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colcolor=black> 신해혁명
辛亥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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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911년 10월 10일 ~ 1912년 2월 12일
장소
중국 대륙
교전 세력
[image]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임시정부
[image] 중국동맹회
[image] 후베이 군정부
지휘관
[image] 순친왕#s-1.2
[image] 위안스카이
[image] 펑궈장
[image] 돤치루이
[image] 마안량
[image] 양증신
[image] 마치
<^|1>[image] 쑨원
[image] 황싱
[image] 쑹자오런
[image] 천치메이
[image] 리위안훙
병력
200,000여 명
100,000여 명
피해규모
170,000여 명
50,000여 명
결과
혁명 성공
영향
청나라 멸망, 중화민국 수립
1. 개요
2. 제1차 혁명
2.1.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1]과 혁명의 전개
2.2.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협상(남북의화)
2.3.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
5. 신해혁명 그 이후
6. 평가
6.1. 중국
6.2. 대만
6.3. 몽골, 티베트, 위구르
6.4. 만주족
6.5. 신해혁명과 한국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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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조 - 중화민국은 중화인민이 이를 조직한다.

제2조 -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

중화민국 임시약법, 1912년 3월 11일 공포

삼민주의(三民主義): 민권(民權), 민생(民生), 민족(民族).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쑨원

신해혁명()은 중국에서 1911년(신해년)부터 좁게 보면 1912년까지[2], 넓게 보면 1915년까지[3] 일어난 일련의 혁명을 말한다.
이 혁명으로 인하여 진시황 이래 2200년 이상 중국을 다스린 천자의 군주제가 종말을 고하고, 중국사 최초의 근대적 공화국이 세워진다. 그리고 북방 이민족의 중원 지배도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2. 제1차 혁명


좁은 의미로는 이것만을 신해혁명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제2, 제3혁명 역시 제1혁명의 연장선상에 있기에 이를 뭉뚱그려 신해혁명이라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혁명이 임박해 있던 1911년 당시, 이홍장서태후가 사라진 청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서구 열강이 시시각각 침투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청나라의 지식층은 황실 사수를 도모하는 수구파,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입헌파, 민주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로 삼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온갖 민족주의 세력, 비밀결사 등이 개입하면서 혼란상은 날로 극심해져만 갔다.
1911년 5월 8일, 황족인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을 초대 총리대신으로 삼은 청나라의 첫 번째 헌정 내각은 많은 개혁파[4]들을 실망시켰다. 한족은 13명 중 4명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만주족 각료 가운데도 수상인 경친왕을 제외하더라도 7명이 황족으로 이루어졌던 것. 특히 문제는 우전부(우체-통신부)대신 성선회였다. 이런 와중에 청나라의 지도층은 성선회의 주도로 민영으로 돌아가던 자국의 철도를 강제로 국유화, 그걸 담보로 삼아 열강에게 차관을 얻으려는 짓을 터뜨렸...는데,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청나라는 제대로 된 철도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중국의 장거리 철도가 제대로 부설되기 시작한건 청일전쟁 패배 이후였기 때문이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별 철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1881년 6월 9일 당산(현 탕산시)에서 석탄산지 서각장(현 탕산시 펑난구 펑난진(丰南镇), 2004년에 인펑진(银丰镇)과 통합되어 펑난진이 되었다.)으로 이어지는 9.7km 구간의 철도였다(이후 이것이 톈진까지 이어진다). 또 중국인에 의해서 설계되고 공사 된 최초의 철도는 첨천우가 건설한 베이징에서 현재 내몽골자치구장자커우[5]까지 180km의 거리로 이루어진 징장선(경장선)이었으며(1905년~1909년), 징한선(베이징에서 한커우)이 건설 된 정도였다. 그 외 징푸선(경포선, 베이징에서 난징)과 징펑선(경봉선, 베이징에서 봉천/펑텐까지)이 1912년까지 건설 상태에 있었다.
1897년, 당시 양자강을 지나는 지역에 이익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광저우에서 한커우(한구漢口, 후베이성의 중심 도시로, 지금의 우한 북부)까지 이어지는 철도인 월한선[6]을 부설하기를 제안했다. 40년간 청의 부국강병을 위해 진력한 성선회는 이를 위협으로 판단하였다. "철로 부설권을 영국이 가지게 되면, 청조는 독립할 수 없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 상황에서 1900년 미국 자본(미국합흥회사)을 빌려 철도 국유화를 추진했다. 차관 400만 파운드(후에 4000만 달러, 약 800만 파운드로 불어난다)를 연 5.9%로 30년 동안 갚아나가려고 한 것이다. 일이 잘 된다면 북쪽의 베이징에서 내려오는 징한선(경한선)과 남쪽의 월한선이 이어지면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이어지는 대동맥이 완성되는 것이었...겠지만[7] 결론적으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기술의 문제였다. 신해혁명이 터진 1911년 당시 철도는 광저우에서 광둥성을 못 벗어나고 있었으며, 후난성 창사(장사)와 주저우까지만 연결된 중간 구간이 깔짝, 또 우한에서 창사를 연결하는 구간이 지지부진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 역사적으로 월한선은 여러 중단을 거쳐 1910년대 말에 우한 - 주저우 구간이 완성되고, 1936년에야 전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중국을 대동맥으로 연결시키겠단 발상은 우한에 양쯔강 철교가 지어지는 1957년에야 완성되었다.
뭐 이거야 전쟁과 혼란으로 어쩔 수 없다 치고, 두 번째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런 국유화 작업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민간 자본을 통한 철도 부설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1903년 당시 사천성(쓰촨) 총독인 석량(錫良)은 횡선인 쓰촨-한커우(천한선) 철도의 부설을 위해 외채가 아닌 민간자본에 의지하자는 의견을 제기했고, 이것을 청 조정에서는 "철로간명장정"으로 철로의 민간부설을 허락하였다(그 전해 이루어진 "공사법"으로 주식회사란 아이디어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5년 서태후의 총신 장지동은 후베이, 후난, 광저우의 삼성의 신상회의(상공회의)를 소집하여 월한철도 부설권을 회수하였다. 미국합흥공사에 쿨하게 675달러까지 돌려주면서(...) 이러면서 상인의 주도로 (일부는 관청과 합작하여) 대량의 민간철도가 부설되었다. 게다가 이건 단순히 중국의 유지, 유한계급들의 돈만을 모은 게 아니라 배우나 거지들의 푼돈까지도 모인 말그대로 "민족 자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선회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철도를 오히려 망치는 것이었다. 그의 원칙은 "철도는 국력. 그러므로 지분 분할보다는 차관. 차관이라면 내자(민족자본)보다는 외자(外資)."라는 것이었고, 실제로 투자 회수가 길고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철도 산업이 국영화가 필요하다는 그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민간주도로 넘어간 뒤로 중국의 철도는 더더욱 티스푼 공사가 된 것이다(학자 이스트먼이나 스펜스의 지적).[8]
그는 장지동을 설득하여 민간 부설권을 회수, 1909년 독일, 영국, 프랑스 은행의 돈 550만 파운드를 빌려 호광(지금의 후난과 후베이 지방) 철도 차관 계약을 실현했다. 물론 민간의 반대는 심각했고, 결국 장지동은 마음 고생 속에 사망했으나, 성선회는 이런 반대에도 철도 국유화의 의지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런 차에 그가 새 내각의 우선부대신으로 오른 것이었다. 그는 1911년 5월 민영화된 월한선과 천한선 전역을 국유화하기를 조정에 주청하고, 조정은 그를 받아들여 직예, 호광 총독을 거친 단푸(단방)를 내려보내 일을 처리하게 했다.[9]
그러나 갑자기 언제 돌려줄지 모르는 국가 보증(공채)만을 남기고 재산이 휴지조각이 된 이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심지어 주식을 대신한 이 공채들은 철도가 완료된 뒤에야 보상을 하기로 되어 있던 것이다.[10] 여기에 더해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4국 은행단에 600만 파운드를 연리 5%, 40년에 상환하기로 하면서 담보로 쓰촨, 광둥, 후난, 후베이의 염세와 이금, 탄광까지 걸어버렸으니... 민중들에겐 국유화가 되려 철도를 외세에 팔아먹는 꼴로 인식된 것이다. 게다가 일부 지역(의창宜昌에서 만현萬縣)의 철도 공사는 중단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성선회의 아이디어는 분명 실리적인 측면은 있었을지언정 당시 민심 이반으로 인기가 없고 집행능력이 떨어지는 청나라 중앙 정부의 힘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차관의 경우 역시 30년~40년 동안 외세에게 충분히 갚을 수 있냐는 예측이 그렇게 투명하지만은 않았다. 성선회의 예는 제대로 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정부가 함부로 실력행사를 할 경우 맞닥뜨리는 반발의 가장 나쁜 예였던 것이다.[11] (참고 문헌)

2.1. 철도 국유화 반대 운동[12]과 혁명의 전개


일이 이렇게 되니, 당연히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4일, 창사에서 국유화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창사에서 주저우까지 철도 노동자들의 반대시위가 벌어졌다. '보로 운동회'가 전국적으로 결성되었으며, 동맹휴학과 납세 거부도 잇달았다. 특히 성선회를 찢어죽이자는 분위기는 쓰촨성에서 매우 강했는데[13] 기어이 9월 쓰촨성에서 10만명이 넘는 시위군중에 대한 발포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보로 운동은 보로 동지군의 봉기로 이어졌고 쓰촨성의 성도(省都)인 성도(청두)가 함락되면서 사태는 쓰촨성만으로는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를 제압하기 위한 청의 군대(후베이의 신군)가 민중 봉기의 거점인 쓰촨성으로 투입되었고, 이로서 후베이의 중요한 군사 거점인 우창이 군대가 비게 되었다. 때마침 좋은 명분을 얻은 우창의 혁명파는 정부군의 파병을 구실로 1911년 10월 10일에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봉기는 우창의 신군부 공병 제8대대의 부사관과 사병들이 시작하여 보병, 포병, 사관생도가 가세했다. 혁명군은 총독 서징의 도주로 당일 우창을 점령했으며(...) 민주공화정을 골자로 하는 중화민국 성립을 선언한다.[14] 이때가 신해년(辛亥年)인 1911년이었기에 신해혁명이라 일컫는다.
혁명파의 신정부 수립은 시의적절한 상황과 맞물려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혁명의 이념은 10월 22일 후난성과 섬서성을 시작으로 불과 1개월여 만에 중국 전토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쑨원이 정국을 주도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쑨원은 이름만 빌려줬을 뿐이고 몸은 혁명 자금을 모으러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 있었다. 또 중국은 당시 각 성이 산발적으로 혁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많은 성들이 혁명파가 장악하기보다는 이미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던 입헌파가 주도하여 성들을 접수하였다. 우한 봉기 자체도 신군의 군벌들이 군정부의 도독으로 선출되는 등 기존세력과의 연대가 많았다.
그야말로 철도 국영화로 시작된 나비효과였던 것이다. 성선회는 독일 제국 화물선을 타고 혁명가들이 망명하던 일본 제국 고베로 망명해 버렸으며(...) 청조는 그를 삭탈관직하고 영원히 재기용하지 않겠다는 말로 민심을 수습하려 했지만 혼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개별 성들이 도미노처럼 탈퇴하자, 11월 말 경에는 청조의 남쪽 14개 성이 독립 상태가 되었다(순서대로 호북, 호남, 섬서, 강서, 산서[15], 운남[16], 상하이, 절강, 강소, 안휘, 광서[17], 광동[18], 복건, 사천[19]) 각 성은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 “각성대표회의” 등을 만들었다.

2.2.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협상(남북의화)


청나라 정부가 이를 관망만 하고 있을 입장은 아닌지라, 이홍장의 뒤를 이어 막강한 북양군벌을 거느린 위안스카이에게 급히 도움의 제스처를 취했다. 당시 북양군벌은 중국 최정예 군사조직으로서, 충분히 무력으로 혁명을 진압할 역량은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산동성을 복원해 내기도 했고...[20] 그러나 10월 27일 흠차대신, 11월 1일에는 경친왕의 사임으로 총리대신까지 오른 위안스카이는 더 중요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청조는 11월 3일 급조한 의회제의 실시와 황제의 권한 축소, 황족의 총리직 금지 등을 다룬 입헌 개헌안인 《신조 19조》를 내세웠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결국 청나라는 망국의 길로 가게 된다.
게다가 양쯔강의 이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이 이 지역이 신해혁명으로 전장의 한복판에 놓이자 적극적으로 화의를 주선하기 시작한다. 12월 2일 영국 공사관이 있는 한커우에 모인 각 성의 대표들은 위안스카이가 반정(反正)한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으며, 이것으로 혁명군의 남부와 북양군벌의 북부의 화해, 즉 남북의화(南北議和)가 성립되었다(또한 이 날 난징이 함락되었다). 12월 5일 각 성 대표들이 모인 회의에서 청 왕조 타도와 공화정부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의화강요》(議和綱要)가 통과되었다.
혁명의 근원지 우한과 쑨원의 중국동맹회의 본거지인 상하이의 정치적 경쟁 속에 상하이가 승리를 거두어, 결국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난징에서 세워졌다.
이런 속에서 삼민주의슬로건으로 채택됨에 따라 얼떨결에 주동자가 되어버린 쑨원은 그 자신조차 예상치 못했던 급속한 정국 급변에 의해 12월 21일 홍콩으로 귀국, 연말인 12월 29일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선출되고 다음 해인 1912년을 중화민국 원년으로 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다. 결국 쑨원이 중화민국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서 막후 협상을 통해 중화민국 대총통의 지위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하기로 합의하면서 협상은 재개된다.
이런 막후 협상을 하게 된 원인은 현실적으로 오합지졸인 혁명군 세력으로는 북양군벌을 건드릴 수조차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혁명군은 갑자기 우후죽순격으로 제멋대로 등장했고, 서로 연계가 잘 안되었으며, 탄약과 필수물자도 거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도인 북경과 거리가 먼 지역은 쉽사리 독립선포를 달성했지만, 가깝거나 요충지인 지역[21]은 아직 남아있는 청군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시작하자마자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한 단계였다.
대표적으로, 11월이 되자, 청조와 혁명군은 후베이에서 부딪치기 시작한다. 한커우까지 북상했던 혁명군은 한강(汉江, 한수) 이남의 한양(汉阳)으로 남하했고, 심지어 한양까지 뺐겨 다시 장강 이남인 우창까지 도주했다. 사실 위안스카이가 손만 놓고 있지 않았다면 해가 지나기 전에 우창은 함락되고 혁명군은 분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오합지졸을 가지고 북양군벌을 상대했다가는 그냥 태평천국 시즌2를 찍고 끝날 가능성이 높았고, 외세의 개입 가능성도 높았다. 쑨원 스스로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제대로 된 혁명을 자신의 생애안에 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단 청나라라는 구조 자체만 먼저 무너뜨리기로 한 것이었다.

2.3.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성립


한편 청나라의 멸망은 베이징에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1월 중 프랑스 혁명루이 16세까지 운운하며 청나라 황실을 겁박하여 공화정 수용을 요구했고, 황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돤치루이를 필두로 공화정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벌이며 입헌파였던 군주입헌유지회의 만주족 청년 장교 양필(良弼)을 살해한다. 위안스카이를 물리치고 혁명군에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입장이었던 공친왕이 선통제의 숙부에게 군 병력 상황을 묻자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란 답변이나 나오고 있던 청나라였기에 결국 어전회의에서 공화정은 수용되고 만다.
이리하여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하고 북양군벌이 자금성을 장악했다. 다음 날 쑨원은 총통에서 물러났으며, 3월 10일에는 위안스카이가 신정부 2대 임시 대총통에 정식 취임해 청나라의 멸망을 확정 짓는다. 오삼계 등 한족들의 투항 덕분에 중원을 점령하여 다스릴 수 있었던 청나라는 결국 멸망하는 순간까지도 한족의 투항으로 멸망한 셈이다.
쑨원 측은 위안스카이에게 신정부 수반을 위임하는 대가로 남경 천도와 민주공화정제라는 합의를 얻어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아래 내용대로 전부 폐기당한다. 즉, 이 협상은 비록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이후 반세기 가까이 중국을 격렬한 내전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불씨로 작용하게 된다.
여담으로 신해혁명 당시 중국동맹회에 가입해 봉기에 가담한 외국인들이 엄청 많다. 특히 가장 많은 게 일본인데,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다.(ex: 우치다 료헤이, 기타 잇키) 이들 일본 국수주의자들은 '아시아주의'를 주창해왔기 때문에 중국 혁명 활동을 적극 지원해주기도 했다. 한국인들 중에도 신해혁명에 가담한 인물이 있었는데, 예관 신규식과 범재 김규흥, 유동열 등이 있다. #

3. 제2차 혁명


민중이 그토록 고대하던 청나라의 멸망을 달성했음에도 중국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청나라 황실의 빈자리를 대신해 새로운 독재자가 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군사력을 이용해 철권 통치를 행사했고, 신념을 꺾지 않는 기존의 혁명파는 불순분자로 취급되어 북양군벌에게 쫓기게 되었다.
이에 쑨원은 대오가 흐트러진 혁명파를 정비하고 새로이 국민당을 창당했으며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에 맞서 반격의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들은 청이 멸망했던 1912년 남경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해 인민의 대대적 지지를 모았다.
물론 이를 두고만 볼 위안스카이가 아니었다. 그는 혁명파와 대립각을 세운 입헌파와 열강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해 막대한 자금을 수혈받았고, 1912년 8월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 1913년 3월에는 암살자를 보내어 당시 국민당 이사장 대리이며 실질적으로 국민당을 영도하던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쑹자오런 암살 사건을 일으켰고 이어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후대차관 사건을 강행하여 국민당으로 하여금 대대적 어그로를 끌어모았다. 급기야 위안스카이에게 대적하기 위한 토원군이 조직되어 결사 항전에 돌입, 계축전쟁이라 불리는 무력 충돌에 들어갔으나 단 2개월도 가지 못해 진압당했다.
끝내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는 초대 정식 대총통에 등극했고 국민당이 난당으로 몰려 해산당하고 1914년 1월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벌어지면서 제2혁명은 완전히 실패하고 중국의 민주주의도 사실상 종언을 고하였다.

4. 제3차 혁명


노망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위안스카이는 명실상부한 독재자인 대총통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는 제 손으로 엎어버린 황제 체제를 다시 되살리는 반동 시도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당시,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일본 제국의 막대한 군사력과 재력을 탐내고 있었으며 일본 또한 협상국으로서 산동의 독일 제국군 축출을 명분으로 하는 중국 대륙으로의 개입 진행을 위해 위안스카이 정권의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쌍방의 이해가 일치하여 결국 1915년 5월, 이른바 중국판 을사조약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21개조 요구가 체결된다. 이 합의를 훗날 1차 대전이 종전된 1919년, 일본이 승전국 지위를 이용해 베르사유 조약으로 서구 사회로부터 정식 인증시킴으로서 중국 인민들의 분노가 대폭발, 5.4 운동으로 이어진다.
아무튼 일본과의 조약 체결로 일본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확보한 위안스카이로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자작극인 황제 추대 운동이 벌어졌고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하여 1916년을 기하여 황제에 등극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는 21개조 조약 체결로 분개하던 중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결과가 되었고, 이미 1915년 12월 25일 운남에서 차이어량치차오가 일으킨 봉기를 시작으로 1916년 2월에 이르러서는 전 중국적으로 위안스카이에 대해 격렬한 반발 폭동이 잇따랐다. 이때 차이어는 자신의 휘하 운남군을 호국군으로 개명하고 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제3혁명을 다른이름으로 호국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미 조약을 끝맺은 일본은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심지어 위안스카이가 믿었던 서구 열강들조차 등을 돌리는 가운데 버틸 재간이 없었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1916년 3월 23일, 83일만에 즉위 선언을 취소하고 말았고 6월 6일 급사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의 황제 체제를 종식시킨 것은 바로 이 제3혁명으로, 1차 혁명 발발로부터 채 5년도 되지 않은 사이 이렇게 중국은 뿌리부터 송두리째 뒤집혔다.

5. 신해혁명 그 이후


황제 선언으로 대륙에서 전국적인 어그로를 끌어모았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퇴위로부터 3개월여 만인 1916년 6월 6일, 환갑조차 맞지 못한 채 화병으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276년이나 버텨온 청나라를 단숨에 무너뜨렸던 주인공치고는 너무나도 쓸쓸한 최후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금성으로 쳐들어가 청나라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내린 장본인으로서 권력의 무상함과 전제 정치의 폐단을 누구보다 똑똑히 목격한 사람이 바로 이 위안스카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청년 시절부터 무수한 커리어를 쌓아왔으며 당대 최강의 군사조직인 북양 군벌을 조직할 정도의 기량이면 머리 또한 남달리 비상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렸던 황제라는 지위를 다시 만들어 올라서고, 끝내 파국을 자초했던 사실을 보면 이 황제 체제라는 것이 그동안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무섭도록 깊이 각인된 사상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비단 위안스카이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인 대부분에게 있어 황제는 현실에서 도달 가능한 최종 최후의 꿈의 자리가 아니었을까?[22]
위안스카이의 사후, 그의 기반 조직이었던 북양군벌은 몇 개의 파벌로 분열되어 베이징을 중심으로 자기네들끼리 땅 따먹기에 돌입한다. 여기에 그간 위안스카이 밑에서 숨 죽이고 지내던 지방의 군벌들까지 대거 발호, 이 절호의 찬스를 이용해 먹으려는 일본까지 가세하면서 중국 대륙은 그야말로 헬게이트로 돌입한다. 자세한 것은 군벌 문서 참고.
제2혁명의 좌절 이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은 기존 국민당의 후신인 중국혁명당을 창설, 1919년 5.4 운동에 편승해 다시 중국 국민당을 조직한다. 그러나 대군벌시대가 도래하면서 혁명의 투사 쑨원은 지방 군벌에 빌붙어 이리저리 떠도는 식객으로 전락해버렸고, 그런 와중에도 소련과의 대타협을 통해 1차 국공합작을 체결하는 등 노구를 아끼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춘 뒤 본격적인 군벌 진압, 즉 북벌을 추진하게 되었지만 1925년 쑨원은 간암으로 결국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쑨원이 남긴 마지막 유언은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된다.

6. 평가



6.1. 중국


신해혁명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2011년에는 신해혁명&중화민국 성립 100주년 기념 영화도 개봉했다. # 성룡이 주연이며, 본 항목의 제1혁명까지 다룬다. 국내에선 2012년 3월 15일 개봉. 특히 중국 공산당은 신해혁명의 혁명성을 강조하며 농민을 주력군으로 한 인민과 반동 집단과의 투쟁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신해혁명은 농민투쟁의 소산이고, 이것이 혁명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했다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해혁명을 중국 현대사의 시발점으로 간주하면서 '부르주아 혁명'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이런 견해가 오랫동안 통설로 자리 잡아왔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신해혁명은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견해도 존재한다. 대체로 초좌파, 좌익 공산주의[23]적인 정세인식을 반영한 이 견해에 따르면 신해혁명은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반대하는 명확한 강령을 제시하지 못한 채 오히려 열강에 매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기층 민중을 광범하게 동원하지 못했으며, 혁명을 끝까지 이끌고 갈 강력한 혁명정당을 형성치 못한 것 등이 논거로 제시되고 있다. 위안스카이를 수장으로 하는 북양군벌의 수립이 그 후과(결과)로 나타났다는게 이들의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동북 3성(만주)의 포기를 전제로 일본과 밀약을 맺었고, 소련의 야욕을 간파하지 못한 채 중국을 팔아넘겼다는 식의 극단적인 평마저 내놓는다. 다만 신해혁명의 평가절하는 그 반대급부로 중국 공산당의 공산혁명을 진정한 혁명으로 치켜세우려는 의도로 읽힐 수 있다.
이에 대해 최초의 공화국 수립에 의미를 두는 긍정론자들도 혁명 발발에도 불구하고 구질서가 그대로 존속되었고, 위안스카이의 공화국 정권은 청조보다 더 심한 매판 세력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당시 쑨원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혁명 후 그의 회한 어린 언급이 그 증거다.

"정치사회적 암흑과 부패가 이전보다 더하고, 인민들의 고통도 나날이 심해졌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기본적으로 안팎의 패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국민적 각성 위에서 성취된 까닭에 이후에 전개된 모든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신해혁명은 당시의 변혁보다 이후의 역사 전개에 주목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1919년5.4 운동은 신해혁명의 후속 혁명 성격을 띠고 있었다. 20세기 전반에 전개된 중국 및 아시아 민중의 반제투쟁 역시 신해혁명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천조인 청나라의 멸망과 황제라는 자리의 부정, 공화정 체제는 많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일례로 이상주의자로 유명한 이시와라 간지의 경우 1911년 제 65보병연대가 강제병합한 조선에 진주군으로 배치되어 춘천에 주둔하던 시절, 신해혁명 소식을 듣자 부하들에게 그 의의를 설명하고는 부하들과 함께 "지나 혁명 만세!"를 외쳤다는 일화도 남겼다.[24]
다만 중국 정부 차원에서 양안관계 개선을 위해 신해혁명에 대해서 호의적인 해석을 내리는 경우도 많다. 엄밀히 말하면 대만으로 이전한 중화민국 정부가 신해혁명의 직접 당사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
중국 문화를 말살 위기로 몰아넣은, 이름만 혁명인 후대의 만행과는 달리, 중국 역사에 군주정을 소멸시켰다는 점에서 좋든 싫든 큰 획을 그은 사건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중국 국민의 의식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의미로는 그 전 세기에 발생했던 태평천국의 난 제2 라운드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 신해혁명의 두 주역 중 위안스카이는 회군을 지휘해 태평천국과 맞섰던 이홍장을, 쑨원은 태평천국의 이념 중 일부를 각각 계승했기 때문이다.
특별행정구홍콩마카오에서도 신해혁명을 성대히 기념한다.

6.2. 대만


대만 학계는 신해혁명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며, 이른바 '전민혁명'(全民革命)'으로 규정하였다. 사실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기엔 당장 쑨원부터가 부르주아 출신이 아닌 농민 출신, 그것도 중농 이하의 가정 출신이었다. 그리고 혁명에 참여한 계층은 회당(會黨)을 비롯하여 신지식인, 화교, 신군(新軍) 등 중국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이런 중국 내부의 혁명사조를 걷고, 사건 자체의 전개로만 보면, 신해혁명은 참 산발적으로 일어난 엉성한 혁명이었다. 대다수의 혁명이 그렇긴 하지만, 신해혁명은 특히 그랬다. 이 점에서 볼 때 신해혁명은 국민적 각성이나 민중의 열망이 진전시킨 혁명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하지만 필연적으로 일어난 권력의 이동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청나라 말기부터 자라난 지방에 자리를 잡은 신사 세력에게 황제의 권력이 넘어왔고, 청나라의 개혁들이 조정 자체가 의도하지 않은 경제의 근대화와 지방 분권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당장 위에 길게 서술한 철도 문제만 해도 그렇다. 대만의 진관타오 교수나 일본의 학계에서 지지하는 견해다. #
다만 위의 견해는 중국 국민당 계열의 보수주의 학계에서만 지지를 받고 있다. 타이완 독립운동이 성장하면서 국가의 기원을 신해혁명이 아니라 대만 본성인 민족주의 운동에서 찾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신해혁명은 이웃나라 중국의 민주주의, 민족주의 운동일 뿐이고 대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여긴다.

6.3. 몽골, 티베트, 위구르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 소수민족들 역시 청나라 붕괴 직후 분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25] 이들 분리 독립주의자들은 신해혁명으로 인해, 몽골과 티베트 그리고 위구르를 정복 결속시켜 놓았던 만주 제국 청나라가 멸망하였으므로 마땅히 한족(중화민국)과 마찬가지처럼 자립해야 한다고 평가한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며 내몽골과 위구르와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자치구로 편입되었고, 오직 외몽골만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했다.

6.4. 만주족


청나라의 쇠퇴로 명목상의 지배민족 자리만 겨우 유지하던 위태로운 상황의 만주족을 아예 그 지배민족 자리에서 끌어내린 사건이 신해혁명이므로, 만주족의 입장에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한족들이 기념하는 쌍십절/신해혁명 기념일에도 만주족은 한족들과 정반대인 어두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족이 만주에 자신들만의 근현대적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면 한족들이 기념하는 쌍십절/신해혁명 기념일은 만주족 국가에선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질 때 혁명군에게 학살된 만주족을 추모하는 날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만주국은 만주족이 스스로 세운 근현대적 독립국가가 아니라 일본 제국의 괴뢰국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일본 제국의 패망은 만주국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걸로 모자라 아예 명목상으로도 만주족이 주체인 국가가 다시는 들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6.5. 신해혁명과 한국



비록 조선의 후신인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몇몇 대한제국 유민들이 한 일이지만,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당시 예관 신규식, 범재 김규흥, 유동열 등 몇몇 조선인들이 신해혁명에 가담하기도 했다.
개화기 이후로 점차 흐려져가던 사대 의식이나 화이론은 신해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졌다. 신해혁명을 계기로 기존의 중화사상에 기반한 천하 질서 의식이 완전히 소멸하면서 한국에게 더 이상 중국은 '천하의 질서의 중심'이 아닌 하나의 외국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7. 기타


"중국 인명의 표기는 ‘1911년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해서, 과거인은 우리식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음을 따라 표기하되 처음에 한해 한자를 괄호 속에 병기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인대만인중국어 인명을 표기할 때 한국 한자음으로 읽을지, 아니면 중국어 독음을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천하 질서 의식이 소멸하면서 중국과 중국어를 하나의 외국, 외국어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들어선 중화민국부터 중국 전토에 통용될 중국어의 '표준어'를 정리, 제정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이 때를 기준으로 한국 한자음과 중국어 독음을 분리해서 볼 이유가 된다는 것.
그렇다보니 이 시대에 걸려있는 인물들의 경우 호칭이 여러가지로 혼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손문/쑨원, 원세개/위안스카이, 강유위/캉유웨이, 양계초/량치차오 등. 대체적으로 신해혁명 이후까지 살아있으면 원음 표기를 사용하는 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상당히 애매한 기준인 만큼 완벽하게 지켜지진 않고 있는 편이다.[예_만주어이름]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된 교과서나 수험서 등에서 조선책략의 저자는 한국식 한자음인 황준헌(黃遵憲, 1848~1905)이 아닌 중국식 독음인 황쭌셴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신해혁명 100여년이 흐른 현재 중국인, 대만인 연예인 중 조미, 유역비, 등려군, 왕대륙, 우기((여자)아이들) 등 한국식 한자음으로 불리는 사람과, 탕웨이, 장쯔이, 판빙빙, 쯔위 등 중국식 원음대로 불리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리고 같은 중국계라도 홍콩인, 마카오인의 인명은 성룡, 주윤발, 유덕화처럼 한국 한자음으로 읽거나 알란 탐, 글로리아 입, 캐리 람, 조슈아 웡영어식, 포르투갈어식, 광동어식 이름으로 혼합해서 부르는 경향이 매우 크다. 심지어는 명청사학자들이 명청교체기강건성세를 다룬 책에서 인명을 현대 표준중국어 독음으로 표기한 사례도 있다.[예]
이에 대해선 논란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중국어 한글 표기 논쟁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1] 보로운동(保路運動)[2] 제1혁명만을 일컬을 때[3] 제1, 2, 3혁명을 모두 일컬을 때[4] 특히 청나라의 일부 전향적 조치에 기대하고 입헌내각운동을 벌이고 있던 입헌파.[5] 몽골어로는 칼간. 만리장성에 이어져있는 도시기도 하다.[6] 粤漢線. 광저우 지방이 ""지방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7] 지금의 우한을 중간으로 삼는 이유는 후베이의 중심을 거대한 양쯔강이 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징한선은 우한 북부인 한커우까지 내려오고, 월한선은 우한 남부인 우창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8]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게 당시 기준으로 보면 동양보다 서양이 기술력에서 절대우위였다. 즉 철도를 빨리 건설하려면 당연히 혼자서 건설하는 것보다는 서구 열강의 기술력을 받아 건설하는게 더 효과적이다. 그런데 철도에 들어간 자본이 전부 내자라면 서구 열강이 뭐가 아쉬워서 철도 건설하는데 기술력을 제공해 주겠는가? 성선회의 생각대로 차관이든 외자든 어쨌든 서구 열강이 여기에 투자한게 있다면 서구 열강도 투자한게 아까워서라도 자기들 기술력을 조금이라도 제공해 주면서까지 건설하게 해줬을 것이다.[9] 조금 뒤의 일이지만 혁명 와중에 단푸는 청나라 신군에게 살해되었다.[10] 정확히 말하면 월한선의 경우엔 민간이 투자한 자금의 60%만을 돌려주고 40%를 공채로 하였다. 그 40%의 배당금(이자)은 없으며(...) 완공 후 이익이 난 뒤에야 10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겠다는 것이다. 천한선의 경우 한술 더 떠 이미 들어간 돈이 많아 돈을 돌려주진 않고 5년 이후부터 1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겠다고 했다. 정부가 백성(물론 정확히는 지역 세력이지만) 삥을 뜯은 셈.[11] 더욱이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앞서 말했듯 보상 방식이 너무나 엉망이었다는 거다. 어쨌든 보상만은 쩔어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 그거라도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도 나왔겠지만 월한선의 경우 당장 돌려받을 수 있는 자금은 투자액의 60% 수준에 나머지 40%는 당장 돌려받을 수 없으며 거기서 이익을 기대할 수도 없다. 천한선의 경우 당장 아무 자금도 돌려받을 수 없으며 역시 이익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러니 어느 누가 좋아할까? 이는 설령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 맞먹는 강대국이었다고 쳐도 발생할 문제다. 물론 진짜 그랬다면 이런 문제가 생겼을 리도 없었겠지만.[12] 보로운동(保路運動)[13] 사실 쓰촨 총독 조이풍은 보로운동에 호의적이어서 조정에도 천한선의 민영화를 제안했으나 성선회의 거부와 강경진압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조이풍은 혁명 후에 붙잡혀 참수되었다. [image] [14] 원래는 추석10월 16일에 봉기하려 했는데, 한커우 러시아 조계에서 화약 폭발 사고로 계획이 모두 들통나 앞당기게 된 것이다. 쌍십절의 계기다.[15] 그 유명한 군벌 옌시산의 동네. 이때 이미 옌시산은 산시성 도독으로 정권을 잡았고 이것이 그의 독립주의(산서성 먼로주의;;)의 시작이다.[16]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별도로 중구 봉기를 일으켰다.[17] 루룽팅이 여기서 봉기해 부도독이 되었다.[18] 후한민천중밍이 주도했다.[19] 11월 초까지 대부분 봉기한 성과 달리 군사적인 충돌로 독립이 제일 늦었다. 11월 27일[20] 순무로 도독으로 추대된 쑨바오치가 다시 위안스카이와 결탁했다. 이런 산동의 예처럼 많은 지역들이 지역 군벌(최소한 군 지휘관)과의 동맹으로 독립에 성공한 곳이 많아 위안스카이가 마음을 먹으면 회복은 식은 죽 먹기였다.[21] 경한선이 이어진 즈리(직예)와 허난(하남) 등. 후베이(호북)으로 바로 군대가 남하가 가능했던 것도 바로 이런 철도 지역은 모두 정부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2] 보통 전근대에 한 나라의 첫 왕이나 황제가 되는 인물은 하다못해 하급 귀족이라도 되는데 중국은 역사상 평민 출신 창업황제만 2이 있을뿐더러 심지어 노예 출신 창업 황제도 있으며, 통일왕조 창업주는 아니라도 황제에 오른 인물이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편이기에 황제의 절대성과 상관없이 기회만 오면 강력한 힘을 사용하거나 민중의 신뢰를 받아 얼마든지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자리라는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23] 쉽게 말해 레닌주의보다 더 좌측이고 아나키즘보다는 더 우측인 노선.[24] <세계최종전쟁론> 국역본의 보론, '인간 이시와라 간지' 중[25] 이 당시 몽골 왕공들과 티베트 승려들은 청나라를 만주 제국으로 보았지, 한족 정통으로 보지 않았다.[예_만주어이름] 공친왕 혁흔, 순친왕 혁현, 재풍, 경친왕 혁광, 재진 같은 인물은 어찌 할 것인가? 이 사람들은 한인이 아니라 만주인, 그것도 청조의 황족이었는데, 이들 청조 황족들은 과거에 강희제의 아들, 즉 옹정제의 형제 항렬부터 이름이 한족과 비슷한 형태로 돌림자를 쓰며 지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신해혁명까지 이르는 격동의 시대에 만주인의 정체성을 강조할 여유조차 잃어가며 조정에서 한어 단독 사용이 허가된 후로는 자식들에게 만주어를 가르치는 것조차 사치일 뿐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여느 한족들과 마찬가지로 신해혁명기를 기준으로 독음을 달리하여 읽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만주족이니 한족들과 구분하려 든다면 신해혁명 시기 생존여부를 불문하고 이힌, 이후완, 자이펑, 이쾅, 자이전으로 읽을 수도 있다.(표기를 보면 알 수 있듯 한어와 만어 발음 표기가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덤으로,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씨를 그리 자주 쓰지는 않았다지만 굳이 이들 이름 앞에 붙인다면 이 표기 또한 한어 발음을 따와서 '아이신줴뤄'라 표기해야 할테지만, 의외로 이쪽은 시대 불문하고 '아이신기오로' 또는 '애신각라'라 쓰면 썼지 아이신줴뤄라 표기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이래저래 만주인들의 이름 표기에서 신해혁명시 생존 여부를 기준으로 하는 지침의 일관성은 더욱 사라진다.[예]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저서 <옹정제>를 번역한 차혜원 연세대 교수는 녠겅야오, 어우양슈(그런데 이쪽은 송나라 사람이다!) 등의 표기를 써서 한국식 한자음에 익숙한 독자들은 읽기도 어렵거니와 이름만으로는 만/몽/한인을 쉬이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구범진 서울대 교수의 저서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에서는 인명은 신해혁명 전후로 구분하였으나 지명을 전부 중국어 독음으로 표기하느라 산하이관 등의 표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