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칸트주의
1. 개요
New(Neo)-Kantism
19세기 중반부터 유행한 유물론에 반대하여, 관념론의 토대를 만든 칸트의 사상으로 회귀하는 것을 슬로건으로 삼은 사조.
2. 시초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에두아르트 젤러의 작업에 덧붙여서 쿠노 피셔가 《유물론의 역사》라는 책을 써 대륙 관념론의 연장선으로서의 기계론적 유물론으로서 판단한 것이 그 단초가 된다.
3. 영향
일본의 학자 쿠와키 겐요쿠(1874~1946)의 기여로 일본에 칸트철학과 신칸트주의가 정착한 후, 1920년 6월 25일에 천도교 청년회 기관잡지로 발행된 《개벽》에서 신칸트주의를 적극 받아들였다.[1] 천도교의 지도자 이돈화는 "외래사상은 소화하는 주체의 능력에 따라 득실이 결정된다"고 언급했을만큼 서양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는데, 그러한 생각의 반영인지 《개벽》은 앙리 베르그송을 필두로 하는 프랑스 철학과 니체, 칸트, 오이켄을 필두로 하는 독일철학을 적극 받아들여 소개했다.[2]
4. 대표적인 학자
4.1. 마르부르크 학파
주로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활동했던 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일체의 형이상학적 토대에 기초하지 않은 순수한 인식론을 철학의 본질로 간주하고[3] 이를 구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밖에 니콜라이 하르트만,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4.2. 독일 서남부 학파
주로 하이델베르크, 프라이부르크 등 독일 서남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기계론, 인과론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인간 및 정신의 영역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것에 반대하여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구별되는 문화과학의 방법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1] 20세기 서양 철학 및 사상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데 다리 역할을 한 나라가 일본이다.[2] 손유경. (2005).《개벽》의 신칸트주의 수용 양상,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3] 때문에 이들은 칸트의 물자체(Ding an-sich) 개념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 가설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이다.[4] 참고로 리케르트가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델베르크로 옮겨갈 때 자신의 후임으로 지명한 사람이 바로 에드문트 후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