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라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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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에 위치한 알 라시드 영묘
1. 개요
재위 1135년 8월 29일 ~ 1136년 8월 17일[1]أبو جعفر المنصور الراشد بالله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 알 라시드 빌라
생몰 1109년 ~ 1138년 6월 6일
아바스 왕조의 30대 칼리파. 1135년 부친 알 무스타르시드가 암살되자 칼리파로 등극한 알 라시드는 바그다드로 돌아온 직후부터 셀주크 조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는 선대의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는 술탄의 사절단과 셀주크 측 바그다드 총독 베그 아바를 축출한 후 도시 성벽을 재건하며 공성전에 준비하였다. (1135년 10월) 알 라시드는 모술의 장기[2] 와 연대하였고, 11월엔 마수드와 대립하던 조카 다우드가 바그다드에 당도해 칼리파 진영에 가담하였다. 따라서 11월 22일의 쿠트바에선 마수드와 산자르 대신 다우드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1136년 5월, 알 라시드는 재건된 칼리파 군과 출정하였다. 다만 다음달 장기가 마수드의 매복 계획을 알려주자 회군하였다. 그리고 장기 역시 7월 이라크에 개입해 마수드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하지만 알 라시드가 술탄 측과 협상에 나서자 실망한 장기가 후퇴하였고, 그러자 마수드가 강경한 태도로 나오며 협상 역시 결렬되었다.
이후 마수드는 남하하여 8월 3일부터 바그다드를 포위하였다. 티그리스 강과 복잡한 운하 덕에 포위는 장기전의 양상으로 흘러갔고, 셀주크 군의 습격은 번번히 격퇴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패색이 짙어진다고 판단한 알 라시드는 장기의 초청으로 모술로 피신하였다. 칼리파가 떠나며 항전 의욕을 상실한 바그다드는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 항복하였다. 바야흐로 술탄의 권력이 상당 부분 회복되었다. 3일 후 마수드는 시내의 카디 (법관)들을 소집하여 알 라시드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 숙부인 알 묵타피를 옹립하였다. 9월엔 압력을 행사하여 장기로 하여금 알 라시드를 모술에서 축방하게 하였다. 쫓겨난 알 라시드는 아제르바이잔 서부의 다우드 진영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다우드와 함께 이스파한 공격을 준비하던 알 라시드는 직접 이스파한으로 향했다가 아사신에게 암살되었다. (1138년 6월) 거사의 성공에 대해 아사신의 본부인 알라무트에서는 일주일간 기념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