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 이 중 섭'''
李仲燮

<colbgcolor=#d84e34> '''출생'''
1916년 9월 16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現 평안남도 숙천군 송덕리)#
'''사망'''
1956년 9월 6일[1] (향년 39세)
서대문적십자병원
'''국적'''
일본 제국 [image]북한 [image]대한민국 [image]
'''본관'''
장수 이씨
'''학력'''
테이코쿠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 중퇴
분카가쿠인 미술과 졸업
'''직업'''
화가
'''데뷔'''
1941년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수상'''
1978년 은관 문화훈장
1937년 자유미협전 태양상
1. 개요
2. 상세
3. 가족
3.1. 가족 관계
4. 여담


1. 개요


20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한 화가.

2. 상세


'''주요 작품'''
[image]
[image]
'''황소, 1953년'''
'''흰소, 1954년'''
살아 생전 를 많이 그렸다. 어렸을 때부터 소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그림 그릴 때는 하루 종일 소만 바라봤다고 한다. 아내인 마사코 여사(이남덕)의 증언으로는, 소를 관찰하다가 소 도둑으로 몰려서 부리나케 도망가야 했던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흰소'가 있는데, 이것은 백의 민족이었던 대한민국을 의미했다. 그림을 보면 소가 말라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는데, 당시 6.25 전쟁 이후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중섭의 그림 '황소'는 2006년 35억 ~ 45억원 가격대로 경매에 오르기도 했는데[2], 정작 생전에는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6.25 전쟁을 직격탄으로 맞은 세대라. 제주도로 피란 간 때의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지만 어쨌거나 안습. 그래도 이 피난 생활이 이중섭에게는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삶이었다고 한다. 서귀포시에는 그가 가족들과 피난 생활을 했던 집이 아직도 남아 있고, 당시 집주인이셨던 김순복 할머니가 생존해 있다.
부두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다가 이마저도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배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간신히 1955년에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시회를 열었지만, 1년 뒤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황달정신병 등이 겹쳐 향년 4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친구들이 병문안을 가자 며칠 전에 죽은 이중섭의 시체가 침대 위에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죽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라고는 병원비 독촉장이 전부였다고. 평소에 친한 사이였던 3살 아래의 시인 구상이 그의 시신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렀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3]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사후에는 그 진가를 인정받아 작품이 고가에 거래된다는 점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비교되는 예술가다.
단, 이중섭이 고흐처럼 평생 불우하고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개척교회 목사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하층민들과 함께 살아간 고흐와는 다른 케이스다. 집안이 장남도 아닌 아들을 일본 유학까지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부자라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6.25 전까지만 해도 이중섭은 오히려 매우 풍족하게 살았다. 원래도 부잣집이었고[4] 거기에 이중섭의 형이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라서 젊은 시절의 이중섭은 그림 팔아 돈을 벌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형이 지주, 자본가라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음을 맞으면서 가세도 크게 기울게 된 것이다. 게다가 부유한 집 도련님이었던 이중섭은 이런 상황에서 악착같은 생활력을 보여주지도, 씀씀이를 잘 줄이지도 못했다. 담배갑 은박지가 가난한 이중섭의 상징처럼 남아 있지만, 사실 그렇게 은박지로 싼 담배 자체가 당시엔 돈 없으면 사기도 힘들었던 물건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말년의 이중섭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릴 수 밖에 없게 되었지만.#
고가의 거래에 대한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다. 이중섭이 피난 생활을 했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는 그의 작품들을 모은 전국 유일의 이중섭 미술관이 있는데, 2002년 개관했을 당시 진품을 단 한 점도 소장하지 못한 채 레플리카(복제화)를 전시해야 했다는 거다. 2017년 현재도 이중섭 미술관의 소장품 중 '황소' 등 이중섭의 대표작 상당수는 레플리카 신세이다. 6.25 전쟁 당시 월남하면서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고향에 그대로 남은 노모에게 맡기고 왔기 때문에 작품의 절반 이상은 현재 구할 길이 없다. 이외에도 그는 전쟁 통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은박지 위에 칠하고 닦으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든다. 그래서 은박지 작품 3점은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소식이 들려온 지 며칠 뒤에 죽었지만. 이러다보니 박수근과 함께 가장 위작이 많은 한국 화가이기도 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총후 화가(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로 일한 흑역사가 있다. 물론 원해서 그런 건 아니고, 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형[5]이 총후 화가로 만든 것이었다. 오히려 이중섭은 일제 시대에도 언제나 한글로 서명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오산 학교 출신이었다. 당시 오산 학교의 미술 선생인 임파 임용련(1901-?)이 주장했던 '조선 사람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 한다'라는 연설을 듣고 깊게 감명받았다고.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유학파 출신이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할 당시 아내를 만났으며, '아고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같은 반에 이(李) 씨가 세 명이나 있었는데[6] 턱(일본어로 '아고あご')이 길었기에 저런 별명(아고리=あご+李)이 붙었다고.
해방 직후에는 강제적으로 공산당 동맹에 가입했는데, 회의에 다녀올 때마다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밤에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맥없다"(맥 빠진다)라고 호소했다고. 공산당에서 원하는 그림과 이중섭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맞지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6.25 전쟁 당시 폭격을 견디지 못하고[7] 남쪽으로 도망쳤다. 이때 노모에게 당시 그린 그림 대부분을 맡기고 왔다.

3. 가족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지주인 아버지 이희주(李熙周)와 어머니 안악 이씨(安岳李氏)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외가가 부자여서[8], 외조부 이진태는 서북 농공은행장, 초대 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할 정도였다. 이중섭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유복자였지만 이런 외가의 재력으로 유복한 생활을 꾸려갈 수 있었다. 또한 형 이중석도 사업수완이 있어서 원산으로 건너가 이곳 최초의 백화점 겸 문방구인 '백두상점'을 열어 부를 일구었다.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은 원산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다. 시인 구상과 절친했던 것도, 구상 또한 어렸을 적에 가톨릭 신부이던 형을 따라 원산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평양 종로보통학교[9],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도일, 도쿄 무사시노에 있던 데이코쿠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에 진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1936년 분카가쿠인(文化学院)에 입학한다. 이곳은 경직된 일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감성적인 인간을 키워낸다는 이념 아래 설립되어 일본 최초의 남녀 평등교육을 실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그는 같은 미술부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를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당시 이중섭은 굉장히 미남에다가 운동, 노래도 잘 하고 그림 실력도 탁월해 학교의 인기스타였다고 한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연애 중에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아고리'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턱이 길었던 이중섭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요즘말로 말하면 '턱돌이' 비슷한 셈. 또한 '아스파라거스'는 둘이 하얀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자주 같이 먹고는 했는데, 길쭉한 아스파라거스와 마사코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이중섭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야마모토 마사코의 집안도 그녀의 아버지가 미쓰이창고 주식회사[10] 고위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마사코의 집안에서 이중섭과의 교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마모토 마사코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부모님은 결혼을 한번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화가로 먹고살 수 있겠나' 걱정은 하셨지만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바보였어요. 저를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어요.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프리미엄조선》 〈이중섭과 이남덕에 대한 왜곡된 사실들

둘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1943년 전람회 준비를 위해 귀국했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원산에 계속 체류했다. 그러다가 1944년 12월 이중섭이 가족의 결혼 승낙을 받고 야마모토 마사코를 한국으로 불러온다. 1945년 당시에는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미군이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 일본 연안 해상교통을 옥죄던 시기였으나, 마사코는 겨우 배를 얻어타고 부산,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올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결혼식을 올렸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이들은 이후 아들 셋을 낳았으나, 첫째 아들은 생후 1년도 안 되어 디프테리아로 잃고 둘째(이태현, 1947년생, 2016년 후두암으로 별세), 셋째 아들(이태성, 1949년생)이 생존하고있다.
이중섭 가족의 비운은 북한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그의 형 이중석이 자본가 계층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6.25 전쟁이 혼전으로 치닫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원산에 일군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둔채 알거지로 흥남 철수에 동행하게 되며 곤궁한 삶을 살게 되었다. 부산에서는 너무도 살기 힘든 나머지 1951년에 제주도로 건너가 11개월간 머무른다. 여기서 그의 가족은 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제주도의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웠다지만 역시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서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그러던 중 1952년에 장인의 부고를 접하면서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마사코와 둘째 아들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상태이기도 했고,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면서 그녀에게 유산을 남겼는데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원래는 온 가족이 함께 도일하려고 했으나, 당시에는 한일간 국교 단절이 이어진 상태로 이중섭은 여권이 없어 가지 못했다고 한다.
1953년 7월, 이중섭은 친구인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마사코의 어머니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 주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에게 부탁한 게 아니고,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 '''농림대신'''에게 부탁해서 보증해 주었다고.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했던 이중섭을,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사람 역시 장모다. 이들 네 식구는 1주일 동안 히로시마의 여관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이것이 이들 가족이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후 죽을 때까지 1년 동안 가족과는 만나지 못한 채 가족과 다시 재회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홀로 막노동을 하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이로 인해 그가 간간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나 그림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고 한다. 아내는 2021년 현재 99세로 도쿄도에서 거주 중.
한편 신혼 초 첫째 아들을 잃고 크게 상심했으며, 때문에 아들이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발가벗은 채[11]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들은 그저 '벌거벗었다'는 이유 때문에 춘화로 취급되어 정부에서 철거해 버리기도 했다. 어린이에 대해서 너무한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작가 루이스 캐럴같은 양반이 때때로 페도필리아로 비난받는 걸 생각하면 그다지 가혹한 처사는 아니다.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그림에는 복숭아 등 동양화에서 장수나 복을 상징하는 사물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복숭아는 죽은 아들이 천국에서 따다 먹으라고 천도복숭아를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

3.1. 가족 관계


  • 증조부: 이동규 (1826년~1898년)
    • 조부: 이창희 (1856년~1898년)
      • 아버지: 이희주 (1886년~1918년)
        • 형: 이중석 (1912년생~)
형수: 김의녀
  • 조카: 이영진 (1935년~2016년)
조카며느리: 강순남 (1946년생)
  • 조카손녀: 이지연 (1970년생)
조카손녀사위: 공병인 (1962년생)
  • 조카손녀: 이지숙 (1972년생)
조카손녀사위: 이경광 (1962년생)
  • 조카손녀: 이지향 (1974년생)
조카손녀사위: 심재현 (1970년생)
  • 누나: 이중숙 (1914년생~)
  • 본인: 이중섭 (1916년~1956년)
배우자: 야마모토 마사코 (1921년생~)
  • 장남: 이태현 (1947년~2016년)
  • 차남: 이태성 (1949년생)

4. 여담


  • 그의 사후, 이중섭의 차남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2005년 3월 16일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2005년 10월 가짜로 밝혀져서 파장이 일어났다. 이씨가 한국고서 연구회 고문 김용수와 함께 공모해 사기를 친 것. 이를 기점으로 이중섭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이 있었다. 한국미술품평가원에 따르면 이중섭이 위작이 가장 많은 작가라고 한다. 187건의 감정 중 무려 108건이 위작이고 진작은 77건, 감정 불능 2건이었다. 의뢰된 작품의 58%가 가짜였던 셈이다. #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전망대를 조성했는데, 알록달록한 달동네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 논란거리가 하나 있기도 한데, 학창 시절에 졸업앨범에 넣을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일본에서 불덩이가 한반도로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교사들 사이에 논란이 되기도 했고, 그중에는 단순히 화가 자신의 세계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뿐이라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하도 논란이 되어서인지 결국 졸업앨범 제작은 취소되었다.
2012년 4월 10일 탄생 96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구글 두들. '흰소'를 로고화했다.
  • 이중섭은 서명을 할 때 항상 풀어쓰기로 서명을 했다고 한다.

[1] 오전 11시 45분[2] 최근에 47억원에 낙찰되었다. 출처[3] 후배 조각가 차근호가 1주기 때 돈을 갹출해 세운 조각상이 있으며, 유골의 절반은 아내 이남덕 여사가 도쿄의 야마모토 가족묘로 모셔갔다. 따라서 망우리에는 유골의 절반만 있다.[4] 부친이 요절하긴 했지만, 집안 자체는 지주 계급이었고, 외가는 심지어 은행장을 배출한 집안이었다.[5] 당시 상당한 권력자였으며, 해방 이후 부르주아로 몰려 비참한 꼴을 당했다.[6] 일본에서는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서로 성씨로 부른다.[7] 원산, 평양, 남포 등은 당시 UN군의 표적 제 1순위였다. 한 미군 장교는 "원산에서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산에서 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라고 회고했을 정도.[8] 조운면 송천리가 안악 이씨 집성촌인것도 어느 정도 관련 있을 것이다.[9] 동기생으로 채병덕(1916~1950, 육군총참모장 역임), 이용문(1916~1953, 남부지구경비사령관 역임), 오영진(1916~1974, 극작가) 등이 있다.[10] 일본 3대 재벌 가운데서도 1위였던 미쓰이그룹의 물류회사이며, 지금도 존재한다.[11]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