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소설가)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이광수
李光洙 | Yi Kwang-su
'''
'''출생'''
1892년 3월 4일
평안도 정주군 갈지통 광동리
(現 평안북도 정주시 오산동)#
'''사망'''
1950년 10월 25일 (58세)
자강도 강계군 만포면 고개동
'''사인'''
폐결핵 악화로 인한 병사
'''창씨개명'''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
'''본관'''
전주 이씨 안원대군파 26대손[1]
'''호'''
춘원(春園)
'''학력'''
다이세이진죠중학교(현 다이세이고등학교)
메이지가쿠인(현 메이지가쿠인고등학교)
와세다대학(철학 / 중퇴)
경성제국대학(법문학 / 중퇴)
'''직업'''
소설가, 시인, 언론인
1. 개요
2. 생애
3. 친일 행적
3.1. 친일 동기와 카멜레온 본능
3.2. 옹호와 반박
4. 대표작
5. 문학사적 위치
6. 대중 매체에서
6.1. 관련 작품
6.2. 담당 배우
7. 이야깃거리
8. 참고 문헌

[image]
[clearfix]

1. 개요


"40년 일본정부 밑에서 일본에 협력한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어서 한 자를 가린다고 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도 (일본 정부에 대한) 협력이다."

《나의 고백》 中 '친일파의 변' [2]

일제강점기소설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소설가 외에도 시인, 동아일보독립신문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무정>과 <단종애사>, <>, <마의태자> 등이 있다. 한때는 2.8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민족 계몽가로 활동했으나 이후 일본 제국 합리화 노선으로 전향하였다. 이에 대해서 그를 대표적인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보며 급진적 독립 노선을 포기하고 외적으로는 일본에 협조하는 것과 함께 내적으로 자신을 계발하여 조선인의 권리를 얻어내어 선진화되자고 주장하였다는 시각에 따라 '매국형 친일파'는 아니며 친일파 항목에 서술된 '개화형 친일파'에 가깝게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광수는 그 중에서도 '광신적 친일파'로 꼽히기에 이는 적절하지 않다.
단적으로 개화형 친일파가 매국노 소리를 안 들었던 것은 일본의 목적이 한일병합에 있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던 시기 정도이고 이후에는 이걸 받아들이냐 거부하느냐로 확연히 갈라진다. 가장 대표적으로 유길준은 한일병합 이전에는 일본 유학도 다녀왔으며 을미개혁 등에 적극적인 찬성을 띄웠으나 한일병합 직후 받은 작위를 버리며 개발에 필요한 일제의 경제적인 도움을 포기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도 추종하면 모를까 정통 역사학계에서는 이광수가 활동했던 시기에 정말로 한반도 독립을 바라면서 자치론을 주장한 인물들이 존재하기는 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 문학, 특히 현대 문학에[3] 있어서는 지대한 공을 세웠다 치더라도 친일 행적에 의해 그 대부분의 공이 과에 덮인 경우라 보아야 하겠다.

2. 생애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광동리의 몰락한 양반 가정에서 소작농 이종원(李鍾元)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동학의 농민들에게 발견된 이광수는 곧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당국의 탄압으로 동학이 해체되자 1904년에 수도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상경한 직후, 친일파 송병준이 이광수의 문학적인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이 운영하고 있던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이광수를 추천, 이광수는 일진회의 후원으로 1905년 일본으로 유학, 다이세이(大成)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학원으로 편입하였다. 메이지 학원에서 수학하면서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한 이광수는 1910년 경술국치가 발생한 직후, 일제의 회유로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잠시 교편을 잡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1915년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이후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데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업을 그만둔다. 한편, 1917년에는 결핵에 걸려 고생을 했는데, 이 때 이광수를 간호했던 당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 허영숙과 사귀게 된다.
1917년 신한청년당에 가입한 이광수는 신한 청년당 활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최초의 장편 소설인 무정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무정>은 다음해 단행본을 내어 1만부가 팔렸다. 지금이야 1만부가 장난이지 경성부는 1920년대 말에야 25만명의 인구였고, 1926년까지도 전 인구의 99%가 문맹이었으며[4], 1930년에 이르러서도 70% ~ 80% 이상이 문맹이었다.[5] 즉 글을 읽을 줄 아는 5만 ~ 8만 명 가운데 1만 부가 '''팔렸다'''는 것. 당시의 책은 사면 3명 ~ 4명이서 번갈아 보고 헌 책방에서 바꿔 보는 것이 예사였다는 걸 감안하면 초초특급 베스트셀러. <무정>의 스토리 전개로 독자들이 젊은층과 노년층으로 나뉘어서 논쟁도 했다고 할 정도다. 무정의 성공으로 당시 문인으로서의 그의 인기는 단연 톱이었고 이광수는 육당 최남선, 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 문인[6]으로 꼽히게 된다. 이후 이광수는 여운형의 추천을 받아서 1919년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 독립신문의 발행을 맡는다.
[image]
그러나 자금난으로 압박받고 과로로 육신이 피폐해진 이광수는 1921년 2월 16일 애인이자 국내 최초의 산부인과 여의사인 허영숙을 만난 후 '''안창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1년 4월, 허영숙을 따라서 귀국을 택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귀국한지 한달 후인 1921년 5월에 결혼한다. 귀국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임에도 총독부로부터 체포되지 않은 이광수는 이때부터 상해 임정 요인들 사이에서 이광수가 일제의 스파이인 것이 아니냐는 커다란 의혹을 사기 시작하였고[7] 결국 이듬해 1922년 5월 월간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함으로써 사실상 친일파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광수는 민족 개조론에서 조선은 열악한 민족성으로 인해 '''"쇠퇴 또 쇠퇴"''' 라고 하면서 그 구제의 길은 오직 민족 개조 운동에 있을 뿐임을 거듭 강조했다. 물론 허술 그 자체인 이론이라 동경 유학생 최원순[8], 학자 신상우, 조선일보 논설 주필 신일용 등에게 가루가 되도록 논파당했다. 참고로 민족 개조론은 안창호의 이론에서 출발하긴 하였으나 안창호의 이론은 착실히 대비해서 결정적 순간을 노리고 결과적으로는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내용이다. 이광수의 동족혐오에 가까운 민족 개조론과는 '''다르다.'''

[image]
민족적 경륜
1924년 민족개조론에 이어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 을 기고했다가 크게 물의를 빚고 이광수는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다. 이후 동아일보에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장편 소설들을 연재했으며 결국, 1926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다시 복직했다. 그 사이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에 선과생(選科生: 다른 학교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일본 유학 시절 얻은 폐병 때문에 1926년 9월부터 1928년 3월 31일까지 네 차례 휴학했고, 결국 1930년 1월 학칙에 의해 제적됐다.# 1931년에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조선일보로 옮겼다. 이후 조선일보에 장편 소설들을 연재하고 글을 썼다.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취임해서 1934년까지 지냈다. 그렇게 잘 지내나 싶었는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가 그를 투옥하였다.[9]
이후 이광수는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친일 어용 단체인 조선 문인 협회 회장을 맡으며 스스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향산광랑)'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10]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며 일제의 학도병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1945년 8월 16일 서울 근교 사릉에서 살면서 해방을 맞이했고, 8월 18일에는 군중들 사이에 '친일파 이광수 타도' 같은 구호가 나붙기도 했다. 위의 친일 행위 때문에 먼저 자식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고 1946년에 가족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당대 풍습까지 어겨가며 아내와 합의 이혼을 하였으며[11] 반민 특위 체포자 제2호로 연행되나 아들이 혈서를 쓴 덕과 고혈압 증세가 심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어쨌든 이광수가 해방 이후로 폐결핵에 시달렸고 이미 명성은 땅바닥으로 떨어진터라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유명세로 인하여 조선인민군에게 당시 말하는 소위 "모시기 정책"[12]의 일환으로 끌려갔고, 건강이 좋지 않던 상황에서 맹추위까지 겹치던 와중에 무리하게 강계로 이동하여 병이 악화되었는데 이광수의 건강상태를 전해들은 벽초 홍명희가 한때의 친분을 생각하여 김일성에게 부탁, 강계에서 근처에 있던 인민군 병원으로 옮겨주어서 치료를 받았기는 했지만 이미 상태가 호전되기에는 늦었던지라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사실 납북된 후 폭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지용보다는 편하게 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에 끌려가서 사망했다는 설, (1980년 당시 기준으로) 현재 나이가 많아서 작품 활동은 안하고 편히 산다는 설, 문예봉을 유혹했다는 설, 모 어용 단체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숙청당했다는 설[13] 등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남북교류가 점차 이뤄지면서 이 설이 정설인 것으로 확인된다.
삼남 이영근이 1991년 북한을 방문해서 북한 당국에게 자강도 강계로 이송되던 중에 동상이 심해져 10월 25일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한 사항이며, 또한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회의에서 제헌의회 의원출신의 최태규가 강계의 인민군 병원으로 후송중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6년 발견된 미국 CIA의 기밀 문건에서도 이광수의 행적이 확인 되었는데 평양 교도소에서 10월 10일 석방되었던 농학자 신동기가 자신이 석방될 당시에 이광수가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신동기는 납북된 이후 북한측에 전향 권유를 받았지만 거부하자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10일에 석방되었고, 자신이 석방될때 이광수와 김동인의 이복동생으로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김동원, 독립운동가 출신 명짐세등이 수감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증언과 문건들을 종합해볼때 10월 10일까지도 평양 교화소에 수감되어있던 이광수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를 보고받은 홍명희김일성에게 부탁해 국군이 평양을 수복한 10월 20일 이전에 임시수도 강계의 인민군 병원으로 이광수를 후송하게 해주었지만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걸로 보인다.#
2003년에 북한재북인사릉이 조성되었을때 이장되어 현재 무덤은 재북인사릉에 있다. 북한에서도 나름대로 문학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3. 친일 행적


그가 변절하기 몇 년 전, 만해 한용운 선생의 집인 심우장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한용운이 말하길 "네놈은 반드시 배신을 할 놈이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는 말과 함께 쫒겨난 적이 있었고 그대로 되었다.
[image]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 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 일체 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1940년 2월 20일자 매일신보 사설란에 이광수가 '창씨와 나' 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 창씨개명을 적극 권장하는 내용의 글이다.

'미국과 영국을 쳐라'

하옵신 대조를 나리시다

12월 8일 해뜰 때

빛나는 소화 16년

하와이 진주만

적악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

웨스트 버어지니어오클라호마

태평양 미함대 부서지다

이어서 치는 남양의 해공육

프린스.업.웨일즈 영함대 기함

앵글의 죄악과 운명을 안고

구안탄 바다 깊이 스러져 버리다.

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 민족이 번영할 기업

앵글의 발에 더럽힌 지 2백년

우리 임금 이제 '''광복'''을 선하시다.

1942년 1월 '신시대'에 기고한 시 선전대조(宣戰大詔). 순수 일본인 뺨치는 광신적인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미 1910~20년대에도 일제와 유착해 <대구에서>, <유랑조선청년 구제의 건>을 쓰며 조금씩 조짐을 보였고, 1930년대 들어 파시즘까지 받아들여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찬양했지만 이러한 것들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항변할 여지도 있다. 본격적인 친일 행보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석방된 후로, 그는 시와 소설을 쓰거나 강연을 하며 본격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 시로는 '''가끔씩 부른 노래'''(1939년 2월)를, 소설로는 '''진정 마음이 만나고서야(心相觸れてこそ)'''(1940년 3월 ~ 7월, 녹기)[14]를 기점으로 친일 문학을 시작한다. '''내선일체와 조선 문학'''(1940년 4월, 조선),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1940년 11월, 국민 총력), '''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1942년 12월, 국민 문학), '''폐하의 성업에'''(1943년 2월, 춘추), '''모든 것을 바치리'''(1945년 1월 18일, 매일신보) 등 103편의 시, 소설, 논설 등을 기고하였다.
그 외 '''이광수의 친일 행적에 대한 자료는 너무 많다.''' 여기 나열된 것들은 극히 일부의 일부... 일반인이 보통 아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어 생각 이상으로 매우 심각한 정도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들 가운데 내용이 무려 12페이지로, 가장 길다.
한국 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는 '이광수가 쓴 친일 문학 작품은 108편으로 이 부분은 문학계 친일파 인사들 가운데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고 말했다.
이런 친일 행위로 인하여 반민특위로부터 결국 연행되었는데 당시 변명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친일한 것은 표면상 문제이고 나는 나대로 친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한 것이다. 내가 친일한 것은 부득이 민족을 위해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한 후 같은 친일 행위를 한 최린한테 '''"입 닥쳐"''' 라는 말까지 들었다[15].
[image]
또한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호한 <'''나의 고백'''>과 <'''돌베개'''>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은 논조로 자신의 친일 행위를 변호하였다.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만약 이광수가 김동환이라든가 채만식, 최린같이 죄를 뉘우치고 진심 어린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더라면 적어도 이렇게 까이진 않았을 것이라는 평이 많다.

3.1. 친일 동기와 카멜레온 본능


이광수의 친일 동기와 해방 후 카멜레온같은 변신 본능에 대해 이해하려면 당대 지식인들 머릿속에 있는 '식민지 근대주의'의 기만성과 위선성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미 1904년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을 할 당시 일본이 근대 문명이자 개화된 국가라고 생각했으며 일본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자신이 조선 민중들을 개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더불어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20세기 초반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 국민 국가를 이룬 선진적인 나라는 일본 뿐이니 어차피 해방이 안 된다면 조선인들도 일본인과 동일한 국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16] 본격적으로 친일 행위를 하게 된 동기는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자신의 스승 격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사망했을 때였다. 당시 이광수는 매우 커다란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물론 해방이 안된다는 전제하에서 백번 양보해서 본다면 그의 행동이 어찌보면 조선인들을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지만. 이광수가 일본인과 조선인 두개의 동등한 집단의 상호 공존을 추구했다면 옹호론이 있을 수 있었지만 그가 추구한 길은 '''조선인의 권익 증진이 아니라 조선인의 정체성을 없애는 길이었다.''' 그나마 억지로 민족 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은 자치론이라고 분류 해봐도,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로는 '''조선민족은 그냥 일본인이 되는게 낫다'''는 결론 외에는 확인할 수 없다. 즉, 조선 민족이 어려운 것은 조선인들이 일본 내 소수 민족이라 그래. 조선인들끼리도 뭔가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민족적 경륜), 아니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면 아무 문제 없어지잖아, 이것이 과거의 조선인이었던 현재 일본인들을 위한 길이다.(창씨와 나)
서중석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친일 동기와는 별개로 그의 계몽주의 사상부터 문제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광수의 인간관과 민족관은 인본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봤다. '민족의식이 말살돼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멸시받는다'는 사고가 그의 내면에도 자리잡아 있다.

3.2. 옹호와 반박


뉴라이트일빠와 같은 일부 세력들은 이광수의 친일이 어쩔 수 없었으며 '''동료 지식인을 구출'''[17]하기 위한 행동이였고 이광수는 사실 '''거짓 친일, 실제는 독립 염원'''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면서 '이광수는 민족의 양심수' 라고 옹호한다. 그들은 ''''학병을 나가지 않으면 학병을 나가서 받는 것 이상의 고생을 할 것 같기에 나가라고 했다'''' 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일제가 학병에 나가지 않는 학생은 강제 제적하여 징병, 학병보다 전방에 배치하는 식으로 자발지원을 강제한 면은 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해방 후 이광수는 자기는 흥사단이 본업이고 문학은 부업이라는 투로 말해, 은근하게 넌지시 어쩔 수 없었음을 말했지만, 그러기에는 혼자 독보적으로 많은 친일문학[18]을 작성했기 때문에, 이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의견이다.
이광수는 빽이 없어서 더 뭇매를 맞았다는 의견 또한 있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지낸 박마리아[19] 전국적인 친일 강연을 했지만 스리슬쩍 넘어갔다. 그러나 '전국 강연'과 '기사'는 그 파급력 자체가 다르다.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지금보다 더 강연에 비해봐도 기사가 일단 증거가 더 분명하게 남고 알려지기도 쉬웠다.''' 그리고,이광수는 이후로도 난 잘못한 거 없다며 극구 부인하며 스스로 더 어그로를 끌었다.(...) 애초에 빽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었던 셈. 게다가 창씨개명 명령이 오기도 전에 조선 이름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일본식 이름으로 갈아버렸다. 애초에 거의 모든 식자를 독자로 거느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친일짓을 하면 그 정도에 관계없이 유명한 것은 당연하다. 뭣보다도 전 국민의 지탄을 받으며 자유당 정권에게도 버림받고 일가족이 자살해서 비명에 간 이기붕의 마누라인 박마리아가 빽이 있었을까?
또 한편으로는 이광수만 까이는 건 억울하다라는 의견도 있기는 있지만, 이 의견이 왜 말도 안 되는지는 다들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이광수는 1948년 작성된 '친일파 군상' 에 ''''광병적(狂炳的) 친일급 열렬 행위자'''' 로 분명히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광수의 작은 딸인 이정화는 잊을 만하면 신문지상에 나와서 "나의 아버지는 민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항변을 하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팔아먹으면서까지도. 이는 2014년 현재도 다를 바가 없어서, 2014년 10월 13일 조선일보 인터뷰에 등장하여 "아버지를 미워하는 분들께 사과를 드린다"라는 말로 아버지의 친일행적에 대한 변을 남겼다. 그리고 정확히 1주일 뒤에 前 광복회 회장인 김우전 씨가 "(이광수의) 학병 권유 연설을 직접 들었다. 나는 춘원의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라 이야기하며 이광수의 딸 이정화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90년대 후반에 <월간중앙>을 통해서 발표한 재미 의사[20]는 열렬한 이광수 지지자로서 조정래를 제외한 이광수 비판자들을 까는 서적인 <춘원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 의하면 이광수는 일제가 조선인 수십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것이라고 한다. 생체실험 등의 일을 벌인 일본으로서는 연합군의 본토 상륙시 그런 일을 충분히 벌일 개연성은 있다. 사실 보도 연맹도 일본에서 만든 걸 참조한 것을 본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정도 기밀사항을 춘원 정도가 알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일본군이 막장이라고 해도 일개 소설가에게 군사 기밀을 흘릴 정도의 병신집단은 아니다(...) 게다가 이광수가 친일을 한다고 학살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본인이야 친일을 하면 일본한테 밉보일리 없으니까 학살을 면할 수 있었겠지.''' 또한 이 책은 임병직과 임종국도 구분 못하고 동학 혁명이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류가 많은 책이라 순순히 믿기엔 여러가지로 무리가 많다.

4. 대표작


  • 단종애사 -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1929년에 발표되었으나 단행본은 사후 한참 뒤에야 발간되었다.
  • 마의태자
  • 무정 -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연재와 동시에 화제가 되어 1918년 연재가 완료된 동시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민족개조론
  • 소년의 비애
  • 유정
  • 재생
  • - 1933년에 발표되었으나 단행본은 역시 사후에 전집으로 발간되었다.
  • 사랑 - 주인공 안빈의 모델이 장기려 박사라고 한다. #
  • 백범일지
  • 꿈 - 신라 시대 승려 조신의 설화[21]를 모티브로 쓴 중편소설. 1983년 8월 20일 KBS1 TV 문학관에서 최경식 작가와 김재현 PD가 드라마화해 방영되었고, 주연은 하미혜, 정종준, 박상규, 이대로, 최주봉 등이다.
2019년부터 태학사에서 이광수 전집이 나온 상태이다. 링크

5. 문학사적 위치


'''글 못쓴 국문학의 아버지'''. 참고로 이광수가 국문학의 아버지임을 부정하면 국문학 아버지는 나쓰메 소세키기 된다. 그정도로 초기 국문학은 일문학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광수는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개화기~일제강점기 문학가로 국문학 성립기였던 당대에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미쳤다. 하지만 유명세에 비해 작가로서의 능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그의 작품 가운데 시대를 뛰어넘어서 널리 읽힐 만한 문학성을 갖추고 있는 작품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22] 당장 이웃국가 일본의 근현대 문학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 중국 근현대 문학의 아버지 루쉰과 비교해보자. 이들은 시대를 초월한 고전들을 만들어내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을 읽고 있다.
작가의 대표작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장편소설로 인정받고 있는 「무정」 역시 작중 인물의 무의지적인 행동에 의한 전개와 계몽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내세우는 문명 개화와 신교육이 그저 가능성으로만 제시된다는 점에서 이전의 신소설이 가지는 한계를 개선하긴 했지만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 과도기적 작품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반면 이광수의 등장을 한국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장석주의 "나는 문학이다"에서는 "이광수는 전.근대에 머물러 있던 서사문학의 내적 문법을 바꾸고 현대성을 수혈하면서 비로소 한국어가 자아와 세계를 동시적으로 포획하는 현대소설에 적합한 문자라는 사실을 증명해낸다. 현대를 향한 다양한 줄기들은 이광수에게 와서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었고, 그것은 그대로 한국 현대 서사의 장강長江이 되었다. 이 장강에 기대 한국의 서사문학은 꽃을 피웠다. 이광수는 한국 현대 서사문학이 발아發芽하는 기점이자 여명의 외침이고 아울러 무시무시한 빅뱅이다. 이광수라는 빅뱅을 겪지 않았다면 한국 서사문학의 밤하늘을 찬연하게 수놓는 성좌星座는 아직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평가를 내렸고, 김윤식 또한 그의 저서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서 이광수의 작품세계를 한국근현대문학사에 큰 비중과 의의를 가진 것으로 접근 및 평가하고 있다. 다만 다른 글에서는 "만질수록 덧나는 아픈 상처와 같다"며 이광수의 애매한 입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나 중국의 루쉰 같은 최초의 근대소설가 들을 예로 들면서.
추가로 2000년대 초반 진행된 20세기 한국 문학사 10대 사건 및 100대 소설 선정 투표 #에서 이광수는 전 부문에 이름을 올렸으며, 특히 논쟁 사조 분야에서는 "이광수의 등장" 자체가 10대 사건 중 하나로 뽑혔다. 이런 것을 볼때 이광수 평가에 과장이 있었을지언정, 그가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단 것을 부정하긴 힘들다.
다만 그가 식민지 조선에서 이름난 인물일 수는 있으나, 내선일체를 외쳤던 그의 논리에 비추어 봤을때 동시대의 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같은 일본의 문학가들과 비교를 해줘야 그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있는 이광수의 무정을 읽어보자. 그 소설이 그런 수준에 발끝이라도 미치는가? 문학으로서 그 시대상과 고민을 세련된 방식으로 드러내는가? 인간성에 대한 본질에 대한 질문을 시대를 관통하여 제시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이광수와 비교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서정주인데, 역시 친일행위를 했고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에 아부해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의 시재(詩材)만큼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어가 가진 표현의 극한을 보여준 그의 시들은 날로 격앙되어가는 반일기조로도 지워 없앨수 없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학생들에게 읽혀 지고 그의 시집은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이광수가 정말 천재였고 그의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준이라면 친일 논란을 뒤로하고 그의 작품은 서정주의 작품처럼 현대에서도 소비되었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그는 친일논란 덕분에 유명해진 평범한 문인일 뿐이다.
문학사의 새로운 조류를 가져왔다는 고평가가 있는데, 그가 만약 친일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도입한 문학사의 새로운 조류는 최초의 철도만큼이나 단편적인 사실일 뿐이며, 결국 그가 논란이 되고 고평가와 저평가가 난무하는 것은 친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광수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의 글을 읽어보라. 그리고 동시대에서 현대까지 살아남은 고전들과 비교해보라. 그가 얼마나 졸렬하고 식민지 조선에서 종이낭비를 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6. 대중 매체에서



6.1. 관련 작품


1967년에 이수희 감독이 <무정>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춘원 이광수>를 만들었고, 1969년에 최인현 감독이 같은 제목으로 또 만들었다. 주인공인 이광수 역은 둘 다 명배우 김진규가 맡았다. 1978년 10월 29일부터 11월 5일까지 KBS-TV <일요사극 맥>에선 그의 일대기를 다룬 '무정' 편이 방영된 바 있고, 1982년 2월 20일엔 구치소를 섭외해 TV 문학관 사상 최초로 올 스튜디오 촬영을 한 단편 <무명>[23]의 경우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김흥기가 이광수처럼 이야기를 진행하며, 박근형과 주현, 이치우, 김성겸, 맹호림, 이주실 등이 출연했다.
반공작가 선우휘는 이광수의 친일행위를 다룬 소설 '묵시' 를 썼는데 주인공의 선생은 이광수의 친일행위가 '희생양'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원작으로 정하연 작가와 홍성룡 PD가 각각 드라마화한 <묵시(1983년 10월 22일 방영분)>에서는 민욱이 이광수를 모델로 한 C씨를 연기했고, 그 외에 전무송, 임혁, 박인환, 황범식, 이원종, 신동훈, 최정훈 등이 열연했다.
아예 춘원 자체를 그린 단독 작품으로는 1992년 광복절 특집으로 MBC에서 방영된 2부작 드라마 <춘원 이광수>가 있었는데,(오프닝 영상) 여기서 문성근이 춘원으로[24], 이응경이 허영숙으로 각각 나오며, 방송 PD 역은 최수종, 작가 역은 김갑수, 육당 최남선 역은 정한용, 벽초 홍명희 역은 정성모, 그 외 출연진은 정욱, 전운, 이계인, 송영창, 차재홍 등이다. 전반적으로 계몽주의자에 일제에 투항한 후에도 '''자살 직전까지 갈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지식인'''으로 나온다. 당시 극본은 , 연출은 신호균 PD가 맡았다.[25]

6.2. 담당 배우


  • 1967년작 및 1969년작 영화 <춘원 이광수>에선 배우 김진규가 연기했다.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전무송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서희승이 연기했다.
  • 1990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선 배우 백윤식이 연기했다.
  • 1992년작 MBC 8.15 특집드라마 <춘원 이광수>에선 배우 박형준이 청년 시절 역할을, 문성근이 중년 이후의 역할을 각각 맡았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태민영이 연기했는데, 여기서는 간도 참변에 가슴 아파해서 일제에 투항하는 걸로 처리된다.
  • 2003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선 배우 이석구가 연기했다.
  • 2012년작 연극 <꿈>에선 배우 강신일이 맡았다.

7. 이야깃거리


일제강점기 당시엔 얼굴 잘 생기고 머리 좋고 글 잘쓰는 나름 스타였다. 당시 잡지를 보면 이광수 씨가 최근 집필하는 소설이 무엇이고 이광수 씨 집안 인테리어가 어쩌고 하는 글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걸음은 못나게도 안짱다리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26]
연애사와 가정사가 복잡한 편인데 첫번째 아내인 백계숙과 합의이혼했고 신여성과 자유연애 끝에 당시 엘리트이고 이름난 산부인과 의사인 허영숙과 재혼했다.[27] 여기까지는 당시 엘리트들 사이에 흔한 일이었지만 허영숙과 사귈 때 당시 신여성이었던 나혜석과 '''양다리'''를 걸쳤다는 것(...)이 화제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광수는 나혜석과 새롭게 연애를 시작했을 때 허영숙과 헤어지지는 않았고 둘 다를 애인으로 두려고 했다. '''허영숙에게는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오라고 하고 나혜석과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만 만나는 것'''으로 날짜까지 정했는데 이광수는 정해진 요일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며 꼭 그 요일에만 만날 것을 요구했다고. 이걸 안 허영숙은 당연히 펄펄 뛰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요 때문에 결국 허영숙을 선택했다.
여운형 딸의 회고에 따르면 여운형이 출옥 후에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데 변절한 이광수는 뻔뻔하게도 병문안 한다고 여운형을 방문했고 여운형은 소화불량증으로 고생하는 중이었는데도 열 받아서 찬물을 연거푸 들이키며 그를 외면했다고 한다. 이광수는 여운형이 기분 나쁜 걸 알고 나갔고 그가 나간 뒤 여운형은 그를 일컬어 '''이스카리옷 유다''', 배신자라며 신나게 깠다고 한다. 여운형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점에서 최고의 욕을 한 셈이다. 임정시절만 해도 이광수는 "한천에 비를 내리고 고목나무에 꽃을 피울 정도로 탁월하다" 고 여운형을 극찬했으니 배신감이 유난히 컸을 것이다. 참고로 '''뉴라이트 교과서에서 친일로 규정하였다'''. 뉴라이트에게마저도 버림 받은 이광수.
이순신을 소재로 소설을 쓴적이 있다. 읽히기는 무정이나 흙같은 대표작들보다 훨씬 잘 읽힌다.[28][29] 그리고 도산 안창호 일대기를 서술하기도 했다. 이유야 어떻건 도산 선생을 가장 존경했으니.
또 충격적인 사실 한 가지는 Y소설을 지었다는 점이다(...) 이광수는 일본 메이지 학원 유학시절 학원 내 발행물 『백금학보』에 「사랑인가」라는 제목의 단편소설 하나를 투고한 적이 있다.[30] 그뿐만이 아니라 1918년에 기고한 「윤광호(尹光浩)」라는 소설은 조선인 유학생 간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으며 '''최초의 현대 한글 Y소설'''이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무정에서도 좀 묘한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이 잘나보이는 자기 사촌들하고 같이 자고 싶지만 꾀죄죄해서 따돌림 당한다나... 여러모로 충공깽.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도 3년 밖에 마치지 못하고 자퇴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최서해의 등단을 도와준 은인이다.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은 엄청났으나 이를 만개할 형편이 안 되던 최서해가 보낸 글도 평론을 해주고, 그의 시를 문학잡지 《학지광》에 소개하여 등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로 인하여 최서해가 자기체험에 기반한 계급주의적 작품들을 집필하고, 이광수에 비판적이었던 카프에도 참여하였지만, 이광수를 평생 존경했다고 한다.[31] 최서해 외에 채만식한설야가 이광수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등단했다. 풍자소설을 즐긴 채만식은 은인인 이광수 역시 예외없이 풍자했고(인간적으로 싫어한건 아니다.), 월북한 한설야는 북한 체제에 영합하면서 이광수를 가열차게 비난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1987년까지 계속된다고 가정한 대체역사소설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창씨개명한 이름인 가야마 미쓰로로 언급된다. 설정상 단종애사, 마의태자, 원효대사 등의 소설을 몽골의 항해왕조라는 가상 왕조의 연작소설로 바꿨다고 한다. 작품에서 주인공인 기노시타 히데요는 이광수가 한 '''"나는 역사를 믿는다"'''는 말을 두고 '''"역사를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라고 비판한다.
우스개소리로 "이광수는 뭘 썼을까요?" 란 질문의 답이 "'''안경'''을 썼습니다" 라는 옛날 개그가 있다(...)[32]
그의 가족들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둘째딸 이정화 교수가 있다. 이정화 교수는 6.25 전쟁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1998년까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분자생화학 박사로 1980년대에 4차례 한국의 대학에 초빙교수로 오기도 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정화 교수의 남편은 인도인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재학한 적이 있으며, 경성제대 재학번호 1번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광수는 1926년[33] 당시 34세로 이미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편입해 다니다 중퇴한 이력이 있어서 선과생(選科生)으로 입학했다. 선과생은 다른 학교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아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한 것으로 수료로 인정되고, 졸업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당시 영문과의 사토 기요시(佐藤淸) 교수가 “당신은 조선 소설계의 태두인데 왜 여길 들어왔소”라고 묻자 이광수는 “와세다에서는 철학을 했지만 영문학을 한번 공부하고 싶었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8. 참고 문헌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개정증보 3판) - 서중석 저. 웅진지식하우스. 2020. p43~45.
[1] 26대손 ◯수(洙) 항렬[2] 이광수가 말을 꺼내서 대중적으로 확산된 '친일 공범론'의 주된 논리이다. 당시 모두가 친일을 했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단죄할 수 없다는 주장. 당시 반민족 행위를 했던 모든 친일파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었다. 친일파들은 또한 '인재 중용론'도 주장했는데, 친일파의 국정 운영 경험을 활용해야 하니 단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3]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계몽적 민족 의식을 표현했으며 또한 현대 소설의 문체 확립, 실험적 인물 묘사, 현대적 주제 설정 등 문학의 선구자로써 자리매김하였다.[4] 물론 일본어 문맹을 기준으로 삼은거지만 사실 한글 문맹을 기준으로 삼아도 여전히 인구의 절대 다수가 문맹인건 마찬가지이며, 어차피 당시 신문 등 출간물들은 한자 범벅이었기 때문에 한글을 알아도 한자를 모르면 신문과 잡지 같은 당대 출간물을 읽기가 힘든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별 다를 건 없었다.[5] 실제로 남이든 북이든 간에 현대 수준으로 문맹률이 급속도로 줄기 시작한 건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의 일이다.[6]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 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 등이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라며 이들을 동경 삼재라고 불렀다. 셋은 귀국 후,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했고 동경 삼재라는 이름은 (일제 시대하) 조선 삼재로 변했다. 이후 최남선과 이광수는 친일, 홍명희는 모시기로 입북했다.[7]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p298[8] 최원순은 '''열악하다는 조선인의 민족정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고 반문하였다. 이어 '그리고 설사 이러한 현상이 있더라도 이는 조선인의 고질적이고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 라고 비판을 가했다.[9] 감옥 생활을 무대로 한 단편 무명이 바로 이때를 소재로 했다.[10] 향산(香山: 가야마)이란 성은 일본 나라현 카시하라시에 있는 향구산(香久山: 가구야마)에서 딴 것이다. 이광수는 진무 덴노가 카시하라시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카시하라시에 있는 향구산의 이름을 성씨로 택했다고 선씨고심담(1940년 1월 15일, 매일신보)에서 밝혔다. 향구산은 일본 나라 시대에 궁궐 후지와라쿄(藤原京)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한 산으로 숭앙받았고, 만엽집 등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역사적·종교적 가치를 인정하여 향구산 등 야마토 3산을 1968년 '역사적 풍토 특별보존지구'로 지정하였다. (다만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진무 덴노가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곳은 야마토 3산 중 우네비산{畝傍山: 무방산}이라고 한다.). 상당수 창씨개명한 사람들도 어떻게든 자기 본래의 성을 남기려고 했던 것에 비하면, 이광수가 만든 성은 많이 지나쳤다. 한편 이름 '광랑'은 본명 광수를 일본식으로 고친 것이다.[11] 혼자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던 허영숙은 집안을 잘 돌보지 않는 남편에 대해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친일문제까지 겹쳐서 결국 이혼하게 된 것. 하지만 이광수 사후 허영숙은 이광수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1975년 본인이 사망하면서 무산됐다.[12]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 진주한 조선 인민군은 유명한 사람들을 "모셔가는" 짓을 많이 했다. '''"전쟁이 났으니 선생님을 안전한 후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라며 회유하다 말 안들으면 그냥 납북시키는것. 개중에는 끌려간 사람도 있고, 전쟁과 분단을 장기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냥저냥 따라간 사람도 많다고 한다.[13] 퀴즈 아카데미에 문제로 나왔다[14] 제목 자체가 어색한데, 원제 작품 자체가 일본어로 작성된 일본어 소설이라 일본어 제목이 원제라서 한국어로 번역하다 보니 그렇다. '마음이 서로 만나고서야'라는 제목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인의 마음과 일본인의 마음이 서로 만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본격적인 친일의 주제를 담고 있다. 사랑을 위해 고난을 이겨내려 하는 일본인과 조선인 남녀 커플 2쌍(타케오 - 석란, 충식 - 후미에 커플이 주인공인데 충식과 석란이 친남매고 충식과 타케오는 친한 친구다.)을 통해 '내선일체'론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내용의 멜로 소설이다. 원래 장편 소설로 기획되었는데 월간으로 1장씩 5장까지만 연재되다가 중단된 미완의 장편 소설이나, 이미 5장 내에 충분히 내선일체에 대한 많은 논리가 서술되어 있어 서사적 완성을 떠나 친일적인 내용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뒷부분이 없어도 무방했을 수 있는 작품이다.[15] 최린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일제 패망 후, 광복 때 재판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오히려 "나의 행동에 대해 절대로 변명이나 하지 않는다. 차라리 나를 죽여 민족의식의 본보기로 속죄를 하겠다."라고 뒤늦게 뉘우친 인물이라 어느 정도 평가가 괜찮은 인물이다.[16] 1차대전영국이 자치권 약속해놓고 인도인들 이용한 다음에 입씻기 전까지만 해도 마하트마 간디도 이런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용만 실컷 하곤 입씻고 암리차르에서 비무장 시위대를 썰어내는 등 영국의 병크를 보고 인도의 완전 독립을 부르짖게 된다.[17] 여담이지만 독립운동하는 청년들을 잡아와서 "네가 친일 글을 쓰면 풀어주고 아니면 고문을 하거나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글을 썼고 나중엔 마약까지 손을 대었다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광수의 과하다 싶게 많은 친일작품의 수나 해방후의 자기옹호 등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수 있다. '''물론 야담이다'''.[18] 무려 108편이다. 아무리 적극적인 친일문학가도 열 몇편 쓰는 게 고작이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계간 《실천문학》,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공동 발표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3자리수 글을 썼다. 대부분 10개 미만 ~ 열 몇개 정도이고, 이광수 빼고 제일 많은 게 주요한의 43편이다.[19] 그 당시 교수의 유명세는 지금과는 달랐다. 막말로 이승만이 박사 학위를 땄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이승만의 이칭이 '이 박사'로 불리던 시기다[20] 춘원의 아들의 친구이다.[21] 삼국유사 권3 탑상 제4 조신조(調信條)에 실려 있다. 꿈을 통한 인생의 허무를 주제로 한 이야기.[22] 원래 한 나라 문학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들은 문학성 이전에 태동기에 널리 받아들여져 읽혀지며 방대한 영향력을 끼친 이들을 일컫는다. 예를들어 미국문학의 아버지로 에드가 앨런 포나 허먼 멜빌이 아니라 랄프 에머슨이나 너새니얼 호손이 꼽히는 이유도 생전에는 북부 문인들과 대립하는 편집자이자 그저그런 작가로 이름은 알지만 거장 대우는 전혀 못받았던 포나 괜찮은 해양모험소설가로 대우받다 모비딕부터 퇴물 취급받고 죽고나서야 인정받은 멜빌과 달리 생전에 널리 인정받으며 폭넓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23] 이것도 이광수 본인이 만든 단편 소설인데, 극본은 이은성, 연출은 장형일이 맡았다.[24] 청년 시절 역할은 배우 박형준이 맡았다.[25] 스토리가 작가(김갑수)와 PD(최수종)이 이광수의 일생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형태인데, 첫 장면이 PD가 작가에게 이광수 특집극의 대본 집필을 의뢰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서 작가가 연출한 연극을 보는 장면이다[26] 출처는 별건곤 제 63호의 각계명남명녀(各界名男名女), 뒤로 본 인물학(人物學).[27] 그런데 이게 상해 임시정부 활동 시절에 일어났다. 임정 사람들은 이광수가 독립운동의 의지가 약해져서 허영숙을 사귀더니 '''임정을 버리고 그녀와 서울로 도망친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이광수는 배신자라고 인식되었다. 일례로 임정 인사였던 안창호는 일경에 붙잡혀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 그가 넣어준 사식을 '''거절했다.'''[28] 물론 내용은 조선 문관들을 무진장 까고 조선 사람은 이순신 말고는 다 겁쟁이에 쓰레기이며(가끔 용감한 사람이 나오긴 하는데 꾀가 없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금방 죽는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 장수들과 삼국지연의 식으로 대결하여 명장의 경우엔 후히 장사 지내준다는 식으로 쓰여진 문제가 많은 소설이었다. 다만 글은 좋아서 팔리기는 많이 팔렸다.[29] 지금 기준으로 보면 고증이 좋지않다. 노량해전에서 조/명 연합군이 '''2백이 죽고 수십척이 침몰했다는''' 이야기가 버젓히 나온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지금 기준이고 제대로 된 사료 구하기도 힘들었을 그 당시를 생각하면 상당히 신경을 많이쓴 편이다. 읽어보면 징비록은 참고한 게 확실하고 나름대로 사료를 찾아본 듯 하다. 고증문제나 조선까 기질은 역사학자인 신채호가 쓴 역사소설들도 장난 아니라는 걸 감안하면 이 작품만 가지고 비난하긴 좀 그렇다.[30] 문길이라는 한 소년(중학생)이 동급생 미사오를 연모해 러브레터를 보내고 혈서까지 쓰고 난 뒤 귀국 바로 전날에 그를 만나러 시부야에 가서 하숙집을 찾아갔으나 미사오가 보여지지 않자 거절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철도자살을 꾀한다는 내용.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동성애적으로 사모하는 내용을 통해 친일적 시각을 드러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시대를 앞서간 헤타리아...?[31] 최서해가 1932년 사망하여 변절한 이광수를 보지 못해 존경했다 운운하는 주장이 있는데 최서해 마지막 직장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학예부장이다. 일평생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리며 한이 맺힐대로 맺힌 최서해는 돈도 제대로 안주면서 선언문 비슷한 글만 요구하는 카프에 진절머리쳤고 먹고 살기위해 총독부 기관지라고 마다하지 않았다.[32] 이 개그는 김동인 버전으로 나오기도 한다.[33] 경성제대는 1924년 처음 예과를 개설하였고 이들이 본과로 올라가는 1926년에 본과를 개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