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대
1. 개요
滿月臺
고려 말부터 고려 왕조의 법궁 터를 부르는 말이다. 원래 태조 왕건이 태어난 집터 자리로 고려 태조 2년(919)에 창건되었다. 만월대는 원래 궁궐 터를 의미하지만 현대에는 궁궐 자체를 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2. 상세
2.1. 궁의 명칭
터에 있었던 고려 법궁의 원래 이름은 없었다. 전왕조 신라의 경주 월성이나 이후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과 같은 격이지만, 고려 왕조는 신라나 조선처럼 법궁에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았고 그냥 궁궐(宮闕), 본궁(本宮), 대내(大內), 정궁(正宮), '''본궐(本闕)'''이라고 불렀다. 그저 정식 궁궐, 메인 궁궐이라고만 한 것이다.
고려시대 초중기까지 단지 본궐로만 불렸지만 이자겸의 난으로 본궐이 불타고 인종은 별궁 연경궁에 거주한다. 그러면서 연경궁은 점차 본궐을 흡수해 본궐이 연경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연경궁 문서 참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만월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고려 멸망 이후 조선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인데, 음력 정월 대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망월대(望月臺)에서 유래된 것이다. 현재 북한의 개성 송악동(舊 행정구역상 만월동 71-8번지) 송악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의 국보 122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일반적으로 만월대라 할 때에는 왕궁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궁성 부분, 그 가운데서도 관료들이 조회를 하던 회경전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의 주 건축군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여간 고려 왕궁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3. 역사
3.1. 태조 즉위 이전
이상 기록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인용한 편년통록, 편년강목의 기록이다. 위에 있는 기록은 건국 이전 왕건 일가를 신화적으로 각색한 신성화가 지나치게 추가돼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몇몇 부분은 확실히 실제 역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만월대 자리는 왕건의 선조가 살던 자리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엔 송악에 자리 잡은 호경부터 아들 강충, 손자 이제건, 보육, 증손녀 진의, 외고손자 작제건, 외6대손 용건과 외7대손 왕건까지 모두가 송악에서 살았다고 한다.
호경 이후 강충 대부터 지방호족으로서 송악 일대를 지배한 것으로 보이며 의조 작제건이 영안성을 세우고 송악군을 경영했다. 마지막으로 세조 용건이 현 만월대 터에 저택을 세웠다. 태조 왕건이 저택과 세력을 이어받고 발어참성을 세웠다. 초창기에는 송악이 잠깐 후고구려의 수도가 됐지만 곧 철원으로 천도한다.
3.2. 태조 즉위 이후
태조가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성에서 즉위 후 다시 송악으로 돌아와 옛 저택 자리에 궁궐을 지으니 바로 지금의 만월대다. 광종이 '수영궁궐도감(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해 크게 증축했고 현종 때 재건하며 모양을 크게 바꿨다. 인종 때 재건하며 궁궐 건축의 이름들을 싹 바꿨다.
태조 때 지어진 이래로 공민왕 전까지 현종 때 한번, 인종 때 한번, 명종 때 한번, 고종 때 한번, 총 4번 완전히 날라가버린 적 있다. 이후 원종이 다시 세웠다.
원종 대 재건 이후 수리가 잘 안된 듯 하다. 충선왕은 재위 3년 차에 편전 강안전(康安殿)이 낡았다며 투덜거린 기록이 있다. 1년 간 재수리를 거쳐 410여 칸을 가진 궁궐로 만들었고 이 때 신하들이 원의 예절을 따라 축하했다고 한다.
충선왕이 상왕으로 있을 때 잠시 상왕궁(上王宮)으로 바뀌었다. 이때 정궁은 충숙왕이 있던 현덕궁(玄德宮). 실권을 충선왕이 장악했기에 연경궁(본궐)을 충선왕이 차지한 것이다. 충숙왕은 국왕인데도 밀려난 것. 그래서 사실상 계속 법궁의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크게 무너지는 일 없이 유지됐지만 공민왕 때 홍건적이 들어와...
3.3. 공민왕 이후
조선이 건국 이후에는 고려의 종묘를 부수고,[5]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를 탄압하는 등 고려 왕실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던 전적이 많기야 하지만 딱히 만월대까지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은 아니다.
공민왕 10년(1361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별궁인 연경궁과 함게 또 다시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한 채 나라가 망하면서 폐허가 된 상태 그대로 오늘날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이미 부서진 상태였기 때문에 조선이 부술지 말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공민왕 11년(1362년), 만월대가 전소된 후 공민왕은 임시로 흥왕사를 임시궁[6] 으로 사용했고, 만월대는 광장 구정(毬庭)과 편전 강안전(康安殿)만 복구하였다. 폐허가 된 개경을 떠나 수원(水原)[7] , 평양(平壤)[8] 에 새로운 궁 터를 알아보게 했지만, 결국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법궁이었던 수창궁[9] 이 사용되었다.
3.4. 구한말 ~ 대한민국
경술국치가 있기 1년 전인 1909년에 대한제국의 순종 황제가 일제가 기획한[10] 서북 지역 순행에 나서면서 일제의 의도로 만월대에 들렸다고 한다. 물론 순종이 '''허허벌판이 된 만월대를 방문하게 한 것 자체가 무언의 협박'''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순종 본인이 당시에 몰랐을 수는 있으나 일제가 그런 의도로 기획한 이상 그게 여러 루트로 순종의 귀에 들어가서 결국 알게 됐을 것이다.
2008년 이후로 남북이 공동으로 만월대 터 발굴을 추진해 오고있다. 꽤나 많은 성과를 이루어 왔고[11] 아직까지도 몇차례 연달아 발굴을 추진중이나, 북측의 소극적인 협력에 발굴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개성공단이나 개성 시내 관광 등이 활발하게 추진되던 시절엔 발굴 조사 역시 활발히 진행되기도 했으나, 천안함 피격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태 등 관계가 냉각된 이후에는 가볼 수가 없게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수해로 인해 만월대가 피해를 입어 복구 공사가 진행되자 남측의 복구 인원도 개성공단에 체재하면서 복구 공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및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기간에 평창 주경기장 인근의 상지대관령고등학교에서 남•북한 사학자 공동 학술/발굴 관련 모임인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주최로 만월대 공동발굴 특별 전시전이 열렸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남북관계가 풀리면서 2018년 9월 27일부터 만월대 공동발굴을 재개하게 되었다.#
4. 특징
고려 본궐과 조선 본궐 경복궁의 다른 점은 고려 본궐이 바깥의 '''황성(皇城)'''과 내부의 '''궁성(宮城)'''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개경은 개경 전체를 둘러싼 거대한 나성(외성 and 내성) > 군주의 필수 행동 범위만 둘러싼 황성 > 궁성 순서로 성곽이 구분됐다.
본궐을 둘러싼 궁성 성벽 자리는 현재 동·서·북쪽 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석비례와 진흙을 엇바꾸어 여러 겹으로 다져 쌓았다. 만월대 유적은 고려 시기의 우수한 건축 예술이 남김없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궁전 건물의 설계에서 일정한 비례관계가 적용된 것, 건물 배치에서 지형 조건을 잘 고려한 것 등은 고려 시기의 건축술이 높은 수준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고려에 사신으로 온 북송의 신하 서긍이 고려도경에 남긴 말을 보자. 이 책엔 고려 궁궐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데 재밌는 구절이 있다.
쉽게 말해 오랑캐 따위가 건방지게 궁궐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만들었는데도 우리 황제가 워낙 덕이 커서 충성만 보고 넘어가 준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내부 묘사를 좀 더 보면 대부분 전각이 크고 웅장하다, 섬돌은 붉게 칠하고 난간은 동화[13] 로 장식하여 화려하다 등등 대체로 건물이 웅장하며 화려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무릇 바라보이는 궁전 이름과, 치미(鴟尾)[12]
장식을 거리낌없이 했으니, 여기서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작은 일로 오랑캐를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김을 알았다.
만월대를 비롯한 고려의 궁궐들은 평지에 조성한 조선의 왕궁과 달리 높이 쌓은 축대가 인상적인데 산을 훼손하지 않고 궁궐을 지으라는 풍수지리적 조언에 따라 지형을 그대로 두고 언덕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궁궐을 지었기 때문이며, 언덕의 높이가 더해지는 덕분에 실제보다 더 웅장하게 보이고, 계단식으로 건물을 배치해 위엄 있게 보이려 하는 특색을 지닌다. 이는 강화도 고려궁지, 삼별초의 항쟁 거점인 진도군 용장산성의 임시 궁궐 터에서도 드러나는 방식이다.
5. 주요 건축
본궐의 규모는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위치한 규모로 중앙의 회경전에서 동벽까지 135m, 서벽까지 230m, 승평문까지 250m 정도이며, 궁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고,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만월대에선 동물 머리 모양의 돌 조각과 많은 기와 조각, 도기, 철제 장식, 철창, 철침 등이 수습되었다. 구릉지에 위치한 지형적 특성상 높은 축대를 쌓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건물들의 배치 또한 자유롭게 구성했다.
5.1. 나성(羅城)
고려 현종 원문대왕이 쌓은 개경 전체를 둘러싼 방어 성. 당시 개경의 범위를 구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옛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 부소갑(扶蘇岬) 두 지역을 합쳤으며 나성 안에 시장을 설치, 방위에 따라 5부를 두어 주소를 구분했다. 이 나성이 백제 왕조의 부여 나성, 조선 왕조의 한양도성 격이다.
고려사 왕경 개성부 지리지에 따르면 현종이 총 30만 4천 4백 명을 동원해 쌓았다고 한다.[14] 총 1만 3천 칸이며 둘레는 2만 9천 7백 걸음이다. 4개 대문과 8개 중문, 13개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 선의문(宣義門)
- 회빈문(會賓門)
- 수구문(水口門)
5.1.1. 외성 - 내성
나성은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구분 되며 외성 부분엔 고관대작, 백성이 살았다. 여러 사찰이 있었으며 방위에 따라 오부 구역이 정해졌다. 내성 부분엔 6부 정부기관이 설치 되어있었으며 근처엔 환구단과 사직이 설치 되어있었다. 여러 사찰이 있었다.
나성 중 내성은 고려왕조 극후기 우왕 대에 나성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추가로 지었으며 공양왕 대에 완공했다. 즉 내성은 고려 역사상 거의 쓰이지 않은 셈.
5.2. 황성(皇城)
고려 태조 신성대왕이 궁예의 신하였을 시절에 쌓은 발어참성(勃禦塹城)[15] 이 원조이며 후손 현종이 나성을 축조하며 동시에 발어참성을 황성으로 재축조하였다.[16] 나성 안의 궁성을 둘러싸는 방어 성이며 내부에 중서문하성, 상서성인 2성 정부 기관이 있고 고려도경에 따르면 부여궁, 계림궁, 적경궁 등 만월대 내 별궁이 있었다.
고려사 왕경 개성부 지리지에 따르면 황성은 2천 6백 칸이었고 총 20개의 대, 중,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 광화문(廣化門)
- 주작문(朱雀門)
- 현무문(玄武門)
- 신흥사(新興寺) - 공신당(功臣堂)
- 대봉은사(大奉恩寺) - 효사관(孝思觀)
5.3. 궁성(宮城)
황성 안의 고려 본궐을 둘러싸는 방어 성이며 보통 이 궁성 부분을 만월대라고 한다. 내부에 본궐의 여러 전각, 태자의 관저인 좌우춘궁이 있다.
- 동화문(東華門)
- 서화문(西華門)
- 현무문(玄武門)
5.3.1. 정전으로 가는 길
- 승평문(昇平門)
고려도경에 따르면 승평, 신봉, 창합, 회경전문은 3문 형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월대 터에 남아있는 유적을 살펴 보면 위 네 대문은 모두 천자국 제도인 5칸으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즉 외왕내제였던 고려는 문은 일단 5칸으로 황제처럼 세운 뒤, 실제 쓰는 문은 3문으로 3칸만 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종의 절충안을 찾은 셈. 나중에 이 절충안은 조선 왕조의 창덕궁 돈화문이 계승한다.
- 구정(毬庭)
- 만월교(滿月橋)
- 신봉문(神鳳門)
▲ 오늘날의 신봉문 터
광명천을 지나면 나오는 대문. '''정전으로 가기 위한 세번째 대문.''' 역시 이중루이며 윗층은 신봉루(神鳳樓)라고 하여 모든 대문 중 가장 화려했다고 추정하는데, 신봉문은 위치한 쪽에서 남향으로 넓은 구정을 바라 볼 수 있으니 매우 웅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대 군주들이 등극시 관례로 신봉루에서 사면령을 선포하거나 군대를 사열했다. 고려사 예지엔 신봉문에서 사면령을 내릴 때의 순서와 예법을 항목을 따로 내서 기록했다. 또한 팔관회 때의 의례도 기록했는데 고려의 군주는 자황포[20] 를 입고 신봉루에 앉아 송나라 사신, 여진 사신, 탐라 사신의 조하(朝賀)를 받고 그들이 외치는 ''''성궁만복(聖躬萬福)''''[21] 을 듣는다고 되있다.
신봉문의 뜻은 '거룩한 봉황.' 나중에 의봉문(儀鳳門)으로 바뀐다. 의봉문의 뜻은 '규범의 봉황.' 위봉문, 영봉문과 봉 자 돌림 문이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신봉문의 간판은 붉은 색 바탕에 금색 글자를 넣었다고 한다. 이자겸의 난 때 현화사 주지 의장과 승병들이 신봉문을 쓰러뜨리려 했다.
- 창합문(閶闔門)
- 회경문(會慶門) / 전문(殿門) / 회경전문(會慶殿門)
5.3.2. 정전(正殿)
'''회경전(會慶殿)''''''"“과인(寡人)에게 과오(過)가 있다면 부디 즉시 벌(罰)을 내려주시오! 만민(萬民)에게 과오(過)가 있다면 과인(寡人)이 마땅히 모두 대신하여 받을 것이오!'''
'''그러하오니 부디 두터운 은택을 내리어 근원(元元)을 구해주시오!"'''
- 고려사 현종 세가, 재위 15년인 1024년 5월 중. '''회경전에서 비를 내려달라 하늘에 외치며.'''[23]
본궐의 가운데엔 정사를 처리하는 정전(正殿)인 회경전이 세워져 있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그 위치는 궁성의 정남문인 승평문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가 신봉문과 창합문을 지나면 회경전에 도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도의 전문이 있으며 규모가 매우 장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상례는 감히 거행할 수 없으며, 오직 사신이 이르렀을 때 마당 아래에서 조서를 받들거나 표문을 봉한다는 말이 있고 나머지 예는 별전에서 별도로 행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커다란 도끼(부월) 12자루를 늘어 놓았다. 동서로 단칠한 섬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전면에 4개의 계단을 만들었고 좌우에는 동행각과 서행각이 있었다.
현종 대에 추가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예종이 재위 1년(1106년) 7월 이 곳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와 태조(太祖)를 같이 제사 지내며 비를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인종 4년(1126년)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 때 소실되었다가 얼마 후에 다시 복구되었고, 인종 16년(1138년) 5월 전각 및 궁문의 명칭을 개정할 때 선경전(宣慶殿)으로 개칭되었다.
회경(會慶)의 뜻은 만남, 조회가 경사스러운 전각, 선경(宣慶)은 넓고, 크고 경사스러운 전각이란 뜻이다.
동문선 108권에 '선경전 상량문'이 남아있다. 명종 대에 궁궐을 다시 지을 때 쓴 듯하다. 상량문에서 태조를 '성조(聖祖)', 명종의 위엄을 '황제의 위엄'이라 하고, '성주(聖主)'로 칭했다. 개경을 '상도(上都)'라 하고 고려를 '삼토일가(三土一家)'[24] 라 칭했다. 상량문을 보면 명종 대 선경전은 한나라 장안궁의 제도를 본따 만든 듯하다.
5.3.3. 제 2정전으로 가는 길
궁성의 문은 매우 많았는데 그 중 제 2정전으로 가는 특별한 문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을 지나 회경전의 동북쪽으로 가면 천덕전의 유적이 보인다.
- 구정(毬庭)
- 위봉문(威鳳門)
- 창덕문(昌德門)
- 천덕문(天德門) / 전문(殿門) / 천덕전문(天德殿門)
5.3.4. 제 2정전(正殿)
'''천덕전(天德殿)''''''"짐(朕)과 신라(新羅)는 피를 나눈 동맹(同盟)이다. 그리하여 양국(兩國)이 영원히 서로 잘 지내며 각자 사직(社稷)을 지키고자 했다.'''
'''이제 나왕(羅王)이 굳이 칭신(稱臣)을 원하고, 경등(卿等)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 짐(朕)은 마음이 아프지만 중의(衆意)가 원하니 받아들이겠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8년인 935년 12월 중. '''천덕전에서 고려 - 신라 합방이 선포되다.'''[26]
회경전 서북쪽에는 천덕전(天德殿)이 있다. 천덕전은 태조 왕건 대부터 있었으며 천자를 자칭하며 지은 전각이다. 상국으로 대하던 국가의 조서를 받고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며 매우 커 제 2의 정전 기능을 하였다. 고려 초기엔 제 1정전이었던 듯 하며 시간이 지나 회경전에 밀린듯 하다.
천덕전의 정문이자 남문은 당연히 천덕문(天德門)이다. 동문은 인덕문(仁德門), 서문은 의창문(義昌門)이다.
태조는 천덕전에서 신라국왕 김부의 입조(入朝)를 공식으로 수락해 신라를 합병했다. 또한 이 곳에서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김부와 결혼시켰다. 이민 온 발해 대신 은계종이 태조에게 세 번 절한 곳도 이 곳이다.
정종은 이 전각에서 동여진에게 조공을 받았다. 고려사에 한번은 정종이 천덕전에 가자 비가 내리고 사람이 벼락에 맞아 정종이 불길해 했다는 기사가 있다. 숙종이 여기서 업무를 보고 과거를 열고 초제를 지냈으며 명종, 신종이 이 곳에서 즉위했다.
김양경이란 신하가 희종의 명을 받고 대관전 옥좌 뒤 병풍에 글을 썼다고 한다.[27] 이 때 대관전 옥좌 병풍엔 유교 경전 무일편의 무일도(無逸圖)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28]
반역자 강조가 천덕전 어탑(御榻)[29] 밑에 걸터 앉은 적 있다.
태조 이후 성종이 뜻이 통하는 건덕전(乾德殿)으로 바꾸었고[30] 인종 16년, 1138년 5월에 대관전(大觀殿)으로 바꾸었다.
태조가 지은 천덕(天德)이 단순히 '해동천자의 덕'을 찬양하는 의미라면 인종이 개칭한 대관(大觀)은 '넓은 관점, 포용'을 의미하는 선정의 의지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태조의 천덕전을 전례로 삼은 건지 고려의 기타 별궁의 정전은 대부분 천 자 돌림이다. 본궐 흡수 전 연경궁도 정전이 천복전(天福殿)[31] 이었고 예종이 지은 서경 용덕궁의 정전은 건원전(乾元殿), 인종이 지은 서경 대화궁은 건룡전(乾龍殿), 의종 대 별궁인 수덕궁도 정전이 천령전(天寧殿), 구제궁의 정전으로 추측되는 전각의 이름도 천흥전(天興殿)이었다.[32]
조선조에 제작된 동국여지승람은 건덕전을 정전이라고 했지만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엔 회경전을 정전이라 하였고, 고려사 역시 희종 2년 4월조의 기사 중에서도 회경전을 정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회경전을 정전으로 보는 것이 대세. 하지만 그 기능에서는 회경전과 건덕전이 서로 비슷하였던 듯하다.
고려 본궐의 궁문 배치도를 보면 헷갈릴 만한데 황성의 정문[33] , 궁성의 정문[34] 을 제외하면 천덕전도 도달하기까지 금천(禁川)[35] , 구정(毬庭)을 거쳐 세 개의 궁문을 지나야하는 전형적인 천자식 궁궐의 정전 구조를 하고 있다.
천덕전이 회경전에게 정전의 자리를 내줬지만 여전히 권위 높은 전각이었음을 드러내는 면은 고려사 예지에 직간접적으로 나온다.
예지 환구단 조엔 환구단에서 제사 지내는 순서가 기록되있는데 국왕은 자황포, 즉 금색 곤룡포를 입고 '''대관전'''[36] '''→''' '''대관문'''[37] '''→''' '''흥례문'''[38] '''→''' '''의봉문'''[39] '''→''' '''승평문'''[40] 순으로 궁궐을 나온다고 되있다. 국왕이 직접 안가고 왕족[41] 을 시켜 대신 환구단에 보낼 때도 ''''대관전''''에서 왕족에게 축판을 내준다고 돼있다.
이 순서는 고려 임금이 태묘에 갈 때도 똑같이 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엔 대관전에서 연회를 열 때의 순서도 따로 항목을 내서 기록했다. 신봉문(의봉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대사면령을 선포한 뒤, 역시 임금은 천덕전(대관전)으로 온다. 팔관회를 열 땐 고려 임금은 자황포를 입고 선인전[42] → 신봉문 → 신봉루 → 천덕문 → 천덕전 순으로 도착한다고 되있다.
5.3.5. 금원
만월대 동북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창덕, 창경궁 후원의 격이다. 딱히 정해진 명칭이 없었던 듯 하며 보통 후원(後園), '''금원(禁園, 禁苑)''', 어원(御園) 등으로 불렸다. 호수가 있었으며 덕분에 화재가 나도 후원까지 닥치는 경우가 적었다. 서경 장락궁에도 금원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 의종 대 별궁인 수덕궁의 금원은 의종이 매우 사치스럽게 만들어 조선시대에 엄청나게 욕 먹었다. 금원엔 진귀한 꽃, 동물, 광석을 진열해 두었다고 한다.
- 산호정(山呼亭)[43]
- 상춘정(賞春亭)
- 충허각(冲虛閣)
- 선구보(善救寶)
- 양성정(養性亭)
- 양이정(養怡亭)
- 제석원(帝釋院)
- 사루(絲樓)
5.3.6. 기타 전각, 궁문
고려는 상시 설치된 전각 뿐만 아니라 태후, 왕후, 공주 등 왕족들에게 관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궁궐 내 전각과 관부을 새로 설치해주는 경우도 많았다.
유명한 예로 헌애왕후의 ''''천추전(千秋殿)''''[45] , 사숙태후의 '중화전(中和殿) 영녕부(永寧府)', 명의태후의 '천화전(天和殿) 숭명부(崇明府)', 노국대장공주의 '숙옹부(肅雍府)' 등등.
5.3.6.1. 전(殿)
고려도경의 묘사에 따르면 장화전, 원덕전, 장경전이 나란히 서 있었고 회랑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마당엔 벽돌이 깔려 있었다.
- 원덕전(元德殿)
- 신덕전(神德殿)
- 연총전(延寵殿)
- 중광전(重光殿)
- 선정전(宣政殿)
- 선덕전(宣德殿)
- 만령전(萬齡殿)
- 장령전(長齡殿)
- 자신전(紫宸殿)
- 건시전(乾始殿)
- 건명전(乾明殿)
- 건화전(乾化殿)
- 천성전(天成殿)
- 천부전(天敷殿)
- 천수전(天壽殿)
- 자화전(慈和殿)
- 장화전(莊和殿)
- 산호전(山呼殿)
- 경령전(景靈殿)
경령전은 중국 송나라의 '경령궁(景靈宮)'과 명칭이 비슷해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이나 고려왕조의 독창성이 강하다.
총 다섯 실(室)로 구성되어 있고 태조실(太祖室)을 기준으로 이실, 삼실, 사실, 오실(五室)이 있다. 태조실엔 태조와 신혜왕후의 초상화를, 이실부턴 오실까진 현 재위 중인 국왕의 사대조 내외의 초상화를 안치한다.
경령전 제사 의례는 고려사 예지 경령전조에 기록되어 있다. 태묘가 모든 국왕을 제사 지냈다면 경령전은 재위 중인 국왕의 직계만 모셨다는 차이점이 있다.
5.3.6.2. 각(閣)
- 임천각(臨川閣)
- 보문각(寶文閣)
- 청연각(請讌閣)
- 귀령각(龜齡閣)
5.3.6.3. 궁문
- 향복문
- 태초문(太初門)
- 천우문(天祐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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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문(通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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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양문(乾陽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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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봉문(丹鳳門)
- 의창문(義昌門)
- 인덕문(仁德門)
6. 만월대 관련 문학 작품
6.1. 시조
古寺蕭然傍御溝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夕陽喬木使人愁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煙霞冷落殘僧夢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歲月觴嶸破塔頭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황진이, 만월대 회고(滿月臺懷古)'''
'''오백 년 都邑地를 匹馬로 돌아드니,'''
/ 오백년 도읍지를 말 한 필 타며 돌아보니
'''山川은 依舊하되 人傑은 간 데 없다.'''
/ 옛 산천은 그대로 이지만 영웅호걸은 간 곳이 없구나.
'''어즈버, 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아아! 태평성대를 누리던 지난날의 하룻밤은 꿈과 같구나.
'''興亡이 有數하니 滿月臺도 秋草ㅣ로다.'''
/ 흥망이 하늘의 뜻에 달렸으니 만월대도 가을 잡초만 무성하다.
'''五百年 王業이 牧笛에 부쳐시니'''
/ 오백년 왕조가 목동의 피리소리에 깃들었으니
'''夕陽에 지나는 客이 눈물계워 하노라.'''
/ 해질녘에 지나는 나그네가 눈물겨워 하노라.
6.2. 가요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가엾다 이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7. 기타
- 만월대 서쪽에 개성 첨성대가 있다.
- KBS 세트는 태조 왕건 촬영 당시 문경시에 지었지만, 대왕 세종 세트로 바뀌어 현재는 KBS에 만월대 세트가 없다. MBC 세트의 경우엔 신돈 촬영 당시 용인에 지었던 세트, SBS의 경우에도 대풍수를 찍기 위해 19억 원을 들여 예전 서동요 찍던 부여 세트장 옆에다가 확장해서 넣었다.[55]
- 이상하게 MBC 세트는 엄연히 다루는 시대상이 조선시대인데도 이 세트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이산, 동이, 해를 품은 달, 마의, 불의 여신 정이, 역린, 화정인데, 이런 탓에 역덕들이 보기엔 조선의 궁궐이 고려의 정궁인 황당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를 비판한 기사 아마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서 기껏 지어놓은 걸 굳이 부숴버리기에는 아깝기도 하고 금전적인 여유도 없기도 하니 본전이라도 계속 뽑기 위해서 고려시대 건축 이런 거 신경쓰지 않고 조선시대 사극 촬영에도 그냥 재활용하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