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케패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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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케패스 작전은 1972년 4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맹호부대(수도사단) 기갑연대가 치른 전투이다.
2. 상세
가장 치열한 전투이자 당시 구정공세이후 유일하게 연합군이 선전하여 전과를 냈던 전투이다...라는 것이 공식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국군이 가장 많이 사상당한 전투'''이며 인터넷 뒤져보면 안케패스 작전 당시에 한국군의 수많은 삽질과 군 수뇌부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참전용사들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전투이다. 참전용사들이 이정도로 심하게 비난하는 전투는 안케패스 전투외에는 거의 찾기 힘들다. 한마디로 한국군 최악의 졸전으로 알려진 짜빈박 전투보다 더 많이 죽었다. 즉 엄청난 손실을 입은 피로스의 승리이다.
'안케패스 작전'하면 지역내에 638고지에서 있던 전투가 전부로 오인되어 양자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안케패스 작전'의 일부가 638고지 전투이며 가장 중요한 작전이며 대부분의 피해가 나온 전투이다. 작전 자체가 기갑연대 1중대 관할인 638고지에 숨어든 적군이, 1중대를 기습하자 우발적으로 일어난 작전이 바로 안케패스 작전이다. 즉 안케패스 전투 > 638 고지이다. 638 고지에서 한국군이 워낙 말도 안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자 이를 희석 시키기 위해 안케패스 일대의 전투와 짬뽕시켜 고국의 국민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에 638 고지를 중심으로 설명 하며, 실제로도 안케패스 작전의 대부분이 638 고지 전투이고 나머지는 그 주변에 일어난 부수적인 전투이다. 그동안 두코 전투, 짜빈동 전투를 통해 한국군 1개 중대가 베트남군 각 1개 대대, 1개 연대를 물리쳤다며 중대전술기지의 효율성이 알려졌었다. 채명신 장군도 이들 전투를 통해 중대전술기지가 미국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고 자신의 저술에 극찬 해놓았다. 이러한 중대전술기지를 통해 소수의 병력이 포위한 다수의 병력과 싸운 전투가 딱 1번 더 있었는데 바로 638 고지 전투였다. 문제는 전술기지를 지키는 병력이 적군이였고, 10배의 병력으로 포위했다가 작살난 병력이 아군이어서 그렇지.
- 안케패스 작전 전체 참전부대
- 한국군(ROK):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기갑연대(수색중대, 1~12중대) 1400명/ 사단직할 61/628 포병대대
- 배속: 1연대 수색(114명)/8중대(95명), 26연대 2중대
- 미군(US): 공군 제7공군.
- 남베트남군(ARVN): 육군 2군단 22사단 44/47연대
- 북베트남군(NVA): 육군 3사단 12연대/ 지역 VC
- 전과: 사살 680명, 노획화기 77정
- 피해: 전사 63명, 부상 96명
- 638고지 전투 참전부대
- 작전기간: 1972년 4월 11일 ~ 24일 (14일)
- 한국군(ROK): 기갑연대 1대대 1/2/3/4, 배속 9/수색중대, 1 * 연대 8중대 - 총 7개중대
- 적군: 단대호 미상 1 개중대(-) 또는 1개 소대(+)
- 전과: 사살 436명(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음), 무기 노획 36정, 목표 점령시 포살체 4구 확인
- 피해 39명, 부상 51명
양자를 비교하면 알겠지만 안케패스 작전에 참가한 16개 중대중에서 7개 중대가 638고지 전투에 참가했으며, 적 사살, 노획화기, 아군 피해의 절반 이상이 638 고지에서 나왔다. 638 고지 전투를 요약 하자면 한국군 1개 소대가 버리고 간 전술기지를 단대호 미상, 규모 미상의 적군이 점령 하였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군 7개 중대가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은 전투이다. 특히 공격의 선봉을 담당한 1연대 8중대의 경우 95명중에서 전사 17명(중대장 김용강 대위 포함), 부상 30명으로 그야말로 중대가 작살 났다. 흔히 병력의 30%가 사상당하면 전멸로 판정한다는 인터넷글이 있지만 실제로는 재편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1연대 8중대의 경우 사상률이 50%나 되었다. 게다가 24일에, 1대대 4중대가 대신 진격해보니 적은 이미 다 철수한 상태로 진지에는 적시신 4구만 남아 있었다.(...) 결국 아군의 피해가 워낙 컸던 전투라 본국에다가는 "적 사살 436명. 우린 39명 사망. 헐 대승이닷!" 하고 보고 한 것이 638 고지 전투의 실체이다.
당시 산꼭대기에 완전 포위되었던 1개 소대 가량의 적이 밤중에 몰래 432구의 시신을 들고 도망쳤을리가 없으니, 적 사살은 최소 4명에서 최대로 잡아 보자면 노획 무기의 수에 해당하는 36명으로 보인다. 특히 고지 자체가 소대급 진지라 워낙 좁아 436명이 들어 갈 수가 없다. 그리고 시신을 들고 갈려면 400여명이 필요하고, 적 사살 1명당 부상 2명으로 계산하면 800명의 부상자가 자력 탈출했다는 말인데... 혹시 638 고지에 초고층 아파트라도 있다면 모를까. 혹시나 땅속에 시체를 묻은 게 아닌가 하고 찾아 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이 때문에 안케패스 작전 전체에서 적 사살 680명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638 고지 전투 적 사살 432명은 일단 빼야 하고 나머지 전과도 도무지 믿기 힘들게 되었다. 심지어 노획 무기인 77정(638 고지 36정 포함) 조차 의심 받고 있다. 전두환 처럼 월남 암시장 가서 사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엄청난 손실을 감추기 위해 어마어마한 훈장이 쏟아 졌다. 최고의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만 2명 받았고 (2중대 1소대장 고 임동춘 중위, 4중대 3소대장 이무표 중위), 졸렬한 지휘를 하여 푸짐하게 욕들어 먹은 연대장 김창렬 연대장을 포함하여 4명에게 을지 무공훈장, 충무 무공훈장 6명, 화랑 무공훈장 13명, 인헌 무공훈장 약간 등 50여명에게 훈장이 쏟아 졌다. 이 훈장들이 얼마나 가라냐면 어마어마한 훈장을 받은 사람들에게 공적기록이 남아 있지않다. 즉 왜 훈장을 줬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638 고지 한정으로 "적 시신이 4구인데 이를 수십명이 공적 기록으로 나눠 가질려면... 에이 모르겠다. 그냥 공란으로 남겨 놓자!"정도의 사고방식으로 유추해본다.
- 한국군 상황
1번 국도에 해당하는 19번 도로는 당시 내륙에 있던 자유월남군 2군단의 핵심이자 유일한 보급로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고 당시 한국군은 19번 도로를 확보하려고 했다. 원래는 미군 1기병사단 주둔하던 지역이었으나 1970년 7월에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군 맹호사단 기갑연대 1중대가 인수하여 경계를 하였다. 안케패스는 약 5.5km에 달하는 19번 도로이다. 이를 서쪽부터 638 고지에 1중대 1소대가 지키고, 240고지에 2소대, 168고지에 3소대가 있었다. 중대 본부는 638 고지 북쪽 500미터 능선에 있었다. 그러다 1소대는 638 고지를 버려두고 1중대 본부로 이동한다. 이때 주둔하던 소대 전술 기지를 원상복구 시키지 않고 참호, 교통호는 물론 각종 건설자제를 그대로 방치 시켜 놓는다.
1971년 11월 19일에 부임한 맹호 사단장 정득만 소장은 적 박격포 사정거리를 고려하여 "기지 주변2킬로 미터 이내를 매일 반복 수색 하라"라고 지시를 내리며 이는 일일 수색 계획으로 매일 사단에 보고 되었다. 그런데 1중대는 이를 보고만 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특히 72년 3월 중순 638 고지를 적군이 점령해서 진지를 구축하는데 20일간 모르고 있었다. 4월에는 중대장이 교체되었는데 후임 중대장인 김종식 대위도 계속 허위보고만 일삼았다.
- 북베트남군 상황
구정공세 이후 대대적으로 시작된 북베트남 정규군의 춘계대공세로 직접 남하하여 전방지역에 대한 장악을 위해서 시작하여 내륙에 있던 월남군 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공세적인 작전을 위한 연대급 이상의 작전을 펼치게 된다. 북베트남군으로서는 남베트남(자유월남)군 2군단을 포위하려면 반드시 수행해야하는 작전이었다.
2.1. 638 고지 전투
2.1.1. 4월 11일
04시를 기점으로 안케패스의 최고로 중요한 638고지에 매복해있던 적군은 북쪽 500미터 지점에 있던 기갑연대 1중대를 기습공격하였다. 10시에는 베트남군의 공격으로 19번 도로의 교량과 3m 크기의 도로대화구를 만들어서 도로가 일부 파괴되어서 사단의 공병중대가 즉각 복구를 하게 된다.(14시에 현장 도착하여 17시에 복구완료.)
이때까지만 한국군은 큰 저항이나 적의 공세라고 예측하지도 않았고 병사들 자체도 많이 경계심이 풀어져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군의 최악의 실책으로 작용하게 된다. 16시를 기점으로 월남군 44연대에서 베트남군의 연대급 병력이 안케패스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첩보를 접했지만 사태관망만 하고 있었다. 게다가 638고지는 매복 후 철수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17시에 매복조를 투입하기 위해서 638고지로 수색정찰을 하게 되면서 638고지에서 적과의 대대적인 교전이 벌어진다. 한국군 기갑연대 1중대가 보유한 화력을 총동원하여 매복 및 수색조를 지원했으나 매복조를 지원하던 1중대 1소대장 임만철 중위는 적이 1개 중대급 병력이라는 보고와 함께 638고지에서 퇴각하게 된다. 실제로는 급한데로 적이 1개중대라고 말했을 뿐이지 끝까지 적의 규모는 미상이었다.
2.1.2. 4월 12일
한국군의 탐색전과 다르게 이미 4월 12일 07시를 기점으로 베트남군은 교량 2개소 도로 3개를 폭파하여 19번 도로를 차단하고 638 고지를 장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638고지보다 38m 아래있던 한국군 1중대를 향해서 75mm 무반동총과 82mm 박격포등의 공격을 가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한국군 기갑연대 수색중대는 638 고지의 적을 파악하기 위해 탐색전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나면서 혼란상황이 된다. 게다가 수색중대가 1중대 기지로 퇴각하게 되면서 상황은 초기 중대급 작전이라 생각했던 작전이 대대급 작전으로 확대되어서도 전과가 아닌 패배가 나오게 된다. 수색중대가 패퇴한 시점에 기갑연대 1대대 3중대가 증원되어서 오게 된다.
2.1.3. 4월 13일
13일 09시30분을 기점으로 3중대가 638고지를 향해서 재차 공격을 하지만 역시 실패(3명 전사 9명 부상)하면서 기갑연대 1대대의 대대급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게된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자 사단장이 참모들과 직접 1중대 기지에 방문하지만 적의 82mm 박격포 공격에 작전참모 구경희 중령이 중상을 당하여 급히 철수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된다.
2.1.4. 4월 14일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나 했더니 06시에 다시 베트남군 박격포 공격에 1중대의 탄약고가 피격되어서 피해(4명 부상)가 나자 당일 08시부로 3중대가 다시 638고지를 공격, 12시에 9부 능성까지 올라가지만 역시 실패한다.(2명 전사 13명 부상)
2일간에 걸친 탐색전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고 대대급 작전의 공세도 완전히 실패하자 한국군은 15~16일간 연대의 가용화력과 사단포병(61/628포병대대) 그리고 미 제7공군의 증원을 받아서 화력제압을 하기로 결정한다.
2.1.5. 4월 15일~16일
2일간 모든 공세작전이 중지되고 638고지에 대한 대대적인 화력제압이 실시된다. 한국군은 수도사단 직할 61/628포병대대가 2일간 2909발의 포격을 퍼부었으며 미 7공군에서 143000lb의 포탄을 쏟아붓게 된다.
2.1.6. 4월 17일
이 때를 기점으로 보급로가 차단된 월남군 2군단은 사실상 고립되어서 고전하는 상황이 된다. 그로 인하여 사단본부에서는 지휘관 문책까지 경고할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졌지만 한국군은 지난 전투동안 적의 규모조차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월남군 22사단 47연대에서 적의 규모가 1개 연대급 이상의 병력이라고 첩보를 보냈지만 한국군 수도사단과 기갑연대는 월남군에 대한 정보를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월남군의 그 동안의 정보에는 허탕이 많았고 적에게 첩보가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믿을 수 없었던 현실이긴 했지만 불행하게도 월남군이 가져다준 2차례에 걸친 첩보는 정확하게 맞았다.
결국 18일부터 연대급 작전으로 완전히 전환하면서 기갑연대가 총동원되기 시작한다.
2.1.7. 4월 18~20일
08시부터 한국군 기갑연대 2대대와 3대대 병력이 안케패스 지역으로 대거 배치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연대급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이번에 공격을 선봉이 된건 2대대 8중대였다. 23시부터 8중대는 7부 능선을 따라 기동하게 되면서 작전이 시작된다.
19일 05시에 8부 능선에서 돌격대형을 갖추는 순간 베트남군의 박격포 공격이 시작되면서 전사 2명 부상 4명(한명은 소대장)이 발생하면서 8중대가 협공을 받을수 있다는 판단하에 철수를 하게된다. 역시 조공을 하게 되어있던 3중대 역시 철수를 하고 1대대 2중대가 20일에 투입이 결정된다.
공세의 주공을 맡은 기갑연대 1대대는 8중대와 수색중대를 선두로 2중대를 예비중대로 하는 공세작전을 펼치게 되지만 15시 30분에 8부능선까지 점령해놓고 적의 82mm 박격포의 대규모 화력공격에 8중대장 김용강 대위가 전사하고 8중대 병력 12명이 부상을 입게되면서 공격이 돈좌하게 된다. 게다가 연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배속된 61포병대대 역시 적의 대대적인 대포병사격(82mm박격포로 200발의 공격을 받았다.) 105mm 주포 1문이 파괴되고 2문이 사용불능상태가 된다.
3일에 걸친 연대급 공격 역시 실패하게 된다.
2.1.8. 4월 22~23일
21일 부대를 재편하고 22일에 다시 공격에 들어갔지만 한국군은 역시 실패했다. 공격부대가 하나같이 동일한 기동로로 축자투입에 가까운 공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만 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덕분에 예비중대였던 2중대마저도 3차례나 패퇴해야했다. 15시에 개시된 3차 공격에서는 드럼통에 흙을 넣어서 엄폐물로 삼고 올라가는 다소 무리한 공격방식이 시작되었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결국 기갑연대 2중대는 마지막 4차 공격에 들어가게 되는데 소대장들이 분대장들 위치에 해당하는 극단적인 진두지휘 원칙의 방식으로 전환되어서 638고지에 있던 베트남군 1선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게 된다. 하지만 완전한 공세는 실패하면서 사실상 한국군의 여러차례의 공세는 사실상의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23일에 연대장이 직접 현장에 다시 방문하여 새로운 작전을 수립하게 된다.
2.1.9. 4월 24일
한국군의 공세는 04시에 다시 시작된다. 연대에 배속된 61/628포병대대가 04시를 기점으로 638고지와 예상은거지를 집중포격(1300발 사용)을 가하면서 05시에 1대대 4중대가 본격적으로 투입된다. 소규모 교전을 끝으로 07시 30분으로 4중대가 638고지를 점령함으로서 사실상의 안케패스 전투는 끝이 난다. 이미 베트남군은 한국군의 포격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군이 638 고지를 점령하면서 산발적으로 기습포격을 해왔다.
2.1.10. 4월 25~26일
638고지를 확보하고 그외 주변지역의 무명고지까지 장악함으로서 베트남군의 19번도로 차단작전을 분쇄하는데 성공하고 한국군은 잔적소탕에 들어간다. 19번 도로 개통은 26일에 맹호부대 사단본부에 APC 장갑차 4대가 19번 도로를 타고 옴으로서 마무리를 짓게 된다.
3. 638고지 전투외
안케패스 전투의 핵심전투였던 638 고지 전투에 대한 서술만을 그렸지만 4월 12일에 638고지 남동쪽 3km 떨어진 곳에서도 한국군 기갑연대 2대대 6중대가 무명 고지를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했다. 15일을 기점으로 겨우 점령을 하지만 상황이 638 고지보다 안좋아서 6중대가 무명고지에서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로 인하여 한국군 기갑연대 2대대 5중대가 15일 저녁에 투입되지만 구원에 실패하면서 6중대의 고립이 계속된다. 당시 6중대원들은 수분부족을 매우 심각하게 호소하였기 때문에 상황은 매우 심각했는데 공세등으로 인하여 4일에 가깝게 물부족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2] 결국 105mm 탄통에 물을 담은 것을 헬기를 통한 공중보급을 했으나 일부 해소만 되었을뿐 6중대의 물부족은 완전하게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었다.[3] 결국 18일부로 5중대가 혈로를 뚫음으로서 6중대가 무명고지에서 철수하고 사단에서 증원을 한 26연대 2중대가 20일에 다시 무명고지에 대한 역습을 가함으로서 전투를 종결짓게 된다. 24일에 26연대 2중대가 철수하고 다시 5/6중대가 소탕작전에 돌입함으로서 전투가 완전히 끝나게 된다.
4. 그 후
26일에 기갑연대 3대대가 19번 도로지역의 잔적소탕에 들어감으로서 안케패스에서의 전투는 완전히 마무리 된다. 구정공세 이후 대규모 공세였던 베트남군의 춘계대공세에서 유일하게 선전한 전투가 바로 이 안케패스 전투이지만 당시 한국군의 정보분석 오판과 무리한 축차공세는 오히려 한국군의 피해를 키우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638고지를 처음부터 확보하지 못함으로서 적에게 감제고지를 포함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내준 문제도 있었다. 그로 인하여 베트남군은 자주 82mm 박격포와 같은 포병화력을 통해서 한국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역공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실제 한국군은 베트남군의 포병공격에 번번히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했다. 게다가 적의 병력규모를 끝까지 제대로 파악을 못했기 때문에 무모한 파상공격밖에 하지 못했다. 핵심지역이었던 638고지에서의 한국군의 전술은 무모한 축자투입이었다. 게다가 이미 638고지를 제외하고 베트남군은 19번 도로지역의 안케패스 지역을 1개월 전부터 파악하고 신속하게 점령할수 있었지만 한국군은 안케패스 지역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도 피해를 키운 원인이 되었다. 또한 역설적이지만 중대전술기지의 가치를 다시금 증명한 전투이기도 하다. 공격하는 쪽이 한국군, 방어하는 쪽이 베트남군이었고, 그 기지는 한국군이 만들었다가 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임동춘 대위(당시 중위)의 업적을 기리어 2008년부터 육군에서는 모범소대장들을 대상으로 '동춘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