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봉국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봉국은 1894년 1월 21일 평안북도 철산군 동부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볼일이 있어 선천군에 갔던 명흥학교 교사 안태영이 그곳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 1장을 얻어 가지고 철산군으로 돌아와서 철산군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이후 안태영으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가담받을 것을 권유받은 안봉국은 흔쾌히 승낙하고 심치규, 김영락(金永洛), 심치경 등 기독교인과 정구석(鄭久錫) 등의 천도교인, 김정찬(金鼎贊)·정익(鄭翊) 등의 일반 주민대표들과 함께 동부동에 거주하는 유봉영의 집에서 3, 4차례에 걸쳐 비밀 회의를 갖고 만세시위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읍내 장날인 3월 7일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독립선언서의 등사는 천도교 측에서, 태극기의 제작은 안봉국과 심치경이 담당했다. 이윽고 3월 7일 정오경 예배당의 종소리가 울리자, 계획대로 기독교인, 천도교인, 일반 주민들이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이후 김영락의 사회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친 후 행진했다. 군중이 수천 명으로 불어난 채 우편소 앞을 지날 때, 일본인 직원이 이를 보고 욕설을 하자, 격분한 군중이 그를 향해 돌을 던졌다. 이에 철도원호대가 즉시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이후 안봉국은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광복 후 급격한 공산화를 피해 월남했고, 이후에는 인천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1978년 8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안봉국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0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