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싱
1. 개요
중화민국의 민주혁명 운동가. 청나라 말기 화흥회와 중국 동맹회의 일원으로서 여러차례의 무장봉기를 지휘했으며 신해혁명의 발단이 된 우창 봉기 때 혁명군 사령관직에 올랐다. 이후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 대총통 쑨원 밑에서 육군총장에 취임해 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쑨원이 물러난 뒤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의 독재에 맞서 계축전쟁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1916년에 상하이로 귀환했으나 얼마 안가 요절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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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 황싱.
황싱은 1874년 10월 25일 창사시 외곽의 한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이름난 서당 훈장으로,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강한 인물이었다. 황싱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유학 서적을 탐독했고 아버지로부터 반청사상을 물려받아 명말청초 시기의 유학자 왕부지(王夫之)를 존경했으며, 평소에 양수청, 홍수전 등 태평천국 운동의 주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듣고 이와 관련된 서적을 찾아봤다. 황싱은 어릴 때부터 재주가 비상해 시구를 짓는 데 있어 또래 뿐만 아니라 어른까지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중국 전통무술을 좋아해 이른 시기부터 무예를 익혔다.
1893년 창사 성남서원에 입학한 황싱은 1896년에 과거에 합격해 수재가 되었고 1898년 우창의 양호서원으로 보내져 학문을 연구했다. 당시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대패해 위신이 크게 추락했고 많은 진보적 성향의 관리들과 지식인들은 일본을 본받아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하루빨리 받아들어야 한다고 판단해 유신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유신운동의 지도자 캉유웨이의 제자였던 량치차오는 1897년 가을 창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세워진 시무학당에서 강의했다. 황싱이 이 강의에 참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이 시기 뚜렷한 정치 활동을 벌였음을 입증할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는 이 유신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황싱이 입학한 양호서원은 허베이와 광둥성의 총독 장지동(張之洞)이 설립된 곳으로, 후난성, 허베이성에서 각각 배경 정도의 학생들이 선발되었다. 학생들은 과거를 통과한 우수한 인재들로 품행이 단정하고 학문에 힘쓰며 겸손하고 근면성실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 외에도 지주의 자녀들 중 40명이 추가로 선발되었는데, 이는 이 학교가 지주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있는 사정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학생들은 학교 기숙사에 머물러야 했으며, 매월 등불의 기름 비용으로 은 3원을 내야 했다. 특별한 상황 때문에 기숙사에서 생활하지 못하는 학생과시험을 치르지 않은 학생은 입학시험에 통과했을 지라도 여전히 '등록을 거치지 않은 학생'으로 분류되었다. 장지동은 1891년 2월 9일 양호서원의 운영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매 과목마다 우등상을 줘서 열심히 공부하게 한다. 많은책을 비치해서 폭넓게 책을 읽도록 한다. 학교의 규범을 세워 나아갈 바를 바르게 한다. 일기를 쓰게 하여 공부하고 연마한 것을 점검하게 한다. 절약하고 물자를 아끼며 언행을 조심한다. 훗날 학생들이 명신, 명유가 되기를 기대한다. (중략) 학교를 마친 후, 바깥일에 신경을 쓰며 학업을 놓고 스승의 이름을 더럽히고, 관장을 공경하지 않으며 선현을 비방하고, 학교 규범을 어기는 학생은 언제든지 조사하여 퇴학조치하겠다."
1902년 여름, 황싱은 후난성 총독 장지동의 추천으로 허베이성 관비유학생 중 후난성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선발되어 일본에 보내져서 5월 말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는 중국 입장에서 다른 서방국보다 유학보내기에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먼저 중국과 인접해 비용이 적게 들고 언어가 유사했으며 유학수속이 간편했다. 1900년 이전에 일본에서 유학하는 중국인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점차 늘어나 1902년엔 100명이 넘었다. 그들은 량치차오가 출간한 청의보(淸議報)와 신민업보(新民業報)를 읽고 청나라에 대한 비판적인 논설에 공감을 표하며 청나라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황싱 역시 도쿄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반청감정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
황싱은 도쿄에 도착한 뒤 굉문학원에 입박했다. 당시 굉문학원은 중국인 유학생 교육을 위해 일본인 유지들에 의해 건립된 특별교육기관으로, 법학, 물리학, 정치학, 그리고 사범교육과정을 설치했다. 황싱은 특히 일본군사훈련을 익히는 걸 좋아해 기회만 있으면 일본사관생들의 훈련모습을 지켜봤고 어떤 때는 일본 군관에게 군사전략 방면의 지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무력을 통해 혁명을 달성하기로 마음먹고 사격과 체육에 전념했다. 또한 황싱은 굉문서원에 다니는 후난성 출신자들의 모임인 토요회(土曜會)에 가입해 그들과 함께 중국에 공화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1902년 가을, 황싱은 굉문학원에 같이 다니던 후난성 출신 양도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월간잡지 <유학역편(游學譯編)>을 발간해 일본을 비롯해 서방 각국에서 발간된 정치학 논문들을 다뤘다. 또한 1903년에는 군국민교육회(軍國民敎育會)에 가담했는데, 이 단체의 목표는 청왕조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군국민교육회 비밀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왜 독립을 갈망하는가? 만주족을 왜 억제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우리 동포라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주는 우리의 조상을 살해했고, 우리 재산을 탈취해 갔으며 그것이 이미 200년이 넘었다. 또한 지금은 우리 동포를 박해하며 우리의 토지를 분할하고, 외지인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것은 멸망의 슬픔과 같이 우리를 비탄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만주는 우리의 원수이자 우리를 멸망시켰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 군대를 거절하는가? 러시아가 동삼성에 근거를 두게 되면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발생할 것이고 분쟁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승리하든 패배하든 우리의 토지는 결국 파괴될 것이다. 동삼성이 망하면 슬픔을 이기지 못할 것이고 우리의 토지는 모두 동삼성과 함께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만일 러시아가 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양국 모두 러시아와 같이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아, 다행이다. 우리 민족의 멸망이 야만의 나라 만주에 의해 결정되어 이렇게라도 독립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지만, 만일 문명의 강국 에게 멸망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노예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 아닌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장렬히 투쟁하며 죽음을 맞이하자. 우리 군국민교육회는 이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청조 타도를 위해 무력혁명조직에 가담한 황싱은 굉문학원을 졸업한 후 1903년 6월 도쿄를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혁명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그렇다면 만주 정부에게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학생 군을 조직하여 반드시 출발시키고, 우선 저지력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만주 정부는 현재 우리를 저지하기 위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군이 북방에 도착 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 쏟을 것이고, 우리 정신에 부 합하는 행동은 못할 것이 없다. (중략) 사람들은 모두 마음 속에서 정확히 느끼고 있다. (중략) 목적을 향하고자 하는 의지는 수단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선 규약중의 혼란한 조치를 바로잡아 ‘민족’ 이라는 두 글자를 대서특필하여 우리의 목표를 분명히 내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이다."
2.2. 반청 혁명 활동
1903년 상하이로 돌아온 황싱은 차이위안페이 등 혁명 동지들과 접촉해 거사를 논의했고 성공회의 중국 지부인 성피득당(聖彼得堂)의 종교의식에 참여했다. 성피득당의 중국 집회장 오국광은 창사 지역의 성공회 회장인 활길정에게 황싱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그후 황싱은 상하이를 떠나 고향인 장사로 돌아갔다. 그는 집에 가는 도중에 우창에서 이전에 공부했던 양호서원에서 잠시 머무르기로 하고, 그곳에서 민주공화정부의 건립 필요성에 대해 주장하며 열렬하게 강연했다. 그러자 허베이성 당국은 서원 원장에게 황싱을 성밖으로 쫓아내게 했다. 황싱은 우창에서 강제로 쫓겨나기 전에 그곳의 군대와 학생 단체에게 "혁명군" 여러 권과 상하이에서 가져온 여러 선전품을 나눠줬다. 1903년 가을, 황싱은 창사 명덕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처음엔 입학교과과정에 있는사범교육 과목 강의를 맡다가 나중엔 역사를 강의하기도 했고 회화와 기타 과목도 가르쳤으며, 때로는 다른 학교에 가서 강연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일어 학교인 '동문강습소(東門講習所)'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한편 혁명사상을 주입했다. 그의 동료 장계는 훗날 당시의 그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삼가 아룁니다. 저의 친구 황싱이 있습니다. 호는 경무이고 후난성 창사부 선화현에 본적을 두고 있으며, 여러차례 성피득당에 와서 도를 닦았는데, 장차 반드시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정부로 돌아가서 귀하를 향해 받아들여 이름을 등록해두면 좋을 것입니다. 안전하길 바랍니다."
1903년 11월 4일, 황싱은 고향친구 유구일(劉揆一)과 함께 혁명조직 '화흥회(華興會)'를 설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황싱은 성립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조직의 원칙이 혁명 성공의 길이며, 군대와 연합하고 학생에서부터 조직의 구성원들까지 같은 행동을 취하며, 동시에 다른 성의 응답도 얻어낼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거사를 일으키는 지점과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의 그림은 아주 괜찮았는데, 낮 수업 때 칠판에 사과를 그리면, 저녁엔 혁명을 계획했다. 그의 사상은 매우 세심했고 매우 빼어난 무예로 용감했다. 당시 후난성 지역의 수많은 중학생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그러나 당시 후난성에서 혁명을 말하지 않는 학생은 좋은 학생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화흥회 구성원은 대부분 학계에 속해 있었고 일찍이 활동한 30여 명의 혁명가들이 참여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일본 유학 경험이 있었고 어떤 이들은 조금 나중에 일본에 머물러 학생이 되었다. 황싱은 비밀조직과의 협력 작업을 더욱 수월하게 진행시키기 위해 화흥회와 서로 연결되는 조직으로서 동구회(東仇會)를 설립했으며, 유구일의 소개를 통해 후난성 가로회(哥老會) 회장 마복익(馬福益)과 만나 거사를 함께 일으키기로 결의했다."하나는 수도 베이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파리, 영국 대혁명은 런던에서 있었다. 영국, 프랑스는 시민혁명이었으나 국민혁명이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혁명을 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몰래 안전함을 꾀하는 시민은 베이징에 본적을 둘 수 없고, 조정을 멸해야만 하며, 이민족의 금위군 역시 몰아내야 한다. 즉 나는 반란을 일으켜 강력한 지역과 각 성에 의거하는 방법을 찾겠다."
황싱은 1904년 11월 16일 서태후 70세 생일을 의거일로 계획했다. 그는 한 다발의 폭탄을 준비해 생일 축하 행사가 무르익을 때 폭발시켜 창사를 혼란에 빠뜨린 후 주력군을 동원해 창사를 점령하기로 했다. 이 주력군의 주요 구성원은 지방의 사병이었고 지휘관은 화흥회 구성원들이 맡았다. 비밀조직 성원은 창사를 점령하는 것에 도와주고 후난성 5개 지역에서 동시에 거병하기로 약속했다. 황싱은 일본 군제를 모방하여 혁명군을 조직했다. 그는 스스로 주사(主師)를 맡았고 유구일과 마복익은 부사(副師)를 맡았다. 황싱은 유구일과 마복익을 쓰촨성에 파견했고 천톈화(陳天華) 등을 장쑤성으로 보내 비밀조직과 연대하게 했다. 그리고 후잉과 쑹자오런은 무창에서 화흥회 지부를 건립하고 그곳 내의 동지를 결속하고 신군을 혁명에 가담시키는 책임을 맡았다.
황싱은 극비리에 상하이에서 무기와 탄약을 사고 1904년 7월 말 혹은 8월 초에 우창에 도착해 거사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1904년 10월 24일, 후난성 당국은 내부 밀고자를 통해 황싱의 거사 전모를 파악하고 화흥회 체포령을 발표했다. 이에 황싱은 은신처에서 잠시 동안 몸을 숨기다가 한달 후 상하이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이듬해에 극비리에 귀국해 거사를 계획했으나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또다시 망명했다.
1905년 7월, 황싱은 쑨원과 손을 잡고 혁명에 관심있는 일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도쿄에서 진행하는 통일혁명 단체조직 기획회의에 초대했다. 여기에는 홍중회, 화흥회, 광복회 및 기타 조직에 참가중인 유학생 70여명이 포함되었다. 이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중국동맹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고 쑨원은 "마주족을 내쫓아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을 창립하여 지권을 균등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황싱은 당시 회의에서 혁명의 대의를 외치며 동맹회 규약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05년 8월 20일, 중국혁명동맹회가 정식으로 도쿄에서 성립되었다. 동맹회 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가 논의될 때, 황싱은 쑨원을 지도자로 공천하는 것은 선거절차를 밟지 않아도 된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의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쑨원은 동맹회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황싱은 동맹회 기관지로 <20세기 지나>를 삼자고 제의해 참석자들의 찬성을 얻어냈다. 이후 황싱은 동맹회에서 서무를 맡으며 쑨원 다음으로 동맹회의 주요 리더가 되었다. 이후 그는 학생들의 무장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장부단(丈夫团)'을 설립했고 1905년 겨울 '장수정(张守正)'이라는 가명으로 중국에 귀환한 후 광시성 계림순방영 통령인 곽인허(郭人漳)를 만나 동맹회의 거사에 가담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곽인허가 주저하자, 황싱은 이듬해 가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중국을 떠나기 전 중국에 남아 거사를 준비하기로 한 유구일과 채소남(蔡绍南)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06년 12월 4일, 유구일, 채소남 등은 부평초기의(萍浏醴起义)를 일으켜 "중화민국 성립"을 알리며 민중에게 청나라를 타도하자고 서동했다. 그러나 봉기는 곧 진압되었고 여러 혁명가들이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대의 혁명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닌 현재의 국민혁명을 제창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민족주의, 국민주의를 다방면으로 지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907년 봄, 친저우 삼나 지역의 향민 류쓰유(刘思裕) 등이 관리의 심한 착취에 분노하여 만인회를 조직하고 관부에 항거했다. 만인회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양광총독 주복(周馥)이 진압을 감행해 류쓰유 등 많은 향민들을 처형했다. 이에 만인회 잔여 세력이 베트남 하노이에 있던 쑨원에게 찾아가 구원을 요청했다. 쑨원은 이 기회를 틈타 기의를 성사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황싱을 친저우로 파견하여 곽인허의 군중에 가서 그를 설득하게 하는 한편 왕화순을 중화민국군 남군도독으로 삼아 거사를 진두지휘하게 했다. 이후 방성에 주둔한 청군의 중대장 유영덕(刘永德)과 이지린(李之焜)이 거사에 동참할 의사를 밝히면서, 혁명세력은 방성에서 기의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1907년 9월 1일, 왕화순이 혁명군을 이끌고 왕광산에서 방성을 습격하여 사흘 만에 점령했다. 그러나 혁명군은 흠주성 공략을 실패하고 청군의 반격으로 밀리다가 탄약이 고갈되자 결국 9월 17일에 해산했다. 왕화순 등은 베트남으로 도피했고 만인회 일원들은 산악지대로 도주했다. 황싱 역시 곽인허 설득에 실패하고 도주했다. 그후 황싱은 12월 진남관 일대에서의 동맹회의 거사에 동참했으나 탄약 부족으로 실패하고 국외로 도주했고, 1908년 3월과 5월에 광둥, 원난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09년 가을, 황싱은 쑨원의 뜻에 따라 홍콩에 동맹회 남방지부를 설립해 광저우 신군봉기를 획책했다. 1910년 11월 13일, 황싱은 페낭으로 가서 쑨원의 주최로 열린 비밀 회의에 참석하여 광저우 봉기를 준비하기로 합의했다. 1911년 1월 18일, 황싱은 홍콩에서 광저우 봉기 준비사업을 주재했다. 하지만 계획 수립 과정에서 여러 혁명가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잦아서 계획이 수차례 변경되며 혼선을 빛었다. 그러다가 4월 즈음에야 광저우의 4곳에서 동시에 봉기하고 황싱이 결사대를 이끌고 양광총독의 본영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911년 4월 27일 오후 5시 30분, 황싱은 임각민(林觉民), 방성동(方声洞) 등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양광총독 본영을 습격했다. 그는 총독이 도망친 것을 확인하고 총독 본영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다른 세 곳의 호응은 전혀 없었고,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는 결사대와 함께 진압군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오른 손 두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무릅쓰고 방아쇠를 계속 당기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다가 대부분의 동지를 잃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은 그는 변장한 후 여성 동지 서종한(徐宗汉)을 찾아가 간호를 받은 후 홍콩으로 도피했다. 이때 72명의 동맹회 동지들이 체포된 후 처형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황화강에 던져졌다.
황싱은 홍콩에서 한동안 요양한 후 7월 31일 상하이에서 담인봉(谭人凤), 쑹자오런, 진치미(陈其美) 등이 설립한 동맹회 중부총회에 가담했다. 그는 남방 봉기가 실패한 이상 창장 유역에서 봉기를 준비하자는 이들의 계획에 동의하면서 우창을 혁명의 중추로 삼을 것을 제의했다. 그후 그는 허베이성 혁명조직의 초청을 받고 우한에 가서 봉기를 준비하려 했다. 그런데 막 우한으로 떠나려 했던 1911년 10월 10일 신군이 우창에서 봉기하면서 신해혁명의 막이 올랐다.
2.3. 신해혁명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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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 봉기군 지휘관 시절 황싱.
우창에서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황싱은 10월 28일 한커우로 가서 중화민국 정부 전시 총사령에 추대되어 혁명군의 전투를 지휘했다. 당시 봉기군은 우창에서 봉기한 직후 한양, 한커우를 공략했으나 얼마 안가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을 이끌고 공격해오면서 곤경에 처해 있었다. 황싱은 11월 20일 군민을 지휘해 한양에서 북양군과 격렬하게 격돌했다. 봉기군은 황싱의 지휘 아래 24일 동안 북양군에 맞서 항전해 타 지역의 혁명세력이 거사를 성사시킬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줬다. 결국 한양을 잃고 우창으로 패퇴하긴 했지만 혁명이 무르익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한 황싱은 전국 17개 성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자 난징으로 가야겠다고 판단하고 현지 혁명당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창 사령관직에서 사임한 뒤 12월 2일에 난징 공략전에 참가했다.
난징을 공략한 뒤, 상하이의 각 성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난징에 임시 정부를 설치하고 황싱을 대원수에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호북군 도독 리위안훙이 반대하자 각 성 대표들은 리위안훙을 대원수로, 황싱을 부원수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황싱은 12월 23일 쑨원이 곧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쑨원이 돌아올 때까지 임시정부 수립을 미루자며 성 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2월 25일 쑨원이 상하이에 도착하자, 황싱은 진기미 등과 함께 마중하러 가서 현재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1912년 1월 난징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황싱은 육군총장을 맡았다. 그러나 전세가 갈수록 불리해지자, 임시 대총통을 맡았던 쑨원은 위안스카이와 밀약을 맺은 후 총통직을 그에게 양보하기로 결의했고 위안스카이는 밀약에 따라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하는 대신 청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수도를 난징으로 베이징으로 옮겼다. 남부 각 성 대표들과 많은 단체들이 위안스카이에게 잇달아 전보를 보내 황싱의 육군총장 유임을 요구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거부하고 측근인 돤치루이를 육군총장에 임명하고 황싱을 실권 없는 참모총장에 앉혔다. 하지만 황싱이 취임을 거부하자, 위안스카이는 다시 그를 난징 유수부 지휘관에 임명하고 난징 주재군 인수 관리를 맡겼다."손중산 선생이 동맹회의 총리이나 그가 아직 귀국하지 않았을 때 내가 동맹회를 대표할 수 있게 되었다. 태평천국은 처음에는 승리를 거듭하여 매우 빠르게 성장했으나 몇몇 지도자들이 권리를 서로 다퉜기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 우리는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1912년 6월 30일, 황싱은 동맹회의 상하이지부 하계상회에 참석해 정견을 발표하며 "민국이 수립된 지 반년이 지났지만 모든 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정당이 성립되지 못한 탓이라며 삼민주의, 특히 민생을 관철하겠다."고 강조했다. 그해 8월 동맹회가 국민당으로 조직 개편되었을 때, 그는 국민당 이사로 취임했다. 9월 11일, 황싱은 위안스카이의 초대를 받고 베이징에 가서 회담을 벌였다. 위안스카이는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고, 황싱은 그가 민국 제일의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이후 황싱은 실업과 교육을 발전시켜 국가의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정세가 혼란하고 북양군벌이 중화민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뜻이 제대로 펼쳐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1913년 3월,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을 암살했다. 쑨원은 즉시 군대를 일으켜 위안스카이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황싱은 남방의 각성은 내부가 통일되어 있지 않고 군대의 힘이 약하니 법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묵살되었다. 1913년 7월, 쑨원이 계축전쟁을 단행하자, 황싱은 장쑤도독 청더취(程德全)에게 위안스카이로부터 독랍하게 한 뒤 장쑤 방면군 총사령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난징의 일부 군대가 위안스카이의 회유에 넘어가 이탈해 난징에 주둔한 8사단은 2개 연대를 잃고 2천명 정도 남았으며 나머지 부대는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이수하지 않아 전투력이 취약했다. 결국 봉기군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게 연전연패했고 7월 25일 쉬저우가 공략당했다. 이에 황싱은 7월 29일 일본으로 망명했고 계축전쟁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후 그는 무모한 전쟁을 감행한 쑨원에게 반감을 품고 그와 대립하게 된다.
2.4. 쑨원과의 대립
쑨원과 황싱은 1905년 동맹회를 결성한 이래 공화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뜻을 함께한 동지였다. 황싱은 쑨원을 중국 민족을 해방시킬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앙했고 쑨원 역시 그를 혁명 달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인재라고 고평가했다. 그러나 1913년 계축전쟁이 대실패로 끝난 뒤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쑨원은 계축전쟁 패배의 원인은 당원들이 말을 듣지 않는데 있다며 특히 황싱이 그의 지도를 듣지 않는 것을 문제삼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황싱은 1914년 쑨원이 중화 혁명당으로 조직을 개편했을 때 이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1914년 7월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쑨원의 지지자들은 그가 혁명을 배신하고 제멋대로 이탈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반면 쑨원의 지나친 이상주의에 반감을 품은 혁명가들은 황싱에게 당을 새로 설립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쑨원과 멀어지긴 했어도 내부분열을 원치 않았던 그는 "손중산이 국민당 총리인 것은 변함 없으며 그것에 도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거절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에게 위안스카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국민당에게 자금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2.5. 요절
1915년 9월 말 위안스카이가 황제를 칭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황싱은 이를 막기 위해 쿤밍으로 가서 운남 일대의 장성 탕사오이 등과 편지를 교환하며 운남 봉기 계획을 논의했다. 1916년 1월, 황싱은 운남 호국군에게 자금을 전달하며 황제를 칭한 위안스카이 토벌을 선포했다. 이렇게 해서 발발한 호국전쟁은 계축전쟁 때와는 달리 봉기군이 우세했고 구이저우, 광시, 광둥, 저장, 산시성 등이 차례로 독립을 선언했다. 황싱은 이 시기에 다방면에서 자금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일본의 화교들로부터 5월 말까지 500만엔을 빌려 군자금으로 썼다.
그러나 위안스카이가 죽고 호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6년 10월 10일, 그는 지나치게 과로한 나머지 위출혈에 걸려 입원했으나 10월 31일에 병사했다. 향년 42세. 이듬해 4월 15일, 황싱의 국장이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창사 악록산 운록봉에 묻혔다.
황싱은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강했고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현실을 잘 읽는 것도 아니어서, 이후의 더욱더 혼란해지는 중국 정세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죽어야 할 떄를 잘 잡은 사람이라 보겠다.
3.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
신해혁명에 고무되어 망명해 온 한인들은 한국의 독립이나 혁명을 위한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형성을 희망하였다. 한인들은 중국혁명에의 참여를 통한 한·중연대 구축방안을 중시하였다. 신규식과 조성환은 “목숨이라도 중국혁명에 바쳐 지지의사를 표하고자” 하였다. 한인들은 중국혁명 성공의 날이 곧 한국의 독립·해방의 때라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인식에서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는 한국해방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판단했다.
황싱은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특별한 우의를 맺으며 항일투쟁을 지지했다. 1914년 7월에는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李大爲)와 안창호가 미국을 방문한 황싱을 방문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황싱은 “귀국 사람들은 무슨 일을 도모할 때에 우리 제2차 혁명의 실패를 전감(前鑑)하여 모든 것을 확실히 예비한 후에 시작하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황싱이 말한 제2차 실패란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이 되어 독재정치를 펼치자 이에 반대하여 봉기하였다가 위안스카이의 군사력에 진압당한 일을 말한다. 또한 황싱은 신규식 등이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설립하여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하는 것을 지원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황싱의 독립운동 지원을 인정하여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4. 저서
- 황극강선생 전집
- 황흥집
- 황흥미간전고
- 황극강선생 서한 묵적
5. 기념
- 황싱묘: 후난성 창사 악록산에 위치. 무덤 앞에는 공양물을 올리는 단과 돌의자가 있고 약 10m에 달하는 비석이 있다. 비석에는 "황공극강지묘(黃公克強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 황싱공원: 상하이에 위치. 복단대학교, 외국어대학교, 재경대학교 등의 대학교가 밀집한 오각장 부근에 있다. 약 600만 평에 달하며, 입장은 무료이며 개방 시간은 오전 5시부터 오후 7시까지다.
- 황싱보행길: 창사에 위치. 2002년에 상업거리로 조성된 길이다. 길이 총 838m, 넓이 23~26m이며 보행길 안에는 황싱광장도 포함되어 있다. 쇼핑, 오락, 음식 등 즐길거리가 많으며 보행길 중간에는 황싱 동상이 세워져 있다.
6. 참고 자료
- 손문의 혁명, 이승휘, 한울아카데미
- 중국초기혁명운동의 연구, 민두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 황흥의 정치활동에 관한 일 고찰, 조수련,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 20세기 초 중국의 공화혁명과 비밀결사: 동맹회와 천지회의 무장기의를 중심으로, 이평수, 중국근현대사연구
- 중문 위키피디아 황싱 문서
- 영문 위키피디아 황싱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