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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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로마치 어소'''[1]
1. 개요
2. 역사
2.1. 무로마치 시대의 시작
3. 시대적 특성
4. 역대 쇼군
5. 막부 멸망 이후
6. 대중 문화


1. 개요


'''室町時代(むろまちじだい'''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일본을 통치하던 시대.
주로 지명 무로마치를 따서 무로마치 시대라고 부르지만, 당시 막부의 장군(천하인)이 아시카가 씨(氏, 우지)라서 아시카가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시카가는 미나모토의 방계에 해당하는 우지였기 때문에 쇼군직을 무리없이 계승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시기를 언급하는 조선이나 명나라의 사서에서 아시카가의 쇼군을 '원(源)○○'로 부르기도 하여 좀 헷갈릴 수 있으나, 이는 조선명나라에 보낸 일본 측 외교문서에서 쇼군들이 자신의 성을 그렇게 칭했기 때문이다. 사료에서 이름을 대조해 보면 쉽게 구분이 가능하여 큰 문제는 없다. 이후 도쿠가와 씨가 쇼군직을 계승했을 때도 외교문서상으로는 '덕천'씨가 아닌 원씨로 칭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일본은 원씨(源, 겐지의 무로마치 막부)가 다스리다가, 평씨(平, 타이라 씨/헤이시)의 치세가 되었다가,[2] 다시 원씨의 지배로(에도 막부) 회복되었다고 인식하기도 했다. 한국사고려 말엽에서 조선 중기와 겹치는 시기.
학계에서는 실제로 무로마치 시대가 언제 시작되고 끝났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며 무로마치 막부가 존속한 1336년~1573년의 240여 년을 전부 무로마치 시대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1467년의 오닌의 난이나 1493년의 메이오 정변에 무로마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이는 그 시점에서 아시카가 쇼군가의 실권과 권위가 상실되면서 사실상 전국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무로마치 막부 정권의 시작에 대해서도 남북조시대가 끝난 1392년[3]이 되어서야 비로소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즉 가장 짧게 잡은 설을 따르면 100년도 안 되는 70여 년의 매우 짧은 시대인 셈. 그나마 전성기는 요시미츠의 시대인 1368~1408의 40여 년 정도. 세분하면 남북조-무로마치-전국시대로 보면 된다. 명목상으로는 남북조와 전국은 대부분 무로마치 시대에 포함되지만 쇼군 정권이 일본 전국에 실권을 행사한 기간은 이 정도다.

2. 역사



2.1. 무로마치 시대의 시작


시작은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 덴노에 반발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천황의 혈통 중에 한 사람을 고묘 덴노로 옹립하여 천황 집안이 남조와 북조로 나뉘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무로마치 시대 중에서 분리해서 따로 남북조 시대라고 불리우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무가의 지지를 얻은 아시카가가 옹립한 북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천황을 갈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다카우지는 새로 천황으로 옹립한 고묘 덴노로부터 최고위의 관직인 다이나곤세이이다이쇼군의 자리를 받고, 이것으로 명실공히 일본의 실력자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했다. 다카우지가 정권을 장악한 1336년부터 1573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義昭)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쫒겨날 때까지 15대의 쇼군이 배출되었다.

2.2. 요시미츠 치세


무로마치 막부의 리즈 시절은 대략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치세.
이 쇼군 치세에 남북조가 통일되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어원이 되는 교토의 무로마치 어소도 그의 치세에 지어진 것이며, 그 유명한 금각사(킨가쿠지)도 이때에 지어졌다. 금각사는 화려함에 걸맞게 무로마치 막부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또한, 일본의 전통 극 중 하나인 노가쿠도 요시미츠 대에 제아미에 의해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막부의 실질적인 창업자는 아시카가 요시미츠라고 봐도 좋은 셈. 그만큼 정치 수완도 상당히 뛰어난 걸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요시미츠는 천황좌 찬탈 의혹[4]이 있고 일본사에서 5세기(왜5왕시대) 이후 유일하게 중국에게 책봉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제가 확립된 근대 일본 사회에서는 그 평가가 굉장히 박했다.[5]

3. 시대적 특성


오랫동안 지속된 전란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크게 성장하여 후의 일본의 기틀을 다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분에 연연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주류세력인 무가부터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었던 점과, 더불어 오랜 전란으로 인재를 쓸 때 신분으로 가릴 수 없게 된 점 등이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실력만 있으면 출신 성분은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자, 반대로 실력이 없으면 윗 사람이라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서 후의 센코쿠 시대에는 가신들이 다이묘를 끌어내리는 꼴을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하극상이 만연해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고제 유방의 말을 빌리자면 반역하지 않는 신하가 바보 되는 세상인 셈[6]
한편으로 이 시대에는 무라(村)[7]가 구체화되기 시작하고 농민 봉기인 잇키가 대두되는 등 서민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는 소와 말을 이용한 경작과 모내기의 확산 등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시장, 도시의 확산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금각사(킨카쿠지)에 버금가는 은각사(긴카쿠지)도 이 시대의 산물.
또한 전기 왜구가 들끓던 시기라 3차례에 걸친(고려 창왕-조선 태조-세종) 대마도 정벌이 이 시기 초중반에 이루어졌다.

4. 역대 쇼군




5. 막부 멸망 이후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마지막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 후, 요시아키의 두 아들이 모두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고 환속(還俗)하지 않은 채로 사망함으로써 요시아키의 혈통은 끊어진다. 그렇다면 이 아시카가 씨의 후손은 현재 전혀 남아있지 않을까? 아니다. 현재도 아시카가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일본 전역에 몇 천명 정도 살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해서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일까?
사실, 12대 쇼군 요시하루의 동생이자 14대 쇼군 요시히데의 아버지, 요시아키의 숙부인 아시카가 요시츠나(足利義維, 1509~1573)[8]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그는 아시카가 씨(氏)의 유력 방계 가문인 히라시마(平島) 가(家)의 조상이다.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 후, 14대 쇼군 요시히데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스케(足利義助, 1541~1592)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에게 의탁함으로써 히라시마 가는 대대로 이에마사의 영지인 도쿠시마 번(德島藩)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게 된다. 이 히라시마 가의 당주들은 지난날 무로마치 막부 쇼군의 지위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오랜 세월 동안 일개 사무라이로 살아가야만 했다. 도쿠시마 번의 영주들은 히라시마 가를 무로마치 막부의 후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재기하여 세력을 키울 것을 우려하여 계속 견제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봉록이 줄어들어 무사 중 하급 수준도 모자라 거의 평민 수준의 생활을 근근이 이어 나갈 정도가 되었다. 요시스케의 손자 아시카가 요시츠구(足利義次, 1596~1680)부터 아시카가 성을 히라시마로 고쳤다.
도쿠시마 번 입번(入藩) 이후 약 200여 년이 지나서 히라시마 가 당주인 아시카가 요시토시(足利義俊, 1795~1876)[9]는 메이지 유신 이후 대다수의 쿠게다이묘들이 화족의 신분을 얻을 때 지난 날 강대한 위세를 부리던 무로마치 막부 가문의 정통 후손[10]임을 내세우며 그 자신도 화족의 신분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앞서 언급했듯이 무사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11] 궁핍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화족 신분 취득에 실패하고[12] 요시스케 이후 대대로 살던 도쿠시마 번을 떠나 교토로 이주하여 평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막부의 주인으로 군림했던 아시카가 가문이 무사만도 못한 한낱 평민으로 전락한 것이었다.[13][14]
이후 요시토시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타카(足利義孝)가 당주 자리를 물려받았으며 아시카가-히라시마 가 현 당주 아시카가 요시히로(足利義弘)는 요시타카의 증손, 현 아시카가 씨 종친회 특별 고문을 맡고 있다.

6. 대중 문화


어쩐지 사극, 만화, 영화, 게임, 소설 등 여러 창작물에서 실컷 우려먹는 헤이안 시대,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에 비해 대중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시대이다. 이 시대를 다룬 작품이라면 막부 창건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대립한 쿠스노키 마사시게닛타 요시사다 같은 이들을 다룬 <다이헤이키(太平記)>를 소재로 한 사극이나 소설이 있는 정도. 근데 다카우지보다는 마사시게나 요시사다의 인기가 더 많다.(…)
이는 위에 언급된 대로 다카우지가 일본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천황과 대립각을 세운 탓도 있고, 더욱이 3대 쇼군인 요시미츠는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일본 국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영락제의 국서에 대해 요시미츠가 '''신(臣)'''이라고 칭한 답서를 올렸을 정도. 거기다 자신의 아들을 천황의 양자로 들이는 식으로 자신의 가문을 천황으로 올리려고 했다. 그의 사후 천황 측의 반발과 집안 내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이런 모습들이 아무래도 일본인들 눈에 좋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 거기에 무로마치 막부 말기는 센고쿠 시대와 겹쳐서인지 이 막부의 리즈시절은 잘 다뤄지지 않는다.
그나마 이 시대 인물 중 대중적으로 자주 다뤄지는 인물은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승려센코쿠 시대 초창기에 사망한 황실 출신의 승려[15] 잇큐 소준(一休宗纯).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긴 승려로 망나니 장군이나 미토 코몬 못지 않게 일본에서 역사 인물을 소재로 한 창작물의 단골 소재다.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고 덕분에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이 흔히 잇큐 상(一休さん)이라고 부를 정도로 대중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무로마치 시대, 도로로닌자보이 란타로는 무로마치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일본의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나 서브컬처에서는 자주 다루지 않던 시대였으나, 놀랍게도 전국 바사라 시리즈의 최신작으로서 발표된 전국 바사라 4의 무대가 무로마치 시대가 될 예정이라고. 전작인 전국 바사라 3가 전국시대 말기인 세키가하라 전투를 다루었기 때문인지, 시대 설정을 아예 전국시대 이전으로 돌려버리는 것 같다.

[1] 현재의 교토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가 위치한 곳에 있었다.[2] 오다 노부나가는 헤이시를 자칭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약간 복잡한데 원래는 평씨를 칭했다가 잠깐 등씨(藤)를 칭했다가 나중에는 풍씨(豊)를 칭하게 되었다.[3] 한반도에서 조선이 건국된 연도와 동일하다.[4] 요시미츠의 죽음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병사했지만 조정에서 손을 쓴 것이라는 음모론도 있다고 한다. 뒷날 혼노지의 변에도 조정이 배후였다는 설과 비슷한 케이스.[5]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 및 유신 주도세력들은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북조 계통임에도 대체로 남조를 진짜 정통으로 보는 시각을 갖고있었다. 그래서 남조 계통 종가들이 이후 일본귀족(화족)에 편입되어 고위 귀족 가문이 된다.[6] 대표적으로 무로마치 시대보다 뒤의 전국시대 일이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씨는 본래 시바씨의 가신이었으나 시바씨의 실권을 뺏어 다이묘가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 사후 그의 가신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키요스 회의를 통해 오다씨의 실권을 뺏고 자기가 천하인이 되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2인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씨의 힘을 꺾어놓은 뒤 오사카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가를 멸망시키고 완전한 천하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시바씨의 실권을 뺏은게 오다씨고 그 오다씨의 실권을 뺏은게 도요토미가 그 도요토미가의 실권을 뺏은게 도쿠가와가라는 얘기다. 천하를 다 가진듯했던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씨도 천하를 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요토미가도 한번 삐끗하자 빛의 속도로 몰락했다는데서 보듯 이 시대가 얼마나 힘으로만 돌아가는 시대였는지 알 수 있다.[7] 일본의 전통적인 마을 구성.[8] 호소카와 하루모토, 야나기가와 카타하루, 미요시 모토나가 등에 의해 쇼군격으로 올려졌으나 공식적인 쇼군이 되지는 못했다.[9] 그의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모토(足利義根, 1747~1826)부터 히라시마 성에서 아시카가 성으로 복귀했다.[10] 정통 후손은 요시아키의 자손이 해당하나, 이미 요시아키의 자손이 그 아들 대에서 끊어졌기 때문이다.[11] 엄연히 무사는 번의 관청에 근무하며 봉록을 받는 관리의 신분이므로 농업 및 상업으로 자급자족하는 평민과는 확연히 대비된다.[12] 화족의 신분을 얻는 데에는 가문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재력도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 아무리 귀한 가문이라도 가난하면 남작 작위도 얻기 힘들었다.[13]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의 평민층은 일부 부농과 상인들을 제외하면 생활 수준이 별로 좋지 못했다. 한반도 해안가에 자주 침입해 식량 및 가축을 약탈했던 왜구가 대부분 평민, 천민들로 구성되었던 사실을 보면 이해가 빠르다.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다면 굳이 식량을 약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4] 이렇게 지난날 일본 역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근대에 들어서 급속하게 몰락한 또 다른 가문으로 조소카베(長宗我部)가 있다. 이 가문의 네임드인 조소카베 모토치카(元親)와 조소카베 모리치카(盛親)은 일본 전국시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아는 명장들이지만 모리치카 사후 도사(土佐) 지역의 맹주로 군림했던 조소카베 씨의 권력이 야마우치(山內) 씨로 넘어가면서 가격(家格)이 하급 사무라이로 전락하고 그나마 살아있던 일부 조소카베 씨의 일원들은 성씨를 시마(島)로 바꾸고 숨죽이며 몇 백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쪽은 메이지 유신 이후 괜찮은 대우를 받았기에 그나마 아시카가 쪽보다는 상황이 나았다.[15] 막부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출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