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네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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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Negri
1933. 8. 1. -
1. 개요
안토니오 네그리 혹은 토니 네그리.[1]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사상가. 윤리철학 및 정치철학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자율주의 운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미셸 푸코 외에도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 등과 친분이 있었다. 마이클 하트(M. Hardt)와는 사제지간이다.
2. 생애
이탈리아의 파도바의 좌파 노동자 집안에서 1933년에 태어났다. 불과 2세 때 아버지를 파시스트들에게 잃었고, 성장한 후에는 파도바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지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이탈리아에서는 기존의 공산주의 정당[2] 과 노선을 달리하는 비의회 좌파 계열 운동이 굉장히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네그리는 이때 사상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이탈리아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 운동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붉은 여단이 알도 모로 수상 납치살해 사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탄압을 받게 되자 네그리는 1979년 알도 모로 수상 살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3] 네그리는 수감 생활 중 1983년 의원 면책 특권을 받기 위해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면책 특권으로 잠시 풀려나지만, 면책 특권 박탈을 위한 소송이 시작되고 두 달 후 기어이 하원에서 면책특권을 박탈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네그리는 체포될 때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쟁쟁한 철학자들이 구명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망명 생활 중 파리 제 8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고 자신의 철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7년 아직도 수배와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자율주의 운동가들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망명생활을 끝내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다시 수감되었다.[4] 네그리가 재수감될 때 전세계적인 구명운동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부터는 가택 연금으로 전환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연금에서 풀려났다. 이후 활발한 저술, 강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3. 연구
자율주의(autonomia)운동의 창시자 격이며, 푸코,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 등과 교류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을 종합-계승하여 독자적 철학 영역을 개척했다. 네그리는 다중(multitude)과 제국(empire)에 대한 저작들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현 시대의 상태를 제국[5] 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는데, 이때 제국이라는 것은 어떤 질서에 대한 여집합을 만들지 않고 모든 것을 내포하려고 하는 세계 질서를 의미한다. 체 게바라가 자본주의와 미국에 대항해 싸웠지만 사후에는 자본주의에 의해 아이콘으로써 상품화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면 간단하다. 체제에 외부가 없다면 어떻게 변화가 추동되는가 하는 물음에서 도출한 것이 다중이라는 개념이다. 다중은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복수성의 총체이다. 과거의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어떤 전형을 설정하고[6]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변화를 추동한다면 네그리의 다중은 현대의 분화된 노동계급들을 총체로써 긍정하고 이들의 자율성이 체제의 변화를 추동한다고 본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을 공동체 운동이나 사회적 협동조합 운동들이 네그리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4. 저작
- 지배와 사보타지(Domination and Sabotage) : 1977.
-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Marx beyond Marx) : 1978.
- 자유의 새로운 공간(New spaces of Liberty) : 1985. F. Guattari와 공저.
- 디오니소스의 노동(Labor of Dionysos) : 1994.
- 제국(Empire) : 네그리를 대표하는 저작. 2001. M. Hardt와 공저.
- 다중: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 2008.
- 다중과 제국(Reflections on empire) : 2011.
- 공동체(Commonwealth) : 2014. M. Hardt와 공저.
[1] 1979년 체포되기 전까지는 철학 서적에는 안토니오, 정치적 서적에는 토니라고 구분했지만 체포된 후에는 그러지 않는다고 한다.[2] 1963년 사회당과 기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한 것을 계기로 노동자 계층이 사회당에 등을 돌렸다[3] 토니 네그리는 붉은 여단의 행동에는 직접적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네그리는 이때 붉은 여단의 무장 투쟁 노선을 저지하기 위한 문건에 서명했다가 붉은 여단의 1순위 제거 대상으로 찍힌 상태였다. 네그리는 자율주의 노동자 운동의 핵심 사상가였기 때문에 체포당했다. 이때 이탈리아 언론은 네그리를 까티보 마에스트로, 즉 악의 지도자라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4] 이때 이탈리아 당국은 네그리를 죽이려고 했던 붉은 여단 단원과 같은 방에 네그리를 가뒀는데, 네그리는 그와 좋은 친구가 됐다고 한다(...). 후일 네그리는 그때 날 죽이려던 사람들은 더 이상 공산주의자가 아니지만 자신은 여전히 공산주의자라면서 씁쓸해했다.[5] 제국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6] 예) 대공장 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