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영(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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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시기의 행적
유봉영은 1897년 1월 27일 평안북도 철산군 고성면 동부동에서 유학요(劉學堯)와 하동 정씨 사이의 1남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2년경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1907년에 철산읍내 신명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909년 3월 탁영련(卓濚鍊)의 3녀 탁윤소(卓潤昭 )와 결혼했다. 1910년 신명학교 고등부를 졸업한 뒤 박천군 육영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105인 사건이 발발하면서 육영학교가 문을 닫자 학업을 중단했다.
1911년 상경하여 YMCA 학관 영어과에 입학하여 영문을 공부했으며, 이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1917년 도쿄 보급영어학원을 수료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명흥학교 교사가 되어 영어와 역사, 지리를 가르쳤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교장 심치규, 교원 안태영, 김영락(金永洛), 안봉국, 천도교 신자 정구석(鄭久錫), 일반 주민대표 김정찬(金鼎贊)·정익(鄭翊) 등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3, 4차례에 걸쳐 비밀회의를 갖고 독립만세시위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선천읍내 장날인 3월 7일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독립선언서의 등사는 천도교측에서, 태극기의 제작은 안봉국과 심치경이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7일 철산읍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으나 일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9명의 사망자와 1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이후 일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상하이로 망명하여 선우혁에게 국내 정세를 보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재정 지원을 수행했다.
1919년 5월 길림으로 가서 여준이 주재한 재만주 독립운동자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협의를 했다. 그해 8월 상하이로 돌아와 프랑스 조계에 머물면서 이희경(李喜儆) 등과 협의해 대한적십자사 창설에 기여했다. 또한 11월에는 만주 안동현으로 가서 부인을 만나 고향의 토지를 처분하게 해 5,000원을 마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인쇄 기계를 구입하는 데 썼다.
이후 만주 봉천에서 농지를 매입해 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국내와 상하이,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들의 연락 임무를 담당했으며, 사재 1,000원을 각출해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1920년 일본 도쿄로 가서 보급영어학관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봉천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도중에 대구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40여 일간 구금되었다가 철산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이후 철산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관한 취조를 받고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2년 2월 경의선 기차 안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며칠만에 풀려났고, 1924년 8월 19일 경성 종로서에 구금되었다가 8월 26일에 풀려났다. 1926년 2월 9일 봉천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 피검되어 구금되었다가 2월 19일에 출감했으며, 1927년 5월 11일 경의선 기차 안에서 경찰에 피검되어 신의주서에 구금되었다가 5월 20일에 출감했다. 1929년 7월 6일 철산경찰서에서 피검되어 5월 16일 신의주형무소로 이송되었다가 5월 25일 불기소 석방되었다.
이후 만주 봉천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본받아 서간도를 중심으로 비폭력 독립운동을 주창했으며, 한편으로는 한국의 상고사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했다. 1936년 국내로 귀환 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폐간될 때까지 재직하였다.
2.2. 해방 후의 경력
8.15 광복 후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재입사하여 주필을 맡았다. 1948년 12월 편집국장 문동표가 실종되자 그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았으며, 정치부장, 사회부장 등 여러 직책도 겸임했다. 1950년 6월 24일 사설 <경계를 요할 괴뢰의 행동>을 기고했는데, 다음날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을 예고한 것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1963년 독립유공자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64년 8월 4일 야간국회에서 언론윤리위법이 통과되자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를 발족해 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신문구독 중지, 정부광고 의뢰 중지, 신문용지 배급 및 은행융자 제한, 언론인 사찰, 신문 정간, 폐간 위협 등을 온갖 압력을 가했지만, 유봉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악법 철폐 운동을 지속했다. 이후 민심이 악화되자, 정부는 동통신 사주 김성곤 의원을 중재자로 내세워 막후교섭을 추진하였으며, 홍종철 공보부 장관과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장이 박 대통령과 ‘악법철폐투쟁위원회’ 간의 회동을 주선했다.“북한 괴뢰집단이 자기네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 그들의 행동이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금번 조만식 선생과 김삼룡·이주하 양인을 교환할 문제는 괴뢰 측에서 먼저 제의하여 놓고 이제 와서 이러니 저러니 구실을 붙여가지고 시일을 천연하고 있으니 그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주저하는 그 이면에 무슨 내막이 있지 않을까. 금후 그들의 행동을 충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경계를 요할 괴뢰의 행동'
1964년 9월 8일, 유봉영은 언론윤리위원회법 철폐투쟁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만년장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했다. 그는 은 “언론윤리위원회법 강제 시행으로 국민이 더 이상 유리되어서는 안된다”고 설명하면서 “언론 스스로가 책임있고 공정한 언론이 되도록 노력할 터이니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보류해 달라”고 건의했고, 박정희는 이에 선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언론윤리위원회법은 보류되었다.
1965년 국제신문인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1966년에는 ‘압록강·두만강 너머 만주땅도 우리 영토’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를 찾기 위하여 백산학회(白山學會)를 창립하여 부회장 겸 총무를 거쳐 회장으로 일하면서 <백산학보>를 32집까지 발간하여 종신사업으로 삼았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추천에 따라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이 되면서 조선일보를 퇴사했고, 1972년 민족문회추진회[1] 이사장에 선출되어 고전 번역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1976년 이유립(李裕岦), 안호상(安浩相), 임승국(林承國), 박창암, 박시인(朴時仁), 문정창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85년 9월 25일 서울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용미리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17년 국립서울현충원 320실 78호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유봉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는 생전에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서울시문화상(언론 부문), 5.16 문화상 등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