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전우 사법살인 사건
1. 개요
1912년 8월 16일, 호북성 군무사 부장 장전우(장진무 張振武)가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 사건을 말한다. 위안스카이 정권이 독재화되는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다.
2. 배경
1912년, 위안스카이는 쑨원의 혁명당과 협상하여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고 선통제를 퇴위시켜 중화민국을 건국했다. 하지만 민주공화정을 건설하려는 혁명당의 염원과는 달리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는 철권통치를 원하고 있었고 자신의 측근 출신인 초대 국무총리 탕사오이가 혁명당의 이상에 부응하여 내각책임제를 실시하려 하자 그를 핍박하여 축출하고 만만해보이는 외교관 출신 루정샹을 내세웠다. 하지만 루정샹을 불신임한 국회가 루정샹을 탄핵하면서 루정샹은 칭병해서 병원에 드러누웠고 이 때문에 육군총장 돤치루이가 국무총리를 대행했다. 국회의 동맹회는 정당내각 정치를 주장하면서 위안스카이를 계속 압박하고 있었다.
3. 전개
3.1. 장전우의 죽음
1912년 8월 8일, 무창의 호북군 제1진 병사들이 봉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호북성이 기반인 부총통 리위안훙은 군사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하는 한편 8월 11일에 평소에 위안스카이에게 전보를 쳐서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북성 군무사 부장 장전우가 그 주모자이며 장전우와 방유가 군사들을 꼬드겨 도적들과 결탁하고 공화제를 파괴하며 반역을 밀모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며 자신은 의리 때문에 장전우를 덮어줄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으나 인내와 지혜가 모자라니 위안스카이에게 좋은 방법을 알려달라고 보고했다. 이는 자신이 직접 장전우를 죽였다가 혁명당의 원한을 살 것이니 위안스카이의 손을 빌려 장전우를 처치하려는 리위안훙의 계략이었다.
장전우는 과거 무창봉기에 참여하여 손무, 장익무와 더불어 신해혁명의 3무로 불리던 혁명가 중 한 사람으로 호북성 군부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위안스카이 역시 혁명당인 장전우가 마음에 들리가 없었기 때문에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리위안훙의 속셈을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았기 때문에 펑궈장, 돤치루이, 강계제 등 고급장령들에게 명령하여 차례로 장전우를 초청하여 대접하라고 지시하여 그의 긴장을 푼 다음에 8월 15일 사건 진상을 조사하지도 않고 장전우에 대한 사형 집행 명령서를 발부했다.
문제는 8월 8일에 장전우는 위안스카이의 초청을 받아 몽골 변경에 대한 조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이징에 가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장전우는 8월 10일에 아무것도 모른체 베이징에 도착했고 13명의 장교와 30명의 수행원이 늘 장전우를 수행하고 있어서 장전우가 몰래 무창으로 가서 반란을 사주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할 증인은 수두룩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8월 15일 밤, 돤즈구이가 장전우와 그의 부하 장유를 체포했다. 장전우는 사건이 날조된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육군총장 돤치루이는 그의 변명을 듣고 싸늘하게 비웃으며 그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을 했고 16일 오전 1시, 장전우는 군정집법처 처장 육건장의 지시로 재판 한번 받지 못하고 끌려나가 총살당했다.
3.2. 반응
장전우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8월 16일 새벽 3시, 손무, 등옥린, 시공구 등이 군정 집행처로 달려와 장전우를 구하고자 했으나 이미 장전우는 시체가 된 상황이었다. 이들은 군정집행처장에게 장군을 재판 한번 거치지 않고 사형시킨 것에 대해 항의했으나 처장은 위안스카이가 발부한 명령서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에 손무 일행은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항의했고 위안스카이는 리위안훙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위안스카이의 의도대로 여론의 화살은 리위안훙을 겨누게 되었다. 특히 호북성 출신 의원과 명사들이 리위안훙을 비난하자 리위안훙은 전국에 통전하여 장전우를 죽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변명하며 대신에 그의 죽음 자체는 애석한 일이니 후한 부조금을 내겠다고 약속했다."이번 사건은 나도 퍽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건 경과를 보면 여러분도 알 수 있겠지만 부총통 리위안훙의 전문을 받고 일을 처리했을 뿐이다. 나로서는 장전우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참의원에서도 20명의 의원들이 장전우가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질문장을 제출했으나 위안스카이는 장전우의 죄가 크다고 대답할 뿐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8월 20일, 우징헝, 왕지상, 차이위안페이 등 17명의 발기로 '법률유지회'가 결성, 1천명의 시민들이 집회를 열어 장전우의 무죄를 호소하는 한편, 재판도 없이 그를 처형한 것을 규탄하며 '민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법률을 지켜야 한다. 대총통이 재판도 없이 긴급명령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전 국민의 생명은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게 된다'라고 호소했다.
참의원에서는 이 일을 가지고 위안스카이와 루정샹 내각 전체를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과 돤치루이와 루정샹만 탄핵하자는 의견이 맞섰다. 하지만 참의원 내부에서 보조가 맞지 않아 조직적인 항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은 흐지부지되었다.
3.3. 쑨원-위안스카이 회담
8월 24일, 위안스카이의 초청을 받은 쑨원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위안스카이는 쑨원을 전직 임시대총통의 예로 영빈관에 모셔 극진히 대접했으며 위안스카이와 13회에 걸쳐 회담했다. 위안스카이가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쑨원의 비위를 맞추자 쑨원은 황싱에게 지시하여 더 이상 장전우 사건을 키우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
쑨원과의 회담에서 위안스카이는 쑨원에게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국무총리로 추천했다. 쑨원은 혁명당원 황싱을 국무총리로 추천했으나 황싱 본인이 거절하여 쑹자오런을 대신 추천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내각책임론자 쑹자오런을 싫어했고 쑹자오런도 위안스카이 밑에서 총리를 하긴 싫다고 거절했다. 위안스카이는 자오빙쥔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는 대신에 자오빙쥔 내각의 모든 총장들이 국민당에 가입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쑨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쑨원, 위안스카이, 황싱의 3자회담 결과, 중화민국 내정방침인 8대정강이 결정되었다. 이는 통일제도를 채용한다, 시비선악의 공도를 견지하고 민속을 바로잡는다, 무비를 단속하며 육해군의 인재를 양성한다, 문호를 개방하여 외자를 도입하고 철도 및 광산을 개발하며 제철소를 건설하여 국민생활의 향상을 도모한다 등의 내용이었지만 쑨원, 황싱, 리위안훙이 여기에 공식적인 동의를 표명하면서 위안스카이는 8대정강을 실시한다는 구실로 더욱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912년 8월, 자오빙쥔이 국무총리가 되고 나서 위안스카이는 더욱 노골적인 정치테러와 권력장악에 나서게 된다.
4. 결과
1912년 9월 29일, 국민당 총무부 간사 우덕곤이 귀주성 옥병현에서 탕지야오의 귀주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우덕군은 국민당의 위임장을 보여주며 정체를 밝혔지만 오히려 그의 목숨을 재촉하는 일이 되었고 탕지야오는 그가 강도에게 살해되었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이어 11월 26일 위안스카이는 각성 도독, 민정장관에게 혁명분자를 엄벌하라는 명령을 지시했다. 한편 약점이 잡힌 부총통 리위안훙은 위안스카이의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게 되어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1913년 중화민국 총선 이후 국민당이 압승하자 위안스카이는 자오빙쥔을 사주하여 국민당 대리 이사장 쑹자오런을 상하이에서 암살하면서 그의 테러는 정점을 찍었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6. 관련문서
- 신해혁명(1911~1912)
- 쑨원-위안스카이 회담(1912)
- 쑹자오런 암살 사건(1913)
- 선후대차관 사건(1913)
- 계축전쟁(1913)
- 중화민국 국회 해산(1914)
- 홍헌제제(1915)
- 호국전쟁(1915~1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