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

 




'''청나라 2대 내각총리대신'''
'''중화민국 2대 임시 대총통'''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중화제국 초대 황제'''
'''위안스카이'''
'''袁世凱 | Yuan Shikai
'''
<colbgcolor=#00001b> '''이름'''
'''袁世凱
원세개 | 위안스카이 | Yuán Shìkǎi'''
''''''
'''慰庭
위정 | 웨이팅 | Wèitíng'''
''''''
'''容庵
용안 | 룽안 | Róng'ān'''
'''연호'''
'''홍헌(洪憲)'''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출생'''
1859년 8월 20일
청나라 허난성 샹청현
'''사망'''
1916년 6월 6일 (향년 56세)
중화민국 베이징
'''국적'''
[image] 청나라
[image] 중화민국(임시정부)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제국
[image] 중화민국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유교
'''배우자'''
정실 우씨(于氏), 첩실 심씨(沈氏)
첩실 양씨(楊氏), 첩실 섭씨(葉氏)
첩실 장씨(張氏), 첩실 곽씨(郭氏)[1]
첩실 유씨(劉氏)[2], 첩실 김씨(金氏)[3]
첩실 이씨(李氏)[4], 첩실 오씨(吳氏)[5]
첩실 이씨(李氏)[6], 첩실 민씨(閔氏)[7]
'''자녀'''
장남 위안커딩[8]
차남 위안커원[9]
오남 위안커취안[10]
포함 총 17남, 15녀 (32남매)
'''주요
경력
'''
청나라 2대 내각총리대신
(1911년 11월 2일 ~ 1912년 3월 10일)
중화민국 2대 임시대총통
(1912년 3월 10일 ~ 1913년 10월 10일)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
(1913년 10월 10일 ~ 1916년 6월 6일)
중화제국 초대 황제
(1915년 12월 12일 ~ 1916년 3월 23일)
'''서명'''
[image]
1. 개요
2. 이름에 관하여
3. 생애
3.1. 출생과 양자 입적
3.2. 조선에서의 경력
3.3. 의화단 사건 진압과 권력 접근
3.4. 백수에서 중국의 실권자로
3.5. 독재자의 길, 그것을 넘은 황제의 길
3.5.1. 정적 암살과 매국 행위
3.5.2. 홍헌제제, 황제 즉위
3.5.3. 단 한사람을 위한 신문
3.6. 21개조 요구에 서명, 매국
3.7. 호국전쟁과 몰락
3.7.1. 군벌의 위협
3.7.2. 울분 속에서 사망하다
3.7.3. 장례식
3.7.4. 무덤 원림
4. 이후
5. 여담
6. 주요 경력
7.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1898년황제배신했고, 1911년제국배신했으며, 1915년공화국배신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 '''

레지널드 존스턴[11]

중국의 군벌. 사익을 위해 자신을 신뢰했던 청나라 황제와 황실을 망설임 없이 배신하고도 모자라서 청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북양군벌의 수장이다. 중화민국/북양정부의 초대 총통이며, 중화제국 초대이자 마지막 황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공화국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를 자칭한 중국 역사상 최악의 한간(漢奸)이라고도 불린다.
항간에는 그놈의 중화제국 때문에 선통제가 아니라 이 양반이 중국 역사상 최후의 군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1917년의 정사복벽 사건도 있고 만주국도 있기 때문에 틀린 말이다. 물론 한족 군주로는 마지막이 맞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총통(한국과 일본에서 쓰는 명칭인 대통령에 해당)과 군주를 둘 다 경험해본 사람이다.
한국과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내정 간섭을 수행한 악연이 있다.

2. 이름에 관하여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원세개'''. shi([ʂɨ][12]) 은 현대 한국어에는 없는 음가인지라 한글로 정확한 발음을 표기하는 것은 어렵다. shi 같은 경우는 중국어의 특징적 발음인 권설음 중 하나로서 무성 권설 마찰음인바 입 안에서 혀를 말고 혀 끝을 경구개에 대고 '스' 발음을 내주면 비슷하다. 중국어에서 권설음(이 경우는 sh([ʂ])) 뒤의 -i는 '설측후음'이라 하여 따로 음가를 가지지 않으며 굳이 한글로 표기하자면 'ㅡ' 정도에 가깝다. 그러나 한글로 중국어의 발음을 표기하고자 할 때는 국립국어원에서 지정한 중국어 한글 표기법에 따라 '''위안스카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한다. 표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위안sky'로 읽기 쉬우나 '위안-스-카이' 로 끊어줘야 한다. 애초에 표기법은 외국어를 그대로 옮겨 적는 수단이 아니라 한국인의 언어 생활에 최적화된 표기법이므로 무리한 원음 재현은 의미가 없다.
간혹 위안스카이의 성을 위엔으로 표기하는 매체도 있으나, '''위안'''이라는 표기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위안스카이의 성인 袁의 한어병음 표기인 Yuán의 모음은 두 모음인 ü와 a가 합쳐진 복모음으로, 굳이 따지면 '''[위엔]''' 쪽에 더 가깝게 들린다. 주음부호로 보면 ㄩ(위)+ㄢ(안)으로 이뤄진 음절이 맞으나 별도의 음절로서 발음되는 게 아니라 합쳐져 한 음절로 발음될 때는 ü[y](위)의 전설성에 힘입어 an[an](안)의 a[a](아)가 a[ɛ](에)[13]로 전설모음화되는 것. 그러나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서 ㄧ(이)+ㄢ(안)이 합쳐진 한 음절(한어병음 yan)은 글자 그대로인 '얀'이 아니라 (전설음화된 현실음을 반영하여) '옌'으로 쓰게 하되 ㄩ+ㄢ이 합쳐진 한 음절은 음절 구조 그대로 '위안'으로 표기한다.
이는 과거 중국어 로마자 표기에 널리 쓰였던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의 영향인데(국립국어원 답변), 한 음절짜리 -ian(옌)과 두 음절짜리 -i'an(이안)은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서 각각 -i'''e'''n, -i-an으로 표기되어 철자 자체가 달랐던 반면에, 한 음절인 yuan(위엔)과 두 음절인 yu'an(위안) 모두 철자 변경 없이 붙임표 유무의 차이만 있는 yüan, yü-an으로 표기되었던 것.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ㄩㄢ 한 음절만을 위한 yü'''e'''n 등의 별도 표기가 없었던 것을 보면, 한 음절인 ㄩㄢ의 중국 현지음이 [위안]이 아니라 [위엔]이 된 것은 의외로 최근의 일일지도 모른다.[14]
한편 '위, 안' 두 음절에 대한 한아병음 표기는 Yuan이 아닌 Yu'an이다. 한어병음에서는 a, e, o 중 하나로 시작되는 음절이 다른 음절의 바로 뒤에 붙으면 그 a/e/o 앞에 어포스트로피(')를 넣는다. 장위안(张玉安)의 병음 표기(Zhang Yu'an)나, 장안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중국의 고도(古都) 시안의 병음 표기(Xi'an)가 그 예시. 즉 yuan은 [위엔], yu'an은 [위안], xian은 [셴], xi'an은 [시안]에 가깝다. 그러나 상술하였듯, 현행 표기법에서는 xian과 xi'an은 '셴'과 '시안'으로 구별해 쓰나 yuan과 yu'an은 모두 그냥 '위안'으로 쓴다.
원어 독음의 표기 문제를 떠나서, 한국 한자음인 원세개와 중국어 표기법 위안스카이 두 이름 사이의 문제도 있는데 이는 현행 표기법의 중국 인명 표기법이 둘로 나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혼란이다. 현행 표기법에는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 이전에 사망한 인물은 한국 한자음으로, 그 이후의 인물은 중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도록 하고 있다. 역사적 방식과 현대식 독법 사이 일종의 타협.[15]
우리로서는 오랫동안 '공자, 맹자'로 불러 온 孔子, 孟子를 현대 중국어 음가에 따라 '쿵쯔, 멍쯔'로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과하다(특히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반대로 현대 중국 인명은 매체 등을 통해 원어명을 직접 접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원음에 가깝게 쓰는 게 기억의 부담도 줄어들고 자연스럽다. 즉 习近平/習近平은 한국 한자음인 '습근평'보다는 중국 원음에 가까운 '시진핑'으로 쓰는 게 바람직하다.
과거에는 '원세개' 하면 알고 '위안스카이' 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현재는 교과서를 필두로 '위안스카이'라는 표기법이 자주 쓰이다 보니 세대에 따라 단어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고 오히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원세개' 하면 잘 모른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초반 제작된 명성황후(드라마)에서는 고증 차원에서 원세개라고 나오지만 정작 당시 학생들은 원세개가 위안스카이인 줄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강유위/캉유웨이 또는) 위안스카이의 이름이 중국어 표기법으로 소개되는 최초의 중국어 인명이다. 모택동이나 장개석도 마찬가지 경우.
국내에서의 저 표기 때문에, 이름인 스카이를 '''Sky'''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심하면 성만 중국식이고 이름은 미국식으로 지은거 아니냐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하필 활동 시기가 근대 개화기라 여러 서양인 선교사, 외교관 등이 자주 등장하고 외국식 이름을 지은 조선인[16]과 한자식 이름을 지은 외국인도 있기 때문에 위안 Sky라는 별명이나 이름이 나와도 이상하진 않겠다 싶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도 있다.

3. 생애



3.1. 출생과 양자 입적


위안스카이는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 출신으로 위안바오중(袁保中)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위안씨(袁氏)는 상청의 명문 가문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아버지 위안바오중은 친동생인 위안바오칭(袁保慶)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위안스카이를 양자로 보냈다.
숙부였던 위안바오칭은 매우 기뻐하며 열심히 양자를 키웠는데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제일 유명한 선생을 붙여줬지만 위안스카이는 도통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대신 말타기를 좋아하고 무예를 열심히 익히는 등 문(文)보다 무(武) 쪽으로 지나치게 열정을 보였다.
그래서 위안스카이는 진사 시험도 3번씩이나 떨어진 '''백수'''였는데 이것을 보면 위안스카이가 별 볼일 없는 것 같지만 사실 당시엔 진사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중국에서 진사가 되려면 먼저 강 부현에서 생원자격 얻은 사람들 중에서 피튀기게 경쟁하여 각 성에서 뽑는 거인이 되어야 하며 이런 십몇개 성에서 보낸 수천명의 거인들 가운데서 300등안에 들어야 한다. 아마도 중국의 과거 시험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붙기 어려운 관리 임용 시험이었을 것이다.

3.2. 조선에서의 경력


위안스카이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오만했으나, 당시에는 벼슬을 하고 출세하기 위해 스스로를 엄히 단속하고 모든 일을 법대로 시행했다. 결국 양아버지 위안바오칭의 추천으로 이홍장의 참모인 우창칭(吳長慶)의 휘하에 들어갔다. 위안스카이의 경력은 조선에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 조정은 우창칭에게 6개의 부대를 이끌고 출병할 것을 명령했고 이때 위안스카이는 우창칭의 휘하로 참전했다. 그리고 임오군란의 수괴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에 연금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후 본대가 철수한 후에도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에 있으면서 갑신정변 진압에서 맹활약하는 등 사실상 조선 주재 청국 공사 역할을 수행하여 이홍장의 명령을 따르며 조선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 주재 시절 위안스카이 추정 사진(좌측 두 번째)
청일전쟁 패전 후 위안스카이는 '''이홍장으로부터 넘겨받은 북양군을 틀어쥔''' 상황에서 1898년 광서제캉유웨이가 주도하는 변법자강운동에 협조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서태후의 측근인 영록대부에게 이를 밀고하면서 뒤통수를 날려 변법개혁을 박살내고 수구파에게 정권을 넘기는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위안스카이가 한간(漢奸) 소리를 듣게 되는 시발점이자 경력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 유명한 사건이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당하였고 나중에 서태후가 죽기 전날에 갑자기 죽었는데 2008년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조사한 결과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로 밝혀졌다.

3.3. 의화단 사건 진압과 권력 접근


이후 서태후의 총애를 얻게 되었고, 1899년~1901년 의화단 사건 기간에는 의화단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동남자보'에 가담하여 세력을 거의 잃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이홍장의 뒤를 이어 더욱 출세를 타게 된다. 의화단 사건 당시 열강에 맞서 싸웠던 청군 장수들 대부분이 중앙정부에 있던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결국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때문에 이를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권력에 한층 더 다가갔다. 한때 관도라 불리던 대쪽대신 천춘쉬안의 탄핵으로 날아갈 뻔 했으나 여론 조작과 혁광, 재전의 도움으로 사진을 합성하여 정적 모함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1903년 위안스카이 사진(가운데)
한동안 청의 외무부(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총리아문이 폐지되고 그 대체 기구로 외무부 신설) 총리교섭통상대신이었으나, 청의 마지막 구심점이던 서태후가 죽은 뒤 황제 푸이의 섭정으로 오른 순친왕의 압력으로 낙향했다. 순친왕은 위안스카이를 애초부터 못마땅했었고 심지어 죽이려는 계획까지 했었다.

3.4. 백수에서 중국의 실권자로


하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청조의 요청으로 정계에 다시 진출해서, 오늘날 국무총리급에 해당되는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조가 이런 태도를 보인 까닭은 북양군벌 때문이었다. 당시 북양군은 신군(신건육군=신식육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는데, 그들을 지휘하는 단기서가 위안스카이의 직속 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북양군을 이끌어 신해혁명을 진압하려면 그 실권자인 위안스카이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속으로는 청조를 타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 신해혁명군의 세력을 꺾는 선에서 상황을 멈춘다. 1912년 1월, 위안스카이는 공화파의 쑨원(손문)과 협상 테이블에 앉고 간단한 조건을 내건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황제 폐하도 버리고 청나라도 버릴 테니 쑨원님이 가지고 있는 혁명 정부 대총통 자리를 내놓으라"'''라는 것.
쑨원은 공화국을 건설할 것과 수도를 난징으로 바꿀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협상은 타결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 있는 심복 돤치루이(단기서)에게 황제 퇴위를 준비시켰고, 그의 군대가 자금성을 점령하자 같은 해 2월 12일 선통제를 퇴위시켰다. 이로서 청나라는 멸망하고, 위안스카이는 대총통 자리에 취임하며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야사로 위안스카이를 청조가 재등용할 때, 청나라 황족 중 하나가 '위안스카이는 사마의와 같은 자다.'라고 경고했다는 설이 있다. 중국사에서 사마의는 망탁조의라 하여 대표적인 역적으로 꼽혔는데, 위안스카이 또한 그런 식으로 반역자가 될 것이라는 뜻.

3.5. 독재자의 길, 그것을 넘은 황제의 길


[image]

3.5.1. 정적 암살과 매국 행위


하지만 이미 혁명 과정에서도 쑨원이 내걸었던 민주적 조건들을 싸그리 무시하던 위안스카이는 총통이 되자마자 독재를 강화해나갔다. 이에 맞서 쑹자오런, 쑨원이 동맹회를 확대해 1912년에 국민당을 결성한다. 오늘날 중국 국민당의 전신으로 위안스카이가 이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켰지만 1919년 쑨원이 재창당했다. 1912년 쑨원-위안스카이 회담을 통해 국가부흥과 정당정치를 수용하는 듯...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옛 심복인 국무총리 탕사오이가 공화사상에 물들어 말을 듣지 않아 압박하여 내쫓았고 1912년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을 일으켜 혁명당원을 제거하는 한편 빌미를 잡힌 리위안훙을 굴복시켰다. 1913년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협을 느껴 만만한 외교관 출신의 루정샹을 총리에 삼았다가 생각보다 너무 만만하자[17]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국무총리로 삼은 후 새 총리로 유력하던 전 농림총장이자 국민당 대리 이사장인 쑹자오런암살을 사주하였다. 쑹자오런은 당시 31살의 젊은 나이로 국무총리에 임명되기 일보직전이었다.
당시 쑹자오런이 이끌던 국민당의 인기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에게 있어서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에 국민당이 반발하여 1913년 7월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제2차 혁명을 일으키자 이를 2개월 만에 간단히 진압해버렸다. 그리고는 '공민단'이라는 정치 깡패 집단을 사주해 의회를 개박살내고, 1913년에는 국무총리 슝시링을 겁박하여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 버렸다.
여기에 열강 5개국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차관을 들이는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켰고 국민당 해산 이후에 정족수 부족으로 정회되어 유명무실해진 국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하여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단행하면서 실로 '매국 행위 + 독재자'가 되어간다. 1914년 5월 1일에는 중화민국 신약법을 발표, 종신 임기에 세습까지 법률로 보장받게 된다.

3.5.2. 홍헌제제, 황제 즉위


[image]
이렇게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자, 위안스카이는 모든 중국 권력가들의 영원한 꿈인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 그 야심의 일환으로 위안스카이는 사천도독 윤창형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1914년 12월 20일, 정식으로 공자를 숭상하기 위한 사천전례를 부활하고 12월 23일에 거대한 규모의 제사를 지냈다. 위의 사진이 당시의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있는 수염 하얀 노인이 위안스카이다. 전부 왕처럼 보이겠지만 위안스카이 혼자만 흉배를 달고 있기 때문에 바로 구분이 된다. 면류관의 평천판에는 면류가 없으며 곤복도 무슨 해괴망측한 정체불명의 형태로, 주나라식 의복도 아니고 단령도 아닌 이상한 모습인데 곤룡포에 들어가는 흉배와 어깨 장식이 아니라 12가지 문양이 수놓아져야 한다. 나름 주나라 시대의 복식을 재현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색한 건 사실이다. 1644년부터 청나라의 중국 정복이 실시됨에 따라 한족 중심의 화이관을 무너뜨리기 위해 의복과 문화 그리고 사상을 크게 탄압해 한족 왕조의 문화가 상당수 소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18]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1일 국체를 논한다는 이유로 참정원을 소집하여 황제로 추대되었고 12월 12일에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측근들을 귀족으로 책봉하였으며 12월 31일에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정해서 초대 황제에 오르게 된다. 이를 홍헌제제라고 한다. 당시 어용 지식인들, 언론들 총동원해가면서 '제정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엄청나게 선전했다. 그러나 여러 강대국들, 주위 인물, 혁명파 학생들과 관리들, 민중들이 모두 위안스카이에게 등을 돌린다.

3.5.3. 단 한사람을 위한 신문


황제 등극 과정에서 엽기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른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신문 사건이다.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 걱정한 부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황제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일반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제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하는 측근들과 가족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차기 황제를 노리던 큰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이 있었다. 반면 둘째 아들 위안커원은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감우'라는 시를 지어 아버지가 황제 자리를 탐내는 것에 대해 경고를 내비쳤다.
당시 중국의 언론은 모두 위안스카이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군주제를 찬성했는데 일본 외무성이 중국에서 발행했던 신문인 순천시보는 위안스카이보다 강한 일본을 빽으로 업고 있어서 위안스카이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공무를 보면서 시세파악을 위해 순천시보를 틈틈이 보곤 했는데 큰 아들 위안커딩은 황태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위안스카이가 순천시보를 보고 칭제를 포기할까 우려하여 위안스카이를 위한 순천시보를 따로 조작하여 군주제 찬성 여론을 싣게 했다. 이리하여 위안스카이 한 명만을 위해서 위조된 '위안커딩 특제 순천시보'가 위안스카이에게 계속 전해지게 되었고 위안스카이는 모든 여론이 자신의 즉위를 찬성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돤치루이펑궈장, 쉬스창 같은 인물들은[19]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에 계속 반대하고 있었지만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를 좌천시키는 등 거의 막무가내로 밀어붙혀 그동안 위안스카이에게 충성하던 측근들도 반감을 품게 된다. 물론 대놓고 개길 힘이 없던 측근들은 대부분은 겉으로는 어서 황제에 즉위하라고 갖은 아양을 떨며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를 환영하는 '''척'''했는데...

3.6. 21개조 요구에 서명, 매국


이에 더해서, 위안스카이는 황제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서명했다. 내용을 보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산둥성 칭다오의 조차권을 일본이 그대로 가져간다. 당시 독일은 이곳에 독일인들이 마실 맥주를 만들 공장 시설을 지어놨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이 그 시설과 기술을 이어받아 일본의 맥주가 발달됐고, 전후에 그대로 남아 지금도 중국 칭다오 피쥬는 유명하다. 그리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게 넘기며, 남만주(뤼순, 다롄항)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한다는 내용은 그렇다치더라도 재정, 군사, '''경찰, 군수'''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외국에 땅을 할양하는데에 일본과 무조건 협의해야 한다는 이 조약은 사실상 매국 조약이나 다름없는 병크였다. 이에 학생들과 시민들은 베르사유 조약 반대 운동인 5.4 운동(1919년)에 나서고, 결국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군사 정부도 탄압 끝에 조약을 들어주지 않겠다며 항복한다.
다만, 이 21개조 요구 수용으로 위안스카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는 말도 있다. 일본이 비밀리에 요구한 21개조 요구가 민중들에게 전해진 것은 위안스카이가 고의로 흘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실제로 이 조약으로 말미암은 고민이 위안스카이를 죽음(1916년)에 이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 부지런히 접촉하면서 중국을 연합국에 끼게 하고 또 일본의 조건을 완화하려고 시간을 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라 개입할 여유가 없었고, 협상에 도움이 될 학생들의 봉기를 무력 진압하려 든 것은 문제였다.

3.7. 호국전쟁과 몰락



3.7.1. 군벌의 위협


한편,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 위안스카이 토벌을 외치며 1912년 6월에 제2혁명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7월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쑨원은 일본에서 1914년에 '중화 혁명당'(오늘날의 중국 국민당의 전신)을 조직하여 해외에서 '반(反) 위안스카이 독재' 운동에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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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무렵의 위안스카이.
1915년 12월 23일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 탕지야오가 위안스카이에게 24시간 내로 제재를 취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토벌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왔지만 전국의 군벌들이 입을 모아 제재를 칭송하던 와중에 위안스카이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갑자기 거기서 왜 나와?라는 반응이라서 무시하였고 결국 12월 25일 전계군벌과 량치차오가 운남성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호국전쟁이 일어났고 루룽팅 등의 군벌들이 관전하다가 대거 합세했다. 호국군은 초기에 조금 주춤했으나 북양군이 잇달아 패하면서 각성이 잇달아 가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옌시산, 장쭤린 등 즉위를 부추기던 쫄따구들은 입을 쓱 씻거나 심지어는 아예 단절 및 독립을 선포하기까지 했고 장쉰, 펑궈장, 진윈펑 등의 측근들까지도 퇴위를 종용하면서 위안스카이는 궁지에 몰렸다. 그러던 중 위안스카이의 딸 숙정이 자신이 좋아하던 잠두콩을 사오라고 여종에게 시켰다. 여종은 잠두콩을 순천시보에 싸서 왔는데 숙정은 아버지가 평소에 읽던 순천시보와 잠두콩을 포장할 때 쓴 순천시보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숙정은 위안커원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위안커원도 자신이 얼마 전에 위안스카이가 읽는 순천시보와 시중의 순천시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에 숙정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냐면서 위안스카이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쳤고 격노한 위안스카이가 다음날 위안커딩을 불러서 사실을 추궁했다. 위안커딩은 겁에 질려 사실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었고 위안스카이는 그 자리에서 위안커딩을 채찍으로 후려갈기고 아버지를 속이고 나라를 말아먹은 놈이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 때부터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은데,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의 믿음이 덜해지자 심지어 동생들을 죽이려는 사변까지 계획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저 황당한 조작 사건으로 비웃음이나 받고 있지만, 당시의 위안스카이는 나름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었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을 위해서 신문을 찍는다'라는 발상의 전환(!)이 정말 대단(대범?)했던 사건이다.

3.7.2. 울분 속에서 사망하다


위안커딩은 끝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제재를 취소해서는 안된다고 상소를 올리며 징징댔으나 믿고 있던 안휘, 강소, 절강 지역의 장군들도 제재 취소를 요구하자 1916년 3월 23일,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취소하고 떡고물이라도 건지기 위해 중화민국 총통 자리로 복귀한다. 이는 군주가 자의로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한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허나 이미 민심은 위안스카이를 떠난 뒤였다. 위안스카이는 펑궈장을 시켜 난징회의를 개최, 중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위안스카이가 총통 자리에 임시로라도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했으나 각성 대표들이 모두 위안스카이 하야를 요구하면서 개판이 되고 말았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실망 속에서 분노와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리위안훙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라고 유언한 후 1916년 6월 6일에 요독증이 악화되어 급사하면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20] 그래도 공화국 수장군주를 전부 경험한 지배자의 장례식답게 1916년 6월 28일의 장례식만은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고 북양정부의 실력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아버지를 부추겼던 위안커딩은 장례 기간 내내 위안스카이의 시신 앞에서 "아버지!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라고 울부짖었다고 하며 위안스카이의 셋째 첩 김씨가 위안스카이를 따라 죽으려고 시도하다가 저지되었지만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3.7.3.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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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위안스카이의 장례식
위안스카이 사후에는 북양군벌안휘군벌직예군벌로 분열되어 안직전쟁, 강절전쟁, 제노전쟁이라는 격렬한 내전을 벌였고, 또한 장훈복벽, 호법전쟁 등의 대규모 내전을 야기했다. 이후 만주쪽은 봉천군벌까지 발흥하면서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손봉전쟁, 직봉풍전쟁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국민혁명군북벌을 통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중국은 군벌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고통받았다.
난세의 실력자로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결국 그것이 실패했다는 점에서 종씨인 원술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3.7.4. 무덤 원림


위안스카이의 무덤은 허난성 안양시(安陽市)의 환강(洹江) 근처에 있는 원림(袁林)이다. "林"은 공자관우 같은 성인들의 묘에나 붙이는 칭호여서, 조성 당시에도 이름이 참람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나마 장남 원극정은 황제의 묘에 붙이는 "陵"을 붙여 원릉(袁陵)이라 하려고 했으나 서세창 대총통의 반대로 원림으로 타협 본 것. 기존의 전통적인 중국의 묘지와는 달리, 당시의 최신 공법인 철근 콘크리트로 패루(묘지의 문)와 묘지를 만든게 특징.
문화대혁명 때는 마오쩌둥이 '특별히 남겨서 반면교사로 삼을 것'이란 명령을 내려서 홍위병들의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는 야사가 있다.[21] 실제로는 홍위병들이 이 무덤도 폭약으로 폭파하려 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콘크리트로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서 가장자리만 조금 깨진 채 무덤 자체는 멀쩡하게 남았다고. 2013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됐다.
시진핑이 헌법개정을 통해 사실상 종신독재자가 됨으로써 중국 네티즌들이 위안스카이의 고사를 빗대어 폭풍까임을 행하자, 위안스카이의 이름이 금지어가 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4. 이후


조선인 첩들이 낳은 자녀가 7남 8녀인데 위안스카이의 자녀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위안스카이는 17명의 아들 중 김씨가 낳은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과 이씨(김씨의 몸종 출신 이씨)가 낳은 다섯째 아들 위안커취안(袁克權)을 가장 총애했는데 특히 위안커원은 위안스카이의 황제 등극 후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실 우씨가 낳은 큰아들 위안커딩(袁克定)은 독일영국유학을 다녀온 자신이 대통을 이어야 한다고 여겼지만 위의 사건과 특히 1913년 승마를 하다 떨어져 한쪽 다리를 저는 바람에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빌헬름 2세를 예방했을 때 중국에서 군주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부추김을 받고는 신나서 순천시보 조작 사건을 비롯하여 군주제 선동 여론을 일으키고 다녔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톈진의 독일 조계지에 숨었으나 과거처럼 권력에 눈이 멀어 행패를 부리고 다니진 않았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로부터 한간이 되라는 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고 궁핍하게 살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문사연구관 연구원이 되어 일하다가 1958년에 사망했다.
1914년 위안스카이의 둘째 아들 위안커원(袁克文) 등이 중국과 미국의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있는 육준(六駿)의 석각을 훔쳤다. 소릉에는 당 태종이 전쟁에 썼던 여섯마리의 준마(駿馬)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이름은 특륵표(特勒驃), 삽로자(颯露紫), 청추(靑騅), 권모과(拳毛瓜), 십벌적(什伐赤), 백제오(白蹄烏)이다. 위안커원 일당은 삽로자와 권모과 두 석각을 훔쳐갔으며 4년 후인 1918년 다시 잠입하여 나머지 네 석각도 훔쳐가려 했으나, 중간에 현지 주민들에 의해 발각되어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 그 때 화를 면한 네 석각은 현재 시안비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미 해외로 반출된 두 석각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에 있기 때문에 이 두 석각은 시안비림 박물관에 레플리카로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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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석각은 미국으로 반출된 삽로자로 잘 보면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너무 무거워서 '''훔쳐가기 편하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냈기 때문이다.''' 출처 반면 시안에 있는 삽로자와 권모과의 레플리카는 당연히 잘라 낸 흔적이 없다.
위안커원은 원래 샹치(將棋)와 마작(麻雀) 유단자로서 명성을 날렸었다. 위안커원은 한 때 후계자 1순위였지만 머지않아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황제 자리에서 밀려나고 병사한 후에는 다시 장기와 마작으로 일생을 지냈다가 1931년 톈진에서 향년 42세로 사망했다. 사실 더 유명한 것은 아버지 위안스카이의 대총통과 황제 시절 위안커원의 기녀 출신 측실이 무려 785명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위안커원의 셋째 아들 위안자류(袁家骝)는 물리학자로써 미국 뉴욕 주립 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지냈고 대만에서 국립 타이완 대학교 대우교수를 지내다가 2003년 향년 91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위안자류의 부인은 중화민국 출신의 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으로 미국 물리학회 첫 여성 학회장 울프상 최초의 물리상 수상, 맨하튼 계획 참여, 과학자 중 최초로 살아 생전 자신의 이름을 딴 소행성(2752 우젠슝)을 가진 저명한 물리학자이다. 1997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이후 위안자류는 2001년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남동생과 아들, 손주 등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자녀가 32명, 손자만 79명이었던 만큼 자손들도 매우 많은데, 가끔 중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 중인 후손들의 행적이 보도되기도 한다.

5. 여담


의화단 운동 직후의 삥뜯기 일화를 보면 상당한 지략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소식을 듣고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문열의 소설인 불멸에도 인용된다. 그러나 이 시는 출처가 다소 불분명하다. 최원식 교수의 논문[22]에서는 이 시의 원 출처가 이은상이 번역 정리한 '안중근 의사 자서전'이고, 이 시와 내용이 매우 비슷한 쑨원의 시가 있음을 주장하며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주석으로 언급하고 있다.
폐렴형 페스트를 최초로 발견한 화교 의사였던 우롄더(伍連德)의 후원자였다.#
한글을 한자 대신 중국의 공식 문자로 도입할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이던 시절 당시 중국에서는 어렵고 수가 너무 많은 한자로 인해 초래된 국민들의 높은 문맹률이 사회적인 문제로 오르고 있었다.[23]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 주재했던 경력도 있고 조선 출신 부인을 총애하는 등 조선의 문물에 대해 관심도 많고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해답으로 한글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고 한다. 중국도 한글 표기를 사용할 뻔했다고?-위안스카이와 류사오치 ‘한글의 중국 수입’ 주장한 원세개, 전 세계에 한글 알린 선교사 헐버트


6. 주요 경력


'''청나라 역대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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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2대

청나라 멸망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
위안스카이
(1911년 11월 2일 ~ 1912년 3월 10일)
'''중화민국 역대 임시 대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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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2대

중화민국 건국
쑨원
위안스카이
(1912년 3월 10일 ~ 1913년 10월 10일)
'''중화민국 역대 대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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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건국

1대

홍헌제제
위안스카이
(1913년 10월 10일 ~ 1915년 12월 12일)

제제 취소

총통 복귀

2대
위안스카이
(1916년 3월 23일 ~ 1916년 6월 6일)

리위안훙
'''중화제국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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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헌제제

초대

제제 취소
홍헌제 위안스카이
(1915년 12월 12일 ~ 1916년 3월 23일)

7. 참고문헌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신해혁명사, 민두기, 지식산업사.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1] 기녀 출신[2] 첩실 양씨의 계집종이었다.[3] 조선인 안동 김씨임오군란을 진압하려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왔을 때 만났다고 한다.[4] 조선인 김씨의 몸종이었다.[5] 조선인 김씨의 몸종이었다.[6] 조선인 위의 이씨와는 별개 인물[7] 조선인[8] 정실 우씨 소생[9] 조선인 첩 김씨 소생[10] 김씨의 몸종 출신인 이씨 소생[11] 당시 청나라 영국 고문.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의 조력자이자 스승으로 나온 인물로 배우 피터 오툴이 연기했다.[12] [ɨ\] 대신 [ʅ\]를 쓰기도 한다. 중설 비원순 고모음을 나타냈던 발음 기호인 [ʅ\](뒤집어진 ʃ)는 현재 국제 음성 기호에서는 [ɨ\]로 대체돼 사용되지 않는 기호이지만 중국학을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현재도 사용되기도 한다.[13] 이 발음은 한국어와 베트남어 등의 동양계 언어를 한글로 표기할 땐 'ㅐ'로,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등의 서양계 언어 표기 시에는 'ㅔ'로 옮겨진다.[14] 정리하면 음절 구분을 위한 어퍼스트로피나 붙임표를 제하고 봤을 때, '옌'과 '이안'의 표기는 한어병음에서 구별이 안 되고 '위엔'과 '위안'은 웨이드-자일스 표기에서 구별이 안 된다.[15] 다만 엄익상 한양대 중문과 교수처럼 신해혁명 이전의 인명·지명도 중국어 발음에 따라 한글로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일단 주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16] 대표적으로 필립 제이슨. 서재필이 있다.[17] 국회의 반대에 아예 병원에 누워 집무를 거부했다.[18] 그 영향으로 박규수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와룡관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다른 신하의 집을 방문했더니 온 집안 사람들이 이것이야말로 주공의 법복이라며 오열했다는 기록이 있고, 처음에는 거부감이 심했던 변발 역시 수백년간 강제되면서 상투가 잊혀지고 점점 보다보니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 개항 이후 서양식 단발이 들어오자 변발이 전통문화라고 반발하는 여론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에서도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린 남자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다고 한다.[19] 재미있게도 이들이 제제에 반대한 이유도 각기 다른데 돤치루이는 1912년에 군사를 동원해 공화국을 만들자고 위협해놓고 이제 와서 황제를 칭하는 건 명분이 없다고 반대했고, 펑궈장은 제국 체제에서는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없다고 반대했으며, 쉬스창은 선통제를 복위시켜야 한다고 반대했다.[20] 한국에서는 흔히 그가 홧병으로 죽었다고 알려져있다.[21] 중국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1952년에 내린 지시라고(「留著做反面教材」)하는데, 출처필요로 되어있는 내용이다.[22] 동양평화론으로 본 안중근의 「장부가」[23] 지금은 중국과 대만에서 보조 문자가 된 한어병음주음부호도 원래는 20세기 초중반에 한자를 대체하는 표음 체계로서 고안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