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

 

1. 개요
2. 조선의 붕당
2.1. 개요
2.2. 기본 원리
2.3. 역사
2.3.1. 사림의 성장과 집권
2.3.2.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기
2.3.3. 숙종의 환국 정치
2.3.4. 영정조의 탕평책
2.3.6. 요약
2.4. 평가
2.4.1. 옹호
2.4.1.1. 역사적 옹호자의 상실
2.4.1.2. 사상에 따른 분파
2.4.1.3.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의 옹호와 비판
2.4.1.4. 다른 나라와 극단성의 비교
2.4.1.4.1. 한국사
2.4.1.4.2. 세계사
2.4.2. 비판
2.4.2.1. 극단화
2.4.2.2. 폐쇄성
2.4.2.2.1. 진영논리
2.4.2.2.2. 의회와의 비교
2.4.2.3. 사회적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
2.4.2.4. 기타
3. 중국의 붕당
4. 같이보기


1. 개요


朋黨
중국과 조선에서, 정치적 사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당파 집단을 이른다. 오늘날의 정당과 비슷하다. 다만 정당은 명문화된 당규가 존재하고 어쨌든 국민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완전 대응되지는 않는다.

2. 조선의 붕당



조선의 붕당 계보도

상고하건대 동서(東西)로 분당(分黨)하여 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도 부끄러운데, 그 후 한쪽 사람이 별도로 당을 세워 북인(北人)이라고 하여 동인(東人)을 지목하여 남인(南人)이라 하였고, 의강과 식이 신국과 이공을 논핵(論劾)한 후부터는 신국과 이공을 지목하여 소북(小北)이라 하였으며, 의강과 식은 여순의 당으로 대북(大北)이라고 하여 추악한 말로 무함하여 서로 공격하기를 마치 장사치나 여자들이 언쟁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 정상을 따져 보려 하면 말하는 입이 더러운데, 말류의 폐단이 끝내는 공도를 무너뜨리고 사(私)를 이루었으며, 임금을 잊고 국사를 그르쳤으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 33권, 선조 32년 6월 1일 기사, 사관의 비판

정여립의 난 이후에는 호남 사람들을 제거하고 영남과 기호 사림끼리 피투성이의 지역 싸움을 했는데, 작고한 본인들의 뜻에 반하여 전자는 주로 이퇴계를, 후자는 주로 이율곡을 추앙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추앙 인물을 헐뜯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옥중 서신 中[1]

다음은 대표적인 붕당 일람. 흔히 사색 당파라고도 불리는데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가리킨다.

2.1. 개요


'''정확한 비유는 아닌, 즉 정합성 높은 비유는 아니지만, 조선판 정당 정치, 조선판 관계이다.'''
붕당이라고 하면 조선 시대 중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치 형태로 말 그대로 당을 나누어 정치를 함을 이른다.

2.2. 기본 원리


  • 붕당은 정파적, 학파적 성격에 의해 당을 나누는 것을 가장 기본으로 하고 있다. 당시 정치인들은 대부분 성리학도들이었는데 위 학파 계보에서 볼 수 있다시피 배운 선생들이 각각 달라 그들이 아는 것이 다르고 이해 관계가 다르다 보니 당이 나눠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들은 성리학의 위대한 스승들(이이, 이황, 성혼, 조식, 서경덕 등등) 아래에서 수학하며 그들이 배운 이상을 조선 정치에 반영하였다.
  • 붕당은 공론(쉽게 말하면 여론. 하지만 이것도 양반들의 여론이었지 농민과 같은 일반 평민의 여론은 세종 시절을 제외하면 반영한 적이 없다.)을 가장 중시한다. 조선의 중앙정치에서 단연 돋보인 이들은 바로 공론이 정치에 반영되도록 목숨을 다했던 언관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원)들이었다. 이들은 그들이 가진 간쟁, 봉박, 서경권을 가지고 중앙에서 처리되는 모든 정치적 사안들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는데 이들은 청요직으로써 주로 젊은 관원들로 뽑혔다.
젊은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윗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못된 일이면 한결같이 궁앞에 모여 소를 올리고 격론을 벌였다. 이들이 윗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격론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들을 등용하는 관직이 바로 이조(인사부)의 하위직인 이조전랑(언관들과 같이 젊고 핫한 관료들이었다)에게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이조 전랑은 후임자를 추천하여 다음 전랑을 선택함).[2]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산림(지방에 자리잡고 있는 학문적 스승들)들과 지방 유생들의 여론은 새로이 정계에 진출하는 젊은이들을 통해서나 격문과 상소를 통해 정치에 반영되었다.

2.3. 역사



2.3.1. 사림의 성장과 집권


조선 왕조에서 시작 자체는 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다. 그런데 붕당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건 사림파훈구파의 대립 이후 훈구파가 몰락, 사림파가 득세한 뒤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부터다. 그러니까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사화)이 아니라 사림파 내부의 정치 투쟁을 가리키는 용어가 붕당이다.[3]
사림의 시작은 조선 초,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향촌 사회에서 학문에 임했던 집단에서 시작된다. 말 그대로 야(野)당. 고려의 삼은(목은, 포은, 야은) 중 한 명이라 불리는 야은 길재의 학풍을 이어 받았으며[4] 성종 시기 성종이 훈구파(당시 여당)를 견제할 목적[5]으로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을 등용하면서 사림파가 형성된다. 이들은 성종의 승하 이후 네차례의 훈구파의 사화를 받으며 탄압받다가 중종이 즉위하자 잠깐 조광조가 그 기틀을 잡아 중흥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조광조가 너무 나서댄 탓에 숙청된 후, 선조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이조(吏曹)전랑(銓郞) 문제[6]동인서인으로 나뉘게 되면서 본격적인 붕당이 이루어지게 된다.[7]
'동인'과 '서인'이라는 이름은 동인이 옹호한 김효원의 집이 건천동(현 충무로 일대)에, 서인이 옹호한 심의겸의 집이 정동에 있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건천동과 정동은 청계천 남쪽에 육조거리 - 숭례문 구간을 기준으로 경복궁을 바라보며 각각 동쪽, 서쪽에 있다. 동인은 기존 훈구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반면 서인은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서인이 온건한 입장을 가졌던 이유는 우선 대상이 된 훈구파가 사림에 우호적인 면도 있었던 세력이었던 점, 그리고 이황조식 등 기존의 거목들이 존재하던 동인과는 달리 서인의 주류학설인 주기론의 최초 주장자인 서경덕은 서인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 유학계의 '''이단아'''라서 결국 중심이 될 이율곡이나 정철 등이 성장할 때까지는 배후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초기의 서인들은 보다 좌충우돌하게 된다. 게다가 서인 세력의 대부분은 훈구파 가문 출신이 대거 많았다.[8] [9]
사실 김효원 - 심의겸의 대립으로 붕당이 본격화되기 전에도 한차례의 위기가 있었으니 노당 - 소당의 분쟁이었다. 노당은 영의정 이준경을 중심으로 하는 원로 사림들의 세력으로 중종 때부터 이어져오던 권신 집권기 와중에도 조정에 남았지만 권신에게 굴복하진 않고 소신을 지킨 이들이었고 소당은 조식, 서경덕, 이황을 비롯하여 재야에 내려가 학문을 닦은 처사들을 추종하는 젊은 사림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들의 수장은 기대승이었다. 이황을 비롯한 재야 사림들이 선조가 즉위한 후에도 벼슬에 그다지 뜻을 두지 않자 기대승을 비롯한 소당의 인물들은 '''윤원형 밑에서 해먹은 영감들은 물러가라!''' 라고 주장했다.
이준경은 격노했고 소당을 소기묘라고 부르면서 기묘사화조광조가 설치다가 작살난 것을 보고도 정신을 못차렸다고 맹비난했다. 이때의 분쟁은 이준경이 구 윤원형 세력이 기묘사화 때의 일을 한번 재현해보자고 접근한 것을 물리치면서 선을 지킨 덕에 유혈 사태로 격화되진 않았는데 노당의 수장 이준경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소당의 수장 기대승도 낙향했다가 46세를 일기로 사망하는 바람에 일단락되었다.[10]
그렇게 수장인 이준경기대승이 차례대로 죽으면서 노당은 중심을 잃고는 와해되었다. 더구나 이준경의 뒤를 이어 노당의 수장 노릇을 할법한 원로 사림 유희춘, 백인걸, 노수신 등이 소당을 지지 했으므로 사림의 분열은 이렇게 봉합되었으나 김효원 - 심의겸의 문제를 놓고 끝내 사림은 다시 분열하고 만다.[11]
선조 치세 전반기에는 율곡 이이가 죽기 이전까지는 서인이 집권당이면서도 동인이 경합세를 유지하다가 율곡 이이의 사망 이후에 동인이 득세[12][13]하였고, 임란 직전 당시 득세하던 동인은 남인북인으로 나뉜다. 계기는 정철에 대한 처벌 문제.

2.3.2. 임진왜란 이후 조선 중기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크게 당한 북인은 강경파, 피해가 적었던 남인은 온건파에 있었다. 이이 이상가는 학맥이 없었던 서인에 비해서 동인은 내부적 차이가 뚜렷했던 것이 이른 분당의 원인으로 지적된다.[14] 애당초 동인은 서인에 비해서 학맥 계통이라든지 인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붕당이었다. 서인과 동인의 학맥적 구분은 율곡 이이의 학맥을 도통(道通:성인의 도를 계승했다는 의미)으로 보고 따른 사람들=서인, 그 외=동인에 가깝다. 남인에 비해서 향촌 기반이 약했던 북인조차 철저한 실천유학자였던[15] 남명 조식과 기철학으로 불교적 냄새가 풍기는 사유체계를 탐구한 서경덕과는 학문적 스펙트럼이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퇴계 이황은 서인 계통에서도(일정부분 비판점이 있다고 보긴하지만) 공통적으로 존중받는 선학으로 인식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류성룡을 필두로 하는 남인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 기간에는 남인이 서인에 온건적이었던 영향으로 서인도 다수 조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임란 종결을 전후로 북인 세력들이 남인들과 서인들을 탄핵하고 득세하였으며, 이후 선조의 후사를 두고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뉘게 된다.
광해군이 등극한 전후로는 사색 당파 모두가 참여하는 연립 내각이 형성되었지만[16] 몇번의 대대적인 옥사 끝에 대북 세력들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북 세력들은 완전히 축출된다. 소북 세력들은 살아남았으나 광해군 치세 때 이미 독립 당파로써의 힘은 상실했고 여타 당파로 흡수되었다. 여기까지가 붕당 정치의 제1기로 붕당 정치의 틀이 마련되는 시기였다.
인조반정으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지만, 남인을 함께 기용하였으며 서로 공존하는 정치를 하였다. 서인들이 집권하였다고는 하나 서인들은 이 당시 정치적으로 유력하고 신뢰감 있는 인물이 없었다. 때문에 남인의 협조 없이는 조정의 무게감 자체가 극히 떨어질 지경이었다. 대표적으로 이원익을 정승 자리에 올린 것이 이를 대표한다.
그리고 북벌의 시대가 온 효종 시기에는 서인이 남인을 억압하는 양상을 보였으나[17] 예송논쟁 이후 남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 시기가 붕당 정치사의 제2기이다. 이 시기 붕당의 양상은 서인과 남인간의 대립 양상을 띄게 되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구도가 형성되었다. 실제로 이 시기를 붕당 정치의 이상이 그나마 잘 지켜진 시기로 평가된다. 이 때는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파벌의 경우도 유배나 낙향 정도였고 사약이 내려가는 사사는 정말 드문 경우였다.[18] 송시열예송논쟁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사실 송시열은 2차 예송논쟁이 끝나고서도 한참 뒤인 서기 1689년에 죽었으며[19] 사실 직접적인 원인은 숙종의 환국 정치 때문이다.

2.3.3. 숙종의 환국 정치


이후 숙종 시기 남인이 서인을 축출하면서 득세하게 되지만 이도 얼마 안 갔다. 이후 숙종의 환국 정치를 거치면서 붕당은 낙향, 파직, 좌천 정도가 아니라 위리안치, 사사#s-2, 연좌제의 처벌을 받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것은 숙종의 왕권 강화책이기도 했다. 애초에 붕당이 제대로 불 붙은 이유가 선조의 왕권 강화 노력도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위험한 불장난에 가까웠다. 일부에서는 편당적 인사 조치로 강한 붕당을 견제하여 붕당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숙종의 환국 정치 역시 탕평책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숙종 말기 집권당이었던 서인은 경신환국 이후 송시열이 자신을 도운 김석주를 비롯한 척신들을 옹호하자 이에 실망한 젊은 사림들이 송시열과 그를 추종하는 기성 세력에게 반기를 들면서 노론, 소론으로 분당된다.[20] 그리고 노론, 소론 대립이 격화됨과 동시에 다수당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바뀌는 사건이 터지니 남인 정권이 들어서는 와중에 송시열을 비롯한 거물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자 많은 젊은 소론들이 대남인 강경파인 노론으로 전향한 것이다. 소론은 권좌는 지켰고 갑술환국 이후에 주류가 되지만 점점 노론이 대간 자리를 차지하면서 소론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시작했고 무고의 옥 이후로 노론이 정승판서를 차지하면서 소론의 힘이 약화되더니 경종을 싫어한 숙종이 병신처분으로 소론을 날리면서 노론이 집권한다.
이후 경종이 대리 청정 문제로 함정을 파서 영조를 지지한 노론의 수뇌부를 대거 숙청하고 다시 삼수의 옥이 터져 이들을 대거 죽이면서 소론이 잠시 득세하는 듯 했으나 경종이 덜컥 죽어버리는 바람에 즉위한 영조에 의해 영조 즉위에 많은 공을 세운 노론이 제1정당이 된다.
이 시기가 붕당 정치사의 제3기이다. 이 때에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발생한 사회의 변동과 그로 인한 과거 시험의 남발로 인해서 관료 예비군이 넘쳐흐르던 시대였다. 때문에 정권에서 밀려난 학파의 경우는 지방 영향력까지 상실하며 그야말로 쪽박차는 상태가 되어서 밀려난 세력에게는 유배 정도가 아니라 집단으로 사약을 내려서 씨를 말리려고 하고 왕이 중재해도 의리상 상대 당파들과는 한 하늘 안에 살 수 없다고 배수진을 치고 악착같이 싸우는 시대가 벌어진다. 그리고 밀려난 당파들도 이게 다 왕이 찬탈자라 그렇다! 라고 죽기 살기로 반역을 일으키고 대놓고 왕을 모욕하는 등 테러 행위를 저질러 스스로의 목숨을 재촉한다.

2.3.4. 영정조의 탕평책


영조 즉위 초반에는 영조를 죽이려 들었던 소론의 수장인 김일경을 사사하는 등의 보복이 있었지만 자기들의 세상이 온 줄 알고 권력을 요구하던 노론을 견제하고 소론 중에서 비교적 온건파였던 완소를 대폭 요직에 등용하는 등 노론을 기본적으로 더 신임하면서도 소론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노론을 견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영조 2년에 발생한 조선시대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던 이인좌의 난을 소론 강경파였던 준소와 남인이 연합하여 일으키자 소론 온건파인 완소가 가장 적극적으로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음에도 이후 소론 인사들은 중앙 정계에서 차차 밀려나게 된다. 기본적으로 정통성 컴플랙스가 있었던 영조가 자신의 지지기반인 노론을 내치고 소론에게 주도권을 주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에는 이후 100년이 더 지난 이후에야 철페되는 대과응시 금지령이 내려져서 영남 남인들은 조선 정계에서 아예 배제되었고, 영정조 시대에 정권에 일부 참여했던 남인들은 기본적으로 경기, 충청 지역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영조는 정권이 안정된 이후로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들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 세력 일부를 더한 탕평파를 구성해서 그 탕평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에 들어간다. 이른바 완론 탕평이다. 하지만 이는 영조의 왕권 강화 시도 정도로 탕평파는 또 하나의 붕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을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주도 세력이 되지도 못했다. 민진원, 정호, 유척기 같은 노론의 강경파는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김일경을 비롯한 남인 강경파과 소론, 준론은 아예 영조를 찬탈자로 지목하고 계속하여 반역하여 준론과 남인 강경파들은 아예 멸족되고 남은 소론, 완론들과 남인 온건파들도 영조 31년 이후에는 입지가 너무 좁아져서 주도권을 노론에게 내주는 정도를 넘어 아예 조정에서 거의 퇴출당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론이 영조의 왕권을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조의 왕권에게 짓눌려서 거의 장난감 취급을 받고 있던 터였다.
노론이 소론, 남인을 마구 폄하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걸려서 다시는 붕당 안하겠다고 싹싹 빌며 울고불고 난리친 사건이 여럿 된다. 하지만 의리니 토적을 외치는 강경한 노론 명문가에게 질려버린 영조는 당파의 의리보단 왕의 말이나 잘 듣는 척신 홍봉한과 그의 아우 홍인한이 주축이 된 풍산 홍씨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노론계 외척들을 대거 끌어들이게 되어 영조 후반에는 당파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고 척신 정치가 강하게 자리잡는다. 영조 말년에는 이러한 '풍산 홍씨 척신당'에 과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인 경주 김씨 일파와 김종수, 심환지 등의 청명당[21]이 맞서게 된다.

2.3.5. 사도세자 문제



그런데 한가지 변수가 터지니 사도세자 문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들 사도세자의 처분 문제를 두고 벽파, 시파 등으로 갈라지고 당파들이 싸움을 벌였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이미 그 당시에는 당파라는 개념 자체 희미해지고 있었고 벽파니 시파니 분류된 것은 정조 때의 일이다. 주로 시파가 사도세자에 동정적이고 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하지만 영조 때는 벽파와 시파 구분 자체가 없었고 홍봉한의 탕평당과 척신 정권에 김종수, 심환지 등이 주축이 된 청명당이 서서히 반발하고 경주 김씨 일문이 홍봉한에 맞서면서 그들과 손을 잡는 모습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임오화변은 영조의 의지였지 노론은 별 잘못이랄게 없다.
정조가 벽파와 대결했다는 증거로 이조판서를 지낸 홍인한은 영조가 나이를 이유로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려고 한 것에 대해서 '세손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도 없고,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을 내세웠다는 것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조선 시대에 세자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별로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고 세자는 침선의 문제만을 살피면 되지 괜히 정치를 알려 들었다가는 오히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이 발언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그때는 벽파, 시파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뒤에 밝혀지지만 정조의 정치적 성향은 오히려 벽파의 그것에 가까웠고 홍인한 등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별 책임이 없었다. 정작 후에 강경 벽파로 분류되는 김귀주와 그의 아비 김한구, 사촌 김관주경주 김씨정순왕후 김씨 파는 정조를 크게 지지했고 김귀주 등은 번번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지원사격했으며 정순왕후 김씨는 영조에게 세손의 승계가 당연하지 않냐고 정조를 대리 청정 등을 종용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정조는 즉위 이후 홍국영을 친위세력으로 해서 척신 정치의 상징이자 자신의 대리 청정을 방해한 홍인한, 화완옹주, 정후겸을 제거했고[22] 사도세자의 복수로 죽은 김상로홍계희, 문성국의 벼슬을 추탈하고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를 폐서인하는 수준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시파 정권을 열었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흔치않게도 소론 벽파인 서명선, 노론 벽파의 거두인 김종수심환지 등을 중용하였다. 그리고 당시는 홍봉한의 척신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벽파가 상당수였다. 애당초 벽파라는 것이 '사도세자 죽어라!'가 아닌 '우린 척신이나 역적인 소론, 남인 애들하곤 못놀겠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벽파가 사도세자 추숭에 반대한 것도 사도세자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도세자의 신원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던 노론의 잘못으로 귀결될 문제고 세자가 죽음까지 당했으니 노론은 반역자가 되어 일망타진 당할 처지가 된다. 실제로 채제공은 이걸 실현시켜 남인의 복귀를 꾀했다. 그러니 노론 벽파가 여기에 반대할 수 밖에.
정조는 이어 새로운 척신이 되어가는 홍국영도 제거하면서 척신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고 정민시와 소론, 남인, 규장각 출신 소장파가 주축이 된 시파도 대거 끌어들여 오히려 붕당 정치를 다시 열었다. 정조의 경우는 영조와는 달리 붕당의 시시비리를 가린다는 이유로 소론과 노론의 과격파들과 역시 남인들을 중심으로 한 준론 탕평에 들어갔다[23]. 이후 신해통공과 천주교 문제, 문체반정 운동 등을 통해 정조는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가 탕평 정치기로 붕당 정치사의 제4기이자 사실상 마지막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는 붕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지만 사실상 영조와 정조의 왕권 강화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조가 끝내 종기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24]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 김씨와, 그녀를 지지하는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불과 4년 뒤 정순왕후 김씨가 죽고 순조의 장인이 된 노론 시파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집권[25]하면서 완전히 시파가 득세하게 된다. 이것으로 실질적으로 붕당의 역사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2.3.6. 요약


붕당은 크게 동인과 서인을 시작으로 나뉘어 다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숙종 때에 환국을 치르고 노론의 일당전제가 시작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탕평책이었다. 탕평책으로 힘의 균형을 점차 되찾기 시작하고 영조 때에 이르러 사도세자 처단 문제로 인해 정치인들 사이에서 사도를 죽이자는 강경파와 죽이지 말자는 온건파로 나뉘게 되고 정조 때에 이들은 벽파(주로 강경 노론)와 시파(온건 노론, 남인, 소론)로 나뉘어 조선의 정치를 주도한다.
그러나 정조가 붕어(왕의 죽음)하고 붕당간의 공존이 완전히 깨지고 이제는 특정 정당을 떠나 일정 가문이 정치를 주도하는 세도 정치로 넘어가게 된다. 이건 숙종 때부터 누적된 문제로 붕당을 제어하기 위해 걸핏하면 붕당을 박살내면서 외척에게 권력을 몰아주기 시작한 게 발단이었다.[26] 정조가 살아있을 때까진 그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그나마 제어가 가능했지만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27] 외척을 중심으로 하는 세도 정치로 귀결되며, 문제가 시작된다.

2.4. 평가


일제 강점기 이후 일제의 식민사관(당파성론)으로 인해 붕당 정치의 의미가 퇴색되어 단지 무의미한 당쟁에 불과하다고 깎아 내린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물론 붕당을 비판한다고 다 식민 사관이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붕당 정치에는 폐단 역시 적지 않았다. 당대 실학자들이나 서적들에서 붕당을 비판하는 말들이 꾸준히 나왔을 정도니.

2.4.1. 옹호


조선 붕당 정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안확, 이태진, 이시이 토시오(石井壽夫) 등이 있다.

2.4.1.1. 역사적 옹호자의 상실

조선 말기의 혼란과 양반층의 입장에 서서 역사를 남길 전승자가 한국 역사계에서 전무했던 탓도 존재한다. 한국 역사에서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거치며 사회의 고위층에 해당하는 양반계층은 거의 몰살하다시피 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비적 덕목과 그들의 예, 문화는 거의가 자의와 타의에 의해 소실되었다. 붕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이러한 '수혜 계층의 해체'에서 비롯되는 면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자업자득의 면도 있는데, "(일본과 협력 중인) 조정에 반항하는 것은 불충이요,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는 고루한 논리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도 있다.

2.4.1.2. 사상에 따른 분파

또한, 붕당은 어쩌다가 나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정확히는 학파)에 따라 나뉘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성리학은 학문을 실천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상[28]이고, 따라서 사상에 따라 정치적 입장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숙종, 영조, 정조조에 신하들이 놀고 있지는 않았다. 도리어 지속적인 당면 과제를 위한 인구 조사나 수효과 토론에 바빴다. (이점에서 노론 = 대지주, 기득권 = 대동법 반대, 소론, 남인 = 중소지주, 비기득권 = 대동법 찬성 => 실학으로의 진행이란 식의 구도는 무리한 분석이다.) 흥선대원군과 같은 개혁이 뒤늦게 구현된 것은 민란이라는 실제적 위협과 강력한 지도력 발휘가 가능했던 세도 정치였기에 가능했던 거지, 이전의 군주들이 수십년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조선 사회 자체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체제였기 때문에(지배층의 청렴과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구조였다) 붕당과 권력 다툼의 목적이 '권력 획득' 자체에 있지 '권력을 휘둘러 이득을 본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조선의 정치 체제가 무너지는 건 세도 정치 시기부터이지, 오히려 붕당 시대에는 왜란 / 호란 이후 국가 재건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2.4.1.3.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의 옹호와 비판

'은둔의 나라 한국'의 저자 그리피스는 이면에서 정치 공작이 벌어지는 유럽 정치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나름의 규칙과 도덕성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출처)
다만 여기에서 그리피스의 조선에 대한 기록은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중 임진왜란 부분만큼이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 사람은 단 한번도 조선에 직접 와 본 적이 없다. 국화와 칼에서처럼 저자가 직접 가지 않더라도 그 나라에 대해서 잘 쓸 가능성도 아주 드물지는 않지만 이 책은 그런 류는 아니어서 카더라 통신이나 어이없는 소문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장 이야기가 이 사람 책에서 나왔다.
서양 학자들에는 다른 지역의 문명을 '빗대어서' 자국을 비판하는 경향이 전통적으로 존재했다. 말하자면 "(흔히 야만인이라고 여겨지는) 동양인들도 이렇게 나름대로 훌륭한 제도나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데, (문명인이고 훌륭한) 우리 나라는 아직도 이런 문제점이 있다니, 이런건 타산지석 삼아서 고쳐야 한다."는 논조이다. 이러한 논조는 고대 로마 제국 시절 타키투스게르마니아에서도 나오는 유서 깊은 것인데, 자국 비판을 위해서 타 문명의 '도덕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객관성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류의 주장은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한다.

2.4.1.4. 다른 나라와 극단성의 비교

사람이 모이는 곳엔 당연히 파벌이 생기고 서로간에 파벌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렇지 않은 곳은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특수한 일부의 경우를 빼놓고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붕당정치라고 해서 더 욕을 먹어야 할 필요는 없고 무조건 한국사를 깍아 내리려했던 식민사관이나 정당정치를 파벌싸움으로 매도하려던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로 볼 여지도 있다. 다른 전근대 국가들의 위정자들의 통치나 파벌싸움의 행태를 보면 조선시대와 다를것이 없었고 오히려 훨씬 더 부정적인 모습이 많았다. 조선시대는 위정자나 왕조차 욕심많은 토호세력이나 무식한 무인들이 아닌 수신하며 군자를 표방하는 학자의 나라였고 이런 모습은 전근대치고는 우수한 모습이였다. 오히려 조선의 붕당정치가 훨씬 양호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붕당의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여 "조선 민족의 타율성과 정체성"의 근거로 삼기로 했다. 이런 인식은 현재 한국인에게도 스며들어 한국인 스스로도 "한국인은 단결을 못한다", "한국인은 누구 잘되는 걸 보지 못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파벌 싸움의 극단성이 정말 붕당 정치에서 유독 특별하게 강하게 나타나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칼부림은 안 난 붕당 정쟁이 더 온건해 보일 정도. 어느 나라나 정당과 같이 정치 집단의 의견이 갈릴 경우 엄청나게 싸웠다.[29]
비슷한 근세의 유럽 왕정 국가들의 경우는 장미전쟁, 위그노 전쟁, 잉글랜드 내전, 천날만날 일어나는 지방 귀족 세력의 사주를 받은 민란, 암살, 그나마 좀 양지에서 벌어지는 경우인 결투 등, 지배 계급간의 분쟁은 베네치아 공화국 같이 일찍 과두 정치가 자리 잡은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법외에서 진행되는 사적 폭력을 기반으로 해결되었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통제된 문투, 그것도 조정이라는 공식 국가 기관을 통해 법적인 절차를 바탕으로 사약을 사하는 것은 보다 온건하다고 할 만하다. 실제로 왕정보다 앞선 민주정조차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전을 치룬 적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나마 이괄의 난 같은 조선 내부의 내전이라 부를 만한 정치 투쟁은 비슷한 시기의 십만, 백만 단위로 희생자를 수십년에 걸쳐 쌓은 위그노 전쟁이나 영국의 삼왕국 전쟁, 등 성리학권 외부 근세 국가의 내부 정쟁에 비하면 훨씬 더 빨리 진압 되고 안정화 된 편에 속한다. 이 또한 '저런건 종교 전쟁이니 예외로 쳐야 하지 않냐'라는 반론을 할 수 있으나, 구교와 신교의 유혈낭자한 대립도 큰 무리 없이 지배 계급의 합의와 법적 절차를 통해 해소한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의 경우를 보면 종교 자체보다 봉건 귀족제와 근대 중앙 집권 국가의 과도기에 있었던 근세 유럽 왕정 국가들 정치 체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통해 그 정도 스케일로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설명하는 학술적 테제가 휴 트레버-로퍼, 존 헉스터블 엘리엇과 그 제자인 제퍼리 파커 등의 역사학자들이 명명한 '조정과 나라의 대립 (court versus the country)' 이론이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신교냐 구교냐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이고, 종교 갈등의 핵심에는 갈수록 비대해 지고 권력과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왕실 중심의 중앙 권력과, 봉건제로부터 내려오는 특권과 지방 자치를 유지하려는 토착 귀족, 자유 도시, 대학 등의 '주변부' 기관의 충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2.4.1.4.1. 한국사

  • 고구려
고구려 23대 안원왕 시기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면서 귀족들 간에 사병#s-2을 이끌고 내전급 규모의 전쟁이 벌어졌다.
  • 신라
왕위를 놓고 진골 내부에서 사병#s-2을 동원한 극심한 파벌 싸움이 벌어지기 일수였다. 신라 하대에는 군인황제시대에 비견될 만큼 왕이 자주 바뀌었다. 조선 시대 환국은 비교도 안될 정도의 막장이었고 그 폐쇄성도 심해서 좁은 진골 씨족의 내부 다툼이었다. 명분 같은 것도 형편없었으며 지역적으로도 고작 경주로 한정된 세력들이었고 지방의 호족 세력은 껴주지도 않았다가 고려 시대나 와야 개방된다.
  • 고려
고려의 경우 붕당정치 못지 않게 문신들 간 갈등이 엄청 심했다. 문신들 각기마다 문생이 있는데 이것이 문신들 간 패거리 정치의 장이었다. 고려가 정종대에 이르자 5묘 9실제의 태묘가 이미 태조 - 혜종 - 정종 - 광종 - 대종의 신주로 5묘 모두 차버렸다. 그래서 상왕덕종신주를 올리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고려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조선 시대에 비해 무신이 문신보다 훨씬 차별받았다. 그런데 의종 때에는 문신들을 견제하려고 이 차별받는 무신들을 중용하였다. 하지만 이를 경계한 문신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의종은 다시 문신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래서 무신들의 불만은 가득 쌓이게 되었고 결국 문신, 무신 양 진영 간의 반목과 대립은 극에 달했다. 그런데 이 사태의 중심에 있었던 의종은 무신을 우대해서 불만을 해소한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아예 문신들에 힘을 완전히 실어주기보다는 두 문무 신료들 간의 알력을 적당히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려고만 했을 뿐이었다. 딱 붕당들을 대하는 조선 시대 왕들의 모습이었다. 거기에 환관까지 중용해서 파벌을 하나 더 만들었다. 결국 그것이 폭발해 무신정변이란 환란까지 일어나고 100년 동안의 무신정권이 들어서 나라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또한 무신정권 시기도 문신들을 몰아내고 비어진 권좌를 두고 무신들 내부에서 새로운 알력이 야기되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걸핏하면 무신들끼리 서로 시비를 걸거나 군사를 일으켜 전투를 하고 서로 업치락 뒷치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방식도 일자무식 무인들답게 매우 잔인하고 무식했다. 이의민두경승의 대립의 한 일화를 보면 국가의 중요 회의 기관이었던 중서성에서 기싸움으로 이의민이 "어떤 자가 힘자랑을 하길래 내가 이렇게 때려눕혔지."라고 말한 뒤 건물 기둥을 주먹으로 후려쳐 기둥을 진동시키자, 두경승은 "그래? 나도 일전에 한 번 저잣거리에서 주먹을 썼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더군."이라고 대답하고 벽을 주먹으로 한방에 뚫어버리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고 한다.
고려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도 있다.
>나는 이가와 두가가 무섭더라
>위풍이 당당해서 진짜 재상 같거든
>황각에 앉은 지 삼사 년에
>주먹 바람은 만 번도 넘게 불었네
>吾畏李與杜 屹然眞宰輔
>黃閣三四年 拳風一萬古
>― 고려사 반역조 '이의민 열전' 중

이렇듯 대립의 수준이 가히 원초적이며 무법지대라 할만하다. 조선 시대 붕당의 세련됨과는 비교도 안 된다.


2.4.1.4.2. 세계사

  • 영국
입헌 군주국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영국 의회의 양쪽 의원석 앞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는데 의원들은 그 붉은 선 밖으로 나가 상대당 의원석 앞으로 가면 안 된다. 위키백과 영국 의회. 찾기 기능을 이용해 'red line'를 찾아보라 그 이유는 과거 귀족이나 의원들이 칼을 상비하고 다니던 시절 칼부림이 잘 나서 지정된 룰이다(실제 위키백과 당 항목을 보면 각 붉은 선의 거리는 칼 두 자루 분량의 거리라 서술이 되어 있다). 길거리에서 결투를 한 것도 아니고 한 국가의 최고 권위 기관인 의회에서 시정잡배도 아닌 의원들이 칼부림을 했다는 소리다! 영국에서는 의회에서 상대편 의원에게 발의할때 앞에 '존경하는'을 붙이는 전통이 있는데 이런 신사적인 것도 따지고 보면 충돌방지를 위해서 생긴것이고 그만큼 폭력적이었다는 반증이다. 영국을 보고 '신사의 나라'라고 부르는데 사실 포악했던 앵글로색슨족의 폭력을 자제 시키기 위한 예절들이 전통이 굳어진게 많고 그 '신사의 나라'라는 곳이 근세까지 수틀리면 서로 결투를 신청해서 서로 죽고 죽여버리는 것으로 갈등을 해결한 동네가 영국이다.
  • 프랑스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좌파우파의 개념이 생긴 프랑스답게 좌우대립과 정치혼란이 극심했다. 톨레랑스도 너무 반목이 심하다보니까 나온 개념이고 지롱드당, 자코뱅파 등등 수많은 정치체가 쪼개지고 합치고 이합집산에 왕당파 부터 극좌파까지 물과 기름과 같은 너무나도 다른 사상들이 너죽고 나죽기로 싸움을 했고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후에 다 뒤집어 엎어버린 나폴레옹의 군사독재, 왕정복고, 연이은 혁명과 반동으로 피를 피로 씻은 극단적 대립과 반목의 연속이 프랑스의 정치사이다.

2.4.2. 비판


붕당정치를 비판한다고 무조건 식민사관의 당파성론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면 조선시대 당대에도 붕당은 이미 심각한 병폐로 지적받았고 조선말 일제강점기[30] 민족주의 사학자들도 붕당정치를 날카롭게 비판을 하였다.

2.4.2.1. 극단화

특히 붕당은 과대 해석이나 확대 해석이 심했고, 작은 비판, 오래전 글마저 꼬투리 잡아 침소봉대하여 역모로 몰아 수없는 피란을 가져왔다. 정여립기축옥사, 계축옥사 그 예시이다. 이런 극단성 때문에 괜히 숙종환국이나 영조정조탕평책이 나온게 아니다.
무엇보다 붕당은 처음에는 어느 한 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으나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질되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주를 이루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정치적 후진성을 띠게 되었다.
물론 한 가문이 정권을 잡고 독재를 펼치는 세도정치 시기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붕당이 돌아가던 시기엔 아무리 나빠도 일당독재일지언정 한 가문 한 사람이 권력을 독식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세도정치의 배경과 원인인 만큼 이 둘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 붕당 정치가 진행되면서 북인, 남인, 소론 등이 차례대로 제거되고 시파와 벽파가 정권을 놓고 충돌하는 등 집권당은 스스로 분열과 숙청을 거듭하며 범위가 계속 좁아졌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집권층이 하나의 가문으로 좁혀진 것은 이 흐름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위의 그리피스가 봤던 대로 당쟁이 신사적인 규칙 아래에 있었을 때는 숙종 때의 기사환국갑술환국 이전까지다.[31] 그 전까지는 당쟁이란 이념과 논리에 의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논박하여 정권을 유지하거나 획득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쟁에서 패해 정권을 잃으면 그저 야인 생활만 했을뿐 물리적인 탄압은 받지 않았으나, 기사환국(인현왕후의 폐위)와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에 관련된 당쟁에서는 정권을 잃은 당파의 수장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상대당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 일어났다.[32] 갑술환국 이후에는 당쟁이 사생결단 식으로 더욱 심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숙종 말부터 당쟁은 생사를 건 투쟁이 된다. 그래도 신사의 옥 이전까지는 겉으로나마 신사적인 규칙 아래에 있었지만 신사의 옥 이후로는 그나마 당파의 대립을 중재해주던 남구만, 최석정, 유상운 등이 대거 귀양을 떠나면서 겉으로나마 남아있던 신사적인 규칙도 사실상 사라진다. 사실 기사환국 이전에도 당쟁에 의해 무고한 인물이 희생된 경우도 적지 않다. 후술할 기축옥사와 계축옥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촌 오시수만 해도 그리 당파적인 인물도 아니었고 우의정까지 역임했던 중신이었는데, 원접사로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중 강희제의 그 유명한 "군약신강" 발언을 조정에 올렸다가 송시열을 겨낭한 말이라고 서인들에게 미움을 사, 경신환국 때 억울하게 주살될 정도였다.[33]
더욱이 반대당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이 없었던 적은 1차 예송논쟁 단 한번 뿐이었고 애초에 붕당의 스타트를 끊은 선조 때부터 시작해서 상대당에 대한 직접적 탄압이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선조 대에 벌어진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가져온 기축옥사. 이밖에도 광해군 때의 북인에 '의한' 숙청,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서인의 북인에 '대한' 역숙청,[34] 효종 대에 벌어진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한 분파인 낙당에 대한 숙청[35][36] 등 그야말로 글을 앞세운 피로써 피를 씻는 역사가 바로 붕당이었다.[37]
고로 붕당 정치를 마치 근대, 현대의 민주적 정당 정치에 비견하는 것은 지극히 미화된 분석이다. 윗 옹호 문단에서는 근대 유럽의 의회 제도하에서 정당, 혹은 파벌 간이 벌이는 결투와 같은 물리적인 충돌이 최소한 언쟁은 높이되 육체적 다툼[38]으로 까지는 발전하지 않는 "세련된" 붕당 정치에 비해 열등하다는 듯이 쓰여 있지만, 집권당이 비집권당을 자신들의 권력 안정화, 혹은 보복을 목적으로 전격적으로 숙청하는 것이 대체 어디가 민주적이고 어디가 세련되었다는 것인가?. 조선의 붕당에 소속된 조정 신료들은 그 지지기반이 봉건적 영지도, 시민들의 투표도 아닌 '''왕'''이었기에 반대파로 하여금 왕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역도라고 몰아 죽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이 "후진적"이라고 주장하는 유럽식 당파간의 대립에선 집권당이 권력을 획득하자마자 비집권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일은 내전에 대한 사후처리가 아닌 이상 보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붕당 간 갈등이 치열해지면서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직책인 왕의 권한도 강해지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광해군처럼 지나치게 특정인에게 권력을 몰아 주는 식의 실수만 하지 않으면 붕당들은 유일한 조정자인 왕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붕당들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간 환국 정치였다. 또한 붕당 정치에서의 논쟁 결과가 제도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서인과 남인 등이 신권과 왕권의 관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옹호론에서 흔히 지적하는 내용이지만,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제도의 변화로 이어진 바는 전혀 없고 사실상 추상적 - 관념적인 측면에서의 차이에 불과하였다. 예컨대 붕당 옹호론에서 흔히 서인들의 가치관이 대동법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려 하지만, 정작 대동법을 처음으로 정책적으로 시행한 이원익은 남인이었다. 남인의 가치관으로도 대동법을 건의하고 시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붕당세력들도 당연히 숙종기의 환국정치를 겪었기에 숙종 사후 경종과 영조를 두고 소론과 노론이 물고뜯는 이른바 택군 현상이 발생한다. 당연히 한 당의 지지만 얻은 왕은 자신을 지지해준 당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고...
결론적으로 붕당 정치는 스스로 자정 작용을 잃어버리고 말아 가뜩이나 극단적인데 마땅한 중재 기관이 국왕이나 근왕 세력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가 세도정치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2.4.2.2. 폐쇄성

붕당은 세습되었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적인 사회였던지라 아버지가 서인이면, 아들도 서인이듯 붕당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가 없었다. 이중환택리지에서 어느 가문이 어느 당이나 어느 파로 찍히면 초야로 정치를 피하려 하거나, 중도적인 입장에서 행동하려 해도 반대 당의 린치를 피할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붕당 정치는 폐쇄성을 가져왔다. 특히 힘이 강한 붕당에 속하지 않으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정조에게 올린 상소에서 신분, 지역 뿐만 아니라 붕당과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인재들을 8할, 9할을 버린다고 비판했다. 이익성호집의 '붕당론'을 통해 당쟁의 원인은 붕당들끼리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크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학창 시절, 붕당의 양성 기지 서원에 속하지 않으면, 관직에 나가기 힘들 정도 였으며, 세금 착취와 병역 기피 등 서원의 폐단도 심했다. 흥선대원군이 괜히 서원을 밀어버린것이 아니다.

2.4.2.2.1. 진영논리

후기 붕당 정치에서는 진영논리에 휘말려 상대를 소인당이라 비하하고 자기네 당을 군자당이라고 미화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당내 의견에만 휘둘리고, 창의적인 의견은 신변 안전 문제로 나오지 못했다. 율곡 이이는 이를 두고 상대 당의 군자까지 싸잡아 소인으로 비하하는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했지만 이로 인한 색깔론 시비로 정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중종~명종 시기 정적을 몰아낼 때는 붕선 혐의가 많았고[39] 이준경이 죽으면서 선조에게 붕당을 경계하라는 말을 남겼을때는 선조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나 조정에서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조광조가 죽게 된게 붕당 혐의인데 어따대고 붕당붕당거리냐? 저 인간 죽으면서도 헛소리하네?" 라는 반응이었다.
더욱이 붕당은 지역감정을 키웠다. 서인은 경기 - 충청도 기반이고, 영남은 남인과 가까웠는데, 효종 때는 경상도 서인 유생들이 율곡을 옹호하는 글을 올렸다가 남인 유생들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집을 부수고 고향에서 쫓아내버리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2.4.2.2.2. 의회와의 비교

조선의 붕당은 유럽의회와 비교했을 때 소속원의 출신이 엄격하게 제한되어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드러난다. 애초부터 붕당 내에는 민중이 섞이기도 힘들었거니와 민중의 의사를 대변해 줄 대표자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평민의 대표자인 호민관이 존재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위의 사례는 고대 로마고대 그리스의 오랜 민주주의의 전통에 힘입은 유럽의 특수성으로, 유럽 이외의 모든 세계는 일반 민중의 정치 참여가 지속적으로 이어진 역사가 아예 없다는 점에서 조선의 붕당에만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8~19세기 조선 사회의 변화와 중간계층의 성장을 붕당정치가 반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특히 조선에서는 민중은 고사하고 지방 향반이나 중인, 상민 부농조차 붕당정치 체제에 편입되지 못했고, 붕당이 철저하게 중앙정치계의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렀다.
더 큰 문제는 붕당이 결과적으로 상호간의 공존과 견제를 불문적으로든, 성문적으로든 확립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민주적 의회체제에서는 집권당과 정부가 상대 정당과의 대립과 갈등은 있을지언정 상대 정당의 궤멸, 몰락을 시도하지는 않지만[40] 조선의 붕당들은 국왕과 영합하여 상대 당에 대한 숙청, 축출을 지속했다. 그 결과 단기적으로는 중앙 양반집단 내부에서조차 국정 운영의 인재풀이 줄어드는 상황을 초래했으며, 장기적으로는 일당, 나아가 일개 가문의 권력 독점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어 나라를 그야말로 망조로 몰고 갔다.

2.4.2.3. 사회적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

그 외에도 붕당 정치에서 중요한 문제들이 실제 조선 후기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점도 있다. 왕위의 정통성과 같은 성리학적 문제는 결국 국가 체제에도 관련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국가 운영의 이념으로서 성리학을 논의했는지가 알 수 없다. 붕당정치가 합리적인 정치적 토론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려면 붕당정치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도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붕당 정치에서의 논점들을 보면 붕당정치가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만한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붕당 정치의 옹호자들이 흔히 드는 사례가 대동법 등이 붕당 정치의 틀 안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이지만 이는 잘못되었다. 실제 대동법 논의 과정을 보면 이원익은 남인이고 김육은 서인인 등 대동법의 옹호자들은 딱히 붕당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대동법의 실시 여부나 그 결과가 붕당 간의 경쟁에 영향을 준 흔적도 없다. 대동법이 붕당 정치의 틀에서 논의되었다고 하려면 각 붕당이 대동법 실시 여부나 방법 등에 대해서 서로 다른 당론을 가지고 논쟁을 벌여서 이것이 각 붕당간의 발전적 경쟁으로 이어졌어야 하지만, 단지 대동법의 옹호자들이 이 붕당 저 붕당에 속해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동법이 붕당 정치의 틀 안에서 논의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실학에서 주로 언급되던 북학파라든지 중농학파니 하는 이론은 당시 붕당 정치판에서는 주류가 아니었다.

2.4.2.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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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정통하다는 박시백 화백의 붕당에 대한 인식. 붕당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선조 재위기에도 건강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위의 조선 중기 붕당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현대의 '정당 개념'이라기보다는 사병에 가까운 짓거리였으며, 사사로이 패당을 가르는 것을 금기시하는 사회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41]
성호 이익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 바 있다. 말그대로 밥그릇 싸움이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그 싸움은 이해 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가 절실할수록 당파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될수록 당파는 굳어진다.

…이제 열 사람이 모두 굶주리다가 한 사발 밥을 함께 먹게 되었다고 하자. 그릇을 채 비우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난다. 말이 불손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말이 불손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 태도가 공손치 못하다고 꾸짖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싸움이 태도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는다. 다른 날에는… 밥 먹는 동작에 방해를 받는 자가 부르짖고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한다. 시작은 대수롭지 않으나 끝은 크게 된다. 그 말할 때에 입에 거품을 물고 노하여 눈을 부릅뜨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이로 보면 싸움이 밥 때문이지, 말이나 태도나 동작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해(利害)의 연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그릇됨을 장차 구할 수가 없는 법이다.

('붕당론', 《성호집》 권25, 잡저)#


3. 중국의 붕당


중국의 붕당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귀족 가문의 후예와 과거로 등용된 신진 세력과의 마찰 과정에서 당 후기에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40년간의 당쟁을 우이당쟁이라고 부른다.[42] 여러 황제를 거쳐 전개된 이 붕당 정쟁은 당시 정쟁에 환멸을 느낀 황제가 두 당파를 모두 탄압하면서 종결되었다.
특히 송나라명나라 때 붕당의 성행과 갈등이 극에 달했는데, 송의 구법당과 신법당, 명의 동림당과 엄당이 벌인 갈등은 제국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때문에 붕당의 폐해를 경계했던 명나라는 법전 '대명률' 간당조(奸黨條)에서 '''"만약 조정의 관원들이 붕당을 지어 국가의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면 모두 참수시키고, 처자는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관청에서 몰수한다"'''고까지 명시했다.
그러나 이런 경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말기엔 결국 국정의 문란함과 더불어 붕당 갈등(엄당 vs 동림당)까지 성행하면서 망조가 들고 말았다. 특히 환관의 파워가 막강한 명에서 이런 붕당 갈등의 격화는 곧 기회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붕당 정치가 환국으로 인해 망조가 들며 세도정치라는 결말로 귀결된 것처럼, 명의 붕당 정치도 최후의 승자는 어느 당도 아닌 환관이었다. 위충현 항목 참조.

4. 같이보기



[1] 나름대로 역사를 알 만큼 안다는 전직 대통령조차 붕당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이니, 세인들의 관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왜 틀렸는지를 설명하자면 영남과 호남은 당파로 따지면 동인계로 모두 한편이었고 정여립의 난에는 최영경을 비롯한 영남 유림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이 설명이 틀린 것과 별개로 저 설명을 한 사람을 꼭 비판할 만한 것도 아닌 것이 붕당 정치에 대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학자를 넘어 대중들에게 전달된 것은 2000년대 이후나 되어서의 일이었다. 교육 과정으로는 7차 이후. 사실 대부분의 한국사 재평가 작업이 200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잘못 알려진 내용들이 교양 역사서부터 학습 만화에까지 그대로 실려있었다. 지금처럼 위키질로 간단히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닌 것. 다만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얻기 쉽고 연구도 많이 이루어진건 좋긴 한데 이상한 쪽으로 파고드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게 문제이긴 하다. 과거에는 붕당 정치는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절대 다수의 인식이었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워왔다. 그리 아주 오래 전 얘기도 아니고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다. 게다가 한국의 극심한 지역 감정을 붕당과 연관시키거나 심지어 삼국 시대와 연관시키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함석헌 선생도 그런 글을 오래 전에 썼었다. 그것은 딱히 그 시대 사람들이 무식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역사학의 연구와 대중적 전달, 그리고 공식 교육 과정에서의 가르침이 부실했던 것. 인터넷도 없어서 전공자가 아니라면 교과서나 몇몇 책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즉,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부러 호남홀대론을 만들고 영남을 비하하려고 적은 문구가 아니라, 정말로 이렇게 믿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2] 이 때문에 붕당들이 이조 전랑직을 놓고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3] 경종 때의 신임사화 (신임옥사)의 경우 "사화"라고 부르지만 그 내용은 환국에 더 가깝다. 뭐 그렇게 따지면 을사사화도 "사화"라고 보긴 어렵지만 말이다. 항목 참조.[4] 이게 지극히 당연한 것은 목은포은정도전공민왕시기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대부들의 스승이였고, 포은공양왕시기 이성계, 정도전과 대립하면서 조선 건국을 막다가 살해당한 인물이였다. 사람에 따라서 고려의 삼은에 넣기도 하는 도은은 조선 건국 직후 유배갔다가 과격한 곤장형 집행으로 살해되었으니, 야은 말고는 후계를 전할 인물이 없었다. 다만 두문동에서 72명의 사람들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은 그냥 야사이다.[5] 훈구파가 유자광한치임 일파로 나뉘어 있을 때, 새로운 세력을 키워서 나머지 둘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붕당을 나쁘게 보는 사람들은 성종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퍼먹고 놀기만 하는 싸움'''과 '''더디게 발전하는 싸움''' 둘 중 어느 게 나은지는 뻔하다.[6] 이조전랑은 정랑(正郎 정5품)과 좌랑(佐郎 정6품)을 일컫는 말로 관(官)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 내에서도 핵심에 속하는 실권직(이조 판서나 참판 등은 이조 전랑이 올린 결정 사항을 결재나 하는 정도)이었기에 자연히 이를 어느 파벌이 차지하는가에 따라 세력 균형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었다.<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인사권이 아니라 언론기관인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인사권을 이조의 전랑이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 다른 문관 인사권은 이조판서가 좌지우지할 수 있어서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천대법(薦代法)이라고 부른다.[7] 그런데 아래의 중국의 붕당에서의 일 때문에 대명률에서 붕당을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붕당"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진 않았다. 사림파가 득세하는 과정에서 교묘하게 관원 대신 사림이 붕당의 주체가 된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갔다.[8] 그리고 사화에 앞장섰던 사람들 중에 삭탈관직 된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소수에 불과하고 다수는 거의 삭탈관직되지 않은 점도 한 몫했다.[9] 그런데 서경덕의 제자들은 대체로 동인-그것도 북인계열-에 속한다. 그리고 율곡은 정통 성리학을 추구한 사람이지 주기론자도 아니다.(율곡의 학설은 형이상학적인 理만을 중시하는 체계에서 현상적인 氣도 '''함께''' 중요하다는 내용이지, 氣만을 중시하는 학설이 아니다. 거기다가 율곡의 학통을 승계하였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학설을 이어받으면서도 주리론을 중심학설로 받아들이기 있었기에 대체로 율곡의 말한 것보다도 퇴계의 학설에 가깝게 되었다.)[10] 격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준경은 훈구파가 아니였다. 심지어 스스로 사림을 자처했으며, 외척들의 난립 속에서 버티면서 보다 좋은 정치를 위해서 나아온 사람이라고 자부하였는데, 그런 정치가 싫다고 지방에 낙향하며 회피한 자들이 이제와서 자기를 절의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는 것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터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물론 이준경도 당시 명망이 높던 퇴계가 한성에와서 관직을 사양하였을 때에 유림의 거두로서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야 했음에도 자기가 조정의 영수라는 자만감에 무시하면서 일을 드러나게 한 잘못이 있다.(퇴계도 어찌되었던 조정의 영수인 사람을 먼저 찾아 가는 것이 무슨 자기 명성에 큰 오점이라고 가지 않고, 그냥 낙향하면서 이런 사단을 만들었다. 이후에 이 사실에 분개한 제자들의 잘못을 스승으로 바로잡지는 못할망정 그냥 넘겼으니, 이준경과 퇴계가 둘 다 잘못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11] 웃긴 건 사림 분열 및 붕당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된 이 둘은 나중에 화해한다(...). 사이가 틀어진 것도 어처구니 없는 오해였는데, 심의겸이 젊은 시절 권신 윤원형의 집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 집에서 나오는 김효원을 보았고, 간신한테 들러붙는 놈이라고 욕하며 서로 사이가 틀어진 게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사실 윤원형 항목에도 보다시피 윤원형의 사위와 김효원이 절친이라 김효원은 거기 가서 밤새도록 공부한 것이었고, 이 둘은 화해했지만, 붕당의 수준은 두 사람 불화 수준을 떠나있었다는 게 문제. 당사자들이 괜찮다고 해도 주변 인물들이 더하다는 전형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신진 사림들이 심의겸을 비판한 이유는 그가 명종의 외척이였기에 비판한 바가 컸다. 하지만 심의겸은 외척임에도 이전까지는 명망이 높았던 인물로 특히나 명종시기 윤원형과 쌍벽을 이루던 외척 이량을 제거한 인물이기도 하였다.(이량을 제거하고, 사림들이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공적은 생각도 안하고 퇴계남명의 새파랗게 젊은 제자들은 외척이 '''감히 자기들 중에서 이름 높던 김효원을 비판하였다'''고 하며 공격하였다.[12] 초기 동인 우위 →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인한 동인의 타격 → 정철의 처벌에 따른 서인 몰락 등의 전개가 있었다. 다음 각주 참고.[13] 다만 다수파는 야당인 서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정권은 동인이 잡고 있었지만 신하들의 다수는 서인이었다는 뜻이었다. 즉, 여소야대였다. 그리고 당시 좌의정은 서인이던 정유길이었다.[14] 사실 선조 초년에 선배사림들의 노력으로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이 대거 조정에 들어와서 새로운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오만불손한 젊은 아해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퇴계와 남명만 훌륭하고, 이준경, 박순, 백인걸 같은 선배사림들은 외척에 아부하면서 절의를 잃은 사람들로 매도하였다. '''그런데 이준경은 중종29년에 이미 기묘사화때 사류들의 무죄함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고, 박순은 기묘명현 박상의 조카로 서경덕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백인걸은 정암 조광조의 제자였다.''' 그러다가 이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조정하려고한 율곡과 이를 지지한 성혼에 대하여서도 공격하며, 절의없는 자들과 동일하다고 또다시 매도하였다. 이러한 스승에 대한 존경심만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었기에 함께 모일 수 없는 자들이였다. 왜냐하면 퇴계는 경상좌도를 기반으로 하며, 정통 주자성리학을 발전시킨 사람인 것과는 다르게, 남명은 경상우도를 바탕으로 실천적인 모습을 강조하던 사람이였다. 그나마도 경상도라는 지역적인 동질감에 온건적인 인물들의 조화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율곡 사후 변덕적인 선조의 행태는 그렇지 않아도 은퇴해서 사라지는 서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위치를 불안하게 하였고, 동인이라고 불리는 대다수의 젊은 사림들이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나이상 당연한 이치였기에 그럴수 있지만, 정통성에서 문제가 있었던 선조는 자신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원하였다. 뒤로 밀리던 서인의 일부도 이에 호응하면서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반역사건이기에 자신이 직접 지휘한던 것을 나중에는 서인들의 책임으로 넘겨버리는 비열한 형태까지 보였다. 이때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이조식의 학설에서의 동질성이 있었고, 스승을 비난한다는 것에서 아무래도 정여립에 반감성이 있었던 퇴계의 제자들간에 차이점으로 기축옥사에서의 피해도가 달라졌다. 이에 자연스럽게 나뉘게 된것이다.[15] 그러한 영향으로 임진왜란기 조식의 문하에서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다.[16] 남인(이원익), 서인(이항복), 남인(이덕형)이 삼정승 직을 맡았다.[17]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275 - 276[18] 단, 예송논쟁 속에서 남인들의 송시열에 대한 비판은 사약을 넘어서 사사하고 남을 정도였다. [19] 2차 예송논쟁은 1674년에 끝났다.[20] 이는 송시열이 자신의 주장을 오락가락하면서 줏대없게 행동한 측면이컸다. 그러나 당시 경신환국이 가능하였던 것은 오로지 척신 김석주에 공이였으니 기성 서인들은 그의 눈치를 봐야했다. 거기다가 문제가 터진 이유가 남인들 공격을 조작하다가 들킨 사건이기에 남인들로부터 역적이라고 공격당한 송시열은 덮을 수 있는 일이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이 이때 송시열에게만 의견을 구한 것이 아니고, 윤증박세채에게 동일하게 물어 본 것인데, 나중에 소론이되는 이 두 사람은 원론적인 주장만 하였을 뿐 특별하게 송시열에 반대되는 의견을 개진한것도 없는 것이다.(척신 김석주는 사실상 당시 숙종의 대리인과 같이 행동하였다. 그런데 정작 직접적으로 걸린 사람만 비판하였을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고, 처음 송시열도 원론적으로 듣고서는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다만 걸린 사람이 자기 스승인 사계 김장생의 손자라는 것만 아니였다면 윤증박세채처럼 할 수 있었다. )[21] 벽파로 이어진다.[22] 사실 그마저도 홍인한을 제외하면 정조의 즉위 반대에 미온적인 편이었다. 애초에 임금이 후계자로 밀어주는 사람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것이 감히 생각키 어려운 일이었기도 하지만...[23] 여기에는 온건론자들인 영조 시기의 탕평파의 상당수가 결국 시파에 들어갔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24] 사실 이 문제는 맨처음 정통성 없다고 생각한 선조가 당시 우후죽순으로 유입된 사람들의 사이를 갈라서 자신에게 권한을 집중시키려는 것에서 시작하여, 역시나 폐주를 몰아낸 공 이외에 왕위순위에서 높지 않았던 인조가 자신의 정통성을 구축하려고 헛짓거리를 하다가 일을 키웠고, 역시나 왕실권위를 높이려고 하다가 일을 키운 현종에, 이 문제를 과격하게 처리하여 자신에게 힘을 집중시킨 숙종, 당파의 주장에 사로잡힌 경종, 왕이 조정자로서 붕당을 조정하려고 한 영조정조의 정책방향으로 결국 세도정치라는 폐단을 키웠다.[25] 엄밀하게 따지자면 김조순은 정조의 친위 세력으로 김조순 시기를 세도 정치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존재한다는 평도 있다. 실제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본격화되는 것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시대부터이다. 다만 막후에서 여러 가문들과 정계를 좌지우지하였다는 측면에서는 세도정치라고할 수 있다.[26] 숙종의 환국 못지 않게 경종, 영조, 정조도 밀어주다 뒷통수치기를 시전하곤 했다. 영조 때까지 지속된 환국이나, 홍국영을 키우다 내치거나...[27] 엄밀히 말하면 홍경래의 난 이후로.[28] 고려 무렵에는 유학이 단순히 도덕과 이상을 추구했지만, 고려 말부터 점차 실천 위주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를 통해 신진 사대부가 권문세족들을 몰아낸 이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29] 정작 이걸 이용해 조선을 깎아내린 일제는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단 한순간도 육군-해군 간 정쟁을 멈춘 적이 없었으며''' 심각한 수준의 내전까지 일으켰는데 '''인육을 먹기 위해 서로를 사냥한 사건'''까지 있었다. 자세한 것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밀리환초 학살사건 참조.[30] 일제강점기당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 타율성론을 비판한 역사학자는 많았지만 붕당을 긍정적으로 본 역사학자는 안확 외에는 거의 없었다.[31] 그러나 이말조차도 논란이 있는게 붕당은 사실 처음부터 기축옥사, 계축옥사같은 피비린내나는 충돌이 심했으며 기사환국, 갑술환국까지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던 뿐일 수도 있다.[32] 이는 또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각각 서인과 남인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단순한 왕비,후궁의 관계가 아니라 각 당파의 상징이기도 했다. 장희빈은 남인의 지도자급이었고, 인현왕후는 서인의 지도자급이었다.[33] 게다가 오시수의 증조부인 오백령은 딸이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우의정 이숙에게 시집을 갔고 오백령의 딸이 낳은 아들이 노론의 중진이자 역시 송시열의 문인이던 병조판서 이만성인데, 이숙-이만성 가문과 오시수 가문은 서로 가족 관계로 얽혀 있을 정도였다.[34]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북인'들은 아주 그냥 역적으로 낙인이 찍혀서 다시는 조정에 등장하지 못했다.[35] 효종 대 서인들은 원두표의 원당과 김자점의 낙당 그외에 산당, 한당이라는 4대 분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를 통합한 양반이 바로 송시열.[36] 다만 김자점은 죄를 받을 만 했다. 왜냐하면 김자점은 악행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37] 가뜩이나 붕당 정치가 극단 성향이 심한데다가 입헌군주정도 아닌 전제군주정인 조선 사회에서 붕당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38] 유럽 의회에서 일어난 물리적 충돌은 어디까지나 개인 혹인 몇몇 사람들만의 감정싸움이었으며 당 전체가 상대당을 공권력을 동원해 철저하게 보복하는 일은 없었다.[39] 붕선이란 붕당을 선동한다는 것, 즉 붕당을 형성함을 이른다.[40] 다만 시도하려 해도 정당 결성의 자유가 있고 지지층을 어찌할수가 없는터라 상대 정당을 궤멸시키고 몰락시킨다해도 같은 성향의 정당이 다시 나오기에 하지 않는것도 있다. 일당우위제 국가들의 정부와 집권당들도 이때문에 야당해체를 하지 않는다.[41] 조선 사회에서 붕당의 흔한 인식은 삼국지에서 흔히 보이는 봉건적 신하+가신(家臣) 구조에 간신을 합쳐놓은 것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왜 위대한 선비들이 있었음에도 그 선비들의 시기에는 제대로 된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중 하나로 "그 선비를 질투한 간신배 도당들 때문"을 내놓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 때문이다.[42] 붕당의 두 영수라고 하는 우승유와 이덕유의 성을 따서 이렇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