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릉(고려 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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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은 191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릉의 모습이며(출처 : 조선고적도보), 아래 사진은 지난 2009년 한서대학교 장경희 교수가 언론을 통해 공개한 근래의 모습. 앞의 호수 같은 것은 송도저수지다.
봉분을 뺀 나머지 석물은 거의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선명하진 않지만, 윗 사진에서 봉분 앞쪽에는 "고려 혜종왕 순릉(高麗 惠宗王 順陵)"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은 조선 고종 때인 1867년에 세워진 비석이다.
順陵
고려 2대 왕 혜종과 왕비 의화왕후가 안장된 것으로 전해지는 왕릉이다. 위치는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송악동이며, 1916년도 기준으로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고려정 자하동, 1950년 기준으로는 경기도 개성시 고려동이다.
순릉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고려사절요에 전하고 있다. 고려사 945년(혜종 2년) 음력 9월 15일자 기록에는 "송악산(松嶽山)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순릉(順陵)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의화왕후는 정확하게 승하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 후비 열전에 "훙서하고 나서 시호(諡號)를 의화왕후라 하고 순릉(順陵)에 장사지냈으며, 혜종과 함께 부묘(祔廟)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현재 전해지고 있는 순릉이 과연 혜종과 의화왕후가 같이 안장된 왕릉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1916년에 발간된 '대정5년도고적조사보고'에서는 '전(傳) 혜종 순릉'이라고 표기하여, 순릉이라고 추정된다고 하고 있고, 북한에서도 1957년 '개성력사박물관'에서 이 능을 발굴하면서 '무덤칸도 없는 거짓무덤'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첫 번째로는 순릉의 앞에 세워진 비석이 1867년에야 세워진 비석이고, 두 번째로는 성종 때의 《동국여지승람》 및 18세기의 《여지도서》 송도보유에 '탄현문(炭峴門) 밖 경덕사(景德寺) 북쪽'에 순릉이 위치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순릉은 송악산 동쪽 개성 나성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1] 조선 선조 때까지도 고려 혜종의 능은 탄현문 바깥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다만 고려 태조의 능에만 비석이 있어서 정확히 알 수 있었고, 나머지 고려 왕릉은 비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대다수 고려 왕릉은 무덤 주인을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으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측에서도 발굴 당시 해당 무덤이 봉분만 남아 있고, 대부분의 석물은 땅속에 묻혀 있는 상태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 고종이 고려 왕릉의 여러 능침을 보수하고 정비해 75기에 대해 ‘고려 왕릉(高麗王陵)’이라고 쓴 표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은 2019년 북한이 이 무덤을 발굴할 때[2] 청자 새김무늬 잔 받침대, 꽃잎무늬 막새기와, 용 모양의 치미[3] 조각들을 비롯한 유물들과 함께 발굴됐다. 그러니 굳이 말하면 '''북한 학계의 혜종 순릉 비정은 조선 말기 고종 시대로 회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순릉은 송악산 동쪽 자락의 남안화사 근처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1916년 대정5년도고적조사보고에서는 그때까지 전혜종순릉이라 전해지던 무덤을 발굴한 보고서에서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이 없고 난간석(欄干石)의 잔석(殘石)이 남아있으며, 다른 석물(石物)은 없다. 능 앞에 정자각(丁字閣)의 초석이 남아있다.”고 적고, 일제강점기 당시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자하동에 혜종의 순릉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곳도 고려 도성의 안쪽에 있는지라 고려 왕릉이 모두 개성성 밖에 있다는 것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고증이 맞다고는 할 수 없었다. 북한도 1957년 발굴 조사에서 개성시 룡흥동(일본강점기 때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송도 저수지 북쪽에 있는 옛 고려 무덤에 이곳의 옛 지명을 따서 '화곡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혜종의 무덤이라고 지목했다. 그리고 2019년 다시금 화곡릉의 발굴을 거쳐 순릉으로 확정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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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릉은 개성시 룡흥동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송도 저수지 북쪽 기슭의 나지막한 산 능선 중턱에 있는데, 만월대에서 보면 동북쪽으로 10km 떨어져 있는 위치에 해당한다. 화곡릉 서쪽에는 고려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되는 동구릉[4]과 냉정동무덤군을 비롯한 많은 고려 유적이 있고, 개성성 외성(나성)의 동북쪽문터인 탄현문터가 화곡릉의 서남쪽에 있다.
북한 학계에서 이 무덤을 2019년에 다시 발굴하면서 확인하기로는 남북 63.6m, 동서 20m 범위 안에 총 3개 구획으로 나뉘어 있는데 가장 위 구획에는 직경 13m, 높이 3m 규모의 봉분과 비석 받침돌이 있었고, 중간 구획에서는 좌우에 각각 1개의 문관상(文官像)이 땅속에서 발견됐다. 아래 구획에는 제를 지내던 정자각 터가 확인됐고, 많은 주춧돌이 발견됐다. 봉분 주위에서는 난간석들이 일부 발굴됐고, 무덤 구역 전체에 돌담(曲墻)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순릉은 전형적인 고려 왕릉의 배치구조를 하고 있다. 다만 다른 고려 왕릉과 달리 12지신을 새긴 병풍석이 없고, 둥근 모양으로 다듬어진 화강석을 둘러놓은 원형의 기단이 확인됐다. 무덤칸(묘실)은 크기가 길이 4m, 너비 3.4m, 높이 2.2m로, 묘실 안 중앙에 합장된 왕과 왕비의 관대가 마련돼 있고, 그 옆에 부장대가 있다. 무덤 칸이 반지하에 만들어진 외칸의 돌칸흙무덤으로 조성되었는데, 북한 학계의 설명으로는 이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무덤형식이면서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왕릉 가운데 무덤 칸의 규모가 가장 큰 것이라고. 다만 태조 현릉과는 달리 벽화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1] 다만 《고려사》에서 송악산 동쪽이라고 한 것과 비교하면 얼추 맞기는 하다.[2] 내각 민족유산보호국 산하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주도로 화곡릉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3] 모양이나 양식이 고려의 황궁이었던 만월대에서 발굴된 것과 같아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이 무덤을 혜종의 순릉으로 비정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왕궁에서 쓰는 치미를 올릴 정도면 일단 왕족급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다.[4] 일부 학자들은 이 동구릉이야말로 진정한 고려 혜종의 순릉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997년 북한 고고학계에서도 동구릉을 발굴하기는 했는데 타다 만 자기 조각들과 판 못 몇 개만 찾아냈을 뿐 무덤의 주인을 확정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