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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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서상일(徐相日)

동암(東菴)
본관
대구 서씨
출생
1886년[1] 7월 9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신동
(현 대구광역시 중구 시장북로)
사망
1962년 4월 18일 (향년 75세)
경상북도 대구시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5'''
추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 시절
2.2. 일제 강점기
2.3. 해방 이후
3. 변절 논란
4.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그러나 최근에 변절 논란이 일고 있다.

2. 생애



2.1. 초년 시절


1886년 7월 9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서상면 신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시장북로)에서 서봉기(徐鳳基)의 3남으로 태어났다. 대구 달성학교 보통과 및 고등과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하여 보성전문학교 법률학전문과에 입학한 후 1909년 졸업하였다.
1909년 남형우[2]·안희제[3]·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보성전문 출신으로 서상일과 함께 계몽운동 계열의 독립운동을 편 인사로는 남형우, 신백우, 신성모 등이 있으며, 안희제는 보성학교에 입학했다가 양정학교를 졸업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던 해인 1910년의 9월에는 9인결사동맹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당시 무력외교만을 일삼고 있던 외국정부에 우리나라 청년들의 기백을 보여주고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9개국 공사를 상대로 한일합방을 규탄하는 항의를 표시하려 하였다. 이때 9인결사동맹 단원들은 9개국 공사를 한 사람씩 분담해 한일합병을 규탄하는 선언문을 배부하고 할복자살키로 돼 있었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2.2. 일제 강점기


1913년에는 태궁상점을 설립하고, 남문 안에서 곡물 및 숯장사를 시작했다. 장사가 잘 되자, 1918년 봄 윤상태와 서창규의 보증으로 농공은행에서 1만원을 융통하여 확장하였다. 태궁상점은 서상일, 안희제, 남형우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14일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즈음 만주 안동의 신동상회에서 파견된 문상직(경북 고령 출신)을 만나 임정의 선언문과 강령 문서 10매를 은밀히 전달받고 신상태와 함께 대구, 마산 등지에 배포한 것. 그로 인해 체포되고 '내란죄'로 투옥되었다.[4]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3월에는 만주에서 무기를 반입해 일제 관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잠시 투옥되기도 하였다.
1920년 4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영친왕이방자의 혼례식 행렬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방자가 탄 가마에 사제폭탄을 던져 체포되었다.[5] 그로 인해 혹독한 고문을 받을 때 "이왕 전하나 방자 여왕에게는 원한이 없다. 그들을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일본의 소행이 괘씸해서 엄포를 놓으려 했을 뿐이다"라고 진술했다. 이 사건은 극비에 부쳐져서 관계자와 몇몇 사람 외에는 알지 못했고, 신문에도 물론 보도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서 4년의 금고형을 받았으나 미수범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다.
1921년 8월 미국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동지들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이 청원서에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2년에는 대구에서 조양회관을 설립하고[6] 현재의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문화운동에 힘을 기울이며 타협적인 자치론으로 기울어졌다.[7] 1924년에는 '농림(農林)'과 '민중운동(衆運動)'이란 잡지를 발행하고, 흑우회(黑友會) 계통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23년부터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을 맡아 17년간 운영하였다. 1926년 어느 날에는 신문배달을 하던 고학생 이응창[8]을 만나 훗날 사위로 삼았다.
1929년 10월 18일에는 장진홍의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이 발생했는데, 서상일은 여기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대구경찰서에 투옥돼 다시 한번 옥고를 치렀다.

2.3. 해방 이후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경상북도 결성준비위원을 역임했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에 임명되어 경상북도 대표가 되었다.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부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 국회에서 산업위원장을 겸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중앙불교위원회 박성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2년 권오훈 의원이 주한미군의 오발로 별세하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배은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반대하여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다. 이 때 박기출, 장택상 등과 함께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가를 적극 찬성하였다. 그러나 해당 방안이 조병옥, 김준연, 장면, 박순천의 반대로 무산되자 호헌동지회를 탈퇴했다. 이후 조봉암과 진보정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의견 충돌로 진보당 창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53년 조양회관에서 문을 연 원화여자고등학교가 1955년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혁신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병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지병으로 인하여 의정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다가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터지면서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투병 중이던 1962년 4월 18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서상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동생 서상한도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1920년에 영친왕이방자의 결혼식을 막기 위해 폭탄의거를 계획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3. 변절 논란


2016년 8월 11일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1941년 12월 14일 대구 신사에서 일제의 진주만 공습 성공을 경축하고 징병을 선동하는 대회가 열렸을 때 참석한 대표들 중에는 서상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상일은 1941년 10월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성식에 참석했고 황국신민으로 덴노에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일제의 전쟁에 적극 지원할 것을 결의한 임전보국단의 발기인 및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임전보국단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2009년 친일반민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또한 1939년 8월 23일 <매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서상일은 조선군 사령부가 주최한 병사 부장 회의에 대구 병사부 소속 대표로 참석했다고 한다.#
또 1944년 9월 24일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에 이사로 참석하여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근로 협력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을 맹세하였다. 여기에는 서상일 외에도 윤치호·최린 등이 고문으로, 여운형·최남선·안재홍이 내빈으로 참여하였으며 신태악 상무이사, 이종린, 이종욱·장덕수·신흥우·김활란 등이 이사로, 김성수·방응모, 이종만·박흥식 등이 감사로 참석하였다.박흥식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공판조서[9]
뉴스타파에 따르면, 2016년 7월 15일 국가보훈처에 공문을 보내 건국훈장 심사에서 친일 의심 행적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서상일의 건국훈장 서훈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지만, 서상일은 현재까지 건국훈장 서훈자로 남아있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선거구)

'''11,777표 (43.75%)'''
'''당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선거구)

8,921표 (27.74%)
낙선 (2위)

1952
재보궐선거 (경상북도 달성군)

-
낙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선거구)

10,815표 (31.39%)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2선거구)

'''15,348표 (44.8%)'''
'''당선'''
[10]

[1] 제헌 국회의원 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1885년생으로 기재하였으며,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1887년생으로 기재하였다.[2] 단장[3] 부단장[4] 당시 일곱살 난 둘째딸이 매일 서대문 형무소에 가서 도시락을 꺼내들고는 "우리 아버지 점심식사가 식지 않게 빨리 넣어 주세요"라며 애걸했다고 한다.[5] 사제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아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6]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 결성식도 이 조양회관에서 열렸다.[7] 이는 일제시대 항일운동과정에서 계몽운동계열이 가지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8] 이시영의 외아들[9] 다만 이 명단은 단순히 이름만 올린 이들이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리고 박흥식은 명백한 친일행위를 했음에도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한 인물이라 그의 진술의 신빙성은 별로 없다.#[10] 1961.5.16: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자격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