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영(독립운동가)

 

성명
안태영(安泰英)
생몰
1894년 11월 1일 ~ 1963년 12월 21일
출생지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천북동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태영은 1894년 11월 1일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천북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독교 계통의 명흥학교(明興學校) 교사로 재직하던 1919년 3월 1일 볼 일이 있어 선천에 갔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 1장을 얻어가지고 왔다. 그는 심치규·김영락(金永洛)·안봉국 등 기독교인과 정구석(鄭久錫) 등의 천도교인, 김정찬(金鼎贊)·정익(鄭翊) 등의 일반 주민대표들과 함께 동부동에 소재한 유봉영의 집에서 3, 4차례에 걸쳐 비밀회의를 갖고 독립만세시위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선천읍내 장날인 3월 7일 예배당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독립선언서의 등사는 천도교측에서, 태극기의 제작은 안봉국과 심치경이 담당하였다.
이윽고 3월 7일 정오경 예배당의 종소리가 울리자, 기독교인, 천도교인, 일반 주민들이 계획대로 예배당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김영락의 사회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친 후 행진했다. 군중은 행진하면서 수천 명으로 불어나 우편소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일본인 직원이 이를 보고 욕설을 하자, 격분한 시위군중이 일본인에게 투석하였다. 그러나 미리 병력을 증파하여 경비하고 있던 철도원호대(鐵道援護隊)가 즉시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군중은 해산하였다. 안태영은 이후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었고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울로 이주해 조용히 지내다 1963년 12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안태영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