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 마리조제프폴이브로크질베르 뒤모티에[1]
Marie-Joseph-Paul-Yves-Roch-Gilbert du Motier, Marquis de La Fayette
(1757년 9월 6일 ~ 1834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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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어린 시절
2.2. 미국 독립 전쟁
2.3. 프랑스 혁명
2.4. 몰락
2.5. 샹 드 마르스의 학살
2.7. 말년
3. 기타
4. 평가


1. 개요


Le héros des deux mondes

'''두 대륙의 영웅'''

Inssurection is the most sacred of the rights and the most indispensible of duties

'''저항은 가장 중요한 권리이자 가장 필수적인 의무이다'''[2]

프랑스군인, 사상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브랜디와인 전투와 글로스터 전투, 배런힐 전투, 몬머스 전투, 로드아일랜드 전투, 그린스프링 전투, 요크타운 전투 등에서 공적을 올렸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서 국민위병의 지휘를 맡아 사령관이 되었다. 유럽대륙 최초의 인권선언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초안을 쓰는 데 참여했다.
프랑스 혁명에 관련된 인물 중 몇 안되는 장수한 인물이다. 수많은 혁명가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지는 와중에서도, 라파에트는 대혁명, 혁명 전쟁, 나폴레옹 집권, 7월 혁명, 6월 봉기를 모두 보았고 이러한 사건의 대부분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2. 생애



2.1. 출생과 어린 시절


프랑스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미셸 루이 크리스토프 뒤모티에는 라파예트가 2살 때 7년 전쟁에 종군하였는데, 1759년 8월 1일 벌어진 전투인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대패했고 이 때 라파예트의 아버지도 포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 후 후작의 지위와 영지는 모두 어린 라파예트에게 주어졌는데 어머니인 마리 루이즈는 어린 라파예트를 내버려둔 채 파리의 뤽샹부르 궁전과 외가인 리비에르 영지에 머물렀고 아들을 찾아올 때는 드물었다. 라파예트는 11살이 되자 파리의 콜레쥬 뒤 플레시스(Collège du Plessis)에 입학했다.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라파예트가 12살이 된 1770년 4월 3일 숨을 거두었으며 라파예트의 외조부인 리비에르 후작 또한 얼마 뒤 사망했다. 친지들의 잇달은 죽음 이후 어린 라파예트는 자신의 앞으로 120,000리브르의 연간 소득을 상속받게 되었다.
14세 때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였고 얼마 뒤, 장 루이즈 폴 프랑수아 데 노아이유 공작의 딸인 아드리엔느 드 노아이유와 혼담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노아이유 공작의 부인의 반대에 부딪혀 라파예트와 아드리엔느가 좀 더 성장한 이후 결혼을 시키기로 합의를 보았고, 이후 좀 더 성장한 후인 1774년 4월 11일 라파예트와 아드리엔느는 결혼식을 올렸다.

2.2. 미국 독립 전쟁


1776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라파예트는 식민지 편에 서서 참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라파예트는 아버지가 영국군에게 죽었기 때문에 영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식민지인"들에게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프랑스는 전쟁에 참전할 것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파예트는 개인으로 식민지로 건너가야 했다. 당시 대륙 의회는 라파예트를 지원할 돈이 없었으므로 그는 가족과 정부의 만류를 무릅쓰고 '''사재를 털어서''' 라 빅투아르(La Victoire, 프랑스어로 승리라는 뜻으로, 영어의 Victory와 같은 말이다.)라는 배를 구입하고 몇몇 프랑스 육군 장교 동료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라파예트는 도착하고 나서 영어를 조금씩 배웠다.
라파예트는 대륙 의회와 접촉하여 무보수로 육군 장교로서 봉사하기로 하였고, 식민지군 사령관 조지 워싱턴 장군과도 만났다. 라파예트는 식민지군 육군 소속으로 활약하였으며 1781년 요크 타운 전투에서 중요한 공적을 세웠다. 이듬해 프랑스로 귀국하여 "신대륙의 영웅"으로 불리며 명성을 얻었다.

2.3. 프랑스 혁명


1789년에 삼부회에서 제 2신분(귀족) 대표로 선출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을 경험한 라파예트는 귀족이었지만 프랑스의 절대왕정입헌군주제로 개혁해야 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제 2신분이면서도 제 3신분의 편에 서서 의회 정치의 실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라파예트는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다음날, 새롭게 신설된 국민위병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와 함께 프랑스 인권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 때 라파예트의 권력과 명성은 절정에 도달했다.
하지만 파리의 치안 유지라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은 뒤 실패를 저질렀고, 명성과 권력은 실추되었다.

2.4. 몰락


라파예트를 사령관으로 한 국민위병은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 사건에서는 여성을 중심으로 한 군중들이 루이 16세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로 연행하는 것, 군중들이 근위병을 살해하는 것과 궁전을 파괴, 약탈하는 것을 방관했다.
1791년 6월 20일, 루이 16세가 파리에서 도망쳐 오스트리아로 가다가 붙잡힌 바렌 사건이 발생하였다. 라파예트는 경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것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의회가 파벌로 나누어지면서 라파예트는 온건하고 왕정 유지와 입헌군주제의 실현을 요구하는 푀양파(Feuillant)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롱드파자코뱅파가 세력을 키우는 가운데 푀양파는 점점 몰락해 갔다.

2.5. 샹 드 마르스의 학살


1791년 7월 17일, 파리 서쪽 샹 드 마르스 연병장에서 자코뱅파가 집회를 열고 약 5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파리 시장 바이와 국민위병 사령관 라파예트는 국민위병을 이끌고 나타나 해산을 명령했다. 집회는 의회를 불신임 하는 서명을 모으는 것이었는데, 의외로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군대가 나타나면서 긴장감이 조성되고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져 살벌함이 가속됐다.
이에 바이는 위협 사격을 명령했다. 5만명이 북적거리는 연병장 안에서 사태 파악이 힘든 군중들이 총성을 듣자 대규모 공황을 일으켰다. 군중들은 혼잡 상태에서 도망쳤다. 총격이 몇번 있었는지, 수평 사격이었는지, 위협 사격이었을 뿐이었는지는 기록에 따라서 다르지만, 어쨌든 민중에게 국민위병이 발포한 것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얼마나 희생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따라서 다른데, 10여명 남짓에서 수십명까지로 보고 있다. 정말로 군중을 향한 총격이 있었는지, 공황 상태의 인파에 따른 대량 압사 등 다른 까닭인지는 확실치 않다. 당시에는 소문이 퍼지면서 라파예트가 수천명씩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되어 라파예트의 정치 생명은 완전히 끝장났다. 라파예트는 국민위병 사령관을 사임했다.

2.6. 프랑스 혁명전쟁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군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프랑스군은 약체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전연패 했으며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왕권이 정지되고 공화국이 선포, 푀양파 의원들이 왕당파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체포되어 단두대로 끌려가자 라파예트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왕당파로 간주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낀 라파예트와 그의 휘하에서 종군했던 일부 장교들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벨기에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탈출했으나 도중 오스트리아 군대에 체포되어, 포로로서 5년 간 옥중 생활을 보낸 다음[3] 1799년 귀국했으나 시대는 이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잡은 상태였고, 흘러간 인물로 전락한 라파예트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간의 명성을 고려해서 라파예트를 복권시키는 데 좀 도움을 주긴 했지만[4] 야심찬 젊은 장군과 라파예트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라파예트는 나폴레옹 정부에 참여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퇴 생활을 보냈다.

2.7. 말년


1824년, 미국 독립 50주년을 맞아서 제임스 먼로 대통령과 의회에서 라파예트를 국빈으로서 미국에 초청했다.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 그를 기억해주고 있었고, 15개월 동안 미국 각지를 돌면서 환영을 받았다.
1830년, 7월 혁명이 발발하자 다시 국민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루이필리프를 지지했지만, 1831년 해임되고 하야했다.
1832년, 1832년 6월 봉기의 발단이 된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었다. 6월 봉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도 언급된다.
1834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3. 기타


사후 100여년 후인 2002년, "미국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라파예트는 이미 독립전쟁 당시에 여러 주의 결의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생전에 라파예트는 "프랑스에서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이미 미국 시민이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미국에는 Lafayette 혹은 La Fayatte로 명명된 지명이 다수 있다. [5]
그의 장남은 조지 워싱턴의 이름을 따서 조르주 워싱턴 드라파예트라 이름 붙였다. 아들은 프랑스 혁명 시기 미국으로 보내저서 안전하게 양육되다가 1799년에 프랑스로 복귀해서 나폴레옹 군대에 입대해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 아일라우 전투에서 에마뉘엘 그루시 장군의 보좌관으로 활약했으나 아버지와 나폴레옹의 사이가 좋지 못했기에 결국 승진에 한계를 느끼고 1807년 사생활 문제로 군대에서 전역 했다. 이후 일관되게 자유주의자로 활약했고 정치 활동을 하면서 프랑스 2월 혁명에도 가담했다.
프랑스 해군의 현용 호위함 라파예트급 1번함인 라파예트와 1991년 8월 12일 퇴역한 미 해군의 라파예트급 전략원잠 1번함인 USS 라파예트는 둘 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또한, 미 해군에서 쓰던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의 6번함인 CVL-27 랭글리는 미프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1951년 프랑스 해군에 인도되어 R96 라파예트라고 재명명되어 약 10여년간 쓰였다. 우연의 일치이기는 하지만 두 대륙의 영웅이라는 이명다운 적절한 작명이다.

4. 평가


미국프랑스에서 평가가 극단으로 다른 인물이다. 미국에서는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받지만, 프랑스에서는 처음에는 그런 평가를 받았으나 혁명기의 삽질 때문에 말년에는 평가가 박하다.
훗날 프랑스가 침공을 받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국이던 미국에서는 참전하자는 여론이 높았고, 일부 청년들은 직접 개인 자격으로 프랑스에 와서 의용군에 입대하기도 했는데 이때문에 미국인 의용군으로 구성된 전투비행단에 '라파예트 비행대(Lafayette escadrille)'란 이름이 붙기도 했다. 미국이 참전한 뒤에는 퍼싱 장군과 참모진이 파리에 있는 라파예트 묘지를 참배했고 퍼싱의 부관이던 스탠턴은 "라파예트여 우리가 돌아왔습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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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이 비행단의 사연이 Fly Boys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국내에는 비행단의 이름을 따 "라파예트" 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제임스 프랭코 주연. 실제 1차 세계대전 때 활동한 미국인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일본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삼부회 모집 때 귀족이면서도 평민들을 지지한 이력을 반영해서,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평민의원(제3신분)들이 농성하는 에피소드에서 인상깊게 활약한다. 루이16세의 강제 해산명령을 받은 근위대(원래 근위대장은 오스칼이었으나 사임하고 위병대장으로 전근했고, 후임으로 부대장이었던 제로델이 근위대장을 맡음.)가 평민의원들을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라파예트 후작이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소수의 귀족의원(제2신분)들과 함께 칼을 빼들고 평민의원들을 보호한다. 이런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에서 오스칼이 급히 개입하여 근위대의 제로델을 설득하고, 제로델은 "오늘 제가 물러가는 것은 오직 오스칼님을 위해서입니다."라고 고백하고 근위대를 철수시킨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작 영화 <프랑스 혁명>에서는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그랜트 박사로 유명한 샘 닐이 연기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어쌔신 크리드 3의 트레일러에도 나온다.[3] 그의 포로생활은 가혹한 면이 많았다. 혁명 전부터 가졌던 그의 귀족작위와 고위 군 경력과 계급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를 각각 감옥에 보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그를 핵심 혁명분자로 간주하여 대우를 장기간 독방 감금과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우는 식(감금 초기)으로 대했다. 처음엔 프로이센이 그를 억류했지만 1795년 바젤 조약으로 적대관계가 해제되었는데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를 풀어주진 않고 오스트리아에게 인계했다. 1795년 그의 아내가 프란츠 2세에게 간청하여 그녀와 두 딸이 자진해서 감옥으로 들어와 라파예트와 같이 생활했다.[4]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의 내용 중 라파예트 일가 및 같이 억류중였던 일부 고위 장교들의 석방이 포함되어있었다. 다만 라파예트는 여전히 불안정했던 프랑스 국내로 귀국하지 않고 네덜란드에서 2년 동안 지내다 나폴레옹이 집권한 직후 귀국했다.[5] 미국식으로는 보통 라피엣이라고 부르며, 루이지애나주의 Lafayette과 퍼듀 대학교가 소재한 인디애나 주의 West Lafayette, 그리고 워싱턴 DC에 있는 백악관 앞의 광장 Lafayette Square가 가장 유명한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