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1. 개요
朋黨
중국과 조선에서, 정치적 사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당파 집단을 이른다. 오늘날의 정당과 비슷하다. 다만 정당은 명문화된 당규가 존재하고 어쨌든 국민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완전 대응되지는 않는다.
2. 조선의 붕당
상고하건대 동서(東西)로 분당(分黨)하여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부끄러운데, 그 후 한쪽 사람이 별도로 당을 세워 북인(北人)이라고 하여 동인(東人)을 지목하여 남인(南人)이라 하였고, 의강과 식이 신국과 이공을 논핵(論劾)한 후부터는 신국과 이공을 지목하여 소북(小北)이라 하였으며, 의강과 식은 여순의 당으로 대북(大北)이라고 하여 추악한 말로 무함하여 서로 공격하기를 마치 장사치나 여자들이 언쟁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 정상을 따져 보려 하면 말하는 입이 더러운데, 말류의 폐단이 끝내는 공도를 무너뜨리고 사(私)를 이루었으며, 임금을 잊고 국사를 그르쳤으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다음은 대표적인 붕당 일람. 흔히 사색 당파라고도 불리는데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가리킨다.정여립의 난 이후에는 호남 사람들을 제거하고 영남과 기호 사림끼리 피투성이의 지역 싸움을 했는데, 작고한 본인들의 뜻에 반하여 전자는 주로 이퇴계를, 후자는 주로 이율곡을 추앙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추앙 인물을 헐뜯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2.1. 개요
'''정확한 비유는 아닌, 즉 정합성 높은 비유는 아니지만, 조선판 정당 정치, 조선판 여야 관계이다.'''
붕당이라고 하면 조선 시대 중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 형태로 말 그대로 당을 나누어 정치를 함을 이른다.
2.2. 기본 원리
- 붕당은 정파적, 학파적 성격에 의해 당을 나누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당시 정치인들은 대부분 성리학도들이었는데 위 학파 계보에서 볼 수 있다시피 배운 선생들이 각각 달라 그들이 아는 것이 다르고 이해 관계가 다르다 보니 당이 나눠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들은 성리학의 위대한 스승들(이이, 이황, 성혼, 조식, 서경덕 등등) 아래에서 수학하며 그들이 배운 이상을 조선 정치에 반영하였다.
- 붕당은 공론(쉽게 말하면 여론. 하지만 이것도 양반들의 여론이었지 농민과 같은 일반 평민의 여론은 세종 시절을 제외하면 반영한 적이 없다.)을 가장 중시한다. 조선의 중앙정치에서 단연 돋보인 이들은 바로 공론이 정치에 반영되도록 목숨을 다했던 언관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원)들이었다. 이들은 그들이 가진 간쟁, 봉박, 서경권을 가지고 중앙에서 처리되는 모든 정치적 사안들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는데 이들은 청요직으로써 주로 젊은 관원들로 뽑혔다.
2.3. 역사
2.3.1. 사림의 성장과 집권
조선 왕조에서 시작 자체는 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다. 그런데 붕당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건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이후 훈구파가 몰락, 사림파가 득세한 뒤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부터다. 그러니까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사화)이 아니라 사림파 내부의 정치 투쟁을 가리키는 용어가 붕당이다.[3]
사림의 시작은 조선 초,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향촌 사회에서 학문에 임했던 집단에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야(野)당. 고려의 삼은(목은, 포은, 야은) 중 한 명이라 불리는 야은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았으며[4] 성종 시기 성종이 훈구파(당시 여당)를 견제할 목적[5] 으로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을 등용하면서 사림파가 형성된다. 이들은 성종의 승하 이후 네차례의 훈구파의 사화를 받으며 탄압받다가 중종이 즉위하자 잠깐 조광조가 그 기틀을 잡아 중흥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조광조가 너무 나서댄 탓에 숙청된 후, 선조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이조(吏曹)전랑(銓郞) 문제[6] 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면서 본격적인 붕당이 이루어지게 된다.[7]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은 동인이 옹호한 김효원의 집이 건천동(현 충무로 일대)에, 서인이 옹호한 심의겸의 집이 정동에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천동과 정동은 청계천 남쪽에 육조거리 - 숭례문 구간을 기준으로 경복궁을 바라보며 각각 동쪽, 서쪽에 있다. 동인은 기존 훈구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반면 서인은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서인이 온건한 입장을 가졌던 이유는 우선 대상이 된 훈구파가 사림에 우호적인 면도 있었던 세력이었던 점, 그리고 이황과 조식 등 기존의 거목들이 존재하던 동인과는 달리 서인의 주류학설인 주기론의 최초 주장자인 서경덕은 서인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 유학계의 '''이단아'''라서 결국 중심이 될 이율곡이나 정철 등이 성장할 때까지는 배후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초기의 서인들은 보다 좌충우돌하게 된다. 게다가 서인 세력의 대부분은 훈구파 가문 출신이 대거 많았다.[8] [9]
사실 김효원 - 심의겸의 대립으로 붕당이 본격화되기 전에도 한차례의 위기가 있었으니 노당 - 소당의 분쟁이었다. 노당은 영의정 이준경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 사림들의 세력으로 중종 때부터 이어져오던 권신 집권기 와중에도 조정에 남았지만 권신에게 굴복하진 않고 소신을 지킨 이들이었고 소당은 조식, 서경덕, 이황을 비롯하여 재야에 내려가 학문을 닦은 처사들을 추종하는 젊은 사림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들의 수장은 기대승이었다. 이황을 비롯한 재야 사림들이 선조가 즉위한 후에도 벼슬에 그다지 뜻을 두지 않자 기대승을 비롯한 소당의 인물들은 '''윤원형 밑에서 해먹은 영감들은 물러가라!''' 라고 주장했다.
이준경은 격노했고 소당을 소기묘라고 부르면서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설치다가 작살난 것을 보고도 정신을 못차렸다고 맹비난했다. 이때의 분쟁은 이준경이 구 윤원형 세력이 기묘사화 때의 일을 한번 재현해보자고 접근한 것을 물리치면서 선을 지킨 덕에 유혈 사태로 격화되진 않았는데 노당의 수장 이준경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소당의 수장 기대승도 낙향했다가 46세를 일기로 사망하는 바람에 일단락되었다.[10]
그렇게 수장인 이준경과 기대승이 차례대로 죽으면서 노당은 중심을 잃고는 와해되었다. 더구나 이준경의 뒤를 이어 노당의 수장 노릇을 할법한 원로 사림 유희춘, 백인걸, 노수신 등이 소당을 지지 했으므로 사림의 분열은 이렇게 봉합되었으나 김효원 - 심의겸의 문제를 놓고 끝내 사림은 다시 분열하고 만다.[11]
선조 치세 전반기에는 율곡 이이가 죽기 이전까지는 서인이 집권당이면서도 동인이 경합세를 유지하다가 율곡 이이의 사망 이후에 동인이 득세[12][13] 하였고, 임란 직전 당시 득세하던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뉜다. 계기는 정철에 대한 처벌 문제.
2.3.2.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기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크게 당한 북인은 강경파, 피해가 적었던 남인은 온건파에 있었다. 이이 이상가는 학맥이 없었던 서인에 비해서 동인은 내부적 차이가 뚜렷했던 것이 이른 분당의 원인으로 지적된다.[14] 애당초 동인은 서인에 비해서 학맥 계통이라든지 인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붕당이었다. 서인과 동인의 학맥적 구분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도통(道通:성인의 도를 계승했다는 의미)으로 보고 따른 사람들=서인, 그 외=동인에 가깝다. 남인에 비해서 향촌 기반이 약했던 북인조차 철저한 실천유학자였던[15] 남명 조식과 기철학으로 불교적 냄새가 풍기는 사유체계를 탐구한 서경덕과는 학문적 스펙트럼이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퇴계 이황은 서인 계통에서도(일정부분 비판점이 있다고 보긴하지만) 공통적으로 존중받는 선학으로 인식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류성룡을 필두로 하는 남인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 기간에는 남인이 서인에 온건적이었던 영향으로 서인도 다수 조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임란 종결을 전후로 북인 세력들이 남인들과 서인들을 탄핵하고 득세하였으며, 이후 선조의 후사를 두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뉘게 된다.
광해군이 등극한 전후로는 사색 당파 모두가 참여하는 연립 내각이 형성되었지만[16] 몇번의 대대적인 옥사 끝에 대북 세력들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북 세력들은 완전히 축출된다. 소북 세력들은 살아남았으나 광해군 치세 때 이미 독립 당파로써의 힘은 상실했고 여타 당파로 흡수되었다. 여기까지가 붕당 정치의 제1기로 붕당 정치의 틀이 마련되는 시기였다.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지만, 남인을 함께 기용하였으며 서로 공존하는 정치를 하였다. 서인들이 집권하였다고는 하나 서인들은 이 당시 정치적으로 유력하고 신뢰감 있는 인물이 없었다. 때문에 남인의 협조 없이는 조정의 무게감 자체가 극히 떨어질 지경이었다. 대표적으로 이원익을 정승 자리에 올린 것이 이를 대표한다.
그리고 북벌의 시대가 온 효종 시기에는 서인이 남인을 억압하는 양상을 보였으나[17] 예송논쟁 이후 남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 시기가 붕당 정치사의 제2기이다. 이 시기 붕당의 양상은 서인과 남인간의 대립 양상을 띄게 되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구도가 형성되었다. 실제로 이 시기를 붕당 정치의 이상이 그나마 잘 지켜진 시기로 평가된다. 이 때는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파벌의 경우도 유배나 낙향 정도였고 사약이 내려가는 사사는 정말 드문 경우였다.[18] 송시열이 예송논쟁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사실 송시열은 2차 예송논쟁이 끝나고서도 한참 뒤인 서기 1689년에 죽었으며[19] 사실 직접적인 원인은 숙종의 환국 정치 때문이다.
2.3.3. 숙종의 환국 정치
이후 숙종 시기 남인이 서인을 축출하면서 득세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안 갔다. 이후 숙종의 환국 정치를 거치면서 붕당은 낙향, 파직, 좌천 정도가 아니라 위리안치, 사사#s-2, 연좌제의 처벌을 받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것은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애초에 붕당이 제대로 불 붙은 이유가 선조의 왕권 강화 노력도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위험한 불장난에 가까웠다. 일부에서는 편당적 인사 조치로 강한 붕당을 견제하여 붕당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숙종의 환국 정치 역시 탕평책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숙종 말기 집권당이었던 서인은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이 자신을 도운 김석주를 비롯한 척신들을 옹호하자 이에 실망한 젊은 사림들이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기성 세력에게 반기를 들면서 노론, 소론으로 분당된다.[20] 그리고 노론, 소론 대립이 격화됨과 동시에 다수당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는 사건이 터지니 남인 정권이 들어서는 와중에 송시열을 비롯한 거물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자 많은 젊은 소론들이 대남인 강경파인 노론으로 전향한 것이다. 소론은 권좌는 지켰고 갑술환국 이후에 주류가 되지만 점점 노론이 대간 자리를 차지하면서 소론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시작했고 무고의 옥 이후로 노론이 정승판서를 차지하면서 소론의 힘이 약화되더니 경종을 싫어한 숙종이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날리면서 노론이 집권한다.
이후 경종이 대리 청정 문제로 함정을 파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의 수뇌부를 대거 숙청하고 다시 삼수의 옥이 터져 이들을 대거 죽이면서 소론이 잠시 득세하는 듯 했으나 경종이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즉위한 영조에 의해 영조 즉위에 많은 공을 세운 노론이 제1정당이 된다.
이 시기가 붕당 정치사의 제3기이다. 이 때에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발생한 사회의 변동과 그로 인한 과거 시험의 남발로 인해서 관료 예비군이 넘쳐흐르던 시대였다. 때문에 정권에서 밀려난 학파의 경우는 지방 영향력까지 상실하며 그야말로 쪽박차는 상태가 되어서 밀려난 세력에게는 유배 정도가 아니라 집단으로 사약을 내려서 씨를 말리려고 하고 왕이 중재해도 의리상 상대 당파들과는 한 하늘 안에 살 수 없다고 배수진을 치고 악착같이 싸우는 시대가 벌어진다. 그리고 밀려난 당파들도 이게 다 왕이 찬탈자라 그렇다! 라고 죽기 살기로 반역을 일으키고 대놓고 왕을 모욕하는 등 테러 행위를 저질러 스스로의 목숨을 재촉한다.
2.3.4. 영정조의 탕평책
영조 즉위 초반에는 영조를 죽이려 들었던 소론의 수장인 김일경을 사사하는 등의 보복이 있었지만 자기들의 세상이 온 줄 알고 권력을 요구하던 노론을 견제하고 소론 중에서 비교적 온건파였던 완소를 대폭 요직에 등용하는 등 노론을 기본적으로 더 신임하면서도 소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영조 2년에 발생한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던 이인좌의 난을 소론 강경파였던 준소와 남인이 연합하여 일으키자 소론 온건파인 완소가 가장 적극적으로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음에도 이후 소론 인사들은 중앙 정계에서 차차 밀려나게 된다. 기본적으로 정통성 컴플랙스가 있었던 영조가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론을 내치고 소론에게 주도권을 주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에는 이후 100년이 더 지난 이후에야 철페되는 대과응시 금지령이 내려져서 영남 남인들은 조선 정계에서 아예 배제되었고, 영정조 시대에 정권에 일부 참여했던 남인들은 기본적으로 경기, 충청 지역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영조는 정권이 안정된 이후로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 세력 일부를 더한 탕평파를 구성해서 그 탕평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에 들어간다. 이른바 완론 탕평이다. 하지만 이는 영조의 왕권 강화 시도 정도로 탕평파는 또 하나의 붕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주도 세력이 되지도 못했다. 민진원, 정호, 유척기 같은 노론의 강경파는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김일경을 비롯한 남인 강경파과 소론, 준론은 아예 영조를 찬탈자로 지목하고 계속하여 반역하여 준론과 남인 강경파들은 아예 멸족되고 남은 소론, 완론들과 남인 온건파들도 영조 31년 이후에는 입지가 너무 좁아져서 주도권을 노론에게 내주는 정도를 넘어 아예 조정에서 거의 퇴출당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론이 영조의 왕권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조의 왕권에게 짓눌려서 거의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던 터였다.
노론이 소론, 남인을 마구 폄하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걸려서 다시는 붕당 안하겠다고 싹싹 빌며 울고불고 난리친 사건이 여럿 된다. 하지만 의리니 토적을 외치는 강경한 노론 명문가에게 질려버린 영조는 당파의 의리보단 왕의 말이나 잘 듣는 척신 홍봉한과 그의 아우 홍인한이 주축이 된 풍산 홍씨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노론계 외척들을 대거 끌어들이게 되어 영조 후반에는 당파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고 척신 정치가 강하게 자리잡는다. 영조 말년에는 이러한 '풍산 홍씨 척신당'에 과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파와 김종수, 심환지 등의 청명당[21] 이 맞서게 된다.
2.3.5. 사도세자 문제
그런데 한가지 변수가 터지니 사도세자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들 사도세자의 처분 문제를 두고 벽파, 시파 등으로 갈라지고 당파들이 싸움을 벌였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미 그 당시에는 당파라는 개념 자체 희미해지고 있었고 벽파니 시파니 분류된 것은 정조 때의 일이다. 주로 시파가 사도세자에 동정적이고 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하지만 영조 때는 벽파와 시파 구분 자체가 없었고 홍봉한의 탕평당과 척신 정권에 김종수, 심환지 등이 주축이 된 청명당이 서서히 반발하고 경주 김씨 일문이 홍봉한에 맞서면서 그들과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임오화변은 영조의 의지였지 노론은 별 잘못이랄게 없다.
정조가 벽파와 대결했다는 증거로 이조판서를 지낸 홍인한은 영조가 나이를 이유로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려고 한 것에 대해서 '세손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도 없고,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을 내세웠다는 것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조선 시대에 세자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고 세자는 침선의 문제만을 살피면 되지 괜히 정치를 알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이 발언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그때는 벽파, 시파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뒤에 밝혀지지만 정조의 정치적 성향은 오히려 벽파의 그것에 가까웠고 홍인한 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별 책임이 없었다. 정작 후에 강경 벽파로 분류되는 김귀주와 그의 아비 김한구, 사촌 김관주 및 경주 김씨와 정순왕후 김씨 파는 정조를 크게 지지했고 김귀주 등은 번번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지원사격했으며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에게 세손의 승계가 당연하지 않냐고 정조를 대리 청정 등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정조는 즉위 이후 홍국영을 친위세력으로 해서 척신 정치의 상징이자 자신의 대리 청정을 방해한 홍인한, 화완옹주, 정후겸을 제거했고[22] 사도세자의 복수로 죽은 김상로와 홍계희, 문성국의 벼슬을 추탈하고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를 폐서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시파 정권을 열었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흔치않게도 소론 벽파인 서명선, 노론 벽파의 거두인 김종수와 심환지 등을 중용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홍봉한의 척신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벽파가 상당수였다. 애당초 벽파라는 것이 '사도세자 죽어라!'가 아닌 '우린 척신이나 역적인 소론, 남인 애들하곤 못놀겠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벽파가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한 것도 사도세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신원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던 노론의 잘못으로 귀결될 문제고 세자가 죽음까지 당했으니 노론은 반역자가 되어 일망타진 당할 처지가 된다. 실제로 채제공은 이걸 실현시켜 남인의 복귀를 꾀했다. 그러니 노론 벽파가 여기에 반대할 수 밖에.
정조는 이어 새로운 척신이 되어가는 홍국영도 제거하면서 척신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고 정민시와 소론, 남인, 규장각 출신 소장파가 주축이 된 시파도 대거 끌어들여 오히려 붕당 정치를 다시 열었다. 정조의 경우는 영조와는 달리 붕당의 시시비리를 가린다는 이유로 소론과 노론의 과격파들과 역시 남인들을 중심으로 한 준론 탕평에 들어갔다[23] . 이후 신해통공과 천주교 문제, 문체반정 운동 등을 통해 정조는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가 탕평 정치기로 붕당 정치사의 제4기이자 사실상 마지막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붕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지만 사실상 영조와 정조의 왕권 강화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조가 끝내 종기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24]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 김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불과 4년 뒤 정순왕후 김씨가 죽고 순조의 장인이 된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집권[25] 하면서 완전히 시파가 득세하게 된다. 이것으로 실질적으로 붕당의 역사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2.3.6. 요약
붕당은 크게 동인과 서인을 시작으로 나뉘어 다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숙종 때에 환국을 치르고 노론의 일당전제가 시작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탕평책이었다. 탕평책으로 힘의 균형을 점차 되찾기 시작하고 영조 때에 이르러 사도세자 처단 문제로 인해 정치인들 사이에서 사도를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 말자는 온건파로 나뉘게 되고 정조 때에 이들은 벽파(주로 강경 노론)와 시파(온건 노론, 남인, 소론)로 나뉘어 조선의 정치를 주도한다.
그러나 정조가 붕어(왕의 죽음)하고 붕당간의 공존이 완전히 깨지고 이제는 특정 정당을 떠나 일정 가문이 정치를 주도하는 세도 정치로 넘어가게 된다. 이건 숙종 때부터 누적된 문제로 붕당을 제어하기 위해 걸핏하면 붕당을 박살내면서 외척에게 권력을 몰아주기 시작한 게 발단이었다.[26] 정조가 살아있을 때까진 그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그나마 제어가 가능했지만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27] 외척을 중심으로 하는 세도 정치로 귀결되며, 문제가 시작된다.
2.4. 평가
일제 강점기 이후 일제의 식민사관(당파성론)으로 인해 붕당 정치의 의미가 퇴색되어 단지 무의미한 당쟁에 불과하다고 깎아 내린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물론 붕당을 비판한다고 다 식민 사관이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붕당 정치에는 폐단 역시 적지 않았다. 당대 실학자들이나 서적들에서 붕당을 비판하는 말들이 꾸준히 나왔을 정도니.
2.4.1. 옹호
조선 붕당 정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안확, 이태진, 이시이 토시오(石井壽夫) 등이 있다.
2.4.1.1. 역사적 옹호자의 상실
조선 말기의 혼란과 양반층의 입장에 서서 역사를 남길 전승자가 한국 역사계에서 전무했던 탓도 존재한다. 한국 역사에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사회의 고위층에 해당하는 양반계층은 거의 몰살하다시피 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비적 덕목과 그들의 예, 문화는 거의가 자의와 타의에 의해 소실되었다. 붕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러한 '수혜 계층의 해체'에서 비롯되는 면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자업자득의 면도 있는데, "(일본과 협력 중인) 조정에 반항하는 것은 불충이요,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고루한 논리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도 있다.
2.4.1.2. 사상에 따른 분파
또한, 붕당은 어쩌다가 나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정확히는 학파)에 따라 나뉘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성리학은 학문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상[28] 이고, 따라서 사상에 따라 정치적 입장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숙종, 영조, 정조조에 신하들이 놀고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지속적인 당면 과제를 위한 인구 조사나 수효과 토론에 바빴다. (이점에서 노론 = 대지주, 기득권 = 대동법 반대, 소론, 남인 = 중소지주, 비기득권 = 대동법 찬성 => 실학으로의 진행이란 식의 구도는 무리한 분석이다.) 흥선대원군과 같은 개혁이 뒤늦게 구현된 것은 민란이라는 실제적 위협과 강력한 지도력 발휘가 가능했던 세도 정치였기에 가능했던 거지, 이전의 군주들이 수십년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조선 사회 자체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체제였기 때문에(지배층의 청렴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구조였다) 붕당과 권력 다툼의 목적이 '권력 획득' 자체에 있지 '권력을 휘둘러 이득을 본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조선의 정치 체제가 무너지는 건 세도 정치 시기부터이지, 오히려 붕당 시대에는 왜란 / 호란 이후 국가 재건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2.4.1.3.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의 옹호와 비판
'은둔의 나라 한국'의 저자 그리피스는 이면에서 정치 공작이 벌어지는 유럽 정치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나름의 규칙과 도덕성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출처)
다만 여기에서 그리피스의 조선에 대한 기록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중 임진왜란 부분만큼이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 사람은 단 한번도 조선에 직접 와 본 적이 없다. 국화와 칼에서처럼 저자가 직접 가지 않더라도 그 나라에 대해서 잘 쓸 가능성도 아주 드물지는 않지만 이 책은 그런 류는 아니어서 카더라 통신이나 어이없는 소문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장 이야기가 이 사람 책에서 나왔다.
서양 학자들에는 다른 지역의 문명을 '빗대어서' 자국을 비판하는 경향이 전통적으로 존재했다. 말하자면 "(흔히 야만인이라고 여겨지는) 동양인들도 이렇게 나름대로 훌륭한 제도나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데, (문명인이고 훌륭한) 우리 나라는 아직도 이런 문제점이 있다니, 이런건 타산지석 삼아서 고쳐야 한다."는 논조이다. 이러한 논조는 고대 로마 제국 시절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서도 나오는 유서 깊은 것인데, 자국 비판을 위해서 타 문명의 '도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객관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류의 주장은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한다.
2.4.1.4. 다른 나라와 극단성의 비교
사람이 모이는 곳엔 당연히 파벌이 생기고 서로간에 파벌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렇지 않은 곳은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특수한 일부의 경우를 빼놓고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붕당정치라고 해서 더 욕을 먹어야 할 필요는 없고 무조건 한국사를 깍아 내리려했던 식민사관이나 정당정치를 파벌싸움으로 매도하려던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로 볼 여지도 있다. 다른 전근대 국가들의 위정자들의 통치나 파벌싸움의 행태를 보면 조선시대와 다를것이 없었고 오히려 훨씬 더 부정적인 모습이 많았다. 조선시대는 위정자나 왕조차 욕심많은 토호세력이나 무식한 무인들이 아닌 수신하며 군자를 표방하는 학자의 나라였고 이런 모습은 전근대치고는 우수한 모습이였다. 오히려 조선의 붕당정치가 훨씬 양호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붕당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여 "조선 민족의 타율성과 정체성"의 근거로 삼기로 했다. 이런 인식은 현재 한국인에게도 스며들어 한국인 스스로도 "한국인은 단결을 못한다", "한국인은 누구 잘되는 걸 보지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파벌 싸움의 극단성이 정말 붕당 정치에서 유독 특별하게 강하게 나타나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칼부림은 안 난 붕당 정쟁이 더 온건해 보일 정도. 어느 나라나 정당과 같이 정치 집단의 의견이 갈릴 경우 엄청나게 싸웠다.[29]
비슷한 근세의 유럽 왕정 국가들의 경우는 장미전쟁, 위그노 전쟁, 잉글랜드 내전, 천날만날 일어나는 지방 귀족 세력의 사주를 받은 민란, 암살, 그나마 좀 양지에서 벌어지는 경우인 결투 등, 지배 계급간의 분쟁은 베네치아 공화국 같이 일찍 과두 정치가 자리 잡은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법외에서 진행되는 사적 폭력을 기반으로 해결되었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통제된 문투, 그것도 조정이라는 공식 국가 기관을 통해 법적인 절차를 바탕으로 사약을 사하는 것은 보다 온건하다고 할 만하다. 실제로 왕정보다 앞선 민주정조차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전을 치룬 적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나마 이괄의 난 같은 조선 내부의 내전이라 부를 만한 정치 투쟁은 비슷한 시기의 십만, 백만 단위로 희생자를 수십년에 걸쳐 쌓은 위그노 전쟁이나 영국의 삼왕국 전쟁, 등 성리학권 외부 근세 국가의 내부 정쟁에 비하면 훨씬 더 빨리 진압 되고 안정화 된 편에 속한다. 이 또한 '저런건 종교 전쟁이니 예외로 쳐야 하지 않냐'라는 반론을 할 수 있으나, 구교와 신교의 유혈낭자한 대립도 큰 무리 없이 지배 계급의 합의와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의 경우를 보면 종교 자체보다 봉건 귀족제와 근대 중앙 집권 국가의 과도기에 있었던 근세 유럽 왕정 국가들 정치 체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통해 그 정도 스케일로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설명하는 학술적 테제가 휴 트레버-로퍼, 존 헉스터블 엘리엇과 그 제자인 제퍼리 파커 등의 역사학자들이 명명한 '조정과 나라의 대립 (court versus the country)' 이론이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신교냐 구교냐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이고, 종교 갈등의 핵심에는 갈수록 비대해 지고 권력과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왕실 중심의 중앙 권력과, 봉건제로부터 내려오는 특권과 지방 자치를 유지하려는 토착 귀족, 자유 도시, 대학 등의 '주변부' 기관의 충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2.4.1.4.1. 한국사
- 고구려
- 신라
- 고려
또한 고려 시대에는 조선 시대에 비해 무신이 문신보다 훨씬 차별받았다. 그런데 의종 때에는 문신들을 견제하려고 이 차별받는 무신들을 중용하였다. 하지만 이를 경계한 문신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의종은 다시 문신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래서 무신들의 불만은 가득 쌓이게 되었고 결국 문신, 무신 양 진영 간의 반목과 대립은 극에 달했다. 그런데 이 사태의 중심에 있었던 의종은 무신을 우대해서 불만을 해소한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아예 문신들에 힘을 완전히 실어주기보다는 두 문무 신료들 간의 알력을 적당히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려고만 했을 뿐이었다. 딱 붕당들을 대하는 조선 시대 왕들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환관까지 중용해서 파벌을 하나 더 만들었다. 결국 그것이 폭발해 무신정변이란 환란까지 일어나고 100년 동안의 무신정권이 들어서 나라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또한 무신정권 시기도 문신들을 몰아내고 비어진 권좌를 두고 무신들 내부에서 새로운 알력이 야기되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걸핏하면 무신들끼리 서로 시비를 걸거나 군사를 일으켜 전투를 하고 서로 업치락 뒷치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방식도 일자무식 무인들답게 매우 잔인하고 무식했다. 이의민과 두경승의 대립의 한 일화를 보면 국가의 중요 회의 기관이었던 중서성에서 기싸움으로 이의민이 "어떤 자가 힘자랑을 하길래 내가 이렇게 때려눕혔지."라고 말한 뒤 건물 기둥을 주먹으로 후려쳐 기둥을 진동시키자, 두경승은 "그래? 나도 일전에 한 번 저잣거리에서 주먹을 썼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더군."이라고 대답하고 벽을 주먹으로 한방에 뚫어버리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고 한다.
고려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황각에 앉은 지 삼사 년에
>주먹 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
>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
>― 고려사 반역조 '이의민 열전' 중
2.4.1.4.2. 세계사
- 영국
- 프랑스
2.4.2. 비판
붕당정치를 비판한다고 무조건 식민사관의 당파성론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면 조선시대 당대에도 붕당은 이미 심각한 병폐로 지적받았고 조선말 일제강점기[30] 민족주의 사학자들도 붕당정치를 날카롭게 비판을 하였다.
2.4.2.1. 극단화
특히 붕당은 과대 해석이나 확대 해석이 심했고, 작은 비판, 오래전 글마저 꼬투리 잡아 침소봉대하여 역모로 몰아 수없는 피란을 가져왔다. 정여립의 기축옥사, 계축옥사 그 예시이다. 이런 극단성 때문에 괜히 숙종의 환국이나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이 나온게 아니다.
무엇보다 붕당은 처음에는 어느 한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주를 이루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정치적 후진성을 띠게 되었다.
물론 한 가문이 정권을 잡고 독재를 펼치는 세도정치 시기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붕당이 돌아가던 시기엔 아무리 나빠도 일당독재일지언정 한 가문 한 사람이 권력을 독식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세도정치의 배경과 원인인 만큼 이 둘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 붕당 정치가 진행되면서 북인, 남인, 소론 등이 차례대로 제거되고 시파와 벽파가 정권을 놓고 충돌하는 등 집권당은 스스로 분열과 숙청을 거듭하며 범위가 계속 좁아졌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집권층이 하나의 가문으로 좁혀진 것은 이 흐름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위의 그리피스가 봤던 대로 당쟁이 신사적인 규칙 아래에 있었을 때는 숙종 때의 기사환국과 갑술환국 이전까지다.[31] 그 전까지는 당쟁이란 이념과 논리에 의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논박하여 정권을 유지하거나 획득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쟁에서 패해 정권을 잃으면 그저 야인 생활만 했을뿐 물리적인 탄압은 받지 않았으나, 기사환국(인현왕후의 폐위)와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에 관련된 당쟁에서는 정권을 잃은 당파의 수장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상대당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 일어났다.[32] 갑술환국 이후에는 당쟁이 사생결단 식으로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숙종 말부터 당쟁은 생사를 건 투쟁이 된다. 그래도 신사의 옥 이전까지는 겉으로나마 신사적인 규칙 아래에 있었지만 신사의 옥 이후로는 그나마 당파의 대립을 중재해주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이 대거 귀양을 떠나면서 겉으로나마 남아있던 신사적인 규칙도 사실상 사라진다. 사실 기사환국 이전에도 당쟁에 의해 무고한 인물이 희생된 경우도 적지 않다. 후술할 기축옥사와 계축옥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촌 오시수만 해도 그리 당파적인 인물도 아니었고 우의정까지 역임했던 중신이었는데, 원접사로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중 강희제의 그 유명한 "군약신강" 발언을 조정에 올렸다가 송시열을 겨낭한 말이라고 서인들에게 미움을 사, 경신환국 때 억울하게 주살될 정도였다.[33]
더욱이 반대당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 없었던 적은 1차 예송논쟁 단 한번 뿐이었고 애초에 붕당의 스타트를 끊은 선조 때부터 시작해서 상대당에 대한 직접적 탄압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선조 대에 벌어진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가져온 기축옥사. 이밖에도 광해군 때의 북인에 '의한' 숙청,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서인의 북인에 '대한' 역숙청,[34] 효종 대에 벌어진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한 분파인 낙당에 대한 숙청[35][36] 등 그야말로 글을 앞세운 피로써 피를 씻는 역사가 바로 붕당이었다.[37]
고로 붕당 정치를 마치 근대, 현대의 민주적 정당 정치에 비견하는 것은 지극히 미화된 분석이다. 윗 옹호 문단에서는 근대 유럽의 의회 제도하에서 정당, 혹은 파벌 간이 벌이는 결투와 같은 물리적인 충돌이 최소한 언쟁은 높이되 육체적 다툼[38] 으로 까지는 발전하지 않는 "세련된" 붕당 정치에 비해 열등하다는 듯이 쓰여 있지만, 집권당이 비집권당을 자신들의 권력 안정화, 혹은 보복을 목적으로 전격적으로 숙청하는 것이 대체 어디가 민주적이고 어디가 세련되었다는 것인가?. 조선의 붕당에 소속된 조정 신료들은 그 지지기반이 봉건적 영지도, 시민들의 투표도 아닌 '''왕'''이었기에 반대파로 하여금 왕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역도라고 몰아 죽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이 "후진적"이라고 주장하는 유럽식 당파간의 대립에선 집권당이 권력을 획득하자마자 비집권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일은 내전에 대한 사후처리가 아닌 이상 보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붕당 간 갈등이 치열해지면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직책인 왕의 권한도 강해지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광해군처럼 지나치게 특정인에게 권력을 몰아 주는 식의 실수만 하지 않으면 붕당들은 유일한 조정자인 왕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붕당들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간 환국 정치였다. 또한 붕당 정치에서의 논쟁 결과가 제도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서인과 남인 등이 신권과 왕권의 관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옹호론에서 흔히 지적하는 내용이지만,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제도의 변화로 이어진 바는 전혀 없고 사실상 추상적 - 관념적인 측면에서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예컨대 붕당 옹호론에서 흔히 서인들의 가치관이 대동법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려 하지만, 정작 대동법을 처음으로 정책적으로 시행한 이원익은 남인이었다. 남인의 가치관으로도 대동법을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붕당세력들도 당연히 숙종기의 환국정치를 겪었기에 숙종 사후 경종과 영조를 두고 소론과 노론이 물고뜯는 이른바 택군 현상이 발생한다. 당연히 한 당의 지지만 얻은 왕은 자신을 지지해준 당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고...
결론적으로 붕당 정치는 스스로 자정 작용을 잃어버리고 말아 가뜩이나 극단적인데 마땅한 중재 기관이 국왕이나 근왕 세력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가 세도정치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2.4.2.2. 폐쇄성
붕당은 세습되었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적인 사회였던지라 아버지가 서인이면, 아들도 서인이듯 붕당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가 없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어느 가문이 어느 당이나 어느 파로 찍히면 초야로 정치를 피하려 하거나, 중도적인 입장에서 행동하려 해도 반대 당의 린치를 피할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붕당 정치는 폐쇄성을 가져왔다. 특히 힘이 강한 붕당에 속하지 않으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은 정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신분, 지역 뿐만 아니라 붕당과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인재들을 8할, 9할을 버린다고 비판했다. 이익도 성호집의 '붕당론'을 통해 당쟁의 원인은 붕당들끼리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크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학창 시절, 붕당의 양성 기지 서원에 속하지 않으면, 관직에 나가기 힘들 정도 였으며, 세금 착취와 병역 기피 등 서원의 폐단도 심했다. 흥선대원군이 괜히 서원을 밀어버린것이 아니다.
2.4.2.2.1. 진영논리
후기 붕당 정치에서는 진영논리에 휘말려 상대를 소인당이라 비하하고 자기네 당을 군자당이라고 미화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당내 의견에만 휘둘리고, 창의적인 의견은 신변 안전 문제로 나오지 못했다. 율곡 이이는 이를 두고 상대 당의 군자까지 싸잡아 소인으로 비하하는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했지만 이로 인한 색깔론 시비로 정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중종~명종 시기 정적을 몰아낼 때는 붕선 혐의가 많았고[39] 이준경이 죽으면서 선조에게 붕당을 경계하라는 말을 남겼을때는 선조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나 조정에서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조광조가 죽게 된게 붕당 혐의인데 어따대고 붕당붕당거리냐? 저 인간 죽으면서도 헛소리하네?" 라는 반응이었다.
더욱이 붕당은 지역감정을 키웠다. 서인은 경기 - 충청도 기반이고, 영남은 남인과 가까웠는데, 효종 때는 경상도 서인 유생들이 율곡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남인 유생들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쫓아내버리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2.4.2.2.2. 의회와의 비교
조선의 붕당은 유럽의 의회와 비교했을 때 소속원의 출신이 엄격하게 제한되어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애초부터 붕당 내에는 민중이 섞이기도 힘들었거니와 민중의 의사를 대변해 줄 대표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 평민의 대표자인 호민관이 존재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위의 사례는 고대 로마와 고대 그리스의 오랜 민주주의의 전통에 힘입은 유럽의 특수성으로, 유럽 이외의 모든 세계는 일반 민중의 정치 참여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역사가 아예 없다는 점에서 조선의 붕당에만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8~19세기 조선 사회의 변화와 중간계층의 성장을 붕당정치가 반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특히 조선에서는 민중은 고사하고 지방 향반이나 중인, 상민 부농조차 붕당정치 체제에 편입되지 못했고, 붕당이 철저하게 중앙정치계의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렀다.
더 큰 문제는 붕당이 결과적으로 상호간의 공존과 견제를 불문적으로든, 성문적으로든 확립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민주적 의회체제에서는 집권당과 정부가 상대 정당과의 대립과 갈등은 있을지언정 상대 정당의 궤멸, 몰락을 시도하지는 않지만[40] 조선의 붕당들은 국왕과 영합하여 상대 당에 대한 숙청, 축출을 지속했다. 그 결과 단기적으로는 중앙 양반집단 내부에서조차 국정 운영의 인재풀이 줄어드는 상황을 초래했으며, 장기적으로는 일당, 나아가 일개 가문의 권력 독점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나라를 그야말로 망조로 몰고 갔다.
2.4.2.3. 사회적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
그 외에도 붕당 정치에서 중요한 문제들이 실제 조선 후기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도 있다. 왕위의 정통성과 같은 성리학적 문제는 결국 국가 체제에도 관련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국가 운영의 이념으로서 성리학을 논의했는지가 알 수 없다. 붕당정치가 합리적인 정치적 토론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려면 붕당정치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도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붕당 정치에서의 논점들을 보면 붕당정치가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만한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붕당 정치의 옹호자들이 흔히 드는 사례가 대동법 등이 붕당 정치의 틀 안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이지만 이는 잘못되었다. 실제 대동법 논의 과정을 보면 이원익은 남인이고 김육은 서인인 등 대동법의 옹호자들은 딱히 붕당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대동법의 실시 여부나 그 결과가 붕당 간의 경쟁에 영향을 준 흔적도 없다. 대동법이 붕당 정치의 틀에서 논의되었다고 하려면 각 붕당이 대동법 실시 여부나 방법 등에 대해서 서로 다른 당론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서 이것이 각 붕당간의 발전적 경쟁으로 이어졌어야 하지만, 단지 대동법의 옹호자들이 이 붕당 저 붕당에 속해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동법이 붕당 정치의 틀 안에서 논의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실학에서 주로 언급되던 북학파라든지 중농학파니 하는 이론은 당시 붕당 정치판에서는 주류가 아니었다.
2.4.2.4. 기타
[image]
조선왕조실록에 정통하다는 박시백 화백의 붕당에 대한 인식. 붕당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선조 재위기에도 건강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위의 조선 중기 붕당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현대의 '정당 개념'이라기보다는 사병에 가까운 짓거리였으며, 사사로이 패당을 가르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회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41]
성호 이익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말그대로 밥그릇 싸움이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 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이제 열 사람이 모두 굶주리다가 한 사발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말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불손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은 크게 된다. 그 말할 때에 입에 거품을 물고 노하여 눈을 부릅뜨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해(利害)의 연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그릇됨을 장차 구할 수가 없는 법이다.
('붕당론', 《성호집》 권25, 잡저)#
3. 중국의 붕당
중국의 붕당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귀족 가문의 후예와 과거로 등용된 신진 세력과의 마찰 과정에서 당 후기에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40년간의 당쟁을 우이당쟁이라고 부른다.[42] 여러 황제를 거쳐 전개된 이 붕당 정쟁은 당시 정쟁에 환멸을 느낀 황제가 두 당파를 모두 탄압하면서 종결되었다.
특히 송나라와 명나라 때 붕당의 성행과 갈등이 극에 달했는데, 송의 구법당과 신법당, 명의 동림당과 엄당이 벌인 갈등은 제국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때문에 붕당의 폐해를 경계했던 명나라는 법전 '대명률' 간당조(奸黨條)에서 '''"만약 조정의 관원들이 붕당을 지어 국가의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면 모두 참수시키고, 처자는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관청에서 몰수한다"'''고까지 명시했다.
그러나 이런 경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말기엔 결국 국정의 문란함과 더불어 붕당 갈등(엄당 vs 동림당)까지 성행하면서 망조가 들고 말았다. 특히 환관의 파워가 막강한 명에서 이런 붕당 갈등의 격화는 곧 기회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붕당 정치가 환국으로 인해 망조가 들며 세도정치라는 결말로 귀결된 것처럼, 명의 붕당 정치도 최후의 승자는 어느 당도 아닌 환관이었다. 위충현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