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 영국 해군 참사
1707년 10월 22일, 영국 실리 제도에서 영국 해군 함대가 집단좌초하여 전열함 3척과 포함 1척이 침몰한, 기록이 있는 사건 중 전근대 이전의 것으로는 사상 최대의 해난 사고이다.
당시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라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숙적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참이었다. 1707년 영국은 프랑스를 압박하고자 프랑스의 지중해 핵심항구인 툴룽을 봉쇄하려고 함대 지휘관으로 클라우데슬리 쇼밸(Cloudesley Shovell) 제독을 임명했다.
쇼벨은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9년 전쟁을 거친 경험 많은 제독으로, 이번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고 1704년 지브롤터 함락에 공헌하여 그 공로로 정식으로 제독으로 진급하였다. 1705년부터 지중해의 작전 전권을 맡았고 바르셀로나 공격전에서의 해상지원, 툴룽 포위와 프랑스 지중해 해군 세력 격파에 공훈을 세웠다. 한창 툴룽을 포위 중이던 1707년 9월, 정부는 함대를 본국으로 귀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자 쇼벨 제독은 툴룽 포위를 풀고 함대를 지브롤터로 몰린 후 9월 29일 지브롤터를 출항하여 본국으로 향했다. 당시 영국 해군 지중해 전력의 핵심으로 전열함 15척에 포함 4척, 슬루프 1척, 요트 1척으로 무시무시한 규모였다.
문제는 대서양의 10월 날씨였다. 지브롤터를 출항하여 비스케이 만을 통과하는 대부분 날이 악천후였다. 강풍이 거세고 풍랑이 높았으며, 하늘엔 비구름이 가득했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할 수 없었다!''' 과거의 전통적인 항해법에는 천문관측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은 심각한 문제였다. 간간히 날이 갤 때마다 측량하여 위치를 보정하긴 했다. 하지만 이들 함대는 10월 21일 정오 마지막 관측을 끝으로 더 이상 천문 관측을 하지 못하고 추측항법[1] 으로만 배를 몰았다.
당시에는 이런 측량 문제 때문에 대규모 함대를 마중나가는 함선이 출항하여 길안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에도 영국 해군은 호위함 HMS 타타르(Tartar)를 내보내어 쇼벨 함대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타타르는 예상되는 쇼벨 함대의 항로를 따라 나아갔으나 함대를 찾지 못했다. 쇼벨 함대는 정상적인 항로에서 이탈한 것이다!
함대는 정상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 해협으로 안전하게 항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거센 바람이 이들의 항로를 훨씬 북쪽으로 밀어내었다. 그렇게 이들은 영국 본토 란즈엔드 곶에서 서쪽으로 약 50 km 떨어진, 수많은 암초들로 가득한 실리 제도로 닥돌하고 말았다.
10월 22일 오후 8시, 결국 이들은 악천후 속에서 뒤늦게 실리 제도의 섬들을 목격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거센 풍랑 속에서 숨어있는 암초들을 피할 길은 없었고 함선들은 하나둘 차례대로 암초와 충돌하며 빠르게 침몰했다.
함대 총 21척 중 그래도 운 좋게 암초와 부딪치지 않은 선박들도 있었고 충돌했어도 살짝 스쳐가거나 하는 식으로 파손되어 침몰을 면하고 버틴 배들도 많았다. 그러나 '''기함'''인 90문짜리 2급 전열함 HMS 어소시에이션, 70문짜리 3급 전열함 HMS 이글, 50문짜리 4급 전열함 HMS 롬니, 포함 HMS 파이어브랜드가 침몰하였다.
함대 사령관 쇼벨 제독 본인을 포함하여 최소 1400명에서 최대 2000명에 달하는 영국 해군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중 800여 명이 피해함선 중 가장 큰 배인 기함 어소시에이션에서 사망했다.
당대 기술과 사회상으로는 사실 근본적인 대책이 없었다. 하늘이 화창하면 천문정보으로 위치를 파악했는데, 이 참사에서는 천문관측을 게을리하거나 실수한 게 아니라 '''악천후로 천문관측 자체를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기술적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영국 정부는 경도위원회라는 기구를 발족시키고 경도법을 제정, 경도심사국을 발족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천문관측에 의존하지 않고 경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정부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거액의 상금을 걸어 민간의 협력까지 구했다.
결국 이 문제는 시계공 존 해리슨이 1735년 크로노미터를 제작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 배경
당시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이라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숙적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참이었다. 1707년 영국은 프랑스를 압박하고자 프랑스의 지중해 핵심항구인 툴룽을 봉쇄하려고 함대 지휘관으로 클라우데슬리 쇼밸(Cloudesley Shovell) 제독을 임명했다.
쇼벨은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9년 전쟁을 거친 경험 많은 제독으로, 이번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고 1704년 지브롤터 함락에 공헌하여 그 공로로 정식으로 제독으로 진급하였다. 1705년부터 지중해의 작전 전권을 맡았고 바르셀로나 공격전에서의 해상지원, 툴룽 포위와 프랑스 지중해 해군 세력 격파에 공훈을 세웠다. 한창 툴룽을 포위 중이던 1707년 9월, 정부는 함대를 본국으로 귀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자 쇼벨 제독은 툴룽 포위를 풀고 함대를 지브롤터로 몰린 후 9월 29일 지브롤터를 출항하여 본국으로 향했다. 당시 영국 해군 지중해 전력의 핵심으로 전열함 15척에 포함 4척, 슬루프 1척, 요트 1척으로 무시무시한 규모였다.
2. 참사
문제는 대서양의 10월 날씨였다. 지브롤터를 출항하여 비스케이 만을 통과하는 대부분 날이 악천후였다. 강풍이 거세고 풍랑이 높았으며, 하늘엔 비구름이 가득했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할 수 없었다!''' 과거의 전통적인 항해법에는 천문관측으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은 심각한 문제였다. 간간히 날이 갤 때마다 측량하여 위치를 보정하긴 했다. 하지만 이들 함대는 10월 21일 정오 마지막 관측을 끝으로 더 이상 천문 관측을 하지 못하고 추측항법[1] 으로만 배를 몰았다.
당시에는 이런 측량 문제 때문에 대규모 함대를 마중나가는 함선이 출항하여 길안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에도 영국 해군은 호위함 HMS 타타르(Tartar)를 내보내어 쇼벨 함대를 맞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타타르는 예상되는 쇼벨 함대의 항로를 따라 나아갔으나 함대를 찾지 못했다. 쇼벨 함대는 정상적인 항로에서 이탈한 것이다!
함대는 정상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 해협으로 안전하게 항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거센 바람이 이들의 항로를 훨씬 북쪽으로 밀어내었다. 그렇게 이들은 영국 본토 란즈엔드 곶에서 서쪽으로 약 50 km 떨어진, 수많은 암초들로 가득한 실리 제도로 닥돌하고 말았다.
10월 22일 오후 8시, 결국 이들은 악천후 속에서 뒤늦게 실리 제도의 섬들을 목격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거센 풍랑 속에서 숨어있는 암초들을 피할 길은 없었고 함선들은 하나둘 차례대로 암초와 충돌하며 빠르게 침몰했다.
3. 피해
함대 총 21척 중 그래도 운 좋게 암초와 부딪치지 않은 선박들도 있었고 충돌했어도 살짝 스쳐가거나 하는 식으로 파손되어 침몰을 면하고 버틴 배들도 많았다. 그러나 '''기함'''인 90문짜리 2급 전열함 HMS 어소시에이션, 70문짜리 3급 전열함 HMS 이글, 50문짜리 4급 전열함 HMS 롬니, 포함 HMS 파이어브랜드가 침몰하였다.
함대 사령관 쇼벨 제독 본인을 포함하여 최소 1400명에서 최대 2000명에 달하는 영국 해군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중 800여 명이 피해함선 중 가장 큰 배인 기함 어소시에이션에서 사망했다.
4. 대책
당대 기술과 사회상으로는 사실 근본적인 대책이 없었다. 하늘이 화창하면 천문정보으로 위치를 파악했는데, 이 참사에서는 천문관측을 게을리하거나 실수한 게 아니라 '''악천후로 천문관측 자체를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기술적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영국 정부는 경도위원회라는 기구를 발족시키고 경도법을 제정, 경도심사국을 발족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천문관측에 의존하지 않고 경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정부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거액의 상금을 걸어 민간의 협력까지 구했다.
결국 이 문제는 시계공 존 해리슨이 1735년 크로노미터를 제작함으로써 해결되었다.
5. 여담
- 당시 침몰한 배들은 1967년부터 수중탐사로 잔해가 확인되었다. 영국 정부는 일부 유물들은 인양했지만 나머지 선체들은 인양하지 않고 그 상태로 보존하기로 결정하고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 사건 이후로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 여러 개가 돌았다. 쇼벨 제독이 항로가 잘못되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선원을 반란죄로 처벌했다던가, 쇼벨 제독 본인은 좌초 후 인근 섬에 상륙하여 생존했으나 그가 가진 에메랄드 반지에 눈이 먼 지역민에게 살해당했거나 등등. 요즘도 큰 사건이 터지면 유언비어가 터지니, 전근대 시기 대형사건에 이런 소문이 나돌아도 이상하진 않다.
-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 유럽 세계에서 영국의 해군력은 절대 우세였는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주요 해전으로 영국 해군이 입은 피해보다 이 참사로 생긴 피해가 더 컸다.
- 문제의 실리 제도에 계속해서 크고 작은 해상사고들이 이어져서 정부에서 대규모 등대까지 짓고 특별히 중점 관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7년 3월 18일, 토리 캐니언 호 좌초 사고라는 역대급 대참사가 일어났다.[2]
[1] 출발위치에서 침로와 속력을 계산하여 위치를 추측하는 항법[2] 토리 캐니언 호 사건은 현대에 발생했긴 하지만 거센 조류로 침로가 바뀌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토리 캐니언 호에 실렸던 화물이 원유 10만 톤이라 거대한 해상오염사고가 일어났단 점은 다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