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지오 1세
- 생몰년: 650년 ~ 701년 9월 8일
- 재위기간: 687년 12월 15일 ~ 701년 9월 8일
테오도르는 새로운 교황을 인정했으나 파스칼 1세는 일단은 세르지오 1세를 인정하는 척 하며 라벤나 총독에게 많은 뇌물을 약속하고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라벤나 총독이 로마에 입성했을 때 세르지오 1세의 지위가 확고했기에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파스칼 1세가 약속했던 뇌물을 세르지오 1세에게서 받아내려고 했는데 천벌을 받아서인지 687년 12월 15일 세르지오 1세가 정식으로 교황에 취임하던 날 총독이 사망한다.
세르지오 1세가 교황으로서 지위를 굳히므로 일단은 제국 내 교회의 안정이 찾아 오는 듯 했으나 692년 소집된 트룰로 공의회[1] 로 인해 동로마 황제와 교황 간의 불화가 극에 달하고 만다. 이 공의회는 애시당초 교황의 권위를 상대적으로 낮추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위를 상대적으로 높이고 로마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을 띄었다. 실제 이 공의회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제는 친 동로마 성향들이었다.
이 공의회에서 내린 결정 사항들 중 상당 부분에 대해 세르지오 1세는 반대의사를 천명했다. 이에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교황의 사절을 체포한데 이어 세르지오 1세까지 체포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고자 했으나 로마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만다. 분노한 황제는 교황의 고문 보니파시오를 체포하는 한편 사절단을 보내 교황에 경고했으나 결과가 신통치 않자 자카리아스에게 세르지오 1세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다시금 로마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이어져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일련의 사태들로 동로마 황제와 교황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동서 교회의 대분열의 씨앗이 되고 만다.
세르지오 1세는 701년 9월 8일 선종했으며,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9월 8일이다.
[1] 퀴니섹스트 공의회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