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담일기
1. 개요
石潭日記. 조선 시대 대학자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년 ~ 1584년)가 명종 20년인 1565년부터 선조 14년인 1581년까지 약 17년간 조정에서 펼쳐진 경연(經筵)에의 강연과 정계 동향 등을 일기로 엮은 경연일기. 총 4권 4책이나 현재는 3권 3책만이 남아있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율곡 이이가 30세가 되던 1565년 7월부터 46세에 이르던 1581년 11월까지 약 17년간에 걸쳐 우리 나라 조정에서 펼쳐진 주요 경연에서 군신간에 논란이 되었던 당시의 주요 사건과 인물들에 관해 날마다 상세히 기록하고 평론하여 남긴 기록물이다. 원래는 元, 亨, 利, 貞으로 이루어진 총 4책이 있었으나 이 중 元에 해당하는 제1책은 유실되어 현재는 亨, 利, 貞의 3권 3책만이 남아있다.
제1책(결본)은 1565년 7월부터 1573년 10월까지의 일기이고, 제2책은 1573년 10월부터 1575년 10월까지의 일기이다. 제3책은 1575년 10월부터 1580년 7월까지의 일기이고, 제4책은 1580년 8월부터 1581년 11월까지의 일기이다.
이이가 친필로 쓴 원본 책에서 유실된 부분이 있을 뿐 석담일기의 내용 자체는 모두 전해내려오고 있다. 율곡의 문집인 율곡전서 권28에서 30까지와 대동야승 권14 ~ 15에도 내용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국왕의 행례, 신하들의 진퇴 등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여러 제반 시정을 일기체로 기록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첨술하여 놓았는데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한 동서 붕당의 조정에 노력하던 율곡의 고심이 여실히 드러나 있으며, 특히 삼공(三公), 육경(六卿)을 비롯한 여러 중신들의 정사 집행과 유명한 인물에 대한 평론과 함께, 율곡 자신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면서 겪은 생생한 기록들이 자세히 실려 있어 그 가치를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다.
때에 따라선 왕까지 비판할 정도로 굉장히 세세히 당시의 정치 세태를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정공도감의 경우 선조 대에 오면서 조선에 힘있는 권력가들이 모두 방납의 이권에 개입하여 이득을 챙겼고 심지어 정상 공물 값의 2배 ~ 3배를 올려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백성들은 심사 과정인 점퇴에서 기존 품질보다 떨어진다거나 납기가 맞지 않는다는 등의 트집을 잡으며 퇴짜받으면 처벌을 받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준경이 추진했던 것이 정공도감의 설치와 구폐책이었는데 이 또한 신진 사림의 반대에 막혀 시행되지 못했다. 거기다 어떠한 연유에선지 실록에도 그가 추진했던 개혁의 구체적 내용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신진 사람들의 반대 논리만 기록되어 있다.
율곡은 자신의 일기인 석담일기에 이에 대해 자세히 수록하며, 사림 세력의 개혁 반대 논리였던 "수신과 교화가 우선이며 법규와 제도는 나중의 일"이라는 말을 참으로 공허한 것이라 조롱하였다. 일찍이 기대승이 이황에게 했던 "국가에 3년 먹을 식량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개혁에 반대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조차 내놓지 않는 이들을 비판했다.
임금의 뜻은 다만 옛 조례만을 따르려고 하고 대신들도 개혁하기를 꺼려 단지 문부에만 기입하고 삭제했을 뿐 별반 폐단을 혁신하는 일이 없으니 뜻있는 식자들이 비웃었다. (중략) 김계휘가 나에게 말하길 "지금 사세는 기강이 서있지 않아 모든 법도가 허물어지고 해이하여 손쓸 곳이 없다. 유능한 목수도 없이 느닷없이 구옥을 헐어놓기만 하고 마침내 새집을 못 만든다면 빈터만 남게 될 것인데, 지금 조정 신하 가운데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누구이겠소?" - 석담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