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묵타피

 


1. 개요
2. 치세
2.1. 바그다드 공방전 (1157년)


1. 개요


المقتفي لأمر الله‎‎‎

알 묵타피 리아므릴라

재위 1136년 8월 17일 ~ 1160년 3월 12일
생몰 1096년 3월 9일 ~ 1160년 3월 12일
아바스 왕조의 31대 칼리파. 술탄 마수드에게 옹립된 후 20년 가까이 때를 기다리다 마수드가 사망하고 내전이 터지자 거병하여 이라크를 석권하였다. 후임 술탄 무함마드 2세가 1157년 바그다드를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하고 압바스 조의 독립된 권력을 확립하였다. 그는 다소 성급히 군사 행동에 나섰다가 패배한 전임 칼리파들과 달리 상당히 전략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이후 압바스 조는 이라크 중부와 남부를 석권하고 1258년까지 약 한세기 가량 서아시아의 주요 세력 중 하나로 남게 된다. 다만 바그다드 포위 이후 술탄 무함마드 2세의 딸과 결혼하는 등 우호 관계를 회복하였다. 한편 1139년 알 묵타피가 인준한 네스토피우스파 총대주교 아브디쇼 3세에 대한 보호 칙령이 1926년 아시리아인 학자에 의해 출판되었다.

2. 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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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묵타피의 금화 (디나르)
알 무스타지르의 차남으로, 1136년 조카 알 라시드를 폐위한 술탄 마수드에 의해 칼리파로 옹립되었다. 따라서 셀주크 조와 정면 대결에 나선 선대 칼리파들과 달리 알 묵크타피는 치세 전반부를 비교적 조용히, 바그다드를 벗어나지 않고 지냈다. 1138년 5월 동로마 군의 남하에 궁지에 몰린 장기가 수하를 바그다드에 파견해 금요 예배 때에 신도들을 동원하여 술탄 마수드에게 원군을 파견하도록 청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다만 곧 동로마 군이 샤이자르 공방전에서 패하고 회군하자 술탄의 2만 군대 역시 장기의 책략으로 회군하였다. 그러던 1144년 12월, 장기는 에데사를 함락하며 십자군을 압박하였다. 이듬해 장기는 그의 높아진 명성을 시기한 모술의 아미르인 셀주크 왕자 알프 아르슬란의 친위 쿠데타를 제압하였고, 이에 알 묵크타피는 장기에게 정식 군주 및 아미르 칭호를 내렸다.[1]
1146년 장기가 암살당하자 장남 사이프 앗 딘 가지가 모술, 차남 누르 앗 딘이 알레포를 계승하였다. 형제는 1148년 2차 십자군의 다마스쿠스 포위를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 사이프 앗 딘이 사망하자 동생 쿠트브 앗 딘이 모술의 아미르가 되었다. 한편 1141년 대술탄 산자르가 카라 키타이에게 패하고 1148년 살구르 왕조파르스 지방에서 자립하며 셀주크 제국의 세력은 본거지인 이란에서도 약화되었다. 또한 아들이 없던 술탄 마수드는 조카 중 한명이자 다우드의 동생인 말리크샤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았다. 1152년 9월 마수드가 사망하자 말리크샤 3세가 술탄이 되었다. 하지만 후제스탄에 있던 그의 동생 무함마드 2세가 거병하여 이라크를 거쳐 북상, 형 말리크샤를 폐위하고 하마단에서 술탄으로 등극하였다. (1153년 1월) 그러자 아제르바이잔의 아미르들이 반발, 호라산에 있던 마수드의 동생 쉴레이만샤를 옹립하며 재차 내전으로 이어졌다.

2.1. 바그다드 공방전 (1157년)


제국의 서부가 내전에 터진 틈에 같은 해에 동부에선 오우즈 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술탄 산자르를 사로잡는 일이 벌어졌다. 정상적으로 집권하는 술탄이 부재한 상황에서 알 묵타피는 마침내 압바스 조의 중흥의 때가 다가왔음을 직감하였다. 약 1년간 친위 군대를 양성한 알 묵타피는 1154년 거병하여 힐라와 와시트 등 이라크 중남부를 점령하였다.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며 시리아 대부분을 석권할 무렵이었다. 1155년, 알 묵타피는 정통성 부여를 대가로 이라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제시한 쉴레이만샤를 술탄으로 지지하였다.[2] 그러나 1156년 봄, 쉴레이만샤가 하마단으로 남하하였으나 초여름의 전투에서 무함마드 2세에 패하고 사로잡혔다. 동시에 이란 서부 (지발)에 대한 칼리파 군의 공격 역시 격퇴되었다. 양면 전선에서 모두 승리한 무함마드 2세는 알 묵타피를 응징하기 위해 마침내 1157년 1월, 모술의 쿠트브 앗 딘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하였다.
알 묵타피는 바그다드 방어를 위해 힐라와 와시트의 병력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1월 12일, 무함마드 2세는 3만의 병력으로 도시를 포위하였다. 술탄 측이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형세를 관망하던 알 묵타피는 티그리스 강 서안의 구시가지 (원형도시)를 포기하고 성벽이 짧아 방어에 용이한 동안의 신시가지로 병력을 옮기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양안을 이어주는 교각 모두를 파괴하였고 동안의 성벽을 강화하였다. 무함마드 2세는 서안에 진영을 세우고 여러 개의 투석기와 발리스타 등을 배치하였다. 한편 알 묵타피는 칼리파의 적이자 불신자인[3] 술탄에 맞서도록 호소하며 시민들에게 무기를 주어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였다. 또한 재상 아운 앗 딘 이븐 후바이라를 시켜 부상당한 병사들 모두에게 각각 5 디나르를 주도록 지시하였다. 한달 반 가량의 준비와 탐색전 끝에 본격적인 공방전은 1157년 3월부터 일어났다.
3월 4일, 술탄은 모술의 재상 자인 앗 딘과 함께 무자비한 폭격 후에 총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수비 측은 시민군의 용맹함과 석유를 이용한 화공을 통해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은 무함마드 2세는 이번에는 끊어졌던 교량들의 복구를 지시하였고, 3월 29일에 완공되자 병력을 강 건너로 옮겨 동안의 성벽을 공격하였다.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 후 또다시 공성전이 벌어졌는데, 수비군은 화공을 통해 적의 투석기를 파괴하였고 성벽의 투석기로 적의 파성추를 파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무함마드 2세는 군대를 재정비한 후 섣부른 공격 대신 도시를 봉쇄하고 기다리는 전략으로 선회하였다. 그동안 호라산을 지켜내려 노력하던 대술탄 산자르가 사망하며 셀주크 제국의 직할 영토는 이란 서부로 축소되었다. 6월 29일, 공격군은 400개의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 시도했으나 수비군의 맹렬한 화살 세례에 큰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같은 시기 야곱의 여울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리던 누르 앗 딘은 칼리파의 영토를 침공한 동생 쿠트브 앗 딘을 꾸짖었다. 길어지는 전쟁에 실증이 나있던 후자의 재상 자인 앗 딘은 이를 핑계로 전선을 이탈해 모술로 돌아갔다. 이로써 셀주크 제국장기 왕조 간의 동맹 (과 주종관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한편 술탄이 오랜 기간 수도를 비운 사이에 폐위된 말리크샤 3세가 하마단을 점령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무함마드 2세 역시 7월 13일, 바그다드를 포기하고 북상하여 수도를 수복하였다.[4] 하지만 이 무렵 병을 얻은 무함마드 2세는 알 묵타피와의 우호를 회복한 것을 마지막으로 1159년 1월 사망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실권을 행사한 셀주크 술탄이었다. 이라크를 수복하려다 본거지 이란마저 잃을 뻔한 셀주크 제국은 이미 사양길에 들어서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알 묵타피는 모술 측에 의해 옹립된 쉴레이만샤를 책봉한 후 1160년 3월 사망하였다.

[1] 전체 호칭은 '알 말리크 알 만수르' (승리의 왕), '자이나트 알 이슬람' (이슬람의 자랑), '나시르 아미르 알 무으민' (신도들의 승장)[2] 그에게 알 말리크 알 무스타지르 칭호 하사함[3] 칼리파는 움마의 지도자이자 사도 무함마드의 후계자인데 그에 맞서는 것은 무슬림이 아니라는 것. [4] 쫓겨난 말리크샤는 후제스탄을 점령해 권토중래를 노렸지만 1161년 오우즈 계열 군벌 슈믈라에게 축출되어 기록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