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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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화민국의 혁명가, 이론가, 정치가이다. 중국 국민당 내 보수우익 파벌의 리더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남겼다. 아명은 호연관(胡衍鸛) 혹은 호연홍(胡衍鴻)이다.
2. 생애
2.1. 유년시절 ~ 호법운동
1879년 12월 9일 광동성 광저우에서 출생했다. 후한민의 선조는 객가인이며 부친은 장시성 출신이다. 21세에 청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었으며, 1902년에는 왕징웨이와 함께 일본에 유학하여 호세이대학을 졸업했다. 이어 1905년에 민보의 편집장이 되며 쑨원의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고,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산발적인 반청 무장봉기에 참여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혁명군에게 광동도독으로 옹립되으며 1913년 자신을 경계한 위안스카이에게 해임당해 서장선무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하고 상하이로 이동하여 쑨원의 비서장이 되었다.[1]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을 일으켜 독재를 강화하자 1913년 7월, 이에 맞서는 2차 혁명인 계축전쟁에 참여했으나 혁명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쑨원을 보좌하여 호국전쟁에 참여했으며 1차 호법운동, 호법전쟁, 2차 호법운동 등에 참여했다. 2차 광동정부에 참여했으나 1922년 영풍함 사건으로 2차 광동정부가 붕괴되었고 1923년 3차 광동정부가 수립되자 역시 참여하였다. 1923년 셰츠, 린썬, 리다자오, 왕징웨이와 함께 주석단을 구성하여 국공합작에 대해 논했다. 1924년 국민당 선전부장에 임명되었다.
2.2. 국민혁명 시기
1925년 쑨원이 돤치루이의 초청을 받고 북상하자 대원수 대리로써 광저우 정부의 정무를 보았으나 쑨원 사후 1925년 7월 대원수부가 해체되고 국민정부가 수립되면서 왕징웨이에게 정부 주석 자리를 주었다. 1920년대 초반에 맑시즘을 연구하여 이를 일부 차용했으나 계급투쟁에는 반대하여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1923년부터 국공합작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자 일단 동의하여 1차 국공합작과 국민당 개조에 참여했다. 1925년 쑨원의 북상 이후 천중밍이 다시 광저우를 침범하려 하자 국민당의 1차 동정의 총책임자를 맡았다. 이후 전계군벌 양시민, 계계군벌 유전환 등이 중앙에 대해 반기를 들자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하여 복종을 요구했으나 이들이 도리어 반란을 일으키자 장제스, 쉬충즈로 하여금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1925년 3월, 북상했던 쑨원의 건강 상태가 돌이킬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국민정부를 과두정으로 개편할 것을 검토했으나 공산당에게 국민정부가 장악될 것을 염려하여 일단 유보했다. 3월 20일 쑨원이 죽은 후, 쑨원의 후계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었고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와 함께 국민당을 영도했다. 국민당 당권파이자 보수파의 우두머리로써 국공합작에 불만을 품고 지나치게 국민당을 잠식하는 공산당에 대한 조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이를 경계한 좌파의 견제로 인하여 자신의 우려대로 한직인 외교부장에 좌천되었다.[2]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좌파의 거두이자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가 괴한의 총격으로 암살되자 국민당을 장악하려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정치적 공세에 밀려 광저우 국민정부에서 숙청당해 소련으로 강제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소련 방문 중에 소련의 지도자들을 만나 소련혁명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소련혁명이 중국혁명에 도움이 된다고 발언했으며 중국의 부르주아가 반혁명적이고 국민당 역시 무산계급정당이라는 발언을 하는 등 소련이 국민혁명에게 준 도움과 공산주의 이론의 일부 유용성을 인정했으나 국민당 당헌을 공산주의적으로 개정하라는 공산당원들의 요구를 반박하며 공산당이 혼란을 가중한다고 비판했다. 소련 방문 중 중국 국민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통해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연계를 종식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서산회의가 소집되어 국민당 우파들의 반공행동이 표면화되자 리다자오 등 광저우 중앙으로부터 서산회의에 참여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반공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분파주의 역시 배척했던 후한민은 서산회의에 반대를 표명했다.
국민당 2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중앙집행위원 겸 공인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중산함 사건 소식을 듣고 귀국하려 했으나 보로딘의 연락을 받은 소련이 이를 방해하려 하자 큰 불쾌감을 가지고 4월 19일 광저우를 통해 귀국했다. 귀국 후 소련은 코민테른을 이용하여 중국혁명을 도리어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광저우에 잔류한 국민당 우파들은 후한민을 영수로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며 장제스에게 국공합작 종식과 보로딘 감시를 요구했으나 국공합작 노선을 지지하고 있던 장제스가 응하지 않으면서 보로딘의 견제를 받게 된 후한민은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2.3. 장호합작
1926년 7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대권을 잡은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시작했고 국공갈등이 차차 심화되었다. 1927년 4월, 중산함 사건 이후 프랑스 외유를 떠났다가 돌아온 왕징웨이와 4월 3일 만나 대결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논의했으나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과 결별하고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 제4차 중앙집행위원전체회의 예비회의에서 후한민을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손잡을 것을 제의하자 장제스와 손을 잡고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난징정부 출범 이후 중앙정치회의 주석 겸 중국정부위원회 주석로 추대되었다. 이후 보로딘, 천두슈 등 190여명의 공산당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며 청당을 실시했고 청당운동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청당이론을 정립하였다. 후한민은 <청당의 의의>라는 글을 발표하여 청당의 필요성, 당략, 당면과제를 밝히고 선전부장 겸 조직부장 대리 우징헝과 함께 <청당의 원칙>을 정하여 등택여를 주석으로 하는 중앙청당위원회를 성립시켰다. 이후 공산당 숙청과 선전작업에 주력했다.
영한합작으로 우한과 난징이 통합된 이후,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에서 왕징웨이, 탄옌카이, 차이위안페이, 리례쥔과 함께 국민정부 상임위원에 선출되었고 1928년 4차 전국대표대회 결과로 입법원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영한합작 과정에서 장제스가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추구하자 분노하여 항의의 표시로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완수되고 중국이 통일되자 장제스는 편견회의를 통해 군축을 실시하고 정치분회 폐지를 통해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한 후 교육과 경제개발에 투자하려 했는데 불만을 품은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장전쟁이 일어났다. 반장전쟁의 최종국면인 중원대전에 이르러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바이충시 등 주요 군벌들과 왕징웨이의 개조파, 쩌우루, 셰츠, 쥐정, 쉬충즈의 서산회의파가 모두 연합하여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태원약법을 제정하여 국민정부의 훈정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2.4. 탕산 사건과 1차 양광사변
중원대전은 장쉐량과 장제스가 합작하면서 진압당했지만 장제스는 후스 등 자유주의자들의 약법 제정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국민회의를 소집하여 약법을 제정하려 했다. 후한민은 완고하게 약법을 수정하여 국민당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버티고 약법 제정을 장제스의 황제적 총통제 수립 시도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와 틀어져 1931년 2월 장제스의 집을 방문했다가 기습적으로 감금당하는데 이를 탕산 사건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후한민을 추종하는 광동파는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만주사변 발발 이후 장제스에게 협력을 요청받았지만 "이번 사태는 일본 군부의 극소수 강경파가 주도한 것으로 전체 일본의 뜻은 아닐 것이다. 외교역량을 효과적으로 운용한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를 보이며 외교부장 왕정팅과 장쉐량을 파면하고 외교적 소양을 갖춘 인물을 보내 일본에 담판할 것을 주문했다.
다이지타오 등 난징 정부의 요인들이 업무에 복귀할 것을 계속 청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장제스가 하야를 결정하면서 난징-광저우 통합에 맞추어 석방되었다. 1932년 출범한 쑨커 정권은 제1차 상하이 사변과 경제위기를 대처하지 못해서 몰락했고 후한민도 입지가 좁아져 광저우로 떠나야 했다. 1932년 1월 군사위원장에 취임한 장제스는 후한민의 라이벌인 왕징웨이와 장왕합작 체제를 열었고 장제스와는 그 뒤로 별로 친하게 지내진 못했다.
2.5. 말년
1935년 유럽 외유를 다녀왔으며 1935년 제5기 1중전회에서 장제스, 왕징웨이와 함께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저격 사건으로 실각한 왕징웨이는 후한민에게 편지를 보내 난징으로 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여 장제스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후한민은 왕징웨이를 불신하여 회답을 보내지 않고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에도 취임하지 않았다.
1936년 5월 12일 고향인 광저우에서 뇌출혈로 인해 사망했다. 사후 국장이 거행되었다. 후한민의 죽음에 동요한 광서파와 광동파는 연합하여 1936년 2차 양광사변을 일으키지만 장제스에게 진압당했고 광동은 장제스가 장악하게 된다.
3.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
후한민은 1912년 신규식이 한중 양국의 우의 및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성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참여하였다. 신아동제사는 상하이에서 조직된 동제사를 모체로 했으며 한국과 중국의 혁명 지사들이 함께 모여 조직한 단체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신아동제사가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1919년에는 한국과 후한민 등 중국의 유력자들이 모여 흥국실업은행을 창립했는데, 이는 한중 양국의 친선을 실업 제휴를 통해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1921년 10월부터 11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신규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문제로 호법정부 대총통 쑨원을 만났다. 이때 후한민은 호법정부 비서장으로 배석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후한민은 “한국은 동아의 ‘발칸’으로 한국문제가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되지 않으면 아세아주(亞細亞州)의 시국대세가 균형을 잃어 동아의 평화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고 역설했다.
1926년 11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데려온 한국 청년 10여 명이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황푸군관학교는 1924년 1월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중국 혁명에 필요한 군사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한국인은 1925년 7월 제3기부터 입학이 허용되었다. 또한 1931년 경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을 면담하여 한중연대를 통한 대일항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4. 주요 경력
5. 저서
- 《박총휘보론국회지추세(駁總彙報論國會之趨勢)》
- 《오호(嗚呼)! 만청소위헌법대강(滿清所謂憲法大綱)》
- 《만국지외채(亡國之外債)》
- 《강유력지정부변(強有力之政府辯)》
- 《민보지육대주의(民報之六大主義)》
- 《고비난민생주의자(告非難民生主義者)
- 《유물사관비평지비평(唯物史觀批評之批評)》
- 《삼민주의적연환성(三民主義的連環性)》
6. 참고문헌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지식산업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네이버 지식백과 후한민 문서
- 두산백과 후한민 문서
7. 관련문서
7.1. 인물
7.2. 사건
- 신해혁명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2차 호법운동
- 영풍함 사건
- 1차 국공합작
- 광저우 상단 사건
- 선후회의
- 국민당의 1차 동정
- 1925년 객군 반란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국민당의 2차 동정
- 중산함 사건
- 국민혁명
- 반장전쟁
- 창사 폭동
- 탕산 사건
- 1차 양광사변
- 만주사변
- 제1차 상하이 사변
- 열하사변
- 복건사변
- 하매 협정
- 진토 협정
- 왕징웨이 저격 사건
- 법폐개혁
- 중미은협정
- 기동사변
- 12.9 운동
- 2차 양광사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