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현

 


성명
신우현(申禹鉉)

자운(紫雲)
본관
평산 신씨
생몰
1865년 5월 23일 ~ 1935년 3월 16일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진음리
사망지
경상북도 경주시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우현은 1865년 5월 23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진음리에서 신효신(申孝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간 것에 분노해 조병준, 장원섭(張元燮)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략에 대항했다. 이후 1909년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창성헌병대를 습격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 망명했고, 1919년에는 박장호, 조맹선, 조병준, 전덕원, 백삼규(白三圭) 등이 유하현에서 조직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대한독립단이 기원독립단과 민국독립단으로 분열되자, 그는 조병준 등과 함께 민국독립단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또한 1920년에 임시정부 직속의 광복군 참리부가 조직되자, 그는 광복군 참리부에 가담해 내무사장으로서 김승만(金承萬)·김두만(金斗萬)·신언갑(申彦甲)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였다. 한편 1920년 초부터 독립신문의 발간이 경영난으로 어렵게 되자 자금을 내어 독립신문사를 합자회사로 발전시켜 계속 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21년에는 중국 수원성 포두중탄으로 이주하여, 조병준 등과 함께 의민부(義民府)를 조직하여 부총재로서 활동하였으며, 배달학교와 배달농장을 경영하면서 항일투쟁을 하였다. 의민부가 해산된 후에는 국내로 귀환하여 경주에 은거하며 한인 자제들을 가르치다가 1935년 3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우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8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