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위안스카이 회담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만남
3.2. 국무총리 내정
3.3. 팔대정강 발표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


1912년 8월 24일부터 9월 25일까지 13차례에 걸쳐 행해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위안스카이와 전 임시대총통 쑨원의 시국 대책 회담. 혁명당의 거두 황싱, 부총통 리위안훙도 참석했다.

2. 배경


1912년 6월 17일, 중화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탕사오이위안스카이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하야했다. 6월 29일, 외교총장 루정샹이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내각 조각 문제로 금방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정당내각을 주장하는 동맹회와 충돌하고 있었는데 원래 비밀조직이었던 동맹회는 1912년 3월 3일 공개조직인 동맹회로 개편되었고 쑨원을 총리로, 황싱, 리위안훙을 협리로, 후한민, 쑹자오런, 장췬, 전동을 간사로 선출하여 중화민국을 공고히 한다, 민생주의를 실행한다 라는 정강을 내걸었다. 1912년 8월, 동맹회는 소이를 버리고 대동을 취한다는 방침으로 통일공화당, 국민공진화, 국민공당, 공화실진회 등 4당과 통합하여 국민당을 탄생시키고 이사장에 쑨원, 이사에 황싱, 쑹자오런, 왕충후이 등을 추대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난징에 있는 10만의 혁명군을 해산한 이후 1912년 8월,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켜 정계에 한번 충격을 주고 있었는데 혁명당과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난징에 있는 부총통 리위안훙, 쑨원, 황싱을 베이징으로 초청하여 나랏일을 논하자고 제안했다. 쑨원은 임시 대총통 사임 이후 상하이, 우창, 광저우 등에서 유세하고 있었는데 위원스카이가 거듭 사람을 보내 회견을 요청하자 이를 승낙하기로 했다. 장전우의 죽음을 본 혁명당원들은 불안해 하며 쑨원에게 위안스카이가 악랄한 수를 쓸 것이 틀림없으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쑨원은 이미 가겠다고 약속을 한 데다가 설마 위안스카이가 그 정도로 악랄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위안스카이를 만나기 위해 베이징으로 떠났다. 황싱은 북상을 잠시 미뤄 나중에 떠나기로 했다.

3. 전개



3.1. 쑨원과 위안스카이의 만남


1912년 8월 24일, 부인을 대동한 쑨원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수많은 베이징 시민들이 몰려나와 쑨원을 환영했고 위안스카이도 쑨원을 전직 대총통의 예로 극진히 모시며 쌍두마차를 보내 영빈관으로 초대했다. 위안스카이의 비서장 량스이를 포함하여 모든 총장들이 마중을 나가 쑨원을 영접했고 쑨원은 8월 24일 저녁, 총통부를 찾아가 위안스카이를 만났는데 이것이 위안스카이와 쑨원이 만난 첫 대면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며 환영사에서 쑨원을 치켜올리며 쑨원의 처음 뜻과 소망을 저버리지 않겠으니 많은 가르침을 달라고 겸손하게 발언했다. 쑨원도 혁명당 인사들에게 위안스카이는 이제 민국에 충성하는 인물이니 함부로 비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후 국무원에서 총 13차례에 걸쳐서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회담이 행해졌다. 국무총리 대행 자오빙쥔과 육군총장 돤치루이 등 각부 총장들 및 비서장 량스이가 언제나 동석했으며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행한 헨리 조지의 <단세론> 강의를 포함, 말하는 의견 대부분에 찬성을 표하였고 이견이 있을 때에는 "그 말씀도 일리가 있으니 참고하겠습니다."라며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위안스카이의 태도가 수상쩍을 정도로 공손한지라 쑨원은 의심을 품고 량스이에게 몇마디 질문을 했으나 음모의 징조를 포착할 수는 없었다.
8월 25일, 국민당이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쑨원이 이사장에 선출되었는데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도 국민당 입장을 권하며 만약 그가 국민당에 입당한다면 국민당의 영수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 9월 9일, 위안스카이는 쑨원에게 전국 철도를 기획하는 전권을 부여하며 3만원의 월급과 상하이의 사무실을 약속했고 쑨원은 이를 수락했다. 한편 장전우에 대한 얘기를 나눈 쑨원은 황싱에게 장전우 사건을 더 이상 키우지 말라고 지시를 내려 장전우 사건은 그대로 묻히게 되었다. 9월 11일에는 황싱이 베이징에 도착해 쑨원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3.2. 국무총리 내정


한편 위안스카이가 쑨원과 만난 이유 중 하나는 8월 20일 국무총리 대행으로 임명된 자오빙쥔을 정식 국무총리로 승격시키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에게 차기 국무총리에 대한 의향을 묻자 쑨원은 황싱을 새로운 국무총리로 추천했다. 하지만 황싱이 총리가 될 생각이 없다고 거절하여 이어 쑹자오런을 추천했으나 쑹자오런은 위안스카이 밑에서 총리를 할 생각이 없다고 역시 거절했고 위안스카이 역시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쑹자오런을 좋아할리 만무했으니 자연스레 그도 탈락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에게 자오빙쥔을 추천하며 총리 이하 내각 전원이 국민당에 입당하여 1당 책임내각을 출범시키는 조건으로 자오빙쥔을 정식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쑨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정식으로 자오빙쥔 내각이 출범하고 비 국민당 각료들은 사퇴하거나 국민당에 가입했다. 이로 인하여 사법총장 허세영, 농림총장 진진선, 농상총장 유규일, 교통총장 주계금이 입당 원서를 국민당에 제출했고 재정총장 주학희와 외교총장 왕여호는 입당 의사를 표명했고 교육총장 범원렴은 공화당에서 탈당했다.[1] 자오빙쥔 역시 약속대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자오빙쥔 내각은 정당내각, 혹은 내각정당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이 결정은 결코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고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할 뿐이었다.

3.3. 팔대정강 발표


9월 25일, 쑨원은 황싱, 위안스카이와 회담하고 리위안훙의 동의를 얻어 중화민국의 향후 내정방침인 8대정강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나라를 세우는 통일된 제도를 마련한다.
  • 2. 옳고 그름에 공정한 태도를 취하며 풍속을 바로잡는다.
  • 3. 군사력 증강을 잠시 중지하고, 먼저 군의 인재를 기른다.
  • 4.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 자본을 도입하여 철도와 광업을 진흥시키고, 제철소를 세워 민생을 도모한다.
  • 5. 국민의 실업을 돕고 우선 농림, 상공업부터 착수한다.
  • 6. 군사, 외교, 재정, 사법, 교통은 모두 중앙집권주의를 채택하고 그 밖에는 지방분권주의도 겸하여 채용한다.
  • 7. 신속히 재정을 정리한다.
  • 8. 당파들의 견해를 아우르는 데 힘을 다하여 질서 유지에 최선을 다한다.
회담이 끝난 후 위안스카이는 쑨원과 황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쑨원은 뜻이 높고 견해가 탁월하지만 추진력이 부족하다. 황싱은 성품이 올곧고 단호하나 배포가 작고 식견이 짧아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기 쉽다."

베이징을 떠나 남하한 쑨원은 이제 자신은 사회사업에만 종사하고 정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국민당원들에게 위안스카이는 능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며 세상사를 명확하게 꿰고 사상도 새롭지만 방법이 좀 전통적인게 흠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이러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전체적으로 고평가하며 국민당에게 전력으로 위안스카이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황싱 역시 위안스카이를 도우라고 지시했다.

4. 결과


쑨원은 이후 정말로 한동안 미국의 전례에 따라 중국 전역에 철로를 까는 계획에 매달리며 이사장 대리 직함을 쑹자오런에게 맡기고 경제개발 사업에 전념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 황싱, 리위안훙의 동의에 힘입어 더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1912년 12월부터 1913년 2월까지 임시약법 53조에 의거하여 총선이 행해졌다.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은 전통적으로 위안스카이의 혁명당에 대한 기만책 정도로 여겨지지만 국민당이 얻은 이익이 없지 않아 위안스카이가 쑨원을 극진히 예우하는 것을 본 구관료와 보수파 세력이 더 이상 국민당을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일부는 국민당에 참가하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 이는 1913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압승하는 결과에 한가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쑹자오런이 약진하여 차기 총리로 지목되는 것을 보고 경계한 위안스카이와 국무총리 자오빙쥔은 1913년 3월 20일 쑹자오런 암살 사건을 사주하게 되고 4월 26일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켜 독재를 강화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국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6. 관련문서



[1]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해군총장 유관웅은 군인이므로 정당 가입이 불가해서 가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