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2공화국

 



'''프랑스 공화국'''
'''République franç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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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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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 1852년
국가
지롱드당의 노래
위치
오늘날의 프랑스
수도
파리
정치체제
공화제
국가원수
대통령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언어
프랑스어
종교
가톨릭
민족
프랑스인
주요사건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1848년 건국
1852년 폐지
통화
프랑
성립 이전
7월 왕정
멸망 이후
프랑스 제2제국
1. 개요
2. 역사
2.1. 새로운 제도의 정착과 낙관주의 (1848년 2월 24일 - 1848년 3월말)
2.2. 불안정한 사회적 분위기와 중도보수계열의 실패 (1848년 4월초 - 1851년 중순)
2.3. 루이나폴레옹의 독재 (1851년 - 1852년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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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2월 혁명으로 루이필리프를 몰아내고 세워진 정권이다.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나 1851년 친위 쿠데타로 자신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1852년에 폐지된다.

2. 역사



2.1. 새로운 제도의 정착과 낙관주의 (1848년 2월 24일 - 1848년 3월말)


1848년 2월 파리의 시민들은 노동자 권리와 보통선거를 [1] 요구하면서 봉기를 일으켰고, 며칠에 걸친 시가전 끝에 루이필리프가 퇴위하면서 7월 왕정은 무너진다.
루이필리프 본인은 왕위를 손자에게 양도하길 바랬으나, 혁명가들은 공식적으로 임시정부공화정을 선포한다. 이렇게 급조된 임시정부알퐁스 드라마르틴 (외무부 장관), 가르니에 파제스 (경제부 장관), 아라고 (해군 통솔자) 등 온건공화파, 마라스뜨, 르드뤼 롤랭 (내무부 장관) 등 급진공화파와 루이 블랑 또는 알베르와 같은 사회주의자들 등 다양한 정치적 성향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능력은 뛰어났으나 르드뤼 롤랭과 라마르틴을 제외한 멤버들은 정치 경험이 적거나 전무했다. 때문에 정치적 중심이 부족했고, 이상적인 정치를 꿈꾸었으나 위기에 취약했다. 이는 제2공화국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자리잡는다.
투표권을 둘러싼 시위가 혁명의 출발점이었던만큼 전과자들을 제외한 모든 21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덕분에 24만명이던 유권자가 하루아침에 940만명으로 40배 가까이 늘어났다. 한편 국가의 상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는데,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적기를 국기로 쓸 것을 요구했지만,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라마르틴은 이를 거부하고 삼색기를 계속해서 국기로 유지했다. 루이필리프시절에는 양원제를 도입하였으나 제2공화국은 단원제를 도입했다. 유권자들은 90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고, 이 의회는 초기부터 상당히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해갔다. 7월 왕정 때 제한되었던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복구시켰고, 노예제 철폐[2], 귀족 작위 폐지, 사형 폐지와 해군에서의 체형 폐지 등 당시로써는 신선했던 인권 개선 정책을 펼쳤다. 위 개혁들은 새로운 정부에 희망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기여한다. 또 지금까지 많은 분란을 일으켰던 교권 탄압을 중단하고, 교회에게 국민 교육의 권리를 줘, 사회적 동요를 일시적으로 가라앉히는데 성공한다.
새로운 공화정은 민중들의 피로 쟁취한 공화정이었기에 정부는 기본적으로 대중들[3]의 눈치를 많이 볼 수 밖에 없었다. 또 생 시몽, 샤를 푸리에 등 사상가들을 선두로 한 이상적 사회주의가 사회를 휩쓸고 있었고, 국민의 손으로 공화국을 건설했다는 점 때문에 임시정부를 포함한 전 프랑스가 낙관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프랑스 "자유와 평등 (Liberté, égalité)" 슬로건의 박애 (fraternité)가 덧붙여지는 것도 이때부터다. 임시정부는 1846년부터 정치를 마비시켰던 경제적 불황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하는데: 예를 들면 직접 세금을 크게 인상해 정부 국고를 든든히 하고, 실업 상태에 놓인 노동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직업 알선소(ateliers nationaux)를 설치한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 알베르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허용, 근로시간 제한 (파리에서는 10시간, 지방에서는 12시간)같은 제도를 시행한다.

2.2. 불안정한 사회적 분위기와 중도보수계열의 실패 (1848년 4월초 - 1851년 중순)


하지만 이러한 낙관주의적 공기는 임시정부 정책 발표 이후 채 1달도 안 되어 소산되기 시작한다.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점차 "계급투쟁"을 시작하고, 이러한 급진적인 움직임은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지방 주민들과 부르주아 계층을 상당히 자극해, 중도보수 계열들이 의회를 장악한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5월 15일 의회 점거 사건으로 극에 달한다. 당시 프로이센령 폴란드의 독립운동가들이 프로이센 군대에게 학살을 당하자, 프랑스 대외정치에 항시 불만족스러웠던 파리의 급진공화주의자들이 폴란드인들에게 지원병력을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작성한다. 임시정부가 이 청원서를 묵살하자, 이내 블랑키, 바르베스, 라스파이, 알베르 등이 15만명에 육박하는 시위자들과 함께 의회에 입성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주동자들은 체포되고, 오히려 역효과만 내어 지속적인 불안정에 질린 국민들이 중도보수 계열로 관심을 돌리는데 일조한다.
중도보수 계열들이 장악한 의회는 원내와 정부 내의 급진좌파들을 축출해 내는 한편, 이들이 치안 불안의 온상이자 재정적으로 부담으로 여기고 있던 직업 알선소까지 폐쇄해 버리는 초강수를 둔다. 발상 초기의 직업 알선소는 이름 그대로 직업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기관에 불과했는데, 심각한 관료주의와 비효율성으로 실업자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결국 정부는 방향을 틀어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기관으로 변질시켰다. 이러한 행위 때문에 국가 입장에서는 엄청난 금액을 부담해야 했다. 직업 알선소의 지원을 받았던 25세 미만의 실업자들에게는 입대하고, 25세 이상의 실업자들에게는 귀향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분노한 실업자들은 6월 23일부터 25일까지 6월 폭동이라고 불리는 무장봉기를 파리 시내에서 일으킨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권을 권위주의적 공화파인 카베냑 장군에게 맡긴다. 결국 폭동은 정규군에게 진압되는데 사상자가 1만 명이 넘어갈 정도로 많은 피가 흘렀다. 정부는 6월 폭동을 전환점으로 결정적으로 우파로 전향하게 되고, 보수파들은 소유권 보호, 가톨릭 윤리의식과 가족을 모토로 한 "안정당"(Parti de l'Ordre)을 창당한다. 정부는 황급히 안정과 권력의 분립을 염두에 둔 새로운 헌법을 작성한다.

2.3. 루이나폴레옹의 독재 (1851년 - 1852년 초반)


이후 새로운 정부를 이끌어나갈 수반인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1848년 12월 10일 프랑스 전역에서 열렸다. 6월 폭동을 진압한 까베냑, 정부 출범 당시 정신적 지주였던 라마르틴듣보잡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샤를루이나폴레옹이 안정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입후보한다.
이후 새로운 정부를 이끌어나갈 수반인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1848년 12월 프랑스 전역에서 열렸는데...

“어디선가, 헤겔은 세계사적으로 몹시 중요한 사건과 인물은 두 번씩 나타난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어야 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에는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그리고 이 듣보잡이 75%라는 압도적인 투표차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나폴레옹이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하나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은 '나폴레옹'이라는 그의 이름에 열광하면서 그가 삼촌처럼 다시 한 번 프랑스를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 줄 것 이라고 믿고 몰표를 던졌으며, 부르주아 계층 역시 반사회주의 경향이 강했던 그를 밀어주었다. 노동자들도 6월 폭동 당시 자신들을 진압한 공화정부에 분노하여 나폴레옹에게 표를 던졌다.
나폴레옹은 초기에는 공화정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했다. 대통령 취임식 때: "신과 의회에게 맹세하건데, 통합적, 불가분의 민주공화국에게 충실할 것이고, 헌법이 내게 과하는 의무를 다하겠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집권 3년차인 1851년 12월 2일에 친위쿠데타[4]를 일으킨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혁명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을 것"을 약속한다. 티에르, 카베냑 등 의원들은 재빨리 반대파를 결성해 대항하지만 6월 폭동의 진압의 트라우마와 반대파의 리더쉽의 부재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대통령의 개헌을 해 임기를 10년으로 늘려버린다. 이어 다음 해에는 자신의 황제 즉위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결과는 당연히 압도적인 찬성.[5] 그렇게 프랑스 제2공화국은 4년만에 끝장나고 나폴레옹이 나폴레옹 3세로 황제 자리에 즉위하면서 프랑스 제2제국이 시작된다.
[1] 7월 왕정에도 선거는 존재했으나, 26세 이상의 200프랑을 납세한 남성들에 한해 있었다. 그 결과로 투표권자들은 극히 소수였고 (프랑스 인구 3천만명 중 24만명에 불과했다) 참정권에서 제외된 무리 중 질서 유지와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국민위병(Garde Nationale)들도 다수 있었다.[2] 물론 프랑스인들을 노예로 썼던 것은 아니고 흑인 노예를 말하는 것이다.[3] 심지어 이 당시 파리의 민중들의 수중에는 무기가 있는 상황이었으니...[4] 이 친위쿠데타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전일에 이루어지도록 일부러 계획했다고 한다.[5] 734만 표가 찬성, 60만표가 반대. 기권이 150만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