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장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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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장호(朴長浩)

양직(養直)

화남(華南)
생몰
1850년 6월 22일 ~ 1922년 4월 3일
출생지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화양동
매장지
경기도 가평군 계관산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의병장
2.3. 대한독립단
2.4. 암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박장호는 1850년 6월 22일 경기도 가평군 북면 이곡리 화양동(華陽洞)에서 박기우(朴夔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밀성군 박척(朴陟)의 23세손이며, 고조부는 박준(朴埈), 증조부는 박초섭(朴楚燮), 조부는 박명재(朴命載)이며, 모친은 단양 우씨다. 그는 도정 의혁(義赫)의 딸 진주 강씨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박필보는 전주 이씨와 혼인하여 정훈, 기훈, 경훈, 동훈, 명훈, 광훈, 춘훈 등 7남을 두었다. 당초에는 박장호의 본적이나 출생지가 황해도로 기록되었지만, 경원대학교 교수 장삼현이 집필한 <대한독립단 도총재 박장호 실기>에 따르면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한다. 이는 박장호의 선영은 가평군 북면 이곡리 화양동에 있고, 증조부 박초섭에 관한 생활상이 가평에 구전되고 있으며, 부친 박기우가 가평 인근의 양근 벽계에 거주하고 있던 이항로의 제자이고, 자신의 동문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을 초빙해 아들을 가르치게 했던 사실로 볼 때 박장호의 출생지 및 본적은 경기도 가평군에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또한 1903년 작성된 '강수계수성록'에 박장호의 주소가 서석면 생곡리로 표기되어 있으며 1902년 2월 24일에 별세한 부인 진주강씨의 묘가 서석면 하군두리에 있는 것을 볼 때 박장호가 홍천군에도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박장호는 부친의 권유로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갔고, 이항로가 사망한 뒤 김평묵 문하에서 배웠으며, 김묵이 사망하자 다시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스승으로 삼았다. 그는 위정척사를 주장한 이항로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아 서양의 신사상을 배격하고 유교 질서를 숭상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동문인 유인석, 홍재학, 유기일 등과 함께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1881년에는 개화파의 친일 정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조정에는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 묻혀 지내며 학문을 닦았다.

2.2. 의병장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박장호는 1906년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섰고, 1907년 12월에는 종사 2명을 데리고 운강(雲崗) 이강년의 의병대를 방문해 전투방략을 의논했다. 그는 이강년과 함께 행군하여 도찬 주점에 이르렀고, 12월 7일 골운 일남현에서 서울로 진격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가 광악리에서 다시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우리나라 우리 백성의 원수인 왜놈의 수괴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 하늘의 심판을 받자"고 맹세했다. 그리고는 8일 광악령에 올라 대청동에 이르러 주둔했다. 이후 그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3개월 동안 유격전을 벌였다. 이 무렵, 박장호는 유인석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뜻을 밝혔다.

장호는 일찍이 화서, 중암, 성재 세 분 선생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여 우국우도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으나, 끝내 나라가 오랑캐에게 먹혔는데 다시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우리 도가 사교에 침식되었는데도 구하여 유지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우들과 더불어 뜻을 모아 힘을 다하여 성묘를 수호하고 대의를 강론하여 중동(강원도)의 인심을 모아 이 원통함을 풀고자 하나 도와줄 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천지에서 이 근심을 책임맡고 짊어질 자는 우리 세분 선생님에게서 공부한 사람을 제쳐놓고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유인석은 다리에 병이 들어서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고종이 퇴위당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자 1908년 7월에 연해주로 망명했고, 박장호 역시 자신과 함께 일제와 맞서던 이강년이 적군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지는 등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어쩔 수 없이 이진용, 조맹선 등과 함께 얼마 안 되는 의병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만주에서 장백, 무송, 집안, 임강현 등지를 전전하며 국권회복에 전념했다.

2.3. 대한독립단


1919년 3.1 운동 이후 국내로부터 만주로 오는 청년들이 늘어나자, 박장호는 그해 4월 15일 조맹선, 백삼규, 조병준, 전덕원 등과 함께 삼원보에 모여 조직의 단일화를 꾀했다. 그 결과 대한독립단이 결성되었고, 그는 도총재에 추대되어 대한독립단에 가담한 모든 의병대의 총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명의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공전절후(空前絶後)한 대한독립운동이여! 주력이 그 때를 얻고 동기가 그 세력을 승한지라, 각단이 합체하여 만방에 정을 표하여 국기와 특사와 파리평화회의 공인을 얻음은 전 지구가 우리와 같이 공인을 기울이는데, 아주(亞州) 한 모퉁이에 홀연히 고립하여 인도를 무시하는 저 야만 왜놈의 존립이 몇날이나 갈까! 국토 회복에 배성일전(背成一戰)하리니, 이때에 일적의 유혈이 족히 국민만세의 영광이 될 지며, 일푼의 금전이 가히 자손만대의 행복이 될지어다. 그런데 슬프다! 우리 동포는 왜의 품안에 안겨 몸을 어디에 던질 지 돈을 무엇에 잘 쓸지 방황 주저하니, 신명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 각성할 수 있으랴! 본단이 이를 민망히 생각한 지 이에 몇 달이다.

이제 여러 모의를 종합하여 온 강토가 같은 호흡에 북은 아령(我領)으로부터, 남은 만주에 이르도록 수천리에 걸쳐 의용이 운집하고 영웅 준걸이 향응하여 군세가 이미 떨치니 오직 우리나라의 광복이 바로 금일에 있도다. 내외 전역에 도화선을 일으키기 위하여 단원을 특파하여 함악한 곳에 풍찬노숙의 고초를 같이 맛보면서 울며 피를 뿜으면서 포고하노니, 무릇 우리 동포는 국가의 동량될 청년자제를 한 사람이라도 앞을 다투어 파송하며 나라 곳간의 원위(元位)될 금전이란 아끼지 말고 한푼이라도 성심으로 바쳐 사람과 물자가 후일에 적병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할 지어다.

대한민국 원년 4월 15일

대한독립단 도총재부 근백

대한독립단은 도총재부와 총단과 남만주 제1사단 각 현에 지단 분단을 설치하고 국내에도 지단을 설치해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청년들을 끌여들어 병력을 늘림으로서 일제에 맞서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여기에 가담한 이들 대부분은 평안도 출신으로, 박문일, 박문오의 문인이거나 유인석의 문인이었다. 또한 박장호는 일제의 앞잡이로서 각 지방에 산재하여 항일운동을 방해하는 일민단, 보민회, 강립단 요원들을 제거하려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안북도 독판부와 제휴하여 김승학, 백의범, 백기준 3인으로 구성된 독립단 지부를 결성, 국내특파원으로 파송했다. 백의범, 백기준은 용천 및 의주 등지에 배치되었고, 김승학은 평안북도와 황해도 일대를 밀행하며 독립단 지단 88개소를 설치하고 여러 청년들과 군자금을 모집해 독립단 본부에 전송했다.
박장호는 김기한에게도 국내지단 설치의 중책을 맡겼다. 김기한은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밀행하며 동지를 규합해 서울에 중앙 총기관을 설치하고 각도에 조직을 둔 뒤 서울로 돌아와 독립단 각 지부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얼마 후 낌새를 눈치챈 일본 경찰이 급습하는 바람에 김기한, 강시형, 홍영전, 정서웅 등 14명이 체포되고 문서도 압수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편, 대한독립단은 무장투쟁을 담당할 남만주 제1사단 4개 중대를 갖췄고 무송현에 그 본부를 두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제약을 가해서 작전 수행이 어려워지자, 박장호는 1919년 7월 28일 단장 조맹선과 함께 중국 외교총장에게 진정서를 보내 대한독립단의 활동을 막지 말 것을 호소했다.

삼가 아뢸 것은 서방 국가 전쟁이 끝나고 열국들이 회동하여 장차 천하와 더불어 신의를 강하고 화목을 닦아 영원히 전쟁을 그치게 하여 세계 인구의 영원한 행복을 도모하고 있는데, 먼저 강대국을 꺾고 약소국을 부지하여 공리를 신장시키는 일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크게 천하에 선포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해내 해외의 약소국들로서 전날 강대국의 침탈을 받아 스스로 독립할 수 없었던 나라들이 모두 기회를 이용하여 운동을 하고 독립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저희 또한 3월 1일 맨손으로 독립운동을 거행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온 나라가 한결같이 진행하여 칼날을 무릅쓰고 총탄을 맞으면서 죽어도 변치 않아 이미 회합한 열국들의 동정과 공인을 얻어 임시정부를 건설하고 헌장을 선포하였으니, 이것은 열국도 들어서 알고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인들이 그 강대함을 믿고 폭력을 자행하면서 공리를 따르지 않고 우리의 강토와 우리의 보물을 완전히 돌려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한번 무력을 써서 생사존망을 판결 내어야 하는 바, 이에 국내, 국외의 동포들이 모두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분주히 외치며 최후로 한번 거사할 계책을 도모하고 있는데, 부득이 귀국의 동성으로 거점을 삼았습니다. 동성으로 말하면 저희 사람들이 외국에 거주하는 중에서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며, 또 예전부터 귀국에서 한 집안 살마처럼 돌봐주고 있는 곳이어서 거류하기에 편리함이 고국과 다를 바 없는 곳입니다. 이제 존망의 시기를 당하여 이곳이 아니고서는 달리 믿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귀국 또한 이러한 실청을 통찰하고 계시므로 부득이 일반 동지들과 더불어 특별히 이곳에 하나의 기관을 건립하고 이름을 대한독립단이라 한 다음 지방과 조직하여 사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귀국정부 및 지방관원들이 묵묵히 부지하고 비호해주는 힘을 베풀어주어서 지금까지 일체의 운동이 착착 진행되어 날짜를 손꼽아 거사할 수 있는 기약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봉성 향인촌만이 무슨 완비된 법을 요구하면서 무단히 순사를 수시로 파견하여 폐단 및 다른 단체 임원들을 잡아들여 구타하고 구금하며 모금한 돈을 강탈하고 죄목을 날조하여 강제로 벌금을 징수하는 일이 종종 그치지 않고 있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리 정의에 크게 위배되기도 하거니와 또한 귀 정부에서 암묵적으로 동정해 주었던 뜻이 아니니, 우러러 바라옵건대 귀하께서는 이 점을 살피시고 정부의 여러 분들이 이 일을 분명히 조사하여 특별히 환인현감에게 지휘하여 잘 처리하여 지난날 잘못을 꾸짖어 앞날을 경계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것을 아뢰고 삼가 편안하시기를 청합니다.

1919년 7월 28일 대한독립단 도총재 박장호, 총단장 조맹선

한편, 박장호는 대한독립단의 국내외 무장활동을 이끌었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통화현에 부임한 일본 영사를 사살했으며, 그해 9월 24일에는 함경도 갑산군 동인면 소재 주재소를 습격하고 영림서, 면사무소를 방화했다. 그리고 1920년 2월 23일엔 집안현 태평구 소재 민단지부장 강달주를 사살했고, 3월엔 평안북도 초산군 도원면에서 일본인 순사를 암살하고 의주경찰서 순사 김명수를 사살했다. 4월에는 영유군에서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으며, 5~7월에는 평안북도 철산, 삭주, 강계, 벽동 등지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고, 9월에는 의주, 운산, 영변 등지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을 벌였다.
특히 독립군 파견대장 이명서(李明瑞)는 8명의 대원을 인솔하여 벽암동 소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전소시켰고 일본 밀정 강달수를 사살했다. 이명서는 여세를 몰아 1921년 8월 15일에는 황해도 은율군 군수 최병혁을 암살했다. 그러나 9월 10일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이명서를 비롯한 대원 6명이 전사하고 남은 대원들은 중상을 입은 채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태천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 등이 내지분치기관임시통칙에 의한 '의용대'를 조직하고 폭탄을 구입, 관공서 파괴를 계획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 정보를 간파한 일제 경찰의 습격으로 김인수를 비롯한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또한 김병연, 박기연[1]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자금을 모금하고 안도, 무송현 등지와 연락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1년 하순, 대한독립단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박장호를 비롯한 늙은 유림 집단은 연호단군기원이나 융희[2]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청년 집단은 '민국' 연호 사용을 주장했고, 결국 대한독립단은 기원독립단과 민국독립단으로 분열되었다. 박장호는 기원독립단의 총단장으로 임명되었고, 부단장에 백삼규, 총단장 대변인에 이웅해, 총무부장에 김평식, 재무부장에 전덕원, 검찰부장에 강규묵, 참모부장에 김정희, 참모에 백진해, 독립군 대장에 채원개와 백경수 등을 선임했다. 기원독립단은 지도부의 성향상 철저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체택한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 왕실의 복위와 유교 질서의 회복을 추구했고 서구 사상을 배격했다.

2.4. 암살


1922년 4월 2일, 기년독립단을 이끌던 박장호는 일제의 밀정 김헌(金憲)에게 피격되었고 다음날 숨졌다. 향년 72세. 그의 유해는 일본군의 감시로 한동안 거둬지지 못하다가 아들 박필보와 대원들이 몰래 거두어 만주 철령현 박기새촌 양방하 남산에 암매장되었다. 그 후 70여 년이 지난 1992년 박필보의 아들이자 박장호의 장손 박정훈이 박장호의 유해를 발굴해 1993년 가평군 북면 이곡리 후산에 안치했다. 그러다가 2016년 8월 임야 소유자의 이장 요구로 가평군 계관산으로 옮겨져 분묘가 조성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박장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기연과 동명이인이다.[2] 조선의 마지막 국왕 순종의 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