 사회학 전통이 아닌 막스 베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다만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것과 구분이 모호하던 초기 사회학의 발생에서 콩트가 과학적인 태도를 주장하였기에 사회학이 독립 분과로 나타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콩트는 사회 질서(구조)와 사회 변동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자신의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두고 각각 사회 정학(social statics)과 사회 동학(social dynamics)이라 일컫기도 한다. 전자는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각각 생물처럼 유기적인 특성을 가지고 결합하여 전체를 이룬다는 전제가 깔려있으며, 후자에는 그럼에도 사회는 역사를 가지고 이를 반추하며 변화하기에 생물과는 구분된다는 주장이 실려있다.
이른바 실증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정치적 성향으로 가르기를 꺼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누자면 콩트는 사회 동학에 담긴 사회의 역동적인 측면보다는, 유기체로서의 사회를 더 중시하는 보수적 경향을 보였다. 이는 그가 겪었던 대혁명 이후의 혼란상에 일부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반드시 보수적인 인물인 것만은 아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중에는 콩도르세나 앙리 드 생시몽이 있는데, 이들은 적어도 당시에는 가장 대표적인 진보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콩트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욱 철저한 변혁이 일어나, 더 높은 단계로의 발전이 일어날 것이라 보기도 했다.
콩트의 연구결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3단계 진화법칙'''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중세 이전의 '''신학적 단계''' → 중세의 '''형이상학적 단계''' → 19세기 이후의 '''실증적 단계'''로 구분했다. 이는 지극히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이론으로, 많은 경우 유물론을 전제하는 실증주의자가 향한 결론치고는 이색적인 데가 있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인식의 발전이 사회 질서를 가져오므로 인류 역사는 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선형적 발전 테제가 대부분 기각된 오늘날엔 콩트의 연구 결과가 자주 인용되지는 않는다. 그가 사회학의 시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고전 사회학자들에 비해 대중적으로 덜 유명한 것을 보면...(안습)
비판적 사고라는 모토 하에 사상적 아버지를 굴러다니는 돌만큼도 숭상하지 않는 사회학의 풍토에서, 여전히 콩트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사회학을 철학이 아닌 과학으로 바라보고, 과학적 방법론을 이용한 학문으로서 사회학을 정립하고자 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로소 철학 혹은 협의의 인문학과 분리된 인간(사회)에 대한 학문으로서 사회학의 독자적인 자리매김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뒤르켐, 베버 등을 거치며 사회학은 사회과학으로 더욱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다.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사회과학이 과학인지 그리고 과학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장구한 과학철학 논쟁과, 사회학과 철학, 경제학, 심리학, 물리학 등 인접학문들끼리의 영역 다툼, 그리고 사회학 제국주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근대 이후 전개되어온 사회학 관련 논쟁들을 볼 때 사회학은 물론이거니와 지성계 전체가 콩트에게 나름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2. 여담


사회물리학이 사회학이 된 데에는 콩트의 작은 공명심이 영향을 주었다. 콩트가 벨기에의 사회통계학자 아돌프 께틀레(Adolphe Quetelet)가 사회물리학이라는 용어를 도용하고 있다고 생각한 끝에, 자신만의 용어를 만들기 위해 새롭게 조형한 용어가 바로 사회학이다. 오늘날에 와서 사회물리학이라는 단어가 물리학 기반의 사회 연구자들에 의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면 콩트가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해야할까.
콩트는 친구나 동료 연구자가 얼마 없었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발전에 한계가 되었다. 다른 분과 학문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학술체계에 자신들의 분야를 모두 포섭하려는 콩트의 시도를 경멸했다고.
물론 친구가 없는 게 이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인간성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대표적인 일로는, 자신을 1년동안 무상으로 후원해 주던 존 스튜어트 밀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후원을 중단하자 그 동안 받은 후원은 아랑곳않고 밀을 비난하고 모욕하며 후원을 재개하라는 편지를 보낸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때 밀은 자신의 다른 친구들에게 콩트의 후원을 이어줄 것을 부탁하고 다니고 있었다.
학생 시절엔 요즘 식으로 따지면 운동권이었다. 정확히는 완고한 공화파. 젊었을 적 활동의 영향인지 그는 평생 진보와 질서 양 축을 하나의 체계 안에 통합시키고자 시도했다. 역시나 싸움닭 기질이 있었는데,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자신의 적들과 싸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류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흔 일곱 살 되던 해에 클로틸드라는 서른 살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하필 플라토닉 러브가 지속된 지 1년만에 클로틸드가 폐결핵으로 사망. 너무 큰 드라마를 찍어서 성격이 바뀐 건지, 남은 평생을 보편적 사랑의 힘을 전파하는 대사제(...)가 되기로 했다. 차가운 도시의 실증주의자 콩트의 이런 급격한 변화에 그를 지지하던 지적 동료들도 떠나가버렸지만, 새롭게 생긴 제자들에 콩트는 만족했다고.
1835년에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것을 가지고 풀려고 해도 절대 해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는 문제다." 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분광기를 이용한 스펙트럼 분석을 통해 별의 구성성분을 알 수 있게 되었다.[2] 이 발언 때문에 콩트는 현재까지도 천문학자들에게 많이 까이고 있다.

2.3. 영향을 미친 사람



3. 관련항목



[1] 이 구절에서 브라질 국기의 모토인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가 나왔다.[2] 콩트가 죽고 2년 뒤, 분젠과 키르히호프가 태양광의 스펙트럼을 분석해 태양에도 지구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펑범한 원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만 수소가 주된 구성성분임을 알아낸 것은 좀 더 훗날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