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푸리에

 


프랑수아 마리 샤를 푸리에(François Marie Charles Fourier)
1772년 4월 7일 ~ 1837년 10월 10일

1. 개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활동한 프랑스의 사회주의 철학자, 사상가다.
그는 자코뱅내 급진 좌파세력인 몽테뉴파(Montagnards)[1]의 사상적 계승자로 알려져 있으며 급진적 공화주의, 공상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최초의 페미니스트


그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혹은 '''최초의 여성해방론자'''라고 칭해진다.[2] 1837년 그가 발표한 논문『Le Nouveau Monde amoureux』에 여성주의(feminisme)라는 단어가 나온다. [3]
푸리에가 살던 당시에는 장자크 루소의 사상 등을 추종한 급진 진보 사상가들조차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라는 성차별적인 사고가 만연하였고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시대였지만 그는 장자크 루소의 여성관과 낭만주의를 비판하며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재산권과 교육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당시 기준에에는 매우 급진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다.
여성 인권 이슈 외에도 당시 아동을 엄격하게 훈육시켜야 한다고 보았던 근대 교육제도를 비판하며 '아동교육론'을 주장했고 이것은 진보주의 교육과 일상맥통한다.
[1] '산악파'나 '급진자코뱅'으로도 번역한다.[2] 가끔 서구권의 일부 기독교 우파나 극우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은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시초라는 색깔론을 펴기도 하는데, 사실 근세 내지 근대의 진보적 이데올로기 상당수는 계몽주의 전통의 직계이기 때문에 반쯤 말장난인 측면이 있다. 즉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자유주의와 초기 사회주의 모두 철학적 방향성은 매우 다를지언정 뿌리는 같다.[3] 다만 구체적인 페미니즘의 시조는 자유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