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송

 



'''Henri Bergson'''
앙리 베르그송

[image]''' '''192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앙리-루이 베르그송 (Henri-Louis Bergson)
'''국적'''
프랑스 제2제국[image]프랑스 제3공화국[image]프랑스 군정청[image]
'''출생'''
1859년 10월 18일, 프랑스 제2제국 파리
'''사망'''
1941년 1월 4일 (81세), 프랑스 군정청 파리
'''직업'''
철학자
1. 개요
2. 생애
3. 저서
4. Bergson 철학과 인간 Bergson의 쟁점들
5. 우리나라 연구 현황
6. 철학사에서 위치
7. 아인슈타인과의 일화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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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enri-Louis Bergson'''[1]
프랑스 파리 출생. 192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고등사범학교 출신.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그리스-로마 철학을 강의했다. 폴란드유대인인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유대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 3녀 중 둘째로,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속(durée)의 철학''', [2]

“부인, 저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 Madame, j’ai dit que le temps était réel, et qu’il n’était pas de l’espace »

(콜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 강연 중,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귀부인의 물음에)[3]


2. 생애


어렸을 때부터 조용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었다. 너무 그렇다보니 동료학생들은 계집애 같다고 놀리기도하였다. 이 성격은 평생을 가서 죽기 전까지도 계속 예의 바르고 차분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성적은 발군이어서 항상 학력경시대회 같은데 나가기만 하면 항상 입상이고 고등학교 때 마지막으로 치른 학력경시 대회의 <교차하는 양 평면에 접하는 구의 면적을 구하라>는 그의 해법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수학 전문지에 게재될 정도였고, 그의 수학 스승인 데보브는 자신의 저서에 그의 <파스칼의 세개의 원>문제에 대한 해법을 소개할 만큼 수학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래놓고 선생님을 배신하고 고등사범학교 입학은 수학이 아니라 철학과로. 데보브는 '너는 수학자가 될 수 있었는데도 철학자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고 점잖게 쓰고 '''철학자 나부랭이밖에 될 수 없겠구나'''라고 읽는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의 수학에 대한 언급 하나. '''집에서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고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그런 과목. 참 쉽죠?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지만 대학의 정교수가 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Bergson은 강단철학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아주 인기있는 대중적 철학자여서 그의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한 강연은 온갖 사교계의 유명인들이 오는 인기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콜레주 드 프랑스는 교양 있는 귀부인 등이 주로 오는 학원 비스무리한 곳인데, 그 부인들 수준이 철학자 버금간다.(...) 또한 콜레주 드 프랑스는 그 시대 가장 명망 높은 학자들만이 강단에 서는 곳으로, 딱히 Bergson이 강단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그렇다. 후에 프랑스 철학사를 이끄는 에티엔느 질송이나 장 발, 혹은 샤를 페기나 T.S. 엘리엇과 같은 시인들이 Bergson의 강의를 들었다. 나중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된다. 역사상 첫 유대인 아카데미시앙.
Bergson은 당대에는 드물게도 이미 국제적인 학술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던 철학자였다. Bergson의 강의록을 모아놓은 <잡문집>에는 영국, 미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행한 그의 강연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1913년에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초대로 미국에서 반년 간 강의를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 때 Bergson의 강연을 들으러 몰려든 사람들이 뉴욕 브로드웨이에 역사상 첫 교통체증을 만들어냈다고 한다.[4]
Bergson의 영향력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끊임없이 증대하였다. 특히 1907년 출간된 <창조적 진화>는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는데, 그의 영향력에 우려를 느낀 바티칸 교황청은 1914년 <웃음>을 제외한 그의 모든 저서들을 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한다. 유명한 반대자로는 토마스주의의 쟈끄 마리땡(Jacques Maritain).
현실 정치에도 뛰어들어서 미국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촉구하는 프랑스의 사절단으로 우드로 윌슨을 만나 미국의 참전을 이끄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윌슨은 Bergson의 흠모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윌슨의 보좌관은 Bergson에게 "당신이 각하의 선택에 미친 영향력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후 윌슨이 꿈꾸던 국제연맹의 학술분과 기구에서 의장직을 맡으며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Bergson은 자신의 행위가 격동의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언제나 신경을 쓰던 사람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했으나 고통받고 있는 유대인들의 편에 서기 위해 끝까지 유대교인으로 남기로 결심한 일화는 유명하다. [5] 말년에는 류마티스로 고생하다가 나치 독일의 지배에 떨어진 파리에서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비시 프랑스 정부의 예외로 해주겠단 말도 무시하고 유대인으로 자신의 신분을 등록하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보여주는 죽음이다.
유언은 "여러분, 다섯 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Messieurs, il est cinq heure. Le cour est termine')"
천재로 태어나 그 뛰어난 머리로 그저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지적으로 노동하며 일생을 다한 사람. 비트겐슈타인이나 러셀, 쇼펜하우어 같은 재밌고 독특한 일화를 남긴 천재들과는 다르다.

3. 저서


* 볼드체로 표기한 것은 흔히 Bergson의 4대 주저에 속하는 작품이다.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Paris, Félix Alcan, 1889.'''
(국역본: 최화 옮김, 2001,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아카넷.)[6]
'''''Matière et mémoire. Essai sur la relation du corps à l'esprit'', Paris, Félix Alcan, 1896.'''
(국역본: 박종원 옮김, 2005, 『물질과 기억』, 아카넷.)
(국역본: 최화 옮김, 2017, 『물질과 기억』, 자유문고.)
''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Paris, Félix Alcan, 1900.
(국역본: 김진성 옮김, 1983, 『웃음』, 종로서적. )
'''''L'Évolution créatrice'', Paris, Félix Alcan, 1907.'''
(국역본: 황수영 옮김, 2005, 『창조적 진화』, 아카넷. )
(국역본: 최화 옮김, 2020, 『창조적 진화』, 자유문고.)
''L'Énergie spirituelle. Essais et conférences'', Paris, Félix Alcan, 1919.
(국역본: 엄태연 옮김, 2019, 『정신적 에너지』, 그린비. )
[7]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Paris, Félix Alcan, 1932.'''
(국역본: 송영진 옮김, 1998,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서광사.)
(국역본: 박종원 옮김, 2015,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아카넷.)
''La Pensée et le Mouvant. Essais et conférences'', Paris, Félix Alcan, 1934.
(국역본: 이광래 옮김, 2012,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8]
[9]

4. Bergson 철학과 인간 Bergson의 쟁점들


'''1. 철학사 안에 Bergson을 위치시키기'''
'''2. Bergson은 일원론자인가, 이원론자인가?'''
'''3. Bergson의 '지속'(durée)은 어떻게 '실체'(Substance)일 수 있는가?'''
'''4. Bergson의 죽음, '유대 민족'과 '가톨릭'. 그의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제3장의 논의와 그의 '선택'의 문제.'''
'''5. 정치적 Bergson의 문제 : 당대 국제정치적 상황. 유럽협조체제의 붕괴, 독일의 통일, 제국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1, 2차 세계대전. '''
'''6. Bergson의 형이상학과 고전 형이상학 : 특히, ''L'évolution creatrice'' 제4장의 '무' 개념 비판'''
'''7. 왜 Bergson에게 '중세'는 없는가?'''
'''8. Bergson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Bergson과 그의 딸''''
'''9. Bergson 이후 프랑스 현상학의 전개'''
'''10. Bergson의 철학은 하나의 '체계'(système)일 수 있는가?'''
'''11. 영미분석철학 중심의 현 학계와 Bergson 철학의 현 주소'''
'''12. Bergson의 도덕. 신중함, 그리고 고전주의'''
'''13. Bergson은 왜 '철학'으로 회심하였는가?'''
'''14. 도대체 왜 Bergson은 언제나 차분하고, 신중한 것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왜 ''사유와 le mouvant''에 쓰여진 서문은 우리가 알던 Bergson의 문체와 다르게 보이는가?'''
'''15. 만약 Bergson, 그의 철학에 따라 정말 '진리'가 '성장하는 진리'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16. Bergson과 당대의 문학.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지드, ...'''

5. 우리나라 연구 현황


우리나라의 베르그송 연구에 있어서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故 박홍규 서울대 교수이다. 그는 한국의 서양 철학 연구의 토대를 닦아 놓은 인물로서 평가 받고 있으며, 주로 플라톤과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연구했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이 살던 시기에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철학의 핵심을 형이상학으로 파악한 점이 독특하다. 그리고 그런 형이상학을 계승해 나간 인물이 바로 베르그송이라고 평가하며, 서양철학의 두 축을 플라톤과 베르그송으로 보았다. 물론 당시에 베르그송의 고대 철학 연구 자료들이 활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파르메니데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개념과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은 상충되며 이는 『창조적 진화』 제4장의 앞부분에서 명백히 주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무리한 짝짓기는 아니다.
위의 연구와는 반대로, 베르그송 이후의 철학, 요즘에는 특히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를 중심으로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베르그송의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서 파악하고 활용하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철학함 혹은 탐구 대상의 발견의 질서와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는 있으나, 들뢰즈의 통찰이 베르그송의 주요 저작들을 읽는 데에 새로운 시선을 던져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현상학, 특히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비교해서 연구가 이뤄지고 있었다(?). 사실 베르그송 철학의 주요 반대자 중 하나가 메를로-퐁티인 점, 그러면서 동시에 베르그송의 '지각' 개념과 '신체' 개념에 있어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비교 연구는 쉽게 예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의 철학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상충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비교 연구의 큰 의의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대체로 연구 현황은 위와 같다. 그러나 사실 이런 연구들은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성과들로 보기는 어렵다. 거의 기존 연구를 수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연구 현황에 대세적 우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베르그송 연구자들의 각각의 고유한 시각을 중심으로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냐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연구자 개개인이 어떤 문제 의식 속에서 베르그송을 연구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독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6. 철학사에서 위치


보통은 쇼펜하우어, 딜타이와 같은 생의 철학자로 구분된다. 이것은 주로 독일 철학의 관점에서 그렇게 규정되는 것이고, 프랑스 철학의 시각에서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아버지로 지목된다. 멘-드 비랑에서부터 이어지는 프랑스 유심론 전통의 적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신과 물질에 관한 해석에서부터 기본적인 입장들은 모두 이 전통에서 해석 될 수 있다. Bergson의 초기 작인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 에서는 칸트를 인용하는데, 거물인 칸트를 비판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학술 세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10] 실제로 이 책에서는 칸트는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고, 그의 주저 창조적 진화를 보건대 Bergson이 주적으로 삼은 것이 칸트라고 보이지도 않는다. 칸트의 학설과 Bergson의 학설은 반대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다르다.[11] 더 중요한 것은 확인이 필요한 바이지만, Bergson이 프로이트의 최초 인용자로 프랑스에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Bergson이 프로이트를 인용한 것은 이미 Bergson이 <시론>과 <물질과 기억>, <웃음>을 출간하며 프랑스의 스타 철학자가 된 1902년으로, 이 당시 프로이트는 막 <꿈의 해석>을 출간한 상태였고,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신분석학"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Bergson의 세계적인 명성에 비추어 볼 때, 프로이트의 인용이 Bergson의 논의에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그 반대이다.
그는 시간에 대한 탐구를 일생동안 지속했는데, 그것은 주로 공간에 대해서 탐구해 온 파르메니데스-플라톤 이후의 서양철학 전통에 대해 전복을 꾀하는 것이다. 2500년간의 서양철학사가 그에게는 '시간 망각의 역사'라고 생각되었고, 본질상 분절할수 없는 '시간'을 마치 공간처럼 따로 일부분만 떼어서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해 온 철학사의 오류들을 시간을 정당하게 인식해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제논의 역설 중 하나인 아킬레스와 거북이에 관한 역설을 그는 비판하면서 시간과 운동은 분절시킬수 없으며, 운동이 지나간 자리에 불과한 '궤적'을 공간적으로 임의로 분절시켜 아킬레스가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묘사한 제논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과거의 Bergson 해석은 주로 그의 저서 "창조적 진화"[12]를 중심으로 한 생명과 진화에 대한 독특한 해명에 중심이 맞춰줬고 그래서 생의 철학자로 구분했으나 요즈음에는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과 "물질과 기억"에 나온 지속이라는 그의 독특한 시간이론과 그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새로운 현대적 형이상학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라고 하지만, 그건 사실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평가하는 바이고 서양에서는 영국과 미국 학계가 주도한 심리철학과 현대과학철학 사조에 눌려서 사실 많이 죽었다. (고 하는데, 논란의 여지가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에 속하는 질 들뢰즈[13]나 해체주의의 자크 데리다 같은 사람들보단 훨씬 많이 연구되는 사람임. 물론 영미철학계에서는 관심이 없다.) 1950년대 이후 비약적인 자연 과학의 발달로 Bergson의 과학 인식은 많이 낡은 개념으로 치부되는 것이 사실, 그래도 적어도 출신국인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의 주류로 대접받는편, 그의 다양한 저술들이 프랑스 학자들에게 널리 읽히면서, 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전반에 영향을 끼쳤고, 현재 프랑스의 철학교육과정에서도 상당히 중시되는 인물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을 번역한 최화 교수는 "세계 어디서도 이러한 철학사 파악은 찾아볼 수 없으며, 플라톤과 베르크손이 짝지어져 이처럼 깊이 이해되고 이처럼 높이 평가된 적은 없다"라고 서문에 쓰고 있는데, 이걸 뒤집어서 얘기하면 (프랑스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유독 Bergson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책 홍보문구로 뽑기 딱 좋은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의 자생적인 철학사조라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한때 불다마는 유행일 수도 있다. 새로운 조류일지, 반짝 유행일지는, Bergson에 대한 수입이 이루어진 지 아직 2세대가 지났을 뿐이기에 조금더 지켜봐야 할 일. 덧붙여 말하자면, 여전히 한국의 철학계에서 프랑스철학 전공은 독일철학 전공과 비교도 할 수 없이 소수이며, 프랑스철학 안에서 Bergson을 단지 번역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일생을 걸고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더 극히 소수라고 보아야 한다.
근래 학계 동향을 보면, 프레데릭 보름스(Frédéric Worms)를 필두로 해 다시 Bergson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7. 아인슈타인과의 일화


1922년에 파리에서 있었던 프랑스 철학회에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청중으로 참가.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의 개념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논쟁이 있었다. 서로 결론 없이 헤어진 후 아인슈타인이 남긴 말은 "과학자의 시간과 철학자의 시간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적어도 Bergson 철학의 맥락에서는 옳은 말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Bergson은 "지속과 동시성"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에 대한 비판적인 저서를 내놓는다. 물론 그 비판이라는 게 물리학적으로 아인슈타인을 논박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칸트의 이성비판에서 비판처럼 그 한계와 효과를 명확히 정한다는 얘기. 철학과 과학 사이에서 아주 마니악한 떡밥.
이 책은 Bergson의 시간 개념인, 시계의 시간과도 다르고, 심리적 시간과 가깝기는 하지만 같지는 않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의 필연적인 시간인, "절대 지속"의 특유함을 비교적 쉽게 밝히고 있는 장점이 있다. 도대체 이 개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이 분 철학의 핵심인데, 아인슈타인을 설득하려 열을 올리는 과정에서, 철학자가 아닌 사람을 이해시키려는 본인의 언술들이 나온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지속 개념은 정말로 중요하지만, 아인슈타인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논쟁을 끝냈을 만큼 현묘한 개념이다.어찌 생각하면 본인이 이것을 인류에게 설득하려 평생을 두고 철학을 펼쳤으니 그럴 수밖에.
최대한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공평하게 평하려고 노력해보면 Bergson은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에 나오는 몇몇 개념들의 물리학적 배경에 대해 오해가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Bergson의 철학적 시간 개념에 대해 낮설어 이해하지를 못했다. Bergson도 나중에 그걸 깨닫고 "지속과 동시성"은 사후 나올 자신의 전집에서 빼 달라는 말을 남겼다.

8. 기타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Bergson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로, 카잔차키스는 Bergson의 강의를 직접 들었다.[14]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 <물질과 기억>의 구절이 인용되고 있다.
"순수한 현재라는 건 미래를 먹어가는, 과거의 붙잡기 어려운 진행이다. 사실은,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 [15] ''Matière et mémoire''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Votre perception, si instantanée soit-elle, consiste donc en une incalculable multitude d'éléments remémorés, et, à vrai dire, toute perception est déjà mémoire. ''Nous ne percevons, pratiquement, que le passé'', le présent pur étant l'insaisissable progrès du passé rongeant l'avenir. P.167

[1] 이름 표기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베르그송'이라는 표기가 가장 널리 쓰이나, '베르그손', '베르크손', '벩손'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일단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베르그송'이 맞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물질과 기억> 역주자인 최화는 ber'''gs'''on에서 '-gs-'가 어떻게 발음되냐의 문제라고 지적하며, 정확한 발음은 '베르그존' 또는 '베르크손'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우스운 얘기일지도 모르나, 「나의 목소리 베르그송, 베르크손, 베르그손」(최훈) 이라는 논문도 있다! [2] 직관은 사실 "지속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다.[3] 약간의 조소가 섞인 대답이었다고 한다.[4] 스탠포드 철학사전에 이 에피소드가 보고되어 있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bergson/ [5] 자신의 임종에는 카톨릭 신부를 불렀다는 루머가 있으나 사료로 확인할 수는 없다.[6] 영어판 제목은 ''Time and Free Will''이다. 이는 영어로 원서의 제목을 그대로 번역했을 때 드러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베르크손이 직접 붙인 제목이라고 한다. 사실 한국어로도 다양하게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의식의 직접 소여에 관한 시론,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에 관한 시론, 의식의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등. 이때 <무매개적>=<직접적>, <소여>=<주어진 것>임으로 번역상 큰 문제가 없다고 하겠으나, <de la conscience>를 어떻게 번역하느냐는 문제가 된다. 즉, de를 여격으로 볼 것인가, 소유격으로 볼 것인가. 주재형은 그의 역서 『현대 프랑스 철학』(길)에서 '의식에'라는 번역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의식에'라고 번역할 경우 의식의 자기 구성적 측면이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런 관점은 현상학적 측면에서 중요한듯 하다.[7] Bergson은 버리자고 했다.[8] 프레데릭 보름스의 지적에 따르면 현대에는 le mouvant이라는 단어가 운동체, 운동자를 가리키는 데 쓰이지만, 당대에는 문법적으로 다소 이상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에 가깝다고 한다. 사실 le mouvant을 운동체라고 번역할 경우,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 가운데 하나인 "운동은 운동하는 물체를 전제하지 않는다"와 정면으로 배치되기에 '운동체'라는 번역이 적절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동(動)처럼 외따로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문법적 어색함의 의도적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적절할 듯 싶지만, 책의 제목으로 달기에는 부적절한 면모가 있기에 『사유와 운동』이라는 번역을 고수하는 것이 굳이 오역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9] 'le mouvant'의 우리나라 번역어는 다음으로 축약된다. '운동자', '동자', '운동', '동', '운동체', '원동자', '움직이는 것'. 현재까지 우리나라 연구 중 시도된 번역어는 '운동자', '운동', '원동자', '움직이는 것'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Bergson 연구의 주축인 보름스(Wroms)와 그의 사단의 지적이 어찌됐든 간에, 또 이에 대한 우리나라 번역어의 적절성 논쟁이 어찌 됐든 간에, 'le mouvant'은 '떨리는 것', '휘몰아치는 것', '요동치는 것'에 가깝다. Bergson이 le mouvant(영어로 치면 동사 'move'의 동명사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든 어쨌든 간에, '표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le mouvant을 '운동'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좋지만, 기존 번역 단행본 어디에도 제목 번역에 대한 해명이 없다는 점을 비추어 봤을 때, '운동'은 그리 사려 깊은 번역은 아니다. 다시 말해, 역자는 이 지점에서 문제 의식을 느끼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의 주석에서 지적한 '체'(마찬가지로 '-것' 등)의 문제도 Bergson의 '실체' 개념이 해명되고나서야 가능한 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0] Bergson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 학계는 신칸트학파가 득세하던 상황으로, 칸트를 인용하지 않으면 그 철학적 가치가 평가절하되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후에 Bergson은 자신이 칸트로부터 거의 영감을 받은 바가 없다고 고백한다[11] 오히려 당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Bergson의 학설이 반칸트주의로 소비되곤 했다[12] 이책에서 쓰인 용어중에 딴곳에서 오용기로 유명한 용어로 élan vital(생의 약동)(엘랑 비탈)이 있다. 이 표현들은 심지어 1930년대에는 말할 필요도 없고, 1920년대 Bergson 철학이 한국어로 번역되기 이전에도 널리 유행하여 신문 기사 등에 쓰이고 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일본어로 Bergson을 접한 사람들의 영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일본어로라도 당시에 Bergson을 정통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큰 고민 없이 유행에 휩쓸려서 썼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13] 질 들뢰즈의 철학이 Bergson 철학에서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는 거의 공인된 사실이다. 들뢰즈를 소개하는 책에는 어김없이 Bergson 항목이 들어있을 정도이니.[14] 출처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연보.[15]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하)』, 김춘미 옮김, 문학사상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