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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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足利 義詮(あしかが よしあきら'''


1. 개요


무로마치 막부의 제2대 쇼군. 1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주로 가마쿠라에 머물며 남조와의 전투에 임했다.
1349년, 부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명으로 상경하여 막부 정치에 참여했으며 1358년 부친의 뒤를 이어 쇼군에 취임했다. 쇼군 취임 후에도 교토 공방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를 진두지휘했다. 1367년 쇼군직을 아들 요시미츠에게 물려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2. 생애



2.1. 가마쿠라 시대


1330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1333년, 부친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 공략을 위해 상경했을 때, 인질로 가마쿠라에 머물렀다.
이윽고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들자, 요시아키라(당시의 이름은 센주오)는 가마쿠라를 탈출하여, 다카우지의 대관(代官)으로서 불과 '''4세의 나이로 가신단을 이끌고 가마쿠라를 공략했다'''. 다만, 물론 당연히 4살 어린아이였던 요시아키라가 지휘를 직접 한 것은 아니고 다카우지의 적장자 자격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던 일종의 '명예 지휘관'이었다. 실제 지휘는 아시카가 가문의 휘하 가신들이 맡았다.
이후 요시아키라는 주로 가마쿠라에 머물며 교토의 다카우지와 호응하여 남조와의 전투를 전개했다.

2.2. 무로마치 시대


1349년, 막부 내에서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집사인 고노 모로나오와 다카우지의 동생인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하자, 다카우지는 요시아키라를 교토로 불러들여 막부 정치에 참여토록 했다. 그리고 다다요시가 실각하자 요시아키라는 다다요시가 담당했던 행정 전반에 대한 정무를 담당했다. 1352년에는 반제령(특정 지역에 대해 수확물의 절반을 병량미로 납입케 하는 법령)을 반포하여 동란기의 재원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1358년, 요시아키라는 다카우지의 뒤를 이어 쇼군이 되었다. 쇼군 취임 초기에 남조와의 군사적 대립은 여전히 치열했으며, 막부 내의 분열도 일어나 혼란이 가중되었다. 1362년, 요시아키라는 공석이었던 간레이(쇼군을 보좌하며 막부의 정치를 총괄하던 직책)에 시바 요시유키를 임명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했으며, 이듬해에는 오우치 가문과 야마나 가문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밖에 남조와의 강화 협상도 진행되는 등 정국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365년에는 호조 다카도키 이하 가마쿠라 막부 측 전사자들의 33주기 불사를 성대하게 개최하기도 했다. 일본 사회에서 사자는 33주기를 끝으로 몰개성적인 조령(祖霊)으로 전환된다고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불사는 대대적으로 거행되었다. 요시아키라는 1367년 장남 요시미츠에게 쇼군직을 물려주는 한편,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어린 쇼군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정권 이양이 완료된 직후, 요시아키라는 병사했다.

3. 여담


행적을 보다시피 나름대로 능력도 있었고 막부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지만 수명도 길지 않았던 데다가 막부의 창건자인 아버지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거물 정치가 중 하나였던 아들 사이에 끼여 존재감은 약한 편. 어쩐지 조선의 현종이나 프랑스루이 13세 같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