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대장군

 

1. 개요
2. 역사
2.1. 천황과의 관계
2.2. 겐지와 타이라의 대결
2.3. 한국의 관점에서
3. 역대 쇼군
4. 오고쇼
5. 유사사례
6. 여담
7. 같이보기


1. 개요


征夷大将軍(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세이이타이쇼군, 정이대장군)
전근대 일본 율령제에서의 영외관/국정 최고권력자이자 무가정권의 최고 통치자로써, 줄여서 쇼군이라 부른다.[1] 1185년부터 1867년까지 일본 정부의 수장이며 최고권력자였다.[2](중세 일본의 관위와 역직 참조) 사실상 쇼군은 국가원수나 다름없다.[3]
오랑캐를 정복한다는 의미의 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동쪽의 이민족, 에미시를 토벌하는 직책이었고 각각 정적대장군과 정서대장군이 있었다.
원래 '일본'의 권력 구조는 천황이 직접 다스리는 것을 기본으로 했으나 점차 왕족의 집안 또는 공가(쿠게)의 유력자가 집정을 하거나, 섭정(셋쇼)이나 관백(칸파쿠)을 독점하는 후지와라 가문에 의한 셋칸정치로 바뀌었다. 무인들[4]은 12세기까지도 문관이나 문벌 집안에 비해 한 단계 아래 취급을 받았으나, 다이라, 미나모토 씨족 등 무인들이 정치 전면에 대두되면서 교토 왕궁을 두고 서로 전쟁을 벌이는 양상으로 발전했다.[5] 겐지와 헤이시는 왕가의 분가 출신이었지만 수도의 문인 계열이었던 정통 귀족인 후지와라, 타치바나와 달리 무가 집안이었다. [6]
교토는 아무래도 여러 정치 세력이 오랜 뿌리를 갖고 있고 누가 정권을 잡아도 항상 정치 불안정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7] 자기 근거지로 정치 중심을 옮겨 정권의 안정과 항구적인 집권을 노렸다. 이를 막부 개창, 혹은 막부 개막이라고 한다.
고대 중세를 통틀어 일본 정치사의 특이한 점은 그 어떤 누가 정권을 잡아도 천황제 자체를 건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8][9] 가마쿠라 막부로 시작된 무가 정치는 무로마치 막부를 거쳐, 에도 막부까지 이어지는데, 마치 꽉막힌 압력솥이 터지는 것처럼 정권 전환기마다 일본은 엄청난 혼란과 사상자를 낳고 난세를 겪게 된다.
일반적으로 막부의 정이대장군은 미나모토 씨의 조상을 가진 집안만이 맡을 수 있었다고 인식되고 있다.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라는 진짜배기 왕가의 분가 출신이었고,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칭이었지만[10] 공식적으로는 겐지였다. 미나모토(겐지)만이 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 시절 간무 헤이시였던 호조씨는 집권만 했을 뿐 정이대장군이 되지 못했으며, 가마쿠라 막부의 세이와 겐지가 아닌 다른 세이와 겐지 가문들에 의해 멸문당하고, 그중 하나였던 아시카가씨가 무로마치 막부를 건설한다. 무로마치 막부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사라지고,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었다. 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실제로는 가마쿠라 막부 당시 미나모토씨가 아닌 후지와라씨 계통 셋칸가나 왕가의 친왕이 정이대장군에 오른 사례도 있었으므로 미나모토씨만이 쇼군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11] 그러나 정이대장군이 되기 위한 신분적 조건이 까다로운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디고 꼭 겐지만이 정이대장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딴 거 없이 권력으로 겐지의 분파에 입적하여 정이대장군이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3년 후 정이대장군에 취임했다.
다만 일반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 신분이 너무 낮아서 정이대장군이 될 수 없었다는 인식이 강한데 겐지의 혈통만이 정이대장군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논리는 깨진지 오래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과 막부가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막부를 멸망시킨 오다가의 가신이였을 때부터 본 경험자이므로 정이대장군과 막부개창에 크게 흥미가 없었고, 정이대장군 보다도 더 혈통 따지고 오르기 힘들고 상위에 있는 간파쿠에 오른 인물이다. 정이대장군이 무가의 수장이라면 간파쿠는 덴노를 대리하는 자리이고 미나모토는 커녕 미나모토보다 격이 높은 후지와라 가문 중에서도 종가 중의 종가들인 오섭가(고노에, 타카츠카사, 쿠죠, 이치죠, 니죠) 출신들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낮은 출신 신분은 후지와라 오섭가 중에서도 종가인 고노에 가문의 양자로 입적함으로써 해결하려고 하였다. 만약 히데요시가 아시카가 가문 또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직 계승을 주장 가능한 가문의 양자로 입적했을 경우 히데요시 또한 쇼군에 올랐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신 가문인 마쓰다이라 또한 낮은 신분 출신이었던 히데요시 보다는 한 지역의 호족이었으므로 격이 높긴 했지만 결코 쇼군자리를 넘볼만한 가문 배경이 아니었다. 이에야스 또한 무로마치 쇼군의 계승권을 주장 가능할 위치였던 닛타 가문에 입적되는 방식으로 미나모토씨를 칭했다. 정리하자면 '''히데요시는 애당초 명분이 앞서고 지위가 더 높았던 간파쿠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쇼군직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 오르지 못해서 쇼군 자리를 차지하지 않은게 아니다.'''
어느 막부든 교토 왕궁의 천황일본 귀족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늘 긴장 관계에 있었다. 에도 막부의 쇼군은 일부가 일찍 퇴임하여 오고쇼에 올라 막후에서 정권을 움직이기도 했다.
1867년 대정봉환으로 일본 역사의 마지막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하면서 무가 정치는 막을 내린다. 여담이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왕가와 사이가 원활한 편이었고, 빨리 항복한 덕분에 도쿠가와 가문은 멸문되지 않고 왕가와 혼인을 맺는 등 권세를 이어올 수 있었다.

2. 역사


고대에는 이쿠사노키미라 불렀으며, 율령제 하에서 병사 1만 명에 대하여 쇼군 1인, 부쇼군 2인을 두고, 3개 군에 대쇼군(대장군) 1인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실제로는 북방의 에조 원정, 남서의 하야토 정벌, 천황의 호위, 외국 사절 응대 등 네 가지 사안에 대하여 임명되는 '''임시직'''이었다. 한국사에서 고려 중기까지의 원수[12], 그리고 조선의 도원수와 유사한 직책이었다는 소리. 각 쇼군은 서로 다른 칭호를 가졌기에 실제로 '쇼군'이라는 관명은 없었다. 유일하게 상설직이었던 쇼군은 대 에조(아이누인) 방위를 담당하는 진수부의 '진수부장군(鎭守府將軍)' 하나뿐.[13]
무가정권의 최고 통치자로서의 정이대장군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시초인데, 이 발상은 요리토모가 이전 무가정권의 양태를 분석하여 고안했다고 추정된다. 맨 처음 무가정권을 이룩한 헤이케 일족은 기존의 율령 내에서 관위를 높여 나갔고, 이를 제압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조정으로부터 세이토우타이쇼군직을 임명받았다.
1189년에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권대납언, 대납언은 율령제에 존재하는 고위 관직명이다. 앞의 권은 이미 관직을 맡은 누군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명예직으로서 같은 관직을 정원외로 수여했음을 나타낸다.) 겸 우콘에노다이쇼(右近衛大将,우근위대장)에 올라 공경이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만도코로(政所;가정(家政) 기관)을 개설하면서 사실상의 무가정권이 시작되었는데, 당초에는 간토 일대를 다스리는 지방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14] 또한 우콘에노다이쇼는 교토의 방위를 담당하는 관직이라서 조정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독립한 간토에서의 무사정권을 구상하고 있던 요리토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관직이었다. 게다가 현재의 도호쿠 지방인 오슈(奥州)일대는 히라이즈미에 몇 대에 걸친 강한 세력을 구축했던 후지와라 일족이 사실상 사유하고 있었는데, 요리토모는 이를 능가하는 권한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이대장군직에 주목하였다.
당시 무가정권을 구상하고 있던 요리토모에게 필요했던 권한은
  • 간토 내 무사의 정점에 군림하는 '동량(棟梁)'[15]으로서의 권한
  • 전국에 '슈고(守護 ; 지방관)'를 파견할 권한.
  • 공경의 위에 오르면서 설치한 가정기관을 공적인 정치기구에 준하는 기관으로 인정받을 것
이상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만족하는 것이 정이대장군직이었다.
단, 이를 뒤집는 주장도 있다. 요리토모가 필요로 했던 것은 '다이쇼군(대장군)'이라는 칭호뿐이었다는 것으로, 이는 본래 '쇼군(장군)'의 후예라 자부하였던 요리토모 자신에게 위엄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정이대장군 이외의 쇼군이 임명된 예가 없지는 않았으나 예가 지극히 드문 관계로 단순히 '쇼군'으로 약칭되었다. 단, 윗사람의 관명을 직접 지칭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으므로, 실제로는 '오카미(お上)', '쿠보(公方)' 등으로 불리었다.
가마쿠라 막부간토 지방을 다스리는 지역정권의 성격이 강했으니, 간사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덴노의 조정이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3대째로 미나모토 씨가 단절되자 덴노 측은 가마쿠라의 막부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 했는데, 오히려 가마쿠라 측의 역습에 관광당해 교토가 함락되고 덴노가 쫓겨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죠큐의 변). 이후 남북조시대까지 덴노의 정권은 실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16]
보통 '겐지만이 쇼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헤이시를 자칭하고 있던[17][18] 오다 노부나가에게 쇼군직을 제안한 것을 보아 이는 예외가 있을 수도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19] 무엇보다 가마쿠라 막부의 3대 쇼군이었던 사네토모 사후 대가 끊긴 가마쿠라 막부쿠죠 가 등의 '셋케(攝家, 섭정직을 제수받을 수 있는 가문)'와 황족(친왕)으로부터 대대로 쇼군을 모셔왔기 때문에 겐지 이외의 가문에서 쇼군이 나온 예는 상당히 많다. 사실 정이대장군이라는 직위 자체는 가마쿠라 막부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쇼군직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여겨졌으나, 노부나가는 삼관추임문제(三官推任問題)[20] 및 당대의 영향력 등을 보았을 때(쇼군 직에 관심이 있었다면 1568년에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부쇼군 직을 권하였을 때 응하였을 것이다.) 쇼군직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데요시는 천황의 조정의 필두인[21] 쇼군보다 높은 자리인 간파쿠에 이르렀기 때문인지, 쇼군직에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22]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쇼군 및 막부 정권을 대역무도한 것으로 취급하는 존황사상을 이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히데요시가 조정과 천황을 존중했기 때문에 쇼군이 되지 않은 것이라 해석되어 덴노의 충직한 신하로써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대륙 침공의 좋은 본보기였던 것은 덤.[23] 일설에 따르면 아시카가 요시아키[24]의 양자가 되어 쇼군이 되려고 했으나 요시아키의 필사적인 거부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게 사실이면 이미 막부도 멸망당하고 쇼군자리에 오래전에 쫒겨난 볼것 없는 요시아키는 히데요시의 비위를 거슬려 오히려 죽었을 것이다. 정이대장군직을 제수하는 것은 조정이지 토막당한 전직 쇼군이 아니다. 조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천하인은 권력으로 정이대장군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전직 장군이든 주가였던 오다가든 전관대우를 해주었는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그러한 일례로써 오히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품위유지 명목으로 1만석을 받는다.
참고로 간파쿠가 되기는 쇼군보다 몇 십 배는 더 어려웠다. 족보의 신빙성이 상당히 의심될 수 밖에 없는 겐지를 자칭한 대부분의 다이묘가 도전해볼 수 있는 쇼군과 달리 간파쿠는 애초에 후지와라씨의 분파인 코노에(그 유명한 고노에 후미마로의 가문 맞다.), 쿠죠, 니죠, 이치죠, 타카츠카사의 다섯 가문(고셋케(오섭가 五攝家)라고 부른다) 이외에는 취임할 수 없는 관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고노에 사키히사의 조카로 들어가서 간파쿠가 되었지만, 나중에 도요토미 라는 성을 얻고도 간파쿠 자리를 유지한 것은 물론이요, 그 자리를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물려주기까지 했으니, 기존의 원평등귤(源平藤橘; 미나모토, 다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 기존의 4대 성씨)과 어깨를 견주는 풍신(豊臣, 도요토미)씨를 창설한 셈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히데요시가 자기 어머니가 사실 쿠게나 황족의 씨를 받아 자신을 낳았다는 굴욕적인(...) 내용을 날조했다는 설이 있고, 한때 후지와라 성씨를 받아 '후지와라노 아손 히데요시'를 칭하기도 해가며[25] 일본 전체를 쥐고 흔들던 최고권력자 히데요시조차도 조정의 최고위직 간파쿠에 오르기까지는 실로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원평등귤의 4대 성씨는 성립한지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어떤 도전도 받아들인 적 없는 일본 고유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26] 다만 그 직후 도요토미씨는 곧 멸문당한다.
소위 전국 삼걸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직에 흥미를 보인 이유도, 새로운 성씨를 창설하고 이에야스에게도 이를 하사한(당대 이에야스의 풀네임은 하시바 다이나곤 도요토미노 아손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의 그늘로부터의 단절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27] 도쿠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나가가 천하인으로 등극하기 이전 마쓰다이라씨를 쓸 무렵에 조정에 뇌물을 바쳐 겐지의 일파[28]를 칭하게 되었다.

2.1. 천황과의 관계


천황과 쇼군의 관계는 그 역사가 길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기술하기가 어려우나, 쇼군직의 승계는 어디까지나 천황에 의한 '선하(宣下)'였으므로, 기본적으로는 명예군주신하인 셈. 본래 일본에서는 천황이 친정을 한 예가 드물기에 쇼군이 실세이고 천황은 얼굴마담이었다고 단순화하기보다는, '무사 계층에 의한 현실 정치를 쇼군이, 쇼군과 무사의 권력행사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천황쿠게(公家)가 담당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권과는 관계없지만 관직 위계상으로는 쇼군보다 위인 쿠게[29] 계층도 존재했다.[30]
단, 에도 막부 중기 이후에는 쇼군 선하의 칙사가 에도로 내려오고, 이 때 쇼군이 상좌에, 칙사가 하좌에 앉는 형태로 정착되었고, 쇼군의 가격(家格)이 명실공히 일본 최고가 되면서 막부천황의 조정과의 외교면에서 상위에 위치하는 시기가 150년 가까이 이어졌다. 물론 이는 막부 말기 대두되는 존황사상에 의하면 대역부도한 일이었기 때문에 유교적 존왕양이사상은 곧 막부를 쓰러뜨리자는 토막(討幕)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2.2. 겐지와 타이라의 대결


겐지(미나모토)만 정이대장군이 될 수 있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후지와라 계열도 쇼군이 된 적이 있다. 겐페이 전쟁 이후 일본에는 미나모토타이라의 대결이 반복되며 서로 패권을 잡는다는 일본식 세계관이 있어 타이라를 자칭했던 오다에게도 쇼군직 제안이 오기도 했다.

2.3. 한국의 관점에서


간혹 고려무신정권을 일본의 막부 시대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정이대장군직과 유사한 것을 굳이 찾는다면 무신정권 중후반 60여년간의 교정별감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1209년 최충헌 암살 시도 관련자를 찾아 잡아들이기 위해 만든 기관의 장이었지만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면서, 최충헌부터 임유무까지 고려의 모든 정치가 교정별감이 상주하는 교정도감에서 이뤄졌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천황을 군주로 보고 쇼군을 왕자, 즉 대군으로 불렀다. 그래서 종종 왕의 사신이 어떻게 대군에게 무릎 꿇을 수 있겠냐는 식으로 예전 관련으로 다툼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에도 시대 쇼군들을 일반적으로 '관백(간파쿠)'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대군'과 '일본 국왕'이 혼용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시대에 들어오면서 조선-에도 막부 측이 서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맺은 협정에서는 조선 측이 막부 측을 '일본 국왕'으로 호칭하려다가 되려 일본 측에서 이 호칭을 거절한 적이 있다. 이는 무로마치 막부중국으로부터 일본국왕의 명칭을 공식 하달받았듯이, 조선은 왜국의 새 지배자인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몰아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이용했던 것. 하지만 당사자인 왜 측에서는 아직 천황의 협조가 필요한 한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민감한 사항이라서 이를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효종 대까지 '대군'을 쓰다가 숙종 때 일본의 요청으로 '일본 국왕'으로 돌아갔다. 즉, 조선 역시 덴노가 명목상으로만 일본의 군주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1763 ~ 1764년(영조 36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단의 일원이었던 원중거의 '승사록'에서는 천황을 '왜황(倭皇)'으로 칭하고, 쇼군을 '관백' 혹은 '대군'으로 칭하며, 임진왜란 직전 황윤길과 김성일을 각각 정사와 부사로 한 사절단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예우 문제로 시비가 붙었던 일을 떠올리며 쇼군에 대한 예우가 딱 잘라 정하기가 힘들고 애매하다는 것[31]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에도 막부에 통신사를 파견할 당시 일본 국내 정치판이 다소 불안정해 통신사가 보고를 올린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관백이 제위를 겸한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3. 역대 쇼군






4. 오고쇼


천황에게 태상황(혹은 상황, 법황)이 있었듯이, 쇼군에게는 에도 시대부터 오고쇼(大御所)[32]가 있었다. 원래 오고쇼라는 말은 에도 막부 이전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으나 여전히 실권을 가진 친왕이나 그 거처를 이르렀으나 에도 막부부터 은퇴한 쇼군이나 그 거처를 의미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아예 막장 나라가 아니면, 군주로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건 예로부터 동서양을 통틀어, 통치자가 진짜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펴는 일 외에도 할 일이 너무 많고 엄청나게 피곤했던 게 당연했던 일로써 자신이 원하는 권력 쪽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중앙집권이 약해서 정적을 견제하는 문제가 다른 중세 어떤 국가들 못지 않게 피곤했던 일본천황이 실권이 있을 때는, 천황을 그만두고 물려준 상황(上皇)이 피곤한 실무는 다음 천황에게 맡기고, 순수한 정치세력적인 실권을 쥐는 일[33](인세이)이 많았는데, 쇼군의 실권기 역시 마찬가지여서 쇼군을 어느 정도 하다가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본인이 오고쇼가 되어 실권을 휘두르는 일들이 늘어난다. 그리하여 일본사에는 천황 vs 쇼군보다 오히려 천황 vs 상황(上皇)이나 쇼군 vs 오고쇼의 세력 충돌 문제가 실질적으로는 더 심한 경우도 많았다.
쇼군이나 천황 입장에서는 원칙적으로 자신이 제1권력자인 것이고 피곤한 정치 실무는 자기가 다하는데, 자기보다 편하게 쉬는 자기 아버지(오고쇼 혹은 상황)가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자기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 않고 아버지를 따르는 세력에 힘을 유지시키며 죄다 이래라 저래라 하며 간섭을 해댔기 때문에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 에도 막부의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고쇼라는 명예직의 창시자인데, 그의 공식 쇼군직은 2년에 불과했고 무려 10년을 넘게 오고쇼를 했다. 그 명칭이 도쿠가와 가문에 쭉 이어지고 심지어 도쿠가와 가문과 막부 자체의 몰락 이후에도 계속 유행하는 단어가 되어,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공식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뒤에서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오고쇼'라 부른다. 오히려 단어자체 뜻은 조우코(상황) 쪽이 더 와 닿을 수도 있어보이지만, 도쿠가와 시기에 워낙 유행한 탓인지 오고쇼라고 부른다. 한국이나 중국 현대 미디어에서도 이러한 경우 상왕, 상황, 상장군 등을 쓰는데, 이걸 일본어로 번역할 때는 오고쇼라고 해야 양쪽 언어 사용자 측의 뜻이 정확히 일치한다. 이 단어가 현재도 계속 쓰이고 있는 이유는 천황이 계속 존재하지만 천황은 그저 상징일 뿐 실제 실권은 신하인 총리가 쥐고 있기 때문인데, 천황과 쇼군의 관계를 보면 어디까지나 쇼군은 명목상 천황의 신하이기 때문이다. 에도 막부천황과 쇼군의 관계가 현재는 천황총리의 관계로 바뀐 것이므로 막후상의 전임 실세는 오고쇼로 치환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무신정권의 권신을 대상으로 쓸 단어이지 일본 역사에도 실권을 쥔 상황은 존재했기 때문에 왕을 대상으로 이 단어로 치환해 쓰는 경우는 둘을 동격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부적절한 단어가 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도 시대 시점에서 천황은 이미 실권을 잃은 명목상의 군주일 뿐이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 제국 초기에도 수많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왜 천황을 숭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엄청난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따라서 오고쇼를 상왕, 상황, 상장군과 같은 뜻의 관용어로 보는 것을 마냥 부적절하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여담이지만 만약 도요토미 정권이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까지 계속 이어져서 에도 막부가 끝내 세워지지 못했다면, 한국중국에서의 상왕, 상황, 상장군 등에 해당하는 일본 관용어는 오고쇼가 아니라 타이코(태합)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일본에서 섭정이나 관백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태합이고,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조카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관백 자리를 물려주고 태합으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막후에서 실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에야스가 굳이 쇼군을 2년만 하고 오고쇼라는 직책을 만들어 앉은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에야스가 천하를 평정하고 쇼군에 즉위할 때 이미 60이 넘은 나이였고 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 그러니 언제 급사할지 몰랐기에, 아들에게 미리 쇼군이라는 직위를 쥐어주면서 본인이 죽었을 때 아들이 혹시 모를 반란으로 축출될 것을 미연에 방지해두고, 도쿠가와 가문이 쇼군이라는 자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5. 유사사례


세계사에서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집권하여 통치한 권신은 많지만 그러한 권신 정권이 권신 자리에만 만족하며 일본의 쇼군처럼 대를 이어 세습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왜냐면 대를 이어 국가를 통치할 정도로 권력이 있는 가문이라면 2인자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얼마안가 그냥 왕위를 찬탈하거나 선양받아 본인 가문이 직접 군주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정도 권력이 없다면 그 권신의 정권도 1대만에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권신인 조조도 그 아들 조비 대에서 선양을 받아 직접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쇼군처럼 3대이상 대를 이어 세습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실권자 가문이지만 명목상의 상위 군주는 그대로 놔두고 인정해주는 이런 체제는 흔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나라에도 역사적으로 이런 사례가 없지는 않았는데 한국사에는 고려 무신정권기의 최씨 정권이 있었고 네팔 왕국에는 군주인 샤 왕조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국가를 통치한 라나 가문이 있었다.[34] 베트남 후 레 왕조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통치한 찐씨 정권아바스 왕조 칼리프를 자신들의 수도인 카이로에 데려와서 허수아비로 옹립해놓고 명목상 칼리프에게서 술탄으로 임명받은 이집트맘루크 술탄, 17세기 후반 6대 재상을 배출한 오스만 제국의 명문가 쾨프륄뤼 가문도 이와 비슷하다. 가장 비슷한 직위는 마라타 제국의 페슈와인데 교토에 군주인 천황이 있으나 실제 통치는 에도의 막부에서 지방에 영주로서 할거한 고위 사무라이인 다이묘들을 통솔하는 형태인 정이대장군과 비교해보면 마라타 제국도 명목상 수도인 사타라에 있는 황제(차트라파티)가 명목상 군주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바트 가문이 페슈와(재상)직을 독점하여 세습하고 실질적 수도인 푸네의 재상궁에서 실권자인 권신으로서 각 지방에서 사실상 봉건제후처럼 할거하고 있던 장군들의 가문들[35]을 통솔하며 통치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 쇼군과 페슈와 모두 말기에 가면 힘을 잃고 지방 영주 세력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는 것도 비슷하다.[36] 그외에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에서 권신 피핀 가문이 세습했던 궁재도 봉건제+세습권신 조합이라는 부분은 비슷하다. 다만 피핀 가문의 경우는 상술한 사례들과는 달리 궁재직에 만족하지 않고 결국에는 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6. 여담


  • 실질적인 국가의 최고 독재관이나 명목상으로는 천황의 신하였고 이에 '최고사령관'을 뜻하는 정이대장군을 호칭으로 대신했는데 그게 오늘날의 쇼군으로 굳어졌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로마 제국황제와 비슷한 케이스다. 실제로 로마 제국 역시 황제들은 실질적인 국가의 최고 독재관이었지만 명목상으로는 원로원의 일원이었고 이에 '최고사령관'을 뜻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를 호칭으로 대신했는데 그게 오늘날의 엠퍼러(Emperor)로 굳어졌다.[37]
  • 정작 일본의 사실상 최고통치자라고 하는데도 가마쿠라 이후에도 정작 쇼군이 진짜로 절대권력자답게 통치권을 행사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가마쿠라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이 초반에만 권력을 행사했고 그 이후는 호조 가문싯켄이 실세였다. 호조씨는 간무 헤이시 출신으로 겐지처럼 본성이기는 하지만 겐지는 아니었기에 집권을 행한 것이다. 무로마치도 역시 초반의 몇 대에만 행사했으며 이후에는 아예 꼭두각시로 전락해 정4위, 종4위급으로 추락하는 굴욕도 겪었다. 센고쿠 시대, 영록의 변은 덤이고. 그래도 형식이나마 역사와 전통의 다이묘들은 존중해줬지만, 응 그런 거 알 바 아니야라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완전히 갈려나간다. 그나마 도쿠가와는 정이대장군의 명목상, 사실상 급이 가장 강했지만,결국 에도 막부 후기에 이르러선 장군이 아니라 그 밑의 로쥬, 부교[38]나 후견[39],이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했고 혼란스러웠던 막말에 이르러선 조용히 세력을 키워왔던 조슈,사쓰마,아이즈 같은 막부 중앙 정권의 영향력이 덜했던 번들이 세력을 키운 웅번이 실세였다.
  • 지금도 일본에서는 꼭두각시를 내세운 막후 실력자를 쇼군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GHQ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 일본에서는 장군이란 말이 군대 지휘자 전반을 가리키는 한국에서의 쓰임새와 거리가 있기에, 한국 사극을 일본에서 더빙할 때는 쇼군으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어 발음을 그대로 음차하여 장군으로 말한다.
  • 현대 일본에서는 천황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기 때문인지 TV 광고 등에서 권력자를 희화화할 때는 거의 쇼군이 등장한다. 실제 일본 역사 대부분을 보아도 쇼군이 일본 최고 권력자이기도 했고. 일본 환타 광고에서도 쇼군 선생님으로 등장했다.

7. 같이보기



[1] 원래 쇼군은 장군의 일본어 발음일 뿐이지만, 일본사에서 쇼군은 정이대장군의 줄임말이다.[2] 역사상 쇼군과 비슷한 성격의 직위로 초한전쟁기 패왕이 있지만 패왕은 항우 1대에 끝나버렸다.[3] 중국으로 비유하면 상국과 대략 비슷하다.[4] 이들 또한 이들의 수장 격인 미나모토, 다이라 등등은 덴노로부터 유래한 가문들이었다. 세대가 지나면서 덴노와 혈연 멀어진 황족들이 신적강하된 것이다. 그럼에도 대대로 섭관직을 독점하고 황후을 배출했던 외척가문인 후지와라 가문의 종가들보다 낮은 계급이었던 것이다.[5] 그렇다고 죄없는 평민들까지 죽인 전쟁은 아니고 자기들끼리 무력을 이용한 정치 싸움이였다. 간접적인 피해는 어느 정도 있긴 했지만.[6] 즉 무가정치는 천황의 선하에 따라 통치하는 최고집권자인 셈.[7] 역사적으로 소가와 모노노베, 백제 도래인계와 타치바나, 후지와라의 싸움이 이어졌고 권력을 쥔 후지와라와 뒤를 이은 고셋케헤이안 시대의 섭관정치가 몰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8] 역성혁명이 없었다고 해도 좋다. 단, 일본 고대사의 왕계표를 보면 2백 년을 살았다는 천황들도 몇 있는데, 이를 두고 혹자는 원래 일본 왕을 현 천황 가문이 엎었고 천황의 정통성을 위해 전 왕조의 흔적을 지운 게 아니겠느냐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개혁이 있던 7세기 이후 1400년이 지나도록 일본 천황제는 큰 변화가 없었다.[9] 물론 타이라노 마사카도처럼 아예 다 뒤엎고 자신이 천황이 되려고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라도 왕실의 분가라서 가문싸움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 외에 아시카가 요시미츠오다 노부나가가 천황 자리를 노렸다는 '의혹'은 존재하지만 확실하지도 않고 결국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10] 심지어 한때는 아예 후지와라 씨를 자처한 적도 있다. 에이로쿠 6년(1566년) '후지와라노 아손 이에야스(藤原朝臣家康)'라는 이름으로 종 5위하 미카와노카미를 받았었다.[11] 그러한 인식이 생긴 것은 애당초 막부 체제라는게 주로 세이와 겐지 계통 방계 가문들을 각 지역의 슈고로 임명한 일종의 집안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쇼군 자리가 무가를 대표하는 동시에 세이와 겐지 일족을 대표하는 성격도 다소나마 갖고있었던 것.[12] 다만 외침이 잦았던 고려 후기에는 일선 지휘관들의 재량권을 보장해주기 위해 원수직이 남발되어, 기존의 최고사령관이라는 의미보다는 당나라의 절도사나 일본의 다이묘같은 상설직 지방 사령관이자 군벌을 지칭하는 의미로 변화한다.[13] 그리고 헤이안 시대쇼군하면 진수부장군이었다.[14] 처음 1189년에 가정기관이 설치된 것은 맞지만 당시에 설치된 것은 政所가 아니라 公文所였다. 양자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같은데 이는 일본 고대 체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본래 고위 공경의 집에 국가의 이름으로 설치해주는 일종의 비서기관이다. 이는 국가의 일을 담당하는 기관이 아니라 집안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막부의 지배는 무사의 동량과 개별 무사들 간의 개인적인 예속관계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기본적으로 공적이라기보다 사적인 家의 지배의 성격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의 일을 관장하는 公文所-政所가 무가의 정치 행정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公文所와 政所는 기본적으로 성격상 차이가 없으며 단지 이를 개설하는 공경의 관위에 따른 구분이다. 4위까지는 公文所이고 그 위로는 政所인데 1189년 임명받은 관직의 관위에 맞추어 公文所를 개설했던 것이고 이것이 1192년 세이타이쇼군직을 받아 관위가 정 3위 이상으로 올라가자 자연스럽게 政所로 승격되었다.[15] 대들보라는 뜻이지만 한글의 "두령" 혹은 대통령의 '통령'과 발음이 같으며, 실제적인 의미도 같다. 즉 우두머리란 뜻.[16] 단, 그 이전에도 덴노가 폐위되어 쫓겨나거나 살해당한 예는 적지 않다.[17] 세이와 겐지의 후예이자 상당히 오래 된 명가인 카이 타케다 가문(아키 타케다 가문, 와카사 타케다 가문도 포함), 스루가 이마가와 가문, 사츠마 시마즈 가문, 분고 오토모 가문, 스오 오우치 가문,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 셋츠 호소카와 가문 같은 슈고 다이묘를 제외한 대부분의 센고쿠 다이묘는 대개 지방 호족이 세력을 얻자 어디서 주워다 붙인 족보로 헤이시나 겐지를 사칭(...)하는 수준이었다. 헤이시나 겐지가 아니면 뼈대 있는 집안으로 대접받지 못했기 때문. 물론 워낙 흔한 일이었고 제대로 된 검증이 불가능했으니 별로 그런 점을 지적당하진 않았지만... 실제 오다 가문은 에치젠의 신관 가문이 무사로 전직한 것이라고 한다. '''중요한 건 그렇게 별로 신뢰할 수 없는 족보인 데다 다이라(헤이시) 씨족인 노부나가에게 '히데요시보다 앞서' 쇼군 직을 제안했었다는 것.'''[18] 참고로 이러한 일본 가문들의 겐지와 헤이시 사랑(...)때문에 조선에서는 일본 다이묘들이나 쇼군들을 지칭할 때 실제 성 대신 그들이 자신의 본성으로 자처한 겐지(源)나 헤이시(平)를 성처럼 부르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평수길(平秀吉),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행장(平行長) 하는 식. 미나모토의 후손이라고 내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에는 원가강(源家康)으로 불렸다. 마치 루이 16세가 루이 부르봉이 아니라 루이 카페의 이름으로 처형당한 것처럼.[19] 어떻게 보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 '겐지만이 쇼군이 될 수 있다'고 명시되진 않았지만 오랜 기간 '일종의 관례'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전근대사회, 특히 귀족사회에서 관례가 얼마나 중요시되는지를 감안하면...[20] 어떻게든 당대의 실권자인 노부나가와 친하게 지내보고 싶었던 조정이 노부나가에게 좌대신직을 수여했으나 고사하자, 몸이 달아서 쇼군, 관백, 태정대신 중 원하는 자리를 골라 취임하라고 제안한 일이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이 제안 역시 고사했다.[21] 더 엄밀히 말하면 조정의 필두는 태정대신이고 관백은 덴노를 대리하는 자리였다. 태정대신이 율령 하에서 최고위라면 관백은 그러한 율령 밖에 있는 영외직이었다. 관백은 영외직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품계가 없었고 시대에 따라서 관백이 우위에 있기도 했고 태정대신이 우위에 있기도 했다. 어쨌건 관백은 '덴노의 대리자'자리인 만큼 정이대장군보다는 기본적으로 격이 높은 자리였다.[22] 그러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대망 에서는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기를 원했으나 미나모토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쇼군을 포기하고 고노에 가문의 양자라는 명목으로 간파쿠 자리에 올랐다고 이야기하고 있다[23] 이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게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덴노를 '''앞'''에 두고 다이묘들에게 자신에 대해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물론 메이지 일본은 이를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에게 덴노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며 왜곡했다.[24] 아시카가씨도 겐지(미나모토)의 일파이다[25] 고노에 가문의 양자로 고셋케 가문의 지위를 얻었지만, '고노에'라는 건 일본 성씨제도에서 '묘지(苗字)'에 해당한다. 공적인 자리나 문서에서는 '고노에' 라고 쓰지 않고 '후지와라노 ~"라 칭한다. '아손(朝臣)'은 ~의 자손이라는 뜻이 아니라 씨족의 지위를 뜻하는 일종의 골품(신라의 성골, 진골처럼)과도 같은 것으로 일본의 유서깊은 귀족가문들의 씨(氏) 다음에 붙이는 성(姓)인데, 일본어로는 '가바네'라고 한다. 원래 마히토(眞人), 아손(아소미:朝臣), 스쿠네(宿禰), 이미키(忌寸), 미치노시(道師), 오미(臣), 무라지(連), 이나키(稻置)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나라 시대 이후에는 이중에 아손(아소미:朝臣)만 남고 다른 것은 없어지다시피 한다. 우리의 '성(姓)'과 전혀 다른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후지와라노 아손~ 미나모토노 아손~ 다이라노 아손~ 식으로 불리니 아손이 씨족의 의미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26] 이는 귀족 출신인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달리 출신이 비천한 것이 뻔한 히데요시는 자신의 성씨를 원평등귤로 날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식으로 생각되기도 한다.[27] 이에야스는 농민의 자식이었던 히데요시에게 굴종한 것이 여간 굴욕이 아니었던지, 히데요시 수하의 다이묘가 자신에게 복종한 후에도 집요하게 트집을 잡아 가문을 단절시키는 등 해꼬지를 해가면서까지 히데요시와 손을 끊은 것을 분명히 하고,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허무는 등 다소 치졸한 방법까지 동원해 격하했다.[28] 무로마치 막부 초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대립했던 닛타 요시사다의 가문인 닛타씨의 방계 세라다 가문의 후손을 자칭했다. 원래 닛타 가문은 혈통상으로는 아시카가 가문과 제법 가까운 축에 속하는 일족이었지만 닛타 요시사다와 다카우지의 악연 덕분에 무로마치 막부 성립 후 완전히 찍혀버렸고 덕분에 전국시대 당시에는 직계는 단절되고 아와의 다이묘 사토미 가문 등 일부 방계일족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29] 公家.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귀족 계층으로, 공경으로도 불린다.[30] 예컨대 요리토모의 관직인 대납언 위로 내대신, 좌우대신, 태정대신, 관백 등과 같은 상위 관위들이 쭉 있다. 물론 그러한 직책을 맡은 인물들의 실권은 쇼군만 훨씬 못하지만... 해당 직책을 맡은 인물들 중 쇼군 수준의 권력을 누린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뿐이었다. 일본 제국 시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지 않고 명목상 천황을 중시했다는 이유로 천황의 충신이라고 미화된 것과 달리, 실제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으로 출병하지 말라는 천황의 어명마저 씹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당시 천황에게 워낙 실권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31] 일본의 천황과 정이대장군이 이원화된 막부 체제 자체가 동아시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체제였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정이대장군에 대한 예우를 정하기가 애매하다고 한 것이다.[32] 오고쇼들이 태정대신(다죠다이진)을 많이 겸했으므로, 태정대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33] 원래 조우코나 오고쇼(혹은 다죠다이진)나 명예직인데, 실질적으로 실권을 이양하는 쪽으로 변질되었다.[34] 라나 가문은 트리부반 왕이 왕정복고를 단행하여 왕권을 되찾아온 1950년까지 이런 식으로 통치했다. 일본 막부보다 거진 100년은 더 갔다(...)[35] 괄리오르의 신데 가문 세력, 구자라트의 바로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가에크와드(가이크와드, 가이콰드) 가문의 세력, 인도르의 홀카르 가문 세력, 나그푸르의 본슬레 가문 세력 등등[36] 정이대장군이 통치한 일본과 페슈와가 통치한 마라타 제국 둘다 종교적으로 다신교(힌두교, 신토) 체제였다는 것까지 비슷하다.[37] 물론 다른 점도 많은데, 로마 제국의 경우 임페라토르가 1인자이며 이것 외에도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제1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Princeps) - 오늘날의 프린스가 되는 - 도 존재했고, 이 외에 초대 독재관인 카이사르에서 따와서 그냥 스스로를 '카이사르' - 이게 나중에 황제국을 자칭한 독일에서 카이저가 되고 러시아에서 차르가 된다 - 로 칭하는 황제도 많았다.[38] 당장 18~19세기의 개혁을 보면 연호나 그 개혁을 주도한 해당 관리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다.[39] 대표적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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