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나혜석
羅蕙錫 | Na Hyeseok'''

결혼 직후의 나혜석 (1920)
<colbgcolor=#64564b> '''출생'''
1896년 4월 28일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사망'''
1948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자유시 용산구 원효로1가
서울시립자혜원 무연고자 병동 (향년 53세)
'''국적'''
대한민국 [image]
'''본관'''
나주 나씨
'''아호'''
정월 (晶月)
'''아명'''
나아지 (羅兒只), 나명순 (羅明順)
'''직업'''
화가, 시인, 작가
'''학력'''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전문학사
'''배우자'''
김우영
1. 개요
2. 작품 세계
3. 어록
4. 생애
4.1. 어린 시절
4.2. 성평등을 외치다
4.3. 모성애 반론
4.4. 사랑과 결혼
5. 관련 동영상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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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혜석(羅蕙錫, 1896년 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은 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차미리사와 같은 여성지식인로 평가받았다.[1][2] 본관나주(羅州), 는 정월(晶月)이다.
조선 인천부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출생으로 수원 삼일소학당과 서울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여자미술전문학교[3]유학을 다녀왔다. 귀국 후에는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지내기도 했고, 김일엽과 함께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 발행하기도 했다.

2. 작품 세계


작품경향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프랑스 파리에 가기 이전에는 주로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며, 그 뒤로는 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아들인 한결 참신한 수법을 보였다.
자화상(1928)
그의 작품 <자화상>. 30년대에 그린 이 유화는 서구적 신여성의 우아한 자태를 묘사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나혜석의 <자화상>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1930년 당시 이처럼 창조성이 내포된 자화상은 단 1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도, 표현, 색상 모두 놀라울 정도로 뛰어납니다. 천재 화가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죠."라고 평하였다.
작품 <해인사의 풍경>은 겹겹이 두꺼운 붓질로 사물의 윤곽과 초점을 흐린 나혜석의 독특한 기법이 발휘되고 있으며, 화면 전면의 탑뒤로 대웅전의 일부가 보인다는 평이 있다.
예술의 전당 정형민 전시예술감독은 “예술적 수준을 논하기 이전에 나혜석의 공간과 시간속으로 다가가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하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하였다. 그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을 활용하였다
1921년 그가 <개벽(開闢)> 제13호에 발표한 목판화 <개척자>는 한국 근대 판화의 효시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친구이자 한때 연인이었던 이광수와의 작품경향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졌다. 그에 의하면 "이광수의 유학생 주인공들이 거창한 문명개화의 구호를 외치면서도 소설 안에서는 공허한 동어반복만을 되풀이하는 데 비해 나혜석의 글쓰기는 대중을 선도하기보다 대중과 공동의 체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밖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다"는 평도 있다.
나혜석은 그림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감각을 담은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8년 도쿄 여자친목회 기관지 <여자계>에 발표된 소설 「경희」는 일본 유학생인 신여성이 구여성을 설득하며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실감있게 그리고 있는 자전적 소설로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염상섭, 김동인,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등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고백체 소설은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기반으로 한 성적인 금기에 도전했으며 1920년-1930년대의 소설의 사조이기도 했다. <경희>는 이러한 고백체 소설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소설로 꼽힌다.
시 <노라를 놓아주게>에서는 유교삼종지도를 비판하였다. <노라를 놓아주게> 등에서 그는 가부장제 하에서 아버지만을 따르고, 남편만을 따르고, 아들만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 잘못임을 비판하였으며, 아버지의 착한 딸, 남편의 착한 아내, 아들의 좋은 어머니 역할을 인형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1937년 10월에 발표한 <어머니와 딸>에서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 직후 머물렀던 어느 하숙집에서 본 구식 어머니와 신식 공부한 딸의 갈등을 표현하였다.
임신출산으로 여성이 갖는 좌절 및 고난과 자신의 외도 사실을 상세하게 고백한 나혜석, 배신당했던 일을 고백했던 김일엽, 성폭행 피해 경험을 고백하고 그랬던 자신을 글로 유린했던 남성 문학인들과 맞선 김명순 등 절절하게 자신들의 아픔을 세상에 드러냈던 여성 작가들은 '''탕녀'''로 낙인찍혀 문학사에서 매장된 반면, 이들을 탕녀로 만드는 일을 주동했던 김동인, 김기진 등의 남성 작가들은 이전까지는 어떠한 평가나 굴곡 없이 '''근대 고백소설의 모범'''으로 문학사에 기록되었으나, 현재의 학계에서는 해당 작가들의 행동과 관련된 논의가 펼쳐지고 있다. 2016년 문화계 성추문 폭로 사건이란 큰 일을 겪은 현재 한국의 문학계가 앞으로 과거의 이러한 과오들도 청산할 수 있을지 지켜볼 필요가 있을 듯.

3. 어록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디다.

(중략)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겨졌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이혼고백서」 중에서

인형의 가(家)

나혜석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4]

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이 막아논

장벽에서

경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

(하략)


4. 생애



4.1. 어린 시절


나혜석은 나 참판댁 또는 나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기도 수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羅基貞)과 어머니 최시의(崔是議) 사이의 2남 3녀 중 넷째(차녀)였다. 동복 형제들 외에 나계석이라는 이복언니도 있었는데, 나기정이 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녀였다. 나계석은 나혜석이 태어날 무렵,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혼을 했다.[5]
나혜석은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는 등 부족함 없는 삶을 보낸 것으로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고위 관료였던 아버지 나기정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자녀들에게 신교육[6]을 받게 해주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엘리트처럼 보였지만,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딸들에게는 정식 이름이 아닌 아명을 불렀고, 나혜석에게도 진명여학교 입학 전까지는 정식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혜석은 ‘나아기(=나 참판댁 아기씨)’로 불리다가, 학교 입학 후에야 정식으로 ‘나명순'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또한 나기정은 본처 최시의 외에도 여러 여자들을 으로 두었다. 심지어 나혜석이 10대일 때, 나혜석보다 불과 1살 연상인 어린 첩을 두기도 했다. 그 어린 첩은 기생 출신이었는데, 가장인 나기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자신의 이점을 이용하여 최시의에게 온갖 갑질을 했다. 하지만 엄격한 남존여비 사회에서 최시의는 남편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많은 고생을 했다.
이런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며 자랐던 나혜석은 당시의 남성중심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 반감을 가졌다. 나혜석은 고통받는 어머니의 삶과 (아마도 1910년대에) 주변의 또래 친구들이 어린 나이에 강제적으로 시집보내져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고도 한다.

4.2. 성평등을 외치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시, 소설, 칼럼, 강연 등을 통해 '여자도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어느 날 그는 프랑스의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 체류할 무렵,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라고 했다. 또한 귀국 후 그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녀는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 신여성의 표본이 되었다. 그는 억압된 조선 여성들을 대변하고,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고자 했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것이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던, 글과 그림으로 ‘여자도 사람’임을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그는 여자, 남자 이전에 사람이라며 여자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라며,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해줄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일제, 보수적인 지식인과 노인, 유학자 등은 모두 그의 견해를 외면했다.
<섣달대목, 초하룻날>이란 제목의 연작은 여성들의 일상과 가사노동을 중심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섣달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계속해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만평형식의 목판화에도 신여성·구여성의 고달픈 일상에 대한 연민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명절이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했다. 나혜석이 1930년대 신문삽화 <섣달대목>으로 일찌감치 명절이 여성들에게 고단한 날임을 고발하였다. 그가 명절의 고단함을 지적한 것은 후일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기도 했다.
결혼을 여성을 억압하고 옥죄는 족쇄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는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라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칼럼을 <삼천리> 잡지에 기고하여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나혜석은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을 야기하는 것보다는 시험 결혼이나 동거혼 비슷한 결혼을 통해 비극을 예방해야 된다고 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 서로 맞지 않는 결혼 생활을 억지로 유지하면서 불행을 억지로 참고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여성 지인들에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 알콜중독 남편 등의 가정폭력이나 구타를 억지로 참지 말고 이혼하라고 하였다.[7][8]
몇 편의 시와 《규원》(1921년), 《현숙》(1936년) 등의 단편소설, 그리고 여러 편의 수필을 발표했는데 수필과 작품에서는 주로 인습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여인들의 삶을 그렸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을 썼으며, 여성이 각성하고 사람답게 사는 길로는 교육과 계몽, 사회참여, 남자들로부터의 경제적 자립 등을 들었다. 그의 작품 중 《경희》는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기도 했다.
그녀는 인형보다는 인간이기를 원했던 여성이었다. 19세에 <이상적 부인>이란 글에서 현모양처론이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는 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는 나혜석은, 40세에 쓴 글 <신생활에 들면서>에서도 여성의 정조는 취미일 뿐이지 도덕이나 법률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근대 사회로의 전환기, 개성의 확립이 문화계의 화두였던 시절 나혜석은 여성화가와 여성해방론자로, 그리고 여성작가로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마다가 조선 여성의 진일보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아이는 에미의 살점을 떼어먹는 악마' 라고 분노하던 그는, 모성애를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강요한 역할"이라고 주장하였다.[9]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어머니는 수많은 희생을 감내한다. 그리고 이는 본능이 아니라 강요라는 것이다. 그는 모성애가 사회에 의해 학습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을 처음 언급하였다. 그는 모성애가 사회적으로 학습되고 강요되는 강요의 결과물로 파악하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비슷한 논지의 내용을 주장한 바 있다.

4.3. 모성애 반론


나혜석은 여성에게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사회가 여성에게 인위적으로 억압, 강요한 역할이라고 규정했다. 여성에게도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의 자유와 성공 등의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현모양처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인습이자 굴레라고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모양처는 이상을 정할 것도, 반드시 가져야할 바도 아니다.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모성은 인간으로서 자식과 관계를 맺으며 쌓아가는 경험적 인간관계라 주장했다.
모든 여성은 모성애를 지니고 태어나는가, 학습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자 그는 모성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물이 자기 새끼를 버리는 것이라거나 새끼를 물어 죽인 수컷과도 관계하는 것을 하나의 예로 들기도 했다.

잠 없고는 살 수 없다. 이런 것을 탈취해가는 자식이 생겼다 하면 이에 더한 원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 정의한다.

나혜석은 종종 '자식은 악마', 또는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 '자식은 모체를 희생시키는 존재'라고 규정하였는데, 자식을 악마라고 발언한 그의 발언들 역시 화제가 되었다. 생물학적으론 자식이 모체에게 이익을 주는 건 아니니 기생관계인 건 맞으나, 사회학적으로는 교육과 법을 통해 부양의무를 짊어지니 기생관계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일단 자식은 모체를 선택할 수도 출산을 선택할 수도 없는 일방적인 피동적 존재다. 태어나서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고 교육받음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부모의 의사를 거역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다. 부모가 아무리 막장이라도 관계를 단절하는 것도 입양이 아닌 이상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법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어 이를 거부하면 큰 제약이나 차별을 받기도 한다.
그는 "모성애는 의무사항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나혜석은 결혼 1년 만에 첫아이를 낳았다. 그는 생각지도 못한 빠른 임신, 고통스러운 출산육아의 심경을 '모(母) 된 감상기'로 『동명』지 1923.1.1~21호에 발표한다. 여기에서 나혜석은 모성애가 본능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후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며,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1923년의 <모 된 감상기>에서 그는 자신이 “나열(羅悅)[10]의 어미’는 '어미 될 때'로 '어미가 되기'까지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이상한 심리 중에서 '있었던 것을' 찾아 여러 신식 엄마들과 공유하고자 '그렇지 않습디까, 아니 그랬었지요?'라고 묻고 싶다”는 게 이 글의 취지였다. 즉 그는 '엄마'로서 겪는 여러 감정을 다른 엄마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사회가 강요하는 모성애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모 된 감상기>에서 그는 자신의 임신 과정을 고백했다. 그는 입덧을 하면서도 자신이 임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런 중에 뱃속에서는 어느덧 무엇이 움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달은 나는 몸이 오싹해지고 가슴에서 무엇인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가끔은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기쁜 적도 있었지만, 촉망받던 예술가로서의 인생이 갑작스러운 임신출산으로 인해 헝클어져 버린 것에 대한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더 컸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여성이라고 해서 임신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더라고 말한다. 나혜석은 임신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11]
그러나 이 글이 발표되자 지식인 남성들은 반발했다. '백결생'이라는 필명의 논객은 모성애는 숭고한 것이라며 "원래 임신이라는 것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니 여성의 존귀가 여기 있고 여성이 인류에게 향하여 이행하는 최대 의무의 한 가지인 것을 자각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반박했다. 여기에서 그는 나혜석의 임신이나 육아의 의무를 방기하려는 태도라고 규정, 비난했다.[12]
그러자 나혜석은 이에 자신의 감상기가 임신출산을 한 여성들의 솔직한 감정이라고 반박한다. 그래서 자신의 글이 분명 일부 여성들에게는 공감을 얻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한다.[13] 모성애는 의무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자, 일부 지식인 남성과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나혜석은 "모든 어머니가 모성애를 가진 것은 아니며,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가진 것은 아니며, 모든 여성이 모성애를 가져야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사회가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요한다고 반박하였다.
논쟁이 있은 후 훨씬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나혜석의 아들은 자신을 이렇게 적대시한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으며 원망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모성의 신화와 엮어서 생각해 볼 만한 부분.
하지만 나혜석은 이혼 후, 자신의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남편 몰래 아이들을 찾아오곤 했다고 한다. 다행이도 임신과 출산 그 자체만에 회의감을 품었을 뿐이지 적어도 자신의 몸으로 낳은 아이를 적대시하는 수준까진 가지 않았던듯 하다.

4.4. 사랑과 결혼


나혜석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한 혼란스런 식민지의 과도기 상황에서 이상적인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다. 그는 결혼하는 것만이 올바른 선택은 아니라고 평하였다. 결혼 생활 중에는 이를 조심스럽게 내비쳤지만, 1930년 이혼 이후에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혼 제도의 대안으로 독신 생활, 남자 매춘부[14], 시험 결혼,[15] 이성 간 우정과 같은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했다. 그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며 "결코 마음의 구속을 당할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혼에 대한 편견과 색안경에 대해서도, 이혼 역시 하나의 선택에 불과하며 죄악이거나 잘못은 아니라며 반박하였다.
그는 "여자도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 되풀이하면서 여자들의 인권, 권리를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부 글에서 가족애를 다룰 때에는 여성인권에 대한 의견을 모호하게 드러내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 상황에 지혜롭게 맞춘 현실주의적인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의 남자들의 가부장성은 무척 뿌리깊었고, 제도 자체는 개혁할 수 있어도 어릴 때부터 뿌리깊게 새겨진 성향은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연령과 관계없이 평등을 추구한다고 해도 중고생이 성인인 나에게 대뜸 반말을 쓰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16][17]
지금도 금수저 출신이거나 사업이 대박나는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유리천장, 경력 단절 등의 문제로 같은 환경의 남성보다 사회적 제한을 받고 경제력이 훨씬 떨어지기에 독립이 어려운 실정이지만, 저 당시는 여성이 독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데다 가정폭력 등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면 세간의 눈에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 그렇다면 사소한 가정생활에서의 자존심이나 주도권 정도는 조금 접어주고, 대신 남편에게 책임감을 더 부여하여 외도나 일탈을 통제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전략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당시 여성들 중에서 꿋꿋히 주체성을 유지할 여성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신가정이 불화가 컸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다. 즉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해할만한 이야기라는 것.

5. 관련 동영상




6. 여담


  •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을 따라 1년 8개월에 걸쳐 유럽, 미주 등을 여행하였다. 한국 여성 최초의 세계일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무상 출장이 아니라 개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남편 김우영은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게 되고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18]

  • 남편과의 세계일주 여행 중 파리에서 최린을 만나 불륜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김우영과 이혼했다. 그런데 막상 이혼 후 최린은 나혜석을 떠난다. 그러자 나혜석은 최린에 대해 정조유린죄라며 당시 돈 12,000원의 소송을 걸었다. 당연히 이런 짓을 했으니 친가에서는 그녀가 낳았던 아들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 활기차고 재능 많았던 前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하고 무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원래 나혜석은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나 집안에서는 끈질기게 결혼을 강요하여 일본유학 중인 나혜석의 학비지원을 끊었는데, 그녀는 직접 학비를 벌어 복학했다. 그 뒤 자신의 변호를 맡은 김우영의 열렬한 구애에 나혜석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는데,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달라는 것이었고 오픈메리지 형태로 상호 합의하에 관계를 이어 나간다.
  • 일각에서는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시점과 최린을 고소한 시점이 그들이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걷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을 주목하며, 의도적인 것이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19] 따라서 고소 취하의 조건으로 최린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낸 것은 결과적으로 친일파에게 금전적인 타격을 가했다고 볼 수도 있다.[20]
  • 나혜석의 둘째 아들인 김진 전 서울대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김우영은 나혜석을 비난하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는데 제3자나 후대 사람들이 더 나서서 관심을 가지는 격이라고 언급했다.[21] 이를 김진 전 교수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던 마음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 김우영은 1930년대 이후 본격적인 친일을 하면서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도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오명을 남겼다.
  • 배우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이다. 나혜석의 큰오빠 나홍석[22]의 손녀가 나문희. 그리고 나혜석의 막내아들은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김건이다.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 나문희가 그녀와의 일화를 짧게 얘기했는데, 나문희가 5살 때 가족들과 함께 수원으로 갔는데 "당시에 고모는 병환으로 떨고 계셨다"고 한다.
  • 둘째 아들인 김진 전 서울대 교수가 어머니를 회고하는 책을 펴낸 적이 있었다. 기사 책 제목은 <그땐 그 길이 왜 이리 좁았던고>이며, 나혜석의 글귀에서 따왔다고 한다.
  • 능력있는 여자였으나 개인적, 환경적, 사회적인 편견과 벽을 넘지 못하고 사장된 여성의 재능을 가리켜 '나혜석 콤플렉스'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나혜석의 시와 그림은 후대에 남아 감명을 주고, 선구안을 가진 조선 첫 페미니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
  • 그의 조카인 영문학자 나영균 역시 결혼할 때 비슷한 조건을 내세웠다 한다. "살림살이에 얽매이게 하지 말고 공부를 계속하게 해 주시오. 시집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 나혜석의 말년 모습을 목격했으며 여기에 그 자세한 이야기가 있다. 흔히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기사에 따르면 아예 외면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작은오빠 나경석이 워낙 나혜석을 아꼈기 때문에 비참하게 몰락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해서 화를 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였는데, 나영균 박사의 모친, 즉 나혜석의 올케는 이를 안타까워해서 나경석이 집에 없을 때 몰래 집에 들여다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파킨슨병으로 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일주와 유학 등으로 영어를 할 수 있으니 집에 미국인이 왔을 때 통역을 해 주기도 했다고.
  • 나혜석의 작은오빠인 나경석은 독립운동가이자 화가였다. 영문학자 나영균의 부친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대단한 집안.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남매의 부친인 나기정은 친일파로 평가를 받는다. 나혜석 집안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조카인 나영균의 저서 <일제 시대 우리 가족은>에 나와 있다. 링크
  • 소설가 염상섭1924년에 펴낸 단편집 <견우화> 표지엔 소담한 나팔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나혜석이 그린 것이다. 염상섭은 그녀과 친하게 지냈는데, 한때 나혜석을 흠모해서 그녀를 모델로 한 중편소설 해바라기(1923)를 쓰기도 했다.
  • 1931년 5월에 개최된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현대에는 여성 성상품화로 변질되어 페미니즘 진영의 비난을 받지만[23], 초기에는 여성참정권, 여성의 사회진출을 도모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 수원시에서 홍난파 기념사업 이후 수원 출신 예술인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현재 수원시 행궁동 쪽에는 나혜석 생가터를 알리는 비석을 세웠 고, 인계동에는 '나혜석거리'를 지정했다.
  • 신사참배령이 내려지자 그는 불교를 믿는 불자임을 들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사람을 보내 내선일체에 협력하면 진료비와 집, 화실을 제공하겠다고 회유하였지만 거절하였다. 그래서 나혜석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제에 저항한 예술가로 평가되는 부분도 있다.[24] 일제강점기 후반에도 나혜석은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었으나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그 당시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한 사람이 매우 드물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도 창씨개명만으로는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점이 재평가되어 수원시에서는 독립운동가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객관적인 자료 및 증거가 부족해 조사가 더 필요하다는 점, 친일 논란과 관련하여 관점에 따라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는 점에서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25]
  • 그녀의 말로는 다소 쓸쓸하여, 모성애는 없으며 사회적으로 강요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그의 젊은 시절과는 상반된다. 훗날 자식들과의 정으로 가족과 사회적으로 멸시를 당하면서도 파리로 출국하지 않고 국내에 남았다고 한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커서 말년에는 자식을 보고싶어 많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다 무산되었고 요양원에서 탈출하면서까지 자식을 보려 했으나 결국 길에서 쓰러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26] 시신 역시 행려병자 무연고로 처리되었다.
  • 나혜석은 이혼과 자신의 불륜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출판했다. 이 때문에 전남편 김우영은 비웃음거리가 되어 변호사로서 사실상 일을 하지 못하고[27] 다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된다. 다만 김우영은 나혜석과 이혼하기 전부터 을 두고 있었으나, 이는 나혜석의 부정을 부각시키느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 반대로 나혜석의 전 남편인 김우영의 입장도 적자면, 1928년 나혜석이 최린과 파리에서 먼저 불륜을 시작한 것을 알게 된 후 김우영은 짐을 챙기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은 것으로 보인다. 김우영은 부산으로 귀국 후 나혜석과의 사이는 소원해지고 다른 여자와 살림살이를 차렸고, 나혜석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결혼 전 "평생 나만을 사랑해 달라"는 조건을 어긴 것으로 보고 이혼을 거부하였지만, "이혼 불응시 최린과의 간통에 대한 고소를 진행한다"고 말하며 결국 이혼하게 된다. 나혜석이 결혼에 대한 선결조건으로 평생 자신만을 사랑할 것을 내건 것과, 최린과의 불륜은 오히려 남편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는 주장을 미루어 보면, 당시 조선 남성의 통념을 그대로 미러링하여(아내에게는 정절 요구, 본인은 자유연애) 남편에게 적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김우영 입장에서는 원래 그녀가 신여성임을 알기에 사랑하나,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어 이혼한 것이고 나혜석 또한 김우영에게 재산 분할은 받았으나, 결혼 생활의 끝나게 된 과실에 대한 위자료는 요구하지 않은 것을 보면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혼 후 오히려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자신이 지겨워져 결별한 최린에게 위자료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에 대한 명목은 '정조유린' 이었다. 물론 법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아 패소 판결을 받았고, 대중들도 나혜석에게 냉정해지는 원인이 된다.
  • 나혜석이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적인 여성임이 맞지만 너무도 진보적인 언행은 당시 대중들에게 오히려 지탄받는 점을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는 조선 여자 가운데 뼈대있는 부잣집 명문가 가문에서 태어나 돈 걱정없이 일본으로 유학 후 일본 명문 여자미술대학에서 개화된 서양문물을 접하였으며,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의 외교관+변호사 인텔리 남편을 만나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것과 불어, 독어, 영어, 일어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보면 더욱 잘 알수 있다. 그녀가 접한 사회는 100년 후 현재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들도 누리기 힘든 혜택인데 폐쇄된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바라본 나혜석은 신여성을 뛰어넘어 발언에 큰 이질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 특히 남편인 김우영에게 결혼하기 전에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조건들은 '자신을 평생 사랑해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부모 봉양과 육아를 강요하지 말 것', 그리고 '자신의 약혼자였던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줄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과 함께, 최승구의 무덤이 있는 고흥으로 신혼여행을 가 남편과 그 무덤을 참배하면서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나혜석의 모습은 현대인의 시각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만큼, 당시 평범한 조선 여성들이 그녀의 주장에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편대의 평범한 여성들이 처음부터 좋은 환경 좋은 집안에서 금수저 물고 태어나, 굳이 진보적인 여성을 자칭하지 않아도 충분히 진보적으로 행동할수 있는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먹고살기도 빠듯한 여성에게 "결혼도 출산도 하지 말고 그대들의 인생을 살아라"라고 설파하고 다닌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나혜석이 자신의 자식을 두고 한 공개적인 발언은 현대인의 선진적 기준으로는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아동인권적 목적이라기보다는 아이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에는 더했을 것이다.
  • 나혜석은 이혼고백장이라는 글을 통해 약혼 시절부터 결혼생활을 차분하게 회고했다. 이혼사건의 발단이 된 최린과의 관계도 직접 고백했다. 그러나 이 글의 진의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논란이 될 만한 또 다른 발언들에만 관심을 가졌다.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요."와 같은 발언에 집중해서 나혜석을 문란한 여자라고 규정지었다. 하지만 이혼 절차를 밟고 있던 중에 일어난 김우영의 외도와 시가의 횡포, 양육권 및 재산 분할의 불합리성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1] 차미리사와 나혜석은 학교법인 덕성학원의 전신인 조선여자교육회 설립에 참여한 적 있다.[2] 나혜석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기독교계 보수주의 페미니즘의 시초는 바로 김활란이다. 나혜석은 친일반민족주의자로 변절한 김활란의 회유를 거부했다.[3]여자미술대학. 일본의 명문 미술대학 중 하나로, 약칭으로는 '조시비'라고도 부른다.[4]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인 그 '노라'가 맞다.[5] 나계석의 남편은 당시 수원부 유지였던 경주 최씨 기환.[6] 서녀인 나계석에게는 신교육을 시키지 않았다.[7] 이 당시에도 근대적 민사법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으므로 이혼은 가능했다. 그러나 경제력의 부재, 가혹한 사회적 시선, 그리고 스스로 주입된 가부장적 의식 탓에 실제로는 무척 어려웠다. 친정으로 간다? 지금이라면 모를까 그때는 출가외인이다. 아니, 출가외인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쳐도, 친정도 먹고 살기 바쁜데 받아 주겠는가(...) 지금도 미흡하지만 그 때는 보육시설 자체가 없었다. 돈 많은 사람이야 아이 돌보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여자 혼자 10명 가까이 되는 아이를 돌보면서 생계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불가피하게 어린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방에 감금해 두는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사망사건도 흔히 일어났다. 지금만 해도 부득이하게 아기들을 쇠사슬에 묶어 놓고 일하러 가는 제3세계 부모들이 흔하고, 우리나라도 80년대 화재로 방에 감금되어 있던 어린 아이들이 사망한 혜영 용철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소재로 정태춘이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8] 나혜석은 친정이 부자인데다가 실제로 본인도 이혼하고 한동안 친정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살았으니 자신있게 이혼하라고 말할 만하다.[9] 이런 사상은 일본의 만화가 후나토 아카리의 언더 더 로즈의 등장인물 안나를 통해서도 언급이 되는데, 나혜석이 주장한 그대로 자신이 임신한 아기를 징그럽다고 혐오하고 낳았다고 무조건 모성이 생기냐고 주창했다. 작가인 후나토 아카리가 나혜석과 관련이 됐냐면 시대상으로도 전혀 아니고 후나토 아카리 역시 여성인권에 관심이 없다.[10] 나혜석의 딸. '김나열(金羅悅)'이라는 이름은 '김우영(金)과 나혜석(羅)의 기쁨(悅)'이라는 뜻이다.[11] 그럴 거면 왜 임신했냐는 지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때는 지금처럼 피임방법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사실 피임기구가 대거 보급되고 품질이 좋아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 이전에는 제대로 된 피임 방법은 금욕 밖에 없었으니 완벽하게 임신을 막는 건 무리였다. 괜히 보수적 성윤리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는 성관계가 필연적으로 임신의 가능성을 동반하였기 때문. 한창때의 남녀에게 피임기구도 없는 상황에서 결혼해 살면서 성관계를 하지 마라고 하는건 너무 잔인한 처사다.(..) 또한 이 시대에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특히 당시 여성에게 있어 남편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딩크족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만연한데 만약 이 당시 여성이 임신을 원치 않는다 하여 남편과의 동침을 거부한다면 그 자체로 바로 이혼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12] 백결생, <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 『동명』, 1923.2.4[13] <백결생에게 답함>, 『동명』, 1923.3.18[14] 현대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성매매 범죄론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관점이다. 사실 보수도덕주의와 동맹하기 쉬운 성매매 범죄론과 달리 이러한 관점은 지금 시점에도 무척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 당시에는 거의 탕녀 취급 받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보통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가 아니다. 물론 서구에도 그런 페미니스트들은 있었다.[15] 현대 사회의 동거와 동일하다. 1920~30년대에 자유연애도 아닌 혼전동거를 주장했으니 얼마나 파격적이다못해 논란거리였을지 쉽게 예상된다.[16] 물론 연장자에게 존댓말이 기본 관습인 상황에서 반말을 대뜸 쓴다는 것은 '''시비'''를 건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17] 사실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아예 한국인의 언어관습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영어처럼 높힘 표현은 있지만 문법에까지 침투하는 존댓말은 전부 사라지는 방식으로. 실제로 젊은 층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부모와 자신의 선생님들 어른들에게 존댓말을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이미 반말의 허용범위가 시대를 타고 점점 넓어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데 ~해요체는 사실 존댓말이 아니다. 높임 "표현"일 뿐이다.[18] 영친왕이방자 내외의 경우는 일본 정부의 공무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다녔을 때 언론에서 "세금이 심각하게 낭비되고 있다"고 비난이 쏟아졌었다. 사실 세계여행이 말이 쉽지,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귀족이었던걸 감안하면...[19] 나혜석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친일파에게 금전적 타격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가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한 경력이 있다는 것 때문에 수원 박물관의 독립운동가 명단에서 제외되고 독립유공자 서훈도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다.[20] 해당 기사의 필자가 논란 많은 이덕일이지만 적어도 본래 전공인 독립운동사에 관해서는 논란이 없다.[21] 본인이 이미 결혼 전 약속을 했고, 본인이 먼저 바람을 피운 것도 있어서 찔려서 그랬을 수도 있다.[22]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나기형에게 입양되었다. 당시에는 자손이 없으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녀 많은 친척 쪽의 아이를 양자로 호적에 올리는 게 자주 있는 일이었다.[23] 1998년 미스코리아 미 출신의 모델 이정민이 "정치인으로부터 성상납 요구를 받고 회의를 느껴 연예계를 떠나 있었다"고 폭로한 적도 있다.[24] 당시 일제는 종교 여부와 상관없이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을 박해하였고, 심지어 투옥이나 순교시키기까지 했던 시절이다.[25] 그녀가 독립운동가라고 얘기하기에도 확실한 자료가 부족하고, 친일이라고 하기에도 불분명한 상황이기 때문에 일단은 판단 보류의 상태이다.[26] 하지만 나혜석의 차남 김진의 기록에 따르면, 몇번 찾아 와서 만난적은 있었다. 그러나 10여년이나 모른 체 외면했던 어머니가 뜬금없이 나타나자 아이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김진은 생후 3개월 만에 부모가 2년 가까이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3살이 되어서야 처음 어머니의 얼굴을 봤고, 이후 바로 이혼했으니까 전형적인 낳기만 하고 키우지는 않았던 아이다. 아이들도 아버지와 새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나 안타까움은 표현했는데, 어머니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을 대하듯 중립적인 입장이었다.[27]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사생활의 평판이 업무와 직결됐으며, 부인이 바람났다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진 김우영에게 아무도 소송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