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치경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심치경은 1885년 5월 21일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명흥학교 교사 안태영이 선천(宣川)에 갔다가 그곳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 1장을 얻어 철산에 돌아왔다. 곧 그는 동료 교직원들에게 선천의 시위투쟁 상황을 설명하였고, 이를 계기로 철산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준비되었다.
이때 안태영의 계획에 가담한 심치경은 명흥학교 교장 심치규, 교사 안태영과 예수교인 김영락(金永洛)·안봉국, 천도교측의 정구석(鄭久錫) 그리고 주민대표 김정찬(金鼎贊) 등과 함께 유봉영의 집에서 3, 4차에 걸쳐 비밀회의를 열고 모든 준비를 협의하였다. 거사일은 3월 7일 읍내 장날로 잡았고,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태극기 제작은 그와 안봉국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7일 12시경, 예수교회에서 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교인들과 주민들이 속속 예수교 교회당으로 모였다. 김영락의 사회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교회당을 떠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장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군중은 삽시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시위행렬은 군청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시위행렬이 우체국 앞을 통과할 때 그 안에 있던 일본인 직원들이 시위군중을 조소하며 욕설을 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하였다. 이보다 앞서 일제의 철도원호대(鐵道援護隊)는 병력을 증파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시위행렬의 뒤를 따르며 해산을 강요하다가 투석전이 시작되자 실탄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시위군중 중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심치경은 이날의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3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철산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6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심치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