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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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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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이스파한의 마스제데 자메
영어
Masjed-e Jāmé of Isfahan
아랍어
مسجد الجامع أصفهان
프랑스어
Masjed-e Jāme’ d’Ispahan
국가·위치
이란 이스파한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2년
등재기준
(ii)[1]
지정번호
1397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한국어
에스파한의 메이단 에맘
영어
Meidan Emam, Esfahan
아랍어
ميدان الإمام، أصفهان
프랑스어
Meidan Emam, Ispahan
국가·위치
이란 이스파한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79년
등재기준
(i)[2], (v)[3], (vi)[4]
지정번호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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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의 상징 중 하나인 이맘 광장. 본래 (왕)의 광장이라 불렸으나 이란 이슬람 혁명에 따라 이름이 바뀌었다. 베이징에 있는 천안문광장에 이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광장이다.
[image]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도시
اصفهان'''
이스파한 | Isfahan


'''지역'''
이스파한
'''면적'''
551km²
'''인구'''
2,000,000 명
'''도시권 인구'''
4,000,000 명
'''인구밀도'''
3,630명/km²
페르시아어: اصفهان 에스파헌
영어: Isfahan, Esfaha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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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제3의 도시(2012년 현재 인구 175만명)이자 2번째로 큰 광역권의 중추도시.

2. 역사


도시 자체는 기원전부터 존재했다. 고대 메디아의 "아스판다나"라고 불리고 중세 페르시아어로 “군대의 집결지”라는 뜻의 “스파한”이라고 불린 이 도시는 이슬람 시대에는 아랍어로 “이스파한”으로 불리면서, 오늘날까지도 이 도시 명칭으로 굳어졌다.
중세 사산 왕조 시대에는 야즈데게르드 1세에 의해 대규모 유대인 커뮤니티 “예후디예”[6]가 들어서고 상공업이 번영을 누렸다. 사산 왕조가 몰락한 후 아랍인들은 예후디예 지역의 유대인들을 전부 죽이거나 쫓아내고[7] 그 자리에 중세 신 시가지가 건설되었다.
이슬람 시대에도 상공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으며 부와이흐 왕조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여러 침략자들에게 약탈을 당하기도 하였다. 14세기 이븐 바투타가 이 도시를 들렸을 당시 계속된 전란으로 폐허로 변한 상태였다. 사파비 왕조 때는 압바스 1세에 의해 수도가 되기도 했는데 아바스 1세가 폐허였던 이곳을 새로 재건하면서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파한은 '''세계의 절반'''이라는 속담이 아직도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 시절의 이스파한은 조지아, 다게스탄, 체르케스에서 인신매매된 노예 병사들[8][9]과 후궁들, 아르메니아인 상인[10]들로 가득했다고 하며, 도시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을 배려하여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건물인 반크 교회가 세워졌다.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에도 이스파한 주민들은 사실상 조지아인의 후예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1722년 아프가니스탄에 털리면서 쇠퇴가 시작되었고, 18세기말 카자르 왕조가 세워지며 수도 또한 테헤란으로 넘어가 오늘날에는 지방 대도시가 되었다.

3. 현황


1946년 이스파한 대학교가 세워졌고, 이맘 광장과 함께 붙어있는 샤 모스크, 알리 카푸 궁전, 셰이크 로트 폴라 모스크 등이 가장 유명하지만 이외에도 반크 성당[11], 체헬 소툰, 시오세폴 다리, 커주 다리 등 볼거리가 많은 도시다. 이란 전통 수공예의 중심지이기도 한데, 나무, 금속, 뼈를 얇은 막대모양으로 만들어서 그걸 한데엮어 무늬를 만들고, 일정한 패턴을 만든것을 얇게 켠 다음 목판위에 붙여 장식하는 허탐 커리(Khâtam kâri)와 동을 두드려서 만든 그릇이나 접시 위에 에나멜을 칠해 구워 도자기 비슷하게 만든 미너 커리(minâ kâri), 그리고 자잘한 터키석조각들을 동으로 만든 그릇 위에 붙여서 장식하는 피루제쿠비(Firoozekoobi)가 이 도시에서 만들어진다. 그 외에도 카페트나 다양한 전통 수공예 장인들이 사는 곳이다.
2015년 지하철이 개통되었으며,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이스파한의 시내 모습은 이란의 다른 대도시인 테헤란이나 쉬라즈에 비해서 조금 더 깔끔하게 정비가 된 느낌이다. 오리엔트 정교회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이스파한의 아르메니아인 거주구역 노르 주가레바논을 제외하면 중동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2017년 경상북도 경주시와 자매결연을 하였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실제 이스파한 시내에서도 두 가지 영문표기가 혼용되고 있다. 단적으로 이스파한의 세계문화유산 두 개는 각기 다른 영문 표기를 사용한다.[6] 유대인의 땅이라는 뜻이다.[7]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스파한의 유대인들이 거짓 메시아를 지원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유독 이 지역의 유대인들이 생각지도 못한 수난을 당한 것https://sunnah.com/riyadussaliheen/19/5[8] 당시 쉬아파를 국교로 삼던 사파비 왕조와 이웃한 튀르크족 대다수가 순니파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조지아 출신 기독교인들을 납치,징발해 군인 노예로 썼다고 한다[9] 조지아인 군벌들이 자발적으로 이스파한에 정착한 후 쉬아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도 기록되어 있다. 납치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10] 기록에 따르면 무려 30만명[11] 아르메니아인 거주지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성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