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카와 다쿠미
1. 개요
浅川巧(あさかわ たくみ)'''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1]
옛 일본의 한국 도예 연구가.
2. 출생
일본 야마나시현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으로 오기 전까지는 야마나시에서 소학교와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아키다현 영림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다 경성의 남산심상소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부임하고 있던 형이 권유하여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임업기사로 일하게 되었다.[2]
3. 생애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임업연구소에서 근무하며 당시로는 획기적인 '오엽송 노천매장법'이라는 양묘법을 고안했다. 그는 이를 활용하여 그 당시 2년이 지나야만 양묘가 가능했던 조선의 소나무들을 1년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다.[3] 경기도 광릉 수목원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고 국립산림과학원 정원에 있는 1892년생 소나무(盤松)도 1922년 홍파초등학교에 있던 것을 그가 옮겨 심은 것이다.
다쿠미의 주 업무는 양묘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자연스레 조선 사람들과 조선 문물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4] 그러던 가운데 그는 형 노리다카의 조선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깊이 공감하고 함께 도자기를 찾아 조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들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했다. 그는 '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한국에는 한 권으로 묶어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 1996)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조선의 소반에서 그는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미를 발휘하므로 사용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히 봉사하여 세월과 함께 아미(雅美)를 더해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대표라고 칭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며 책을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916년 8월, 그의 생애에서 큰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찾아왔는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만난 것이다..[5] 아사카와 다쿠미의 형 노리다카가 소개하여 야나기와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야나기는 직감적으로 다쿠미가 수집해 놓은 조선 민예품들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서 공예에 눈을 떴다. 결과적으로 다쿠미는 야나기가 공예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동기부여를 해준 장본인이 된 셈이고, 그 후 야나기가 조선미술품을 수집하는데 최고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아사카와가 경성에 거점을 두고 조선 민예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야나기에게 전수하면 야나기는 일본에서 조선 민예의 이론을 정립하고 전파하는 노릇을 했다. 조선을 통해 민예의 미를 발견한 야나기는 후에 일본 민예로 그 영역을 넓혔다. 조선민족미술관이란 곳을 열기도 했는데 장소 확보와 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야나기가 맡고 전시품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등의 실무는 아사카와가 도맡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해방 이후 수집품들을 처리하는 과정이었다. 당시 많은 일본 학자들은 한국의 불안한 정세와 미성숙한 학문성적을 신용하지 못하겠다며 대부분 연구품들을 일본으로 가져갔다.[6] 그러나 이러한 학자들과는 다르게 아사카와 타쿠미와 야나기 무네요시는 자신들이 수집한 물품 3천여 점 을 전부 한국 정부에게 기증하였고, 이렇게 받은 것들은 한국 연구가들에게 소중한 연구자료가 되었다.
4. 죽음
다쿠미는 1931년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가 과로로 41세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그는 죽기 전 '조선식 장례로 조선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자신이 살던 경기도 이문리에 묻혔다가 몇 년 후 망우리공원[7] 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이어진다.[8] 그가 모은 항아리를 본따 만든 탑이 그의 무덤 앞을 지키는데, 산림청에서 무덤을 주기적으로 관리한다고 한다.
5. 평가
그 당시 한국에서 소반이나 도자기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이었지, 예술품으로 대접받으리라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일본인들 중에서도 조선 도자기는 예술품이기에 앞서 사치품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사카와 타쿠미는 그러한 사회적인 시류 속에서도 한국 공예품들을 잘 정리하여 후에 한국 공예연구를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한국을 깊이 사랑하며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 공예연구의 기반을 닦은 인물 중 하나'''
당시 일본의 많은 연구가들은 조선 문화에 대해 중국 문화의 아류라고 평가절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 문화만의 독창성을 찾아 연구하며 후세의 연구가들에게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었다.
'''피곤으로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을 따라 흉내를 내기 보다 갖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으로 찬 날이 올 것이다. 이는 공예로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6. 기타
조선 공예품을 사랑하면서도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1914년 24세 나이로 조선에 부임했을 때, 일기에 '조선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고향으로 돌아갈까' 생각하기도 하였고 '내가 조선에 있는 것이 언젠가는 무슨 일에든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이야기 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사는 한 한국인과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말을 써야겠다'고 결심하여 조선인 마을 온돌방에서 지내며 바지저고리 차림과 망건을 쓰고 외출했는데 일제의 무단통치가 절정일 때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개인적인 인품도 좋아서 많지 않은 월급으로도 절반을 조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적지 않은 조선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어 졸업시켰다.
아사카와는 그 당시 한국 지식인들과도 면식이 있어 1920년대 문예잡지인 ‘폐허[9] ’ 활동인들과도 교류하였다.
그가 남긴 일기에서 아사카와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일본에서 보낸 광화문 철거 반대 기고문을 당시 동아일보 장덕수 주필에게 넘겨 게재한 적도 있다고 한다.
7. 영화화
일본 핑크영화계 쪽에서 유명한 다카하시 반메이가 2012년 영화로 제작하였다.
줄거리가 전반적으로 약간 루즈하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으나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하다.
8. 관련 문서
[1] 서울 망우리 묘지에 묻힌 그의 묘비명[2] 형인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도 나중에 일본에서 '조선 도자의 신'이라 불리며 일본 내 조선 도예학의 최고 권위자 중 하나가 된다.[3] 조재명 전 임업연구원장은 한국 인공림 37%가 다쿠미 선생이 공을 들인 나무라고 했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31/2011083100051.html[4] 실제로 그는 당시 조선어를 아주 능숙하게 했다.[5] 야나기는 일본 문예운동의 중심이자 해군 장성의 아들로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부친의 후배인 사이토 조선총독의 힘을 활용해 조선민족박물관을 설립하고 일본에서 조선의 민예를 이론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6] 이 때문에 한일협약에서 문화재반환 문제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7] 망우리 공원 묘지는 방정환, 한용훈, 이중섭 등 한국 위인들이 많이 묻혔기로 유명하다.[8] 망우리 공원에 있는 유일한 일본식 무덤인지라 눈에 쉽게 띈다.[9] 염상섭, 이광수, 나혜석 등 쟁쟁했던 작가, 예술가들이 있었던 그 잡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