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므르 이븐 알 아스

 


1. 개요
2. 생애
2.1. 이집트 정복
2.2. 1차 피트나


1. 개요


아랍어 عمرو بن العاص
이슬람 제국의 명장.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등과 함께 라쉬둔 왕조의 대확장에 크게 공헌한 일등공신 중 한 명으로 서아시아 제패에 안주하던 이슬람 제국의 영토를 이집트까지 확장시킨 인물이다. 이후 두차례에 걸쳐 14년간 이집트 총독을 도맡아 행정의 거점을 알렉산드리아에서 내륙의 푸스타트 (현 카이로 남부)로 옮기는 등 현재 아랍 문화를 주도하는 이집트를 아랍화한 선구자라 볼 수 있다. 그에 의해 세워진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마스지드는 이집트의 첫 모스크이자 중세 카이로의 3대 모스크 중 하나로 꼽힌다.[1]
정치적으로 아므르는 1차 피트나에서 무아위야 1세의 주요 지지자였고 알리가 임명한 총독 무함마드 이븐 아비 바크르로부터 이집트를 '재점령'하였다. 군사적 능력 뿐만 아니라 권모술수에도 능했던 그는 시핀 전투에서 알리 측에 협상을 청하며 붕괴 직전에 놓인 무아위야 진영에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협상에 직접 나선 아므르는 화려한 언사로 무아위야를 알리와 동급으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결국 알리 진영이 분열되며 무아위야 1세의 승리로 끝났고, 1등 공신이 된 아므르는 90세로 사망하는 664년까지 이집트의 종신 총독이 된다.

2. 생애


573년 경 쿠라이쉬 연맹에 속한 사흠 가문의 알 아스 이븐 와일과 라일라 빈트 하르말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노예 출신인 모친 라일라는 여러 남자들과 지내어서 사실 알 아스가 부친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따라서 라일라의 별명인 앗 나비가를 따라 이븐 앗 나비가로도 불렸다.[2] 부친 알 아스는 무함마드를 두고 그가 사망하면 이슬람도 와해될 것이라는 말을 남길만큼 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가 622년 사망하였다. 한편 아므르의 동생 히샴은 히즈라 이전에 이슬람으로 개종, 비록 히즈라에는 동참하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메디나에 합류하였다. 아므르는 메카에 남아있다가 무함마드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던 629년 경에야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2.1. 이집트 정복


[image]
카이로 남부 푸스타트에 위치한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사원. 이집트 최초의 모스크이다
시리아와 이라크 정복 이후 팔레스타인 총독인 된 아므르는 이집트의 동로마 군이 공격해오자 국경의 안전을 명목으로 칼리파 우마르에게 이집트 정복을 문의한다. (639년) 아직 시리아도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공격이라 판단한 우마르는 이를 거부했지만 아므르는 이집트의 정복이 시리아의 안정과 이슬람 팽창의 거점으로 필수적이라며 역설하였다. 결국 우마르는 4천의 병력을 내어주며 슈라 (원로회의)에서 논의할테니 결정이 나오면 진격하라고 명한다. 구체적으로 '국경에 도달하기 전에 전령이 도착하면 회군하는데, 국경을 넘었다면 알라께 도움을 청하고 그의 가호를 기원하라!' 지시였는데, 회의의 결론은 위험 부담이 크니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하러 사절이 부리나케 달려가 국경을 넘기 직전 가자에서 아므르에게 서신을 전하였다. 그러나 아므르는 다른 이에게 알리지 않고 봉인을 풀지 않은 채로 국경을 넘었다. (639년 2월) 지도부의 우려와는 달리 아므르는 잔광석화로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이집트의 방어 거점인 펠루시움, 빌바이스를 각각 한달의 포위 끝에 점령하였다. 종교적 차이와 지나친 과세로 지중해 건너 본국과 갈등을 빚던 이집트는 이슬람 군대에 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640년 초, 과거 멤피스 건너편의 바빌론 성채 주변에 주둔하였다. 그해 6월엔 사하바인 주바이르 이븐 알 아왐 휘하의 지원 병력이 당도하자 바빌론 외곽의 옛 헬리오폴리스에서 동로마 군을 격파하고 성을 포위, 개종 / 인두세 / 전쟁의 선택을 요구했다.
9개월의 포위 끝에 641년 4월 바빌론 수비대는 지즈야 납부를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포위 도중 640년부터 아므르는 주둔지의 비둘기 둥지가 있던 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사원을 지었다. 바빌론의 항복 이후 사원을 중심으로 신도시 푸스타트 건설이 시작되었다. 비슷한 시기 동로마령 이집트의 치소인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포위가 시작되었고 그해 9월 콥트 기독교도의 내통 덕에 점령되었다. 본래 아므르는 이곳을 중심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우마르는 나일 강이 범람할 때는 메디나와의 육로가 단절된다며 반대하였다. 당시 이슬람 제국은 해군이 빈약했기 때문이었고, 결국 푸스타트가 이집트의 중심이 되어 현재 카이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641년 11월 동로마 총독 키로스는 인두세 및 공물을 대가로 교회의 자치를 보장받고 이듬해 9월까지 남은 병력과 이집트를 떠났다.

2.2. 1차 피트나


무아위야 1세의 책사. 창 끝에 쿠란 구절을 내걸고 화의를 청하자는 계책을 내어 수세에 몰린 우마이야 진영을 기사회생시켰다.

[1] 다른 두 개는 9세기 이븐 툴룬 모스크, 1븐세기 알 아즈하르 모스크[2] 모계 쪽의 이복형제 중에는 후에 이프리키야 정복에 나서는 우크바 이븐 나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