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조맹선은 1870년 1월 22일 황해도 평산군 고지면 서오리(현 황해남도 봉천군 대룡리)에서 아버지 조천항(趙天恒)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김동필 등과 같이 대한13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의 이름으로 을사오적을 참형에 처할 것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박정빈, 우병렬, 이진룡, 박장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을 역임하며 평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제의 토벌 작전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남만주로 망명한 뒤 홍범도·윤세복·차도선 등과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해 장백·무송·임강현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만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동포를 규합해 항일사상 고취와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면서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해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하고, 애국청년들을 만주로 불러들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1916년 10월에는 이진룡과 함께 평북 운산에 진입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운산금광 송금차를 습격하였으며, 그후 신봉황(申鳳荒)·차도선 등과 함께 목릉현 팔면통에 비밀결사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고 국내진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 국내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박장호·백삼규(白三圭)·조병준·전덕원 등과 함께 유하현 삼원보에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고 총재에 박장호를 추대하고 자신은 총단장이 되어 국내진입 활동을 지휘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단원 모집 및 만주 지역의 친일단체인 일민회(日民會)·보민회(保民會)·강립단(强立團) 등을 타도하는 등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2월 관전현 향로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가 조직되자, 그는 사령장(司令長)에 임명되었으며, 여순근·이탁·김승학·유응하(劉應夏)·박이열(朴利烈)[3] ·홍식(洪植)·양기하 등과 함께 일경주재소 습격, 일경사살 등 무력투쟁을 계속하였다. 또한 그해 8월에는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자 독립단 총단장 명의로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고, 그 지원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2년경 중국 지린성 추풍에서 일본군과 맞서던 중 전사했다고 한다.
부인 하양 허씨 허순의 딸과의 사이에 아들 태부(泰釜)와 손자 수동(壽東), 양동(陽東), 흥동(興東)이 황해도 평산군 서봉면 당우리 숨은골에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조맹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