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무스타르시드

 


1. 개요
2. 치세
2.1. 1차 거병 (1125-26년)
2.2. 2차 거병 (1132-35년)
3. 패배와 죽음


1. 개요


المسترشد بالله‎‎

알 무스타르시드 빌라

재위 1118년 8월 6일 ~ 1135년 8월 29일
생몰 1092년 4-5월 ~ 1135년 8월 29일
아바스 왕조의 29대 칼리파. 부친 알 무스타지르와 모친 루바바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118년 전자가 사망한 후에 칼리파가 되었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1125년과 1132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술탄 마흐무드 2세와 마수드에 대항하였다. 둘다 결국 실패하여 전자는 가택연금, 후자는 폐위와 암살로 이어졌다. 하지만 칼리파 군대가 이라크 전역과 서부 이란을 누리며 술탄에 정면으로 맞선 것은 약 2세기 만에 칼리파의 권력이 부활했다는 신호탄이었다. 알 마스타르시드는 왕가의 국제적인 하렘의 영향인지 아랍인으로는 희귀하게도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과 주근깨의 외모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2. 치세


즉위 직후부터 셀주크 제국은 무함마드 1세 사후 벌어진 내전으로 혼란에 빠졌다. 비록 1119년 이라크의 마흐무드 2세가 호라산의 아흐마드 산자르에게 패해 사로잡힌 후 그 종주권을 인정하며 마무리되는 듯 하였지만[1] 그 이듬해 파르스의 마수드가 반란을 일으켰다.[2] 한편 1122년 알 무스타르시드는 자신의 와지르 (재상) 아미드 앗 다울라 잘랄 앗 딘 하산 이븐 알리를 해임, 감금하였다. 그러자 마흐무드 2세는 자신의 와지르 샴스 알 물크 우스만의 동생 아흐마드를 칼리파의 와지르로 선임하였다. 형제는 모두 니잠 알 물크의 아들들이었다. 당시 베두인 부족장 두바이스가 힐라를 기반으로 이라크를 약탈하고 있었는데, 알 무스타르시드는 그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할 정도로 심각하였다.

2.1. 1차 거병 (1125-26년)


1123년 두바이스는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총독이던) 바스라를 습격하고 마수드와 동맹하였다. 이후 그들은 바그다드를 공격했는데, 아흐마드는 장기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바그다드 성벽을 보강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마흐무드 2세가 우스만을 해임, 처형하자 아흐마드의 명성을 경계하던 알 무스타르시드 역시 그를 해임하였다. 이후 아흐마드는 부친이 세운 니자미야 마드라사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자연사하였다. 이러한 셀주크 제국의 혼란을 틈타 알 무스타르시드는 친위대를 조직하였다. 1125년 3월, 그는 술탄 마흐무드가 경쟁자인 아제르바이잔의 토그릴과 싸우는 것을 도우며 술탄의 감사 인사를 들었다. 이후 이라크 남부의 통일을 위해 환관 아피프에게 군대를 주어 와시트로 파병했으나 그해 12월 벌어진 전투에서 총독 장기에게 격퇴되었다. 1126년 1월, 마흐무드 2세는 바그다드로 진격하였고 셀주크 군대가 칼리파 궁전을 약탈하였다.
튀르크 군대의 약탈에 분노한 바그다드 시민들이 민병대를 조직해 칼리파 군대를 도와 셀주크 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마흐무드 2세는 장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해 2월 바그다드에 당도한 장기는 재차 칼리파 군을 격파하였다. 두 달 후 마흐무드 2세는 장기에게 바그다드를 맡기고 하마단으로 귀환하였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칼리파 궁에 연금되어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한편 이때의 공로로 장기는 이듬해 모술과 알레포의 아타베그로 봉해진다.[3] 비록 1128년 대술탄 산자르가 장기 대신 두바이스를 모술 태수에 봉하라 압력을 넣자 마흐무드 2세는 장기에게 모술 퇴거를 명했으나 장기는 무력 시위와 10만 디나르의 선물로 이를 무마하였고 제국의 서부 지역 전체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예복을 하사받았다. (1129년) 그러던 1131년, 마흐무드 2세가 사망하며 셀주크 제국은 재차 내전에 돌입하였다. 아들 다우드가 계승하였지만 숙부 마수드가 반발하였고, 산자르는 전자를 지지하였다.

2.2. 2차 거병 (1132-35년)


셀주크 내전이 막 시작되던 1132년 3월 27일, 바그다드의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선 산자르를 비롯한 셀주크 왕가가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파티마 조가 바그다드를 장악했던 1058년 이후 처음 있는 일로, 알 무스타르시드의 확고한 자립 의지가 투영된 것이었다. 이후 그는 힐라를 점령하는 등 이라크 중부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그해 5월, 마수드는 형 마흐무드와 마찬가지로 산자르에게 패하고 그에게 복속하여 아제르바이잔 총독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6월, 마수드는 모술의 장기에게 칼리파 군을 격파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응답한 장기가 남하하여 8월 무렵 칼리파 군과 대치하였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성유물로 전해지던 사도 무함마드의 옷을 걸치고 전투에 임하는 술책 을 사용하였고, 이는 그대로 먹혀들어 장기의 무슬림 병사들이 싸움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대패를 당한 후 추격을 당하던 장기가 티크리트에 이르러 태수 아이유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그해 12월, 셀주크 내전에서 마흐무드의 아들인 술탄 다우드는 토그릴에게 패하여 아제르바이잔을 잃고 마수드와 함께 바그다드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1133년 1월, 마수드는 알 무스타르시드로부터 술탄으로 책봉받았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후 다우드와 마수드는 칼리파 군대와 북상하여 5월 토그릴을 격파하고 하마단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그 직후 마수드는 칼리파 측과 단절하고 하마단에서 자립해버렸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그대로 자신에게 남은 다우드와 패배한 토그릴과 연합해 북상, 7월 26일에 마수드와 동맹한 장기의 모술을 포위하였다. 다만 8일간의 포위 끝에 칼리파 군은 마수드의 원군이 당도하자 후퇴하였다. 이후 마수드는 하마단, 다우드는 하산케이프에서 공존하게 되었다. 1134년 4월, 장기는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와 연합해 하산케이프를 공격하였다. 그해 6월엔 마수드가 토그릴에게 하마단을 잃고 재차 바그다드로 피신해왔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배신한 전적이 있는 마수드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1134년 10월 그를 바그다드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불과 9일만에 토그릴이 자녀 없이 사망하자 마수드는 재빨리 주인 없는 하마단을 접수하며 세력을 회복하였다. 이로써 알 무스타르시드와 마수드 간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는데, 장기는 아들에게 모술의 열쇠를 주어 전자에게 보내며 술탄 대신 칼리파 측으로 전향하였다.[4] 마수드에게는 대신 칼리파 측에 본거지 힐라를 빼앗긴 베두인 부족장 두바이스가 새로운 동맹으로 가담하였다. 1135년 5월, 칼리파 측의 모술-바스라 연합군이 두바이스와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러자 바스라 총독 베그 아바는 비밀리에 마수드 측으로 전향하였다. 이를 모르던 알 무스타르시드는 와지르의 반대에도 5월 25일 바그다드를 출정하였다. 술탄 마수드 역시 셀주크 왕가에 충성하는 제후들을 모두 소집하였다. 술탄과 칼리파의 정면 충돌은 이슬람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3. 패배와 죽음


[image] 알 무스타르시드의 죽음
전투에 익숙했던 마수드는 그러지 못했던 알 무스타르시드가 자그로스 산맥을 지나 하마단 방면의 긴 여정을 지속하도록 방관하였다. 그리고 칼리파 군대가 케르만샤에 당도하자 마침내 출정하여 대치하였다. 평지에 익숙하던 칼리파 군대는 산지를 지나며 약화된 상태였다. 그러던 6월 22일, 케르만샤에서 알 무스타르시드는 작전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전면에는 대규모의 셀주크 기병대, 후방에는 자그로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사면초가의 형국에서 칼리파 측에게 필사적인 전투 외의 별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틀 후 벌어진 다이마르그 전투는 마수드의 완벽한 승리로 귀결되었다. 자신의 군대에게 버림받은 알 무스타르시드는 포로가 되어 전쟁 배상금 지불을 요구받았으며 칼리파 군대는 해산되었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바그다드의 궁전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면받았다. 승리 후 마수드는 칼리파를 대동한 채로 하마단에 개선하였다.
마수드는 배신의 대가로 베그 아바를 바그다드 총독으로 봉하였고,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자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허물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평정하던 마수드는 대술탄이자 칼리파의 장인이기도 했던 아흐마드 산자르로부터 두바이스를 넘길 것을 요구받았다. 이에 마수드가 침묵하자 산자르는 하마단에 군대를 보냈다. 그러던 1135년 8월 26일, 마수드는 돌연 알 무스타르시드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에게 아제르바이잔으로의 추방형을 내렸다. 따라서 하마단 외곽에서 떠날 채비를 하던 알 무스타르시드는 마침 산자르의 군대가 당도하자 재기를 노리며 그 축하연에 참석하였다. 하지만 그는 술탄이 부재한 틈에 자신의 막사에서 쿠란을 읽던 중 암살당하였다. 이는 압바스 칼리파를 혐오하던 아사신 요원의 범행으로 추정되나, 마수드가 이를 부추긴 것이라고도 한다. 어쨋거나 그의 사후 26세의 아들 알 라시드가 칼리파 위를 계승하였다.[5]

[1] 술탄 칭호 사용하는 대신 라이, 마잔다란을 산자르에게 양도함[2] 1121년 알 보르소키가 이를 진압하고 모술 태수로 복권되었다.[3] 모술을 차남 알프 아르슬란에게 봉해주고 장기를 그 아타베그, 즉 섭정으로 앉힌 것[4] 그러나 이듬해 장기는 이라크 대신 다마스쿠스 원정에 나서며 사실상 중립을 지켰다. 다만 칼리파의 사절이 당도하여 다마스쿠스의 독립을 존중해 달라는 뜻을 전하자 부리 왕조의 복속과 볼모를 대가로 철군하였다. (1135년 3월)[5] 마수드가 알 무스타르시드를 폐위할 때부터 알 라시드를 칼리파로 선언하긴 했으나 그의 죽음이 공식적인 칼리파위의 종결로 본다